제 8 장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성찰적인 지도자
"합리성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니다"
-막스 웨버-
Credat Emptor: 고객을 믿게 만들자.
제2장은 권위의 두 가지 부차적 기초들을 논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그것이다. 6장 7장에서는 성찰적인 지도자라는 용어로 전문성의 구체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복잡한 오늘의 세계 속에서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도력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전문성의 차원은 일종의 메타교역방법론, 즉 우리가 교역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복잡한 목회실천을 다루는 한가지 방법으로, 의미해석자, 공동체형성자, 그리고 공적교역 지원자로서의 목사의 지도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목사는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충실히 구현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찰적인 지도력의 전문성은 설교나 상담목회와 같은 여러 가지 전문성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려면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또 하나의 부차적인 목사의 권위의 기초인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성찰적인 지도력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목사의 지도력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1장에서 소개한 목회삽화 가운데 하나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자기 생각에는 교회를 많이 성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사의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영적인 깊이가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교회 이야기를 회상해 보라. 평신도가 보는 그 목사의 문제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 목사의 지도력은 전문성에 기초하였으나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는 무엇인가: 본 장은 이런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전문성과 신성성의 대변자
내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그라함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나오는 제사장의 이야기를 회상해 보라.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해 한 동네에 숨어 있었는데 그 동네 교인들의 요구로 할 수 없이 미사를 집례했다. 그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신앙생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의 입에 하나님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문성은 거의 전무하였으나 사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는 TV 드라마 매쉬(MASH)에 나오는 물카히 신부를 생각해 보자. 물카히 신부는 그린의 위스키 제사장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전문성이 어떠한 지는 잘 모르지만 순수성이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우리는 그가 설교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TV 에 나오는 다른 성직자들과 달리, 물카히 신부는 권위 있는 목회를 한다. 리차드 커크(Richard Kirk, 1983:7)는 물카히 신부의 권위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서도 물카히 신부는 태초의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창조하신 분의 상징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창조질서를 세운다. 한국 경찰들의 불합리한 행동 가운데서도 그는 믿음 뿐 아니라 의심을 고백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분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표지로 서있다. 전쟁의 공포와 비극 가운데서도 그는 최악의 상황-십자가를 포함하여-에서도 선을 창조하 신 분을 기억나게 해 준다. 죽어 가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 예식을 거행할 때, 그는 부활의 소망을 대변한다.
커크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물카히 신부가 행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의 인생은 성례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8). 이런 의미에서 물카히 신부도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있는 위스키 신부도 권위의 공동적인 기초를 공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실예들은 예전중심교회 또는 로마 카톨릭 관점에서 온 전적인 목회관을 대변한다. 위스키 제사장은 앞서 언급한 직책의 권위의 극단적인 예이고, 물카히 신부는 자기의 성례전적인 직책과 인격적인 성품이 결합하여 자기의 권위를 높이는 실예이다. 직책의 권위를 덜 중시하거나 성례전적 해석을 중시하지 않은 교회의 전통에서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자로서의 권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1977:57-59)가 자기의 저서 Holy Firm에서 설명하는 교회예배를 실예로 하여 좀더 설명해 보자. 그녀는 주일 대예배에 20여명 정도 출석하는 작은 교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목사는 "하나님을 아는 한사람"이다:
한번은, 전세계를 중보하는 긴 목회기도 중간에-지도자들에게는 지혜의 은사를, 슬 퍼하며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는 희망과 자비를, 억압받는 자에게는 구원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기도를 멈추고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주여 우 리는 매 주일 이와 꼭 같은 간구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충격적인 부르짖음을 드린 후에 그는 계속해서 기도를 읽어 나갔다. 이것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좋아한다.
딜라드는 계속해서 활기 없는 예배와 교인들은 설명하면서, 이 교회와 소위 "예전중심의 기도교회들"을 비교하고 있다. 예전중심의 교회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신속하게 그리고 권위 있게 하나님 앞에 나오며, 전문성의 보장 없이도 하나님을 깨닫는다":
예전중심교회에서 성도들은 오랫동안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한 줄기의 좁은 길 을 따라가는 모호크 인디언처럼 예전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약간이라도 변경시켜 버린다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 다. 그러나 말씀중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59).
