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8:45
(1)권위있는 목회자 (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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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3  

권위있는 목회자 (As one with Authority)

: 목회 지도력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

목 차

서 문  1 장 : 권위를 읽어버린 목사들 - 권위의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 ?

제 2 장 : 권위란 무엇인가 ? - 권위의 기초

제 3 장 : 권위의 관계적 차원 : 공동교역은 가능한가 ?

제 4 장 : 권위와 교회 : 교회란 무엇인가 ?

제 5 장 : 교회지도자의 중심과제들 : 권위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인가 ?

제 6 장 : 권위있는 지도력 : 성찰적인 지도력은 가능한가 ?

제 7 장 : 성찰적인 지도력의 구조

제 8 장 : 신성의 대변자

후주

참고문헌

서 문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전통적인 계층구조적인 개념이 붕괴되는 시대에 진정성 있는 권위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쓰여졌다. 이 책은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역을 공유하므로서 교역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지도력은 성찰적인 지도력 (reflective leadership)이며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성찰적인 지도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한다. 나는 이 책에서 지난번에 저술한 Ministry as Reflective Practice (Carroll, 1986)에서 제한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깊이 고찰하면서 확장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어떤 목사들과 평신도들 중에 권위의 문제로 전혀 고민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무오성으로 권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의 전통주의자들은 아직도 교회의 무오한 가르침의 직제를 옹오하고 있으며, 흑인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아직도 수행하고 있으며 권위의 문제로 도전을 받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권위를 재고하는 이런 책 때문에 오히려 이제까지 잠잠하던 권위의 질문이 제기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위문제는 현실적으로 부딛치는 잇슈요, 고민스러운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목사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권위의 수행에 대하여 재고하고 교회의 지도력을 재정립할 수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책에서 나는 성직자를 안수교역자, 목사, 신부 등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했다. 나는 이러한 명칭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 책에서는 같은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사용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나는 교역이라는 단어를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역으로 사용한다. 안수 교역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장로를 안수하여 세우는 개혁전통의 교회들에게 약간의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항상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지만 성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저자들을 인용할 때에는 이것이 그렇게 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권위에 대한 나의 시각은 내가 공부한 사회학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통합적인 시각에 서 있다. 나는 역사가들과 성서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저작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분들은 하트포트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을 공부한 현장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방법으로 그들 자신의 지혜를 나와 함께 나누었다. 수많은 현장 목회자들로부터 얻은 통찰들이 이 책에 포함되었다. 하트포트 지역에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은 여러 주일동안 목회현장을 토의하면서 나도 거기에 참여하여 의견을 나누고 배우게 허락해 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윌리암 위킨스 목사, 리차드 그리피스 목사, 제임스 키드 목사, 아치 맥기 목사, 그리고 폴 쌘트마이어 목사등이 있다.

또한 나는 나의 목회실천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인내로 경청해주고 - 어떤 것들은 인내가 없이는 경청하기 어렵다 - 비평과 통찰을 나에게 제공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하트포트 신학교의 동료교수들은 나의 성찰적인 지도력 연구에 중요한 파트너들이다. 나는 여러 장들에 대한 비평적인 피이드백을 제공해준 클리포드 그린 교수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게리 보우마 교수도 나의 원고를 읽고 조언해 주었다. 교회 연구 프로젝트 팀(낸시 애어맨, 레베카 삼, 칼 더들리, 아디쓰 해이스, 윌리암 홀웨이, 윌리암 맥키니, 그리고 바바라 휠러)은 이 책의 앞부분을 하루종일 토의하며 귀중한 피이드백을 주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도날드 쉔과의 대화는 나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분명해 지겠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나의 주장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나는 또한 웨스터민스트 죤낙스 출판사의 알렉스 스미스, 다니엘 알렉산더, 그리고 돈 리플리의 유익하고 깊이있는 편집조언에도 감사드린다.

나는 또한 릴리 장학재단과 지금은 은퇴하신 이 재단의 전 부총재 로버트 우드에게도 감사드린다. 릴리 재단이 이 책의 연구조사를 지원해 주었다. 봅 린의 풍성한 지혜와 격려의 선물에도 똑같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신학교협의회의 기초 잇슈 지원금은 이 책의 처음 부분의 연구조사에 귀중한 힘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나의 아내 앤 유잉 캐롤에게 증정한다. 그녀의 인내와 격려와 양육과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나는 또한 그녀가 평신도로서 교역현장에서 실천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의 계획

제 1장에서 나는 목사들이 권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여러 가지 목회삽화들은 목사와 평신도들이 경험하는 목회위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나는 또한 이런 권위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언급했다.

제 2장에서 나는 목사와 관련하여 권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였다. 첫째로 나는 특별히 안수교역을 하는 데에 어떠한 권위가 있어야 하는가를 질문했다. 목사의 권위는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교회의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를 논의하고 나서 나는 목사의 권위의 두가지 부차적 기초들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신성의 대변자로서 목사와 전문가로서 목사의 전문지식이다.