목사의 태도와 사람들의 기대 모두에서 신성불가침의 현존을 느끼거나 분명하게 기대하고 있다.
이 사례들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이런 교회에서 전문성은 실제로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이 만약 성직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성직자들의 대표적 성격 또는 성례전적인 성격에 기초한 것이다. 성직자들은 곧 삶의 현장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성직자들이 미숙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변하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성례전적인 대표성만을 가지고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전문성에 관하여 토론하면서, 특별히 성찰적인 실천에 관한 토의에서, 나는 성직자의 권위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로서 전문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문적인 교역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사실이나(예, 홈즈, 1971;하우베르어스, 1989), 우리들 대부분은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이나 필요시에 도움을 베푸는 자들의 전문성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전문성과 법적인 문제에 충고나 도움을 주는 변호사와 같은 전문성을 원한다. 그러나 전문성 그 자체로서 만은 불완전하다. 또한 전문성이 없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되는 것도 불완전하다. 이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전문성은 성찰적인 지도력의 실천적 또는 도구적 측면이다. 반면에 성례전적 현존은 지도력의 존재 또는 의미의 측면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존재하며 이 둘이 분리될 때 교회의 증거는 손상을 입는다. 토마스 롱(Thomos Long)은 모세와 아굴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 점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비와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요, 아론은 모세와 같은 비전은 없으나 모세에게 부족한 대중연설의 은사를 받은 전문성의 대변자이다. 그들은 은사들을 상호보완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협력할 때 모든 것은 잘 되어 갔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 모세가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전문가 아론은 골짜기에 있을 때 아론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았다. 롱은 아주 분명하게 이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결국 아론은 백성들에게 굴복하고 하나님의 생생한 현존에서 끊어졌을 때에 목회자들 이 항상 범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신을 만들었다. 손으로 만든 신에게는 신비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직 기계적인 방법론만이 존재 할 뿐이 다.(1)
죤 플레처(Jhon Flecher,1975)의 적극적인 탐구의 발견은 상호보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성직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기술하라고 요구하였다.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요소는 소위 "종교적 진정성"(religious authenticity)이었다. 평신도들은 진정성있는 목사상을 여러 가지로 기술하였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인 자,""복음을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자,"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사람인자," 평신도들은 목사의 전문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진정성의 차원은 전문성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이 없이는 전문성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성찰적인 지도자의 실천에 성례전적인 현존이 독특하게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장에서 나는 한가지 기여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목사의 기본적인 신학적 비전에 기여한다. 즉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의 용어로 목사의 하비투스(habitus)에 기여한다. 우리의 체질(habitus)은 우리의 전문성을 대변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성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목사의 권위에도 연관된다. 여기에서 나는 단순히 하비투스(체질)가 목사의 실천을 형성하고 지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는 성찰적인 지도력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신분이 암시하는 두가지 점을 상술하려고 한다. 첫째로 목사의 성품이나 인격적인 영성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되는 것이 목사의 실천에 미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성례전적인 현존과 제사장적인 성격과의 관계, 특히 목회관계에서 목사와 평시도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관계-수탁자 보증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잇슈이지만 분리하여 설명하여야 할만큼 중요하다. 이것은 교역에 관한 소명에 기초한 것으로 본 장의 마지막에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암시점들을 탐구하기 전에 3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는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확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만인 제사장직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제사장직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을 완전히 육체화 하였다. 세례에서, 목사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그 분의 몸에 연합되었으며, 세상에서 계속적인 성례전적 현존으로 육체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제사장직의 기초이다. 목사들이 본질적으로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것은 목사-평신도 관계의 역사에서 그처럼 치명적이 되어온 성직자의 제사장직(그리고 성례전적 현존)에 대한 제한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모이고 흩어지는 삶속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례전적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특히 회중들과 다른 공동체적 형태에서 교회가 집단적으로 구체화 해야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다. 목사가 만약 특별히 구별되었다면 그것은 단지 동등한 자들 중에서 첫 번째 순서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들의 특별함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특별한 지도력의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대변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교회이다. 그러나 모두가 평등한 제사장직을 갖는 제사장 공동체의 첫 번째 순서인 목사는 하나님의 신비와 가장 완전하게 동일시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의 제도적인 상징이며 대표적 인격이다. 그것을 좋아하든지 또는 싫어하든지 간에 목사의 직을 맡은 우리는 교역실천에서 우리의 인간성과 전문성 이상의 것을 가져오는 자이다. 우리의 현존으로 우리는 2장에서 언급한 어반 홈즈(Urban Holmes)의 용어대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짐을 벗어버리느냐-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짐이다- 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지도능력을 향상시켜주는 하나님이 은사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책임적으로 사용하느냐 이다.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
먼저 이러한 대표적 위치가-그것을 예전중심교회의 입장에서 해석하든지 또는 말씀 중심의 입장에서 해석하든지 간에-목사가 참여하는 여러 가지 역할에 미치는 공헌을 고찰해보자.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기능을 수행하면서 이러한 역할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수준 곧 명시적 수준과 암시적 수준에서 나타난다.
좀더 명시적인 수준에서 보면,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역할 가운데서 목사의 인격적 전문성에 성스러운 무게-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용어가 없으므로-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를 더해준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은 우리가 교역실천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에 깊이를 더해준다. 예를 들면 의미해석-설교, 예배인도, 목회상담, 가르침 등-에서 의미를 주는 자는 단순히 인간 아무개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입고 있는 까운이나 특별한 의복과 설교하면서 들고 있는 성경책은 목사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 역할을 회상시키는 가시적 상징이다. 가끔, 불행스럽게도 어떤 이들은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들의 설교와 기도에 성스러운 무게를 더해 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나의 경험에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생산한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루터교 목사 존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기교회가 어떻게 자기의 설교와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말씀의 해석자로서 그가 참여하고 있는 "성례전적 광채"(그가 이야기한 바대로)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루터교인들에 있어서, 설교는 성례전과 같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을 불러일 으킨다. 그것은 단순히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의 까운과 그 역할과 함께 행하는 모든 것들이 이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존은 성실하고 순수하게 말씀을 해석해야할 상당한 책임감의 짐을 느낀다. 그러한 논리로 그는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를 성례전적 인격으로서의 권위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 다른 실예를 이야기하면, 목사가 신성불가침을 대변하고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기능한다는 사실은 심리치료와 구별되는 목회상담의 역동성을 창출한다. 양자는 모두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전문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역할과 컨텍스트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권위의 역동성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
평신도가 목사의 가르침이나 권면에 의문을 제기 할 때 그것은 어떤 다른 형태의 불일치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이것은 "계획을 꾸미는 여인들"이라는 시사 TV 코메디의 한 프로에 나타난다. 광고방송 TV에서는 드문 일인데, 그 프로는 여성안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샬렌이라는 등장인물은 남침례교회의 평신도로 십대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프로에서 그녀는 여성안수를 강력히 반대하는 자기교회 목사님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있다. 그룹토의 가운데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재천명한다. 그 직후 그녀는 자기 목사를 찾아가 그 교회를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히려 한다. 그녀는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분이라고 믿어 왔으나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목사의 가르침이 자기의 목사직을 반대할 뿐 아니라 인류의 절반을 목사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결정에 크게 놀라고 불안해전 그 목사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는 자기들 두사람이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한 것 때문에 그녀가 교회를 떠나거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샬렌은 심각한 감정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목사님은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나의 목사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했다는 것은 그를 친구 이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때문에 어려움과 불일치의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인식되는 것은 복일 수도 있다. 우리가 대변하는 그분의 현존이 교인의 고통이나 죽음에 직면해서 우리가 더듬거리며 부적합하게 하는 말을 보충해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보지 않는 목사가 우리 중에 있는가? 목사로서 나는 슬픔을 당한 가족을 목회하면서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가끔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고 그들의 상실에 직면하여 의미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묵묵히 그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위로에 감사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의 감사는 단순히 친구가 찾아와 주었다는 감사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사로서 내가 상징하고 있는 초월하신 그분의 위로이다. 나는 제사장공동체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전달하는 자로서 그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이다.