제 3장에서도 나는 계속 권위의 의미를 개발하면서 특히 권위의 관계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목사와 평신도와의 관계,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는 교역에서 권위를 어느 정도 공유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귄위 관계가 변화하는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 가를 보이기 위해서 교회사로부터 여러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목사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토의를 끝낸 후에 나는 오늘 교회와 교회의 교역이 직면하고 있는 논점들에 비추어서 목사의 권위의 개념을 재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나는 제 4장에서 교회와 교회의 교역에 대한 가정들을 자세히 검토했다. 제 5장은 여기에 기초하여 기술하였다. 공동교역의 관점에서 교회지도력, 특히 목사의 지도력의 독특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토의하였다. 나의 목적은 목사의 권위수행을 재고하는 기초로서 교역실천의 현상학을 제시하였다.

목사와 평신도의 공동교역이라는 틀 속에서 권위를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신성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 3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쉔(1983, 1987)이 제시하는 일반 전문직업실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찰적인 지도력"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했다. 제 6장에서는 목회하는 목사의 사례를 사용하여 성찰적인 지도력의 역동성을 탐구했다. 7장에서는 목회지도력의 실제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을 고찰하면서 성찰적인 지도력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오늘날에 신성을 대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과 성찰적인 지도력이 요구하는 전문성과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질문하였다.

여러 각도에서 이 책은 성찰적인 실천의 하나의 실례이다. 독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 가서야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약간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 목회회의 비전에서 발전되었다. 여러 자원들에서 도출한 여러 학문들로부터 발견한 관점도 성찰적인 실천의 성격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번 여러번 단계에 따라 틀을 만들고 다시 새로운 틀을 만들면서 목회실천을 성찰하고 상황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면서, 그리고 다른 목사들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잭슨 W. 캐롤 저

목사와 권위 : 권위있는 지도력의 길은 있는가?

제1장 권위 있는 목회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 -흔히 보는 범퍼스티키-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는 범퍼스티커는 1960년대 후반에 반문화운동이 일어난 후에 생겨난 것으로, 모든 형태의 권위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강력한 하나의 권고이다. 이것은 신념상실을 촉구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수많은 현장 목회자들이 피부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안수 교역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기들의 권위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무리들이 예수 님을 만나면서 가졌던 경험과는 반대로, 수많은 목사들은 "자신들을 권위 없는 자"로 경험하고 있다. "권위를 상실한 목회자"는 어느 설교집의 제목이기도하다(Craddock, 1979). 이것은 초기 청교도 설교자들이 교인들과 뉴잉글랜드 동네에서 보여주던 "엄청난 권위"와는 거리가 있다. 해리 스타우트(Harry Stout)는 식민 뉴잉글랜드의 설교와 종교문화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의 설교는 교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자 헌신한 유일의 권위의 음성이었다(1986: 19).

권위란 특정한 집단이나 기관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권리이다. 이것은 지도자가 실제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추종자들이 자기들의 지도자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특성, 성격 및 전문성, 또는 이들의 결합에 근거하여 생겨난다.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집단의 사상과 행위들에 영향을 주거나, 지도하거나, 조정하거나 또는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사람들과 집단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여야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목사는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양 떼를 돌보며, 감독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평신도를 훈련하여 세우는 권위를 부여받는다. 교단에 따라 안수규범이 다르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다르지만, 안수식은 권위부여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안수를 통해서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목사들은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정으로 자기는 어떠한 권위를 부여받은 것인가?

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한 분의 감리교회 감리사가 안수식에서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후 교회를 향하여 자기가 나에게 위임받은 목회 기능을 수행할 권위를 부여한다고 말씀하였다. 9년동안 나는 교회-학원 목회자로서 나의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위임받은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동안에 나는 나의 권위에 대해서 다소간에 누구나 경험하는 도전을 받아왔다 : 절차들에 대한 가벼운 불일치. 나의 전임자는 나와 다르게 실행했다는 충고들, 설교 내용이나(특히) 찬송가 선택에 대한 흔히 있는 의문제기, 그리고 교육관 건축에 대한 초기의 반대, 가장 크면서도 가장 중요한 도전은 인종간의 정의 잇슈에서 왔다. 교인들은 나의 설교와 사회 참여 모두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도전 가운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교구 상급 지도자의 지원과 여러 해 동안 교인들과 사이에 맺어왔던 긍정적인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의 설교와 행동에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라도 나를 신뢰하고 돌보아 주었다. 그렇지만 나의 꽃은 장미에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설교하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나의 권위는 심각하게 시련을 당하였다.