한 신학생은 작은 교회에서 학생전도사로서 처음으로 장례식을 집례한 것을 성찰하면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유사한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교인 한사람이 돌아가셔서 나는 그의 장례식을 집례해야 했다. 나는 그의 집에서 그 가족을 만나서 그들의 불신에 찬 부르짖음을 들었다,"어째서 빌을 데려가십 니까?" "그는 더 살면서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 어쩐 일입니까?" "그이 없이 어찌 나 혼자 살아가란 말입니까?" "하나님,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 까?"
나는 예배시간에 신성한 분위기에 압도당하였다. 전에 한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 혼자 어찌 감당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우리는 모두 짙은 안 개속에서 익숙치 못한 길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나의 감각들이 나를 떠나 버리고, 맹인과 같이 바른말과 행동을 더듬거리며 찾는 것 같이 느꼈다. 그런데 이 어두움 속에서 복음의 빛으로 그들을 위로해야할 사람은 떨리고 맹인같고 그러한 고 통과 당황에 직면하여 할말을 찾지 못하는 바로 나였다. 나는 바로 거기에 그들의 고통과 우리 믿음의 소망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빛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 데 하나였다. 나는 심지어 내가 입고 있는 옷 검은 옷과 그 속에 받쳐입은 면 드레스 에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임 가운데서 거기에 모인 교인들과 우 리 앞서가신 성도들의 지원만 받고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바로 그 현장에 그 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모두를 통해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확신의 말씀을 해 주시 고 있었다-거기에 모여있는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소망과 기쁨의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 예배동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 샛길을 갈 수 있 는 능력을 받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우 리는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현존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Dudley & Hilgert, 1987: 98).
그 학생은 신앙공동체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현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자기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의 첫 번째 대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제사장적 역할의 힘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면 드레스 위에 입은 까만 까운은 그 공동체와 그녀가 대변하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역할을 했다. 지도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가 수행하는 상징적 역할의 힘 이외에, 자기의 경험에 대한 그녀 자신의 설명은 우리가 목회실천을 성찰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을 미래목회갱신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살아있는 실예라는 사실이다.
성직자가 수행하는 대표적 역할은 모이는 공동체를 넘어서 교회의 공적교역에 까지 확장된다. 내가 강조했던 바와 같이 공적인 생활에서 제 일차적인 교역자들과 제사장들은 평신도들이지만, 목사의 상징적 위치도 공적인 영역에서 중요하다. 제 4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의 동료들과 내가 (Mckinney, Roogem, and Carroll, 1983 ) 공적생활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지역사회지도자들과 인터뷰 했을 때, 그 지도자들은 목사와 그 역할을 동일시 하였다. 집단적으로 교회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교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지도자들은 목사의 참여를 특별히 중시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목사들이나 신부들이나 랍비들이 지역사회행사에 참여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으면 종교가 그 행사에 부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만인 제사장직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상학적인 시각에서 그들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목사가 수행하는 독특한 대표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 역할을 더 정확히 이해한다면, 목사는 하나님이 현존하는 제사장 공동체에서 동등한 제사장들 중에 제일 첫 번째 순서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현존을 대변하는 자로서 목사의 성례전적 위치가 기여하는 분명한 공헌을 넘어서 또 한가지 암시적인 공헌이 있다. 그것은 목사들이 부적격한 경우에라도 그들의 상징적인 역할만이 목사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에 신성한 무게 다 신성불가침의 현존을 더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투사(projection)와 전이(transference)의 현상들도 있다.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보면 그런 현상들은 어린아이들이 목사를 하나님과 혼동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목회심방에서 이런 동일시를 자주 경험한다 : "엄마, 하나님이 문밖에 와 있어요!" 그러나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비슷한 동일시가 어른들에게서도 일어난다. 목사는 자는 교인들의 가장 깊은 감정들과 미해결의 의문들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투사하는 대상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상징이 됨으로써, 목사들은 멀게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을 특정한 인간의 필요들에 가까이 계신 분으로 만들어 준다. 목사들은 특별히 이런 투사와 전이의 대상이 되지만, 이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한다면,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 공동체라는 사실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특정한 인간의 필요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 목사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과제이다. 그렇지만 목사는 평등한 제사장들 가운데서 제일 첫 번째 순서에 서 있기 때문에 신성불가침과 동일시되고 전이와 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목사는 자기와 신성불가침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항하여야 하지만, 그 과정이 건전할 수도 있고 건전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로렌 미드(Loren Mead, 1976 : 4)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를 한사람의 목사로 인식하는 동안에 나를 대면하는 사람들은 중요하고, 아주 미묘하게, 또는 방어적이요 두려워하면서 나에게 투사한다. 그것은 나를 신성불가침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의 전달자로서 나에게 부여하는 영적인 권위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일어나게 조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
또다시 앞서 언급한 TV쇼의 사례를 성찰해 보면, 샬렌이 목사와 자기와의 사이의 불일치를 친구간의 불일치 정도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샬렌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가장 깊은 소망과 감정을 목사 위에 투사했기 때문이다. 여성안수와 따라서 그녀의 목사직에 대해서 목사가 반대했을 때에 샬렌이 그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은 목사의 반대가 마치 하나님의 반대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하나님 경험은 그 목사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적 임재에 국한되지 않았었다.