그 당시에 나의 권위에 치명적인 도전을 가한 두 번째 요인은 나의 내면서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교역하던 대학교 캠퍼스의 상황이 나의 내면의 문제를 유발한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나의 내면의 문제는 더 심각하게 나의 권위에 도전을 주었다. 학원 목회자로서 나는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 이유는 내가 목회하는 학원의 인식론적 가정이 나의 권위의 궁극적 기초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증거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을 배격하는 관점과의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에는 나와 함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나의 목회의 권위는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고, 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여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실존적인 상황에서 바울 사도의 말씀 "내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고전 13:12)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 9년동안에 나는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논점들의 시험을 당하였다. 인종차별, 핵무장과 세계 평화, 테그놀러지의 변화, 부자와 빈자들 간의 갈등 등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한 기독교적 입장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받은 소명과 안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권위있는 대답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과연 나와 교회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영향력 있는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경험들이 내가 교회목회를 버리고 신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도록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이 안수 교역에 대한 나의 관심과 소명을 결코 약화시키지도 않았다. 특별히 이 경험들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고, 만나고 교제하는 목사들이 부딪치는 권위의 문제에 예민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목회의 지도력의 권위에 대한 질문은 결코 감소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삽화들은 목회자들이 직접 현실적으로 경험한 사례들인데 신중하게 검토해 보라.

·한 분의 여자 목사가 일 주일 내내 회의에서 회의로 약속에서 약속으로 계속 뛰어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거의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던 그녀가 드디어 거의 탈진한 상태로 "내가 무엇을 위해 이처럼 뛰어다니고 있는가?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무슨 중대한 일을 성취하였는가?"하고 자문하고 있다.

·교회행정을 맡고 있는 목사는 자기 교회가 지역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토론하는 에큐메니칼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그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만일 그 계획을 계속 추진한다면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조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주제에 무엇을 한다고 야단인가?"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아 온 어느 교단은 교인 감소 때문에 파라노이드 증세에 빠져가고 있다. 그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뒤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예리하게 촉구하고 있다. 수 많은 지교회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런 교단의 위기 의식을 함께 느끼고 있다. 그들은 성장을 약속하는 프로그림이나 테크닉이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교단 지도자들에게 호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그런 프로그램이냐?" 또는 "어쩐 목적으로" 등의 질문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4년된 젊은 목사가 여러 가지 어려운 목회문제에 부딛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제직회에서 발생한 갈등의 문제였다.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는 법들을 신학교에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으며,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을 이러저러한 목회실제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드디어 미몽에서 깨어나 신학교육의 실패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직자로 봉직해온 한 분의 천주교 신부는 좌절을 토로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해 온 자기의 지도력 스타일에 자기 교인들이 점점 더 심하게 반항하고 있다고 아픔을 이야기한다. 여러 해 동안 평신도들은 성직자가 교회일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해 왔는데, 아니 기대해 왔는데, 어째서 이제 와서 자기의 결정에 그처럼 자주 반항하고 교회의 방향을 수정하라고 소리지르고 있는가? 자기 교회와 가까이에 있는 흑인 개신교회 목사도 한때 그처럼 유순하던 평신도들이 결정과정에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고 좌절을 토로하고 있다.

·갓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 한 사람은 목사와 교인들이 공동목회를 해야한다는 평등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평신도들이 자기에게 지도와 지시를 기대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기까지 했다. 평신도들은 그를 전문가로서 대우하려했으나 그는 단순히 능력을 배양시키는 자로 남기를 원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 한 분은 일대일 상담, 개인 완성의 설교, 그리고 슈퍼마켓식의 프로그램등으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성공하고 있다. 그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목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약간 풍자 섞인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교인들의 가려운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한 분의 여목사는 목회를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행정을 철저히 점검하고, 회의에 충실하게 참여하며, 필요한 가정을 열심히 심방한다. 그녀가 계획하고 인도하는 예배는 잘 계획하고 진행된다. 그런데 어째서 교인들이 그녀의 목회에 무언가 빠졌다고 불평하는지요? 교인들은 그녀의 목회에 영적인 깊이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 어떤 교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녀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학생으로서 그리고 캠퍼스 지도자로서 대학교 4학년 학생이 안수교역의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면서, 진정으로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지도력의 은사를 최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인가 질문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결단을 하는데 주역인가 변두리인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진정으로 더 크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잇지 않을까?" 그녀는 신학교에 가는 대신에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다.

위의 사례들의 여러 가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풍자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 하나의 삽화들은 실제 목회현장에서 경험한 목사들의 경험이다. 더구나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 하나의 사례들은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문제들, 즉 끝이 없이 바쁜 목회자의 일정들, 교인들에게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성직자들, 목적의식이 없이 수단만 붙들고 있는 목회들,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목회 현장의 사건들, 그리고 권위주의 적인 목회에 대한 저항 등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례들은 전문가들에 대한 요구, 기독교 복음을 무비판적으로 문화에 혼합시키기, 경영은 잘하면서도 기독교적 진정성을 상실하기, 안수교역자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목회를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혼란에 빠진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다.

요점은 많은 성직자들 -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도 - 지도력의 권위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낮은 사기, 쇠약하게 만드는 스트레스, 탈진, 그리고 최근에 상당한 메디아의 관심을 끌어모은 성직자들의 도덕적 실패와 같은 잇슈들도 권위에 대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삽화의 사건들과 비슷한 딜레마와 상황들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외기는 목회의 권위의 문제를 재고하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복음에 합당하고 20세기 말기의 교회와 교역에 합당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 권위에 대한 바른 관점을 발견하고 위에 소개한 상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위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는 목사들을 도울 수 있게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새로운 것일까? 위의 실례들은 이미 오랫동안 보아왔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어느 의미에서 그 대답은 예이다.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질문은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있어 왔다. 시대마다 교회는 그 시대에 해당하는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그 문제 자체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이 있지만, 그 시대마다 그 시대에 독특한 형태로 지도력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옛 찬송가의 가사대로 "새시대는 새 의무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 나름대로 독특하게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의 지도력의 이해와 실천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목사의 권위와 지도력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

무엇이 현대에 많은 목사들이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는데에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희생자를 비난하는" 시험에 빠져서, 문제가 목회자들 자신 속에 있다고 지적할수도 있다. 물론 목사들 자신들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이 당면하고 있는 수 많은 어려움들은 여러해 동안 축적되어 온 광범위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그 그 근원이 있으며, 이것이 교회와 결과적으로 목사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왔다. 모든 복잡한 변화를 모두 자세히 검토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4가지로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에 의문제기, 교회 자체의 변두리화, 교회의 일을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신도와의 공동목화에 대한 목사들의 강조이다.

신앙의 위기

권위자와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 첫번째 요인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역사성 또는 상대성에 대한 인식과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칭하는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신념이다. 하나님과 및 인간의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이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캠퍼스 목회를 하던 나에게 도전해 온 문제였으며, 이것은 나만의 문제라고 믿지 않는다.

마크 코넬리 (Mark Connelly)의 희곡 푸른 초장(Green Pasture)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상의 모습들을 조사한 후 "못을 박아 놓았던 모든 것은 헐렁하게 풀어져 있다!"고 보고했다. 과학의 성취들과 현대생활의 다원화는 모두 가브리엘의 관찰이 너무나도 사실임을 뼈져리게 깨닫게 만들고 있다. 과학과 다원화는 모두 "무시간적인 진리들이나 영원한 확실성을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며, 정확한 교리나 불변하는 도덕적 원리들을 이야기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대신에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신화들과 은유들과 상징들을 사용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많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딘 켈리 (Dean Kelley, 1972)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이 최근에 보수적인 교회들이 성장하는 비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주의 기독교인들도 현대주의의 도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들의 신앙의 내용과 스타일을 좀더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유연하게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보수적이든 자유적이던 간에 우리 인생 경험을 끊임없이 인생이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사건이요, 그런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도 아주 다르게 해석 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기독교 적인 시각 또는 적어도 유대적 기독교적 시각의 가정들을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신앙에 대한 도전을 무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들이 양분되어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구분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정들과 주장들-예를들면, 상업이나 정치적 가정들과 주장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부여하는 주장들과 구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파편화되고 분열된 방법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쟝 폴 싸르트르(1956)의 함축성 있는 언어인 "나쁜 신앙"이 암시하는 바의 억지와 자기기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진실을 자기 자신에게서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 여행의 용이함, 거주지 이동성, 그리고 고도의 다양한 문화사회의 성장등은 우리의 인생을 그처럼 산뜻하게 구획지어 살아가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또 다른 전기적 사건들을 예로 들고 싶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것이 지나간 오랜 시대를 반영해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미국의 남부지역에서 자라났다, 나는 비록 그 지역 내부와 외부에 살고있는 다른 사람들이 남부식의 생활방식(좀 완곡하게 말해서 정당한 인종분리주의)의 진실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의 회심-(나는 그런 말로 밖에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은 15세에 일어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남부를 떠나서 국가적 행사인 청년 컨퍼런스에 참석했는데 이 컨퍼런스는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았었다. 내가 컨퍼런스에서 돌아와 아침예배시에 그 컨퍼런스의 경험을 보고 하려고 했을때 나는 당황하게 되었다 : 감히 인종 차별에 대한 나의 회심을 이야기 하고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인종의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선언할 것인지, 또는 그 경험을 용케 숨기고 안전한 부분만 보고할 것인지 곤경에 처한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는 첫번째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을 젊은이들의 잘못된 이상주의로 치부하고, 다음에는 젊은이들을 그러한 파괴적인 행사에 참석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만들었다.