전이와 투사는 유익하고 필요한 경험일 때가 있다. 전이와 투사는 신자들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과 당혹감들을 명료화시켜줄 수 있다. 그것들은 자기방어의 껍질을 깨뜨리고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만들어 준다(마 18:3) ⸃ 동시에 전이와 투사는(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목사에게 불건전한 의존감을 조성하여 착취 당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의존감과 신뢰감을 조성한다. 우리들은 목회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인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관련된 목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전이와 투사는 목회관계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높여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이 근래에 와서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인지 또는 더 많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것인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문제들은 목사들 뿐 아니라 다른 전문직들에도 심각한 잇슈들을 일으킨다. 나는 다음에 목사-교인간의 신뢰에 있어서 목사의 성례전적 위치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이 문제를 좀 더 언급하겠다.
요약하면, 목사가 된다는 것-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성찰적 지도력에서 전문성과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됨으로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목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은 성스러운 무게 또는 심각성이 더해짐으로 해서 목사의 권위는 강화된다. 또한 암시적으로 목사가 인간의 특정한 필요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대변함으로서 목사의 권위는 향상된다. 이것은 또한 건전한-가끔은 불건전한-
전이를 일으킨다. 이러한 특별한 대표적 역할과 오용 가능성 때문에 그것은 양육되어야하고 책임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은사이다.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를 대표하는 것은 모든 전문직들 가운데 목사만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사들도 신성한 일들, 즉 생명과 죽음의 잇슈들을 다룬다. 우리는 그들의 의학적 전문성을 신뢰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기대한다. 특히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는 더욱 그렇다. 저명한 에세이, 아나톨레 브로야드(Anatele Broyard, 1990)가 암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만나면서 자기가 느낀 감정을 기술한 문학비평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능력있는 의술과 약간의 형이상학적 지식을 갖춘 의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치료하는 자가 되고 싶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 아버지는 유대인을 싫어하는 전통적인 남부 노인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방광 암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는 유대인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 다. 그의 주장은 유대인의사가 의학의 진정한 전문인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성경이해에 따르면 유대인의 인생은 연구, 갱신 그리고 개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암과 싸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자기일같이 기쁨으로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장사속을 멀리한 다. 환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불행이다.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유대인 의사가 하나님 과 더 가깝고 그러기 때문에 죽음을 저항해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가 종교적으로 진정성있는 목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브로야드는 의사의 역할의 영적 제사장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사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다른 의사들에게서는 경험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다.
성례전적 현존과 신뢰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상징적 지위는 권위를 행사하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목사는 가장 심각한 인생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자이다. 사람들은 고도로 좌절과 약함에 빠졌을 때 목사를 찾아온다. 목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약함 때문에 손해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목사로서의 전문성을 기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목사가 되었다고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목사는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최고의 유익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며, 복음에 충실하려고 애쓰면서 교회의 최고의 덕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서 위임받은 자로서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신뢰를 받아야 한다.