오늘날 나의 교회가 과거에 했던 것처럼, 그러한 경험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소수파에 속하는 종교 전통과 경험이 다른 문화들을 배울 수 있다. 집에 돌아와서 자녀들이 문선명파에 빠지거나 하리 크리슈나에 빠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의 이웃이 이슬람교도이거나 불교도일 수도 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뉴에이지 강신술사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상업, 의약, 국제 사건 또는 자기개인의 생활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도덕적 문제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흑인 문제, 여성학자 또는 제3세계 비평가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신념과 가정들에 도전을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과 경험들을 무시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이런 것들은 자기가 이제까지 확신을 가져 왔던 절대적이요, 영원한 진리들과 도덕적 원리들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일 수 있다. 남부인의 생활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10대에 내가 당면했던 딜레마는 대략 40년후에 우리가 당면한 도전에 비교해서 약한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도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도전이며, 이것은 목사만 아니라 평신도도 꼭 같이 당하고 있다. 많은 평신도들은 가공하지 않은 원단과 같이 통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을 이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백화점에서 여러가지 다른 생산품가운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고르듯이 전통의 다양한 단편들 가운데서 자기 나름대로 선택하여 받아 들이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예, 리오타드 Lyotard,1984)은 이러한 현상을 "위대한 이야기들의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캐나다 사회학자 레지날드 비비(Reginald Bibby, 1987:83)는 이것을 더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신들은 버려진 것도 아니요 바꾸어 진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들은 조각들로 깨어져서, 조각난 형태로 종교적 소비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그러한 풍조하에서 목사들은 어떻게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지도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세 사람의 심판에 대한 해묵은 야구이야기가 있다. 볼과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구별하냐고 물었을 때 첫번째 심판은 "나는 볼은 볼이라고 부르고 스트라이크는 스트라이크로 있는 그대로 부릅니다"하고 대답했고, 두번째 심판은 "나는 볼로 보이는 것은 볼이라고 부르고 스트라이크로 보이는 것은 스트라이크라고 부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세번째 심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선언하기 전까지는 볼도 아니고 스트라이크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뜻 깊은 인식론상의 논쟁이 요약되어 있는 반면 (뒤에 다시 한번 이 점을 논하겠음) 나는 여기서 단순히 다음과 같은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수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 구조의 절대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그것은 당연히 볼이기 때문에 볼이라고"말하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같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 두사람의 심판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이 양자는 모두 애매하게든지 아니면 담대히 고백적인 입장에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하면서도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쉽게 넘길 수 없는 위험과 취약점을 가진다. 이것은 프레드 크래閺(Fred Craddock)이 설교자의 디테마를 기술하면서 인식한 다음의 말에서 그 깊이를 볼 수 있다:

[설교자] 자신의 신앙이-결코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서-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이 설교자를 설교에 부적격 한 자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설교자가 실제로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이 전체 교인들을 불구로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해서 절름발이가 되었을때, 그것을 교인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한다. 그것을 자기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와 자신에게 솔직해야 된다는 사실과의 사이에 뼈아픈 갈등을 일으키면서, 이 갈등은 우리시대에 너무 극적으로 고조되어서 교역자들의 설교를 더 이상 못하게 만들거나 설교하기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 (1971 : 14)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황

역사성과 상대성은 제 1차적으로 문화적 수준, 즉 의식과 사고의 수준에서 목사의 권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권위의 위기에 기여하는 교회의 사회적 위치를 중심에서 변두리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앞서 삽화에서 언급한 젊은 대학생이 안수교역을 포기하고 법과대학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그 이유로 특별히 오늘날 주요 (주류)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는 인식, 즉 오늘의 교회는 우리 사화의 변두리로 밀려났고 목사의 역할은 감소되고 있다는 인식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식이 진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을 안수교역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지도력의 실천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인식은 광범위한 세속화 과정의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세속화에 따르면, 교회는 다른 사회구조를 위하여 규범적인 기대를 처방하는 상당한 권위를 가진 중심적인 구조로부터 밀려나 변두리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누가 종교적 기본원리를 가지거나 또는 어떤 기관을 신성한 근거에서 설립한다고해도 우리들 대부분은 중세에 절정을 이루었던 기독교 기관과 같이 중요한 사회기관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교육적 기관들과 여가시설, 심지어 가족기관과 같은 것도 점차적으로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자유로운 기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 기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합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것, 정치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 다른 기관의 상황에서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개인들에게 가르치는 것, 의미있는 필요에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하는 등 특별한 경우 - 정치적인 모임, 현충일, 또는 독립기념일 등 - 이외에는 궁극적이요 신성한 목적을 별로 찾아 볼 수 없으며, 모두가 자체의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기관들의 지도자들을 현대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하여 저기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기능적으로 합리적인 수단들을 찾는다. 쟈크 엘룰(Jacgues Ellul, 1964)은 이러한 현상을 "테크닉"의 승리-"한가지 최상의 방법"찾기라고 불렀다.

이제 교회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다양한 기관들 중에 한가지 특수한 기능을 가진 기관에 불과하며, 사회의 다른 분야에 합당한 행동을 처방하거나 명할 수 있는 권위(적법)를 상실하게 되었다. 기껏해야 교회 지도자들은 도덕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설득시키는 아주 간접적인 방법으로 결정과 실천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가지 중요한 예외는 가족으로, 교회는 아직도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변하고 있으며, 가족들은 점차 변하는 성역할과 여성인력의 대거 산업사회 속으로 유입되는 등의 다른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재형성되고 있다. 사회학자 토마스 루크만 (Thomas Luckmann)의 범주를 사용한다면 (1967), 이제 주요 경제와 정치 구조에 의하여 지배받는 공공의 영역과 개인들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가족, 다양한 자원단체,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여가 활동등으로 구성된 사적영역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사적 영역의 한 부분에 귀속되며, 그것도 사회의 중심보다는 변두리에 있다.

목사는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이동하는 변화에 잡혀 있다. 아직도 대중들은 여러 가지 여론조사에서 보는대로 목사를 상당히 존중하지만, 목사의 제 1차적인 역할은 개인들의 사적인 삶의 문제들을 돕는 것이라는 신념들이 점점 널리 퍼져가고 있다. "복음에나 전념하고, 정치에 손대지 말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는 목사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공공의 잇슈들은 교회가 관여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제2차적인 과제요, 교회의 제 1차적인 과제는 아니라는 견해가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교인들의 공적인 생활-예를들면,직장 세계에서의 논점들-은 그들의 사적인 경험에서 점차 구별되고 소원해지고 있으며, 매우 복잡해지고 특수화되고 있다. 이것은 공적인 잇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이 직장에서나 또는 공적인 정책의 문제에서 일어나는 윤리적인 잇슈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목사들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사회학자 이반 밸러 (Ivan Vallier,1968:453)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목사들은 실천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체계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목사들의 지식은 규범적이요 닫힌 지식이요, 과학적이요 열려진 지식이 아니다. 세속의 전문가들은 처방을 내리는데 목사들은 해석을 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 사건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건에 의미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현상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논술하겠다. 목사가 공공분야에서 생겨나는 잇슈들을 이해하고 신앙의 관점에서 그러한 잇슈들을 도덕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히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에 속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은 오히려 수 많은 목사들에게 변두리적 존재감을 더해주며, 결과적으로 자기들의 지도력의 권위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지원제

목사들의 자기권위의식에 영향을 주는 세 번째 요인은 미국 종교 생활의 자유지원제이다. 이 제도는 내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정교분리에 대응하는 미국식 방법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 교회들과 회당들은 특별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자유롭게 자기들의 종교신앙을 함께 나누며,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일한다. 자발적으로 모인 집단도 다른 모든 집단들이 즐겨하지 아니하는 어떤 특별한 법적 특권이나 지원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에 교단주의들과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구조들을 생겨나게 했으며, 모든 교단을 다원구조가운데 하나로 머물게 만들었다.

종교적인 자유지원제는 목사들의 권위문제를 포함하여 미국인들의 수 많은 생활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왔다. 이것은 시드니 미드 (Sidney Mead, 1956)와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1963)에 의해서 자세히 논의 되었다, 미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역사 초기에, 자유지원제 원칙은 지역주의와 개교회주의를 특히 강화 시켰으며, 정교분리 원칙이 제공했던 목사직의 권위를 대폭 감소 시켰다. 자유지원제도는 그 목적 때문에, 설득과 정치, 영향력의 과시 (특히 영혼 구원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들의 권위의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서 개인적인 경건에 의지하려는 목사들의 욕망을 증가시켰다. 더 나아가서, 자유지원제도의 지역주의적, 개교회주의적 성격은 목사들이 어떤 충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법정 소송을 준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교단지도자의 도움 없이 자기 교회 평신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해결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 역사 초기에는 그러했다. 미드(217)는 불란서 철학자 마이클 쿨람-쟝 드 크레브 꾀르(Michael Gullaum-Jean de Crevecoeur) 가 미국농부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언급한 사실을 인용하였다, "목사는 고용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지기일을 충실히 하면 약정된 봉급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봉급을 받지 못합니다. 설교를 하지 않으면 수년동안 교회는 아무것도 목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평신도주의와 영향력에 대한 강조 등, 종교에 대한 이런 자유지원제적 접근의 여러 성격들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다시 19세기 중엽에 목사들의 전문화 의식에 기여했다. 이 시대에 전문화 직종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에 참여함으로써 목사들은 이미 허용되고 있는 자유지원제보다 더 많이 자기들의 환경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그 이유는 지역주위, 개교회주의, 그리고 평신도주의 가능성들에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신학교육을 더 실천적으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유는 교회를 지도하는데에 더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목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스타프슨은 미드의 역사적인 분석을 최근의 사실까지 연장시켰다. 그는 특별히 자유지원제와 그 결과로 생겨난 교단중심주의가 목사들간에 현재와 장래의 교인들의 지원을 받으려는 경쟁을 유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평신도는 신앙에서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목사들은 자기교회를 위하여 그 시장에서 정당한 할당을 얻어내는 방법을 찾고 있다"(Gustafson 1963:733). 구스타프슨이 이런 글을 쓴 이후에, 교회성장운동이 미국 종교 무대에 급속히 등장하였다, 목사들은 실천적인 방법으로 매주시장(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시장)에서 더 많은 할당을 얻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신학적 근거에서 보다는 교인의 감소 또는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욕망에서 기인되고 있다, 미드와 같이 구스타프슨도 평신도의 인기와 지지를 얻기 위하여 기능적이거나 도구적인 목회를 선호하는 현상을 창출하는 자유지원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과 권능을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목사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목사들은 실천적인 목회에 참여하여 자기 지역사회나 교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심리치료자, 가족치료자, 청소년 레크레이션지도자, 지교회의 다양한 기관 행정지도자가 되고자 하고 있다(732).