교회는 목사를 신뢰하고, 반대로 목사는 교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라틴어 credat emptor라는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의 뜻은 "고객이 믿을 수 있게 하자" 또는 "고객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자"이다. 이 구절은 Cavedt emptor , 즉 "고객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하자"는 말과 예리하게 대조가 된다. 후자는 시장에서 물물교환의 모토로 자주 사용된다. 사회학자 에버레트 휴(Everett Hughes, 1968: 657)는 credat emptor를 일반적으로 전문직업들의 모토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바 있다. 휴에 따르면, "고객은 전문인들을 신뢰해야 한다; 고객은 자기가 파악하고 있는 모든 비밀들을 전문인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고객은 전문가의 말과 판단을 신뢰하여야 한다." "나를 믿으시오" 하고 능란한 자동차 판매원의 음성이 TV대중광고 방송을 통해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고객은 caveat emptor가 실천규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전문인들은 "나를 믿어주시오" 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고객이나 교인은 credat emptor에 근거하여 응답한다. 전문인들은 고객과 사회복지에 최우선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행동을 실천을 해야하는 수탁자의 책임을 갖는다. 전문인들의 신뢰의 근거는 일반적으로 상당한 토론을 불러일으킬 만큼(예, Barber, 1983 : 131ff)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목사-평신도 관계의 신뢰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모으고 싶다.
자기 목사에 대한 신뢰의 근거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기쁘게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목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의 근거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필요하는 지도력을 제공해 주거나 나의 특정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목사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문능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것이 개재되어 있다. 즉, 목사의 성품에 대한 기대가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몇 년전에 나의 아내와 나는 남캐로라이나에 소재한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운전하여 가는 중이었다. 동창회가 열리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차가 고장이 났다. 우리는 겨우 정비소에 차 끌어다 놓고 고칠 수 있는지 알아 봤다. 차는 고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날 저녁까지는 고칠 수 없었다. 이 차로 더 이상 운전하며 간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동창회 모임 장소에 갈 것이냐로 의논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내 차를 타고 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끝난 후 집에까지 타고 가시고 내일 여기에 다시 가져다 놓으시면 되지 않겠어요." 우리는 그의 너그러운 제안에 당황하여 그의 차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동창회장까지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그에게 낯선 사람을 어떻게 믿고 차를 빌려주려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 모교의 코치로 있다고 대답하면서, 워포드 대학교 졸업생은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우리가 그 대학교 학생이었을 때, 워포드 신사가 되는 것은-그 때는 남자 대학이었다-규범문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 코치는 너무 순진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을지 모르나, 그 코치가 기꺼이 나를 믿어주는 것과 교인들이 목사나 신부를 기꺼이 믿어주는 것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다. 그 코치의 마음에는 워포드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완전히 낯선 사람까지도 신뢰하게 만드는 성품에 대한 어떤 상징이었다. 신성불가침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도 비슷한 힘을 갖는다. 목사의 도덕적 영적 실패로 신뢰관계에 금이 갔을 때에라도, 다른 사람들은 목사를 기꺼이 신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나 신부에게 그런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의 근거는 목사들이 대변하는 초월자의 성품에 대한 기대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에게 정당성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깊이까지 내려 가셨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에게서 공감과 자비와 돌봄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자기들의 유익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유익을 손상시키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목사도 자기들의 유익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서 헌신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물론 그 반대로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근거하여 목사도 신실할 것이라고 추론하기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더 연역적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목사와 신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성실함, 정당함, 자비, 돌봄, 그리고 진실함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다. 참으로 나는 이러한 귀납법적인 방법이 더 연역적인 방법과 마찬가지로 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목사의 제사장적, 상징적 성격 때문이다. 어느 접근도 목회현장에서의 신뢰관계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