자유지원제와 평신도 지원의 중요성은 또한 목사들에게 평신도의 생활을 지배하는 세속활동에 까지 종교활동을 확장시키게 만들고 있다. 구스타프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목사의 전통적인 기능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될 때, 목사들은 평신도들과 접촉할 수 있고, 문화생활의 중요한 흐름에 따라 갈 수 있도록 자신들을 재적응하고 있다"(733).

이 모든 것은 모든 목사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활동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자기들의 진정한 책임소재를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들은 평신도에게나 자기교단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하나님께 충실해야 한다. 목사들은 가끔 내가 앞서 언급한 삽화의 어느 목사처럼, 평신도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가려운 데를 긁어 주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래서 목사들은 헌금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공격적인 행위를 피하며, 교회의 전반적인 목표를 향해 가기 보다는 기술적인 영향력 있는 일을 하는 데에 힘쓰며, 바쁜 일정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하고 있다는 소명감을 상실해 버린다.

미드와 구스타프슨이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자유지원제는 미국 역사 초기부터 미국 교회들과 함께 해왔다. 이것은 기관의 조직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연의 가치체계가 되어 왔다. 권위와 지도력 잇슈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것이 현금의 상황에서 더 있을까? 물론 있다고 본다. 내가 믿기로는, 세계 제2차대전 이후 베이비품 세대 교인들이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지원제 가치의 강화가 그 하나일 것이다,

여러 분석가들이 새로운 자유지원제 가치들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여론조사가 다니엘 양켈로비치 (Daniel Yankelovich,1981) 는 이 가치들을 청교도에 영향을 받은 자기부정의 윤리에 대조가 되는 자기 완성의 윤리라고 지목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인의 80%정도가 자기완성의 윤리를 추고하고 있다고 추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심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세대마다 35%이하라고 보았다. 로버트 벨라 (Robert Bellah)와 그의 동료들은 공저 마음의 습관 (Habits of the heart, 1985)에서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개인주의의 두형태, 즉 공리주의와 표현주의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미국 문화속에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공리주의적 사고)고 보았다. 공리주의적 입장은 경제와 직업세계와 같은 동적 세계를 지배하여 왔으며, 표현주의적 가치는 최근에 와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우리의 사적인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이 양자는 함께 자율적인 개인주의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이것은 개개인을 자기가 실행할 역할과 충성할 위탁을 선택할 자유성이 있다고 믿으며, 이것은 어떤 높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판단 할 때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계속하여 주장하고 있다.

문화자체의 이해에 따르면, 우리 문화의 표현적 성격은 개인의 자유와 성취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의 천재적 성격은 결혼과 직장에서 정치와 종교적 참여에 이르기 까지 개인의 모든 헌신이 도덕적인 당위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7)

미국의 주요 기독교 전통들의 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들을 반영하면서, 웨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와 월리암 맥키니 9William McKinney)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문화와 삶의 스타일의 출현을 "새로운 자유지원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선택은 종교적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택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자체를 하나의 선택으로 보며, 자기의 추구를 위해서 다양한 전통들을 선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개인주의적 종교는 하나의 자율적인 신자를 상정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영적인 순례를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 훈련, 실천, 그리고 공동생활같은 문제들은 낮 설은 것으로 여기거나 적어도 부차적으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일을 추구할 것이냐 하는 개인의 선택이다. 개인적인 헌신을 할 것이냐 공동체에 헌신할 것이냐 하는 것도 자기의 선택하기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각한다(1987,40).

이 저자는 이러한 주제의 귀결은 "종교적 권위의 쇠퇴와 제도적 신앙에 대한 충성의 약화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권위와 이에 대한 존중의 전통적인 통로들 - 교황의 무오성과 성경무오설에서 지교회 목사, 제사장 또는 랍비의 영적인 역할에 이르기까지 -은 얼마동안 침식당해 왔으며, 이들 구조에 대한 언어적 직접적인 의문제기가 1960년대에 와서 격렬하게 높아졌다." 모든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 풍조하에서 목사의 권위가 도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평등주의와 공동목회