그러한 특성들이 교회와 목사 또는 신부와의 유대관계의 성격이 될 때에 그러한 특성들은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목사 또는 신부의 기능향상에 중요하게 기여한다. 기꺼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공감을 보이며, 돌봄과 자비를 표현하고, 진실을 말하며, 정의로우며,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일종의 "신비적인 토양" (mystical geography)을 창조한다. ⸆ 이 신비적인 토양은 공통적인 관계의 잔디밭에서 목사와 교인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토양은 치료하며, 구속하며, 해방시키는 목회관계를 만들어 준다. 그러한 특성들은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은사들을 깨닫게 하며, 다른 사람들의 성찰적인 능력들을 환기시킨다. 화란의 사회학자 릴리안 포이에( Lillian Voye,1989)는 교회구조 외부에서 형성된 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 남미의 기초공동체와 유사한 것들을 연구조사 했다. 어떤 공동체는 지도력의 역할에 목사 없이 운영되었고 다른 공동체들은 목사나 신부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다. 한 그룹에서 회원들은 신부에게 떠나라고 요구했다. 한 회원이 그 면직에 대해서 코멘트 했다. "그 신부는 전문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분을 모셨다(그분은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분에게서 차이를 발견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노출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론지으려는 고자세를 취하는 분 보다 이분은 그룹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10. 강조는 덧붙인 것임)
첫 번째 신부에 대하여 그 그룹이 가졌던 감정과 비슷하게 나의 친구 한 분은 자기 교회에 부임한 새로운 목사에게 아주 실망했던 이야기를 성찰했다 : "그는 정말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멋지게 설교했다. 그러나 인격적 목회적 관계에서 보면 그는 냉혈동물이다!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신비적 토양이 결여되었다.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적 유대를 깨닫고 나서 몇몇 의과대학들은 소위 "의학적 치료의 관계적 차원"을 시험적으로 가르치고 있다(Suchman and Matthews,1988; Matthews, Suchman and Branch, 연대미상). 이 차원은 지배적인 의학모델인 경험적 과학모델을 확장시켜, 이 모델에 "초 인격적" 또는 "영적" (저자들이 붙인 명칭) 성격을 첨가시키고 있다. 때때로 그들은 의사의 역할의 제사장적 성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적 차원에는 "환자의 불평의 밑바닥을 들어주기," "인격적 관심을 표명하기," "단순히 환자들과 함께 있어주기" 등등이 있다. 수많은 관계경험들을 요약한 후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해, 인내, 그리고 특별한 라포의 순간들을 통해서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장기적인 돌봄과 신뢰간계의 기초가 세워진다. 이런 형태의 의사가 환자관계는 치료효과가 있 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들에서 핵심적인 치료수단은 테크놀러지나 처방약 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이고 의사가 한자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그것이 아 무리 이상하고 괴상하게 보일지라도, 의사가 불시에 전화를 걸어준다든지, 의사로서 의 직업적인 관계이상의 친밀한 우정을 보여 준다든지, 환자의 고민을 주의깊게 경청 한다면 그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효과를 가져오는 헌신과 돌봄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 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고 자기의 짐과 고통을 털어놓고, 의사에게 수용되고 있다고 느 끼고 관계에 안전을 경험하며, 이 관계 속에서 환자가 자기의 짐과 고통은 자기에게 독특한 것이면서도 모든 인류가 경험하는 고통의 일부를 자기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의사 - 환자 관계에는 치료의 효과가 있다.(Matthews, Suchman, & Branch, 연대미상 :26).
관계적 차원은, 의학에서든지 교역에서든지 간에, 전문성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인의 전문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장, 신뢰관계, 즉 신비적 토양을 창출한다. 목사나 신부에게 있어서-좀 덜 분명하긴 하지만 의사에게 있어서-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된다는 것의 한가지 의미일 것이다.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것과 소명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신성불가침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목사가-아마도 의사와 다른 전문가들도 역시-도덕적 영적 거인이 되어야 한다고 암시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2장에서 소개한 직책과 개인간의 중요한 구별을 참고하여 이것을 풀어보자.
목사들의 역할이 신성한 무게를 가지거나 목사들이 신뢰할만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평신도들보다 인격적인 수준에서 더 거룩하고 사랑이 많고 하나님께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구속받은 죄인으로 은혜 안에 살지만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목사를 목사되게 하는 것은 목사의 직책 또는 역할 때문이다. 목사의 역할에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규범적인 기대가 포함되어있다. 신실하다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 한가지 의미이다. 교단에 따라 다르고 지역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마는 이러한 기대들은 그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기대들을 내면화시키고, 그것들이 목회적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 내면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라도 이런 기대들은 일종의 "교사" 또는 "안내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의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몽학선생이다). 내면적인 동기에서는 항상 목회적이요 이타적이 아닌 목사도 교인들과 교회에게 순수한 도움을 제공할 때가 많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개인적인 동기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목사의 역할에 대한 신뢰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
이런 직책 또한 역할과 인격과의 구별이 어째서 중요한가? 그것은 신뢰책임이 우선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목사나 신부의 직에 대한 제도적인 기대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남성목사는 자기의 여성 내담자에 대해서 성적인 환상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화된 역할기대들이 아주 강하여 그런 환상을 승화시키고 상담전문지식을 사용하여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어떤 목사는 자기 교회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변화하는 이웃에게 합당하게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기 개인의 입지향상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사가 지도력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역할 기대는 그 목사의 본능적 욕구를 극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 목사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가 별로 없을지라도 그들에게 신뢰책임을 다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그래함 그린의 위스키 신부가 마지못해서 성찬 집례하기로 동의했을 때에 행한 것과 같다. 목사의 직책에 대한 이런 구조적 차원은 목사나 신부에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여 부르심을 받은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내면적인 동기가 흔들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기도에 응답이 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동안에도 믿음을 지켜 소명을 수행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목사의 내면적인 존재, 즉 목사의 인격적 신앙적 진정성을 감소시키려고 하지 않는다-안수 받을 때에 불멸의 제사장적 성품을 받는다고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그분의 실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징하기는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매우 어렵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전이 실로암 못에서 회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비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요9장).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가 체험자의 교역을 주장했을 때에 여러 가지 다른 뜻도 있었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목사자신의 실존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었다. 물카히 신부는 그의 제사장직 때문에만 신뢰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 직을 수행하는데서 보여준 그의 인격적 신앙적 진정성이 거기에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가 찬양한 회중교회 목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 실존적 지식은 교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반영하며, 그것은 평신도와 목사 공히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소명과 함께 좀 더 특별하게 그 가운데 얼마에게 안수교역에 들어오라는 소명을 의미한다. 목사의 소명에는 외적 소명 즉 교회의 소명으로 그에게 목사의 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교회가 인정하는 것과, 내적 소명, 즉 신비적 소명으로 목사가 되라는 내면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 포함된다.⑧ 신비적 소명은 자기의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온다. 그것은 꿈을 꾸던 야곱, 호렙산의 모세, 성전의 아사야, 또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은 극적이요 영적인 체험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점차적으로 소명을 일깨워가는 점진적 소명체험일수도 있다. 이런 만남-극적이든 점진적이든-은 하비투스(habitus), 즉 자신의 존재와 교역실천을 구체적으로 형성해 주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비전의 핵심에 있다. 이것은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신앙적 진정성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요, 외적인 직책 이상의 것이다. 목사의 직책뿐 아니라 목사의 인격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목사는 직책상 신실하다고 인정받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신실성을 가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사의 소명이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목사의 권위에 연관되는 것처럼, 그것은 전문인으로서의 전문능력과도 연관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전문능력을 강조하는 전문교역모델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체험에 근거한 목회모델과 반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양자는 각기 독자성을 가지면서 교역의 완성을 위해 서로 보완하며, 신실하고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제임스 구스타프슨(Games Gustafson,19882:514)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전문성(전문능력)이 없는 소명은 무능하고 비효과적이요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소명이 없는 전문성은 생생한 동기를 부여하고 민감성과 감각을 일깨우고 자기실현의 합당한 의식을 배양하는 도덕적 인간적인 뿌리에 이르는 통로를 열 수 없다. 또한 소 명이 없는 전문성을 우리 인간의 노력이 목적하는 바 인간성의 더 큰 목적을 쉽게 보 여 주지 못한다.
그것은 생생한 소명감이 성찰적인 전문능력을 성례전적인 임재와 연결 시켰을 때에 가능하다. 그럴 때에 우리는 교회의 안수받은 지도자로서의 우리의 권위의 갱신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역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성찰적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법을 배운 목사들이 예수님께 들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목사는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 있는 자와 같이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