과거와 현재의 표현 모두에서 미국 종교의 개인주의적 자유지원적 가치와 더 넓은 문화가치는 목사의 권위와 그 행사에 영향을 미쳐온 네 번째 요인인 평등주의적 강조와 병행해서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형태이건 계층구조는 심각하게 의심을 받고 있다.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구원보다는 자기 실현이라고 정의하기로 한다), 어떤 제사장도, 설교자도, 또는 전문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목사들과,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평등주의는 만인 제사장의 교리와 교역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다는 이해로 신학적인 정당성을 지원 받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교역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것이요, 성직자들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기독교역사 가운데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두 교역자라는 강조와 교역은 목사에게 전적으로 귀속된 것이라는 강조가 시계추와 같이 진동을 계속 해왔다. 미국인 들의 신앙 생활은 전자의 방형으로 기울어져 왔다. 최선의 의미로 공동교역(shared ministry)은 목사와 평신도 간에는 기능적인 차이만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호 보완하며 교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에 와서 공동교역에 관한 강조는 개신교에서 뿐 아니라 로마 천주교에서도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제2바티칸 공의회는 교역이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쉽과 교역의 상호성을 강조하는 여성학자의 관점도 이런 문제를 강화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여성학자들은 계층구조와 지배에 근거를 둔 권위 구조에 저항했왔다. 공동목회에 대한 강조는 본서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더 나아가서, 평신도들을 종속 적으로 만드는 독재적인 교역 스타일을 조장하는 권위주의에는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앞서 본 바 있는 삽화에서 로마 천주교회의 제사장과 흑인교회 목사와 같이 많은 목사들은 교회교역에 더 크게 기여하고 싶어하는 평신도들의 요구에 힘들고 괴롭지만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그들은 코네티컷트에 소재한 로마천주교회 교인들이 자기들과 공동교역을 거절하는 독재적인 신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례와 같이 분노한 평신도와 대면하여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질서에 있다. 교역에 있어서 목사와 평신도간에 서로 구별이 있으면서 상호보완적인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이 없이 공동교역을 무비판적으로 주장하면, 목사뿐아니라 평신도의 교역의 권위에도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어떤 평신도들은 누구나 교역에 대해서 실제로 심각하게 생각이 들면 신학교 입학하고 안수를 받으면 누구든지 전통적으로 목사가 담당해오던 교역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서 제 2 의 기회로 안수교역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 공동목회에 대한 혼란은 목사들에게 약간 다른 면에서 나타난다. 어떤 목사들은 평신도와의

공동목회를 강조할 때, 자기들만의 독특한 어떤 전문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에버리 델레스 (Avery Dulls)는 로마 천주교회에서 교역의 관점을 선호하고 전통적인 성직자의 교역에 대한 반항이 "현재 교회가 당하고 있는 소명의 위기의 근원 가운데 하나"이라고 믿고 있다 (1978,174).

공동 교역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자기들의 역할은 협력자라고 생각하는 다른 목사들은 앞서 본 사례에서와 같이 평신도들이 계속해서 전문목회를 요구할 때에 좌절을 경험한다. 데이빗 슐러(David Schuller)와 그의 동료들이 행한 미국과 캐나다의 목사와 평신도에 대한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이 최근에 크게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교역을 하라고 부름받은 자라고 보지 않고 제 1차적으로 구경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1975;73).

사회학자 쉐릴 클라인만(Sherryl Kleinman,1984)은 미국 개신교 주요 교단 신학교의 학생들이 강력한 평등주의 행동 교역적 접근을 배운 후에 필드웍과 학생 전도사로 교회에 나갈 때 자기들을 권위자로 취급하는 평신도들과 만나면서 놀라고 실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제 1차적으로 "진정성 있는 인간이 되는 것"으로 보고 평신도보다 무언가를 더 아는 전문가나 권위자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평신도들을 자기들의 목사에게서 이보다 더한 것을 찾는다.

클라이만은 학생들의 권위에 대한 태도와 안수교역자(목사)에 대한 태도를 목사의 역할의 몰 개성화, 특히 특정한 지식과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주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나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면, 목사나 평신도가 교회생활에서 전문성과 비평적 사고의 필요성을 경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해석할 때, 몰개성화는 중요한 실수이다. 목사가 이런 자원들에 대해서 독점적인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평신도들은 목사가 자기의 교역에서 특수한 지식과 전문성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실상 목사들이 받은 교육은 이것을 준비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목사들은 이점에서 자기의 전문성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한대로 나는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하는 공동교역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목사의 권위 행사는 그러한 공동교역을 방해하지 않게 해야 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요점은 평등주의와 공동목회에 대한 강조가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강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역사화, 종교의 사회적 현장의 변화, 그리고 자유지원제와 함께 교회교역에서 목사의 지도력에 대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식민지 뉴 잉글랜드에서 가지고 있던 목사의 권위적인 입지를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며, 사실 우리들 대부분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권위를 의문시하는 여러 가지 잇슈들과 직면한 목사들은 자기들의 귄위를 주장 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내어서 사려 깊은 지도자로서 권위를 행사하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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