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권위와 교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한 부분이라" -고전 12:27-
"전쟁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죠지 클레멘쇼-
지금까지 나는 교역의 권위, 특히 안수교역자의 권위에 대한 관점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권위들, 특별히 성직자의 권위들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많은 도전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나는 사회학적인 시각에서의 권위이해를 시도하였으며, 교회사에서 권위가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석되고 행사되어 왔는지를 보여 주려고 여러 가지 실례들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기초하여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에 역점을 두고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의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2장에서 제시한 바 있는 교회에서의 권위에 대한 논점은 권위가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또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권위인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지도자들이어야 하는가? 이다. 내가 "성찰하는 지도자"(reflective leadership)라고 하는 것이 곧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본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나의 재해석의 기초를 설정하고 싶다. 먼저 본 장에서는 교회와 교역에 대한 몇 가지 규범적인 가정들을 좀 광범위하게 제시할 것이요, 다음으로 다음 장에서는 교회가 요구하는 핵심적인 지도력의 과제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교회의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이야기
바울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을 때,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한 몸 안에 있는 여러 다른 지체들간의 유기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이 비유는 교회의 성격과 사명도 설명해 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성격과 사명 -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사명 - 은 예수님의 이야기, 즉 그분의 삶과 사명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이야기로 규정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내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이야기한 바와 같이(Carroll,1989:59), 이 말의 핵심은 교회가 말씀의 계속적인 성육신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성육신 가운데서 말씀이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제1세기 팔레스틴의 나사렛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그 시대와 그 장소의 독특한 문화, 즉 1세기 중동문화와 사회의 특정한 문화 속에서, 그 문화의 특정한 언어와 사고 패턴을 가진 독특한 한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육체화 되었다. 이것은 분명한 말씀의 성육신이요, 계속적으로 미래에 구체적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성육신,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문화라는 그런 특정한 장소,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기회들과 제한들을 말씀이신 예수님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말씀에 제한을 부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그 말씀이 들려지고, 이해되고, 역사성의 제한 속에 살고 있는 혈육 있는 남자와 여자들의 응답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보편적이 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해방시키지 않고 부활은 여러 다른 시대와 여러 다른 역사적 상황하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듭하여 구체적으로 성육신 하도록 그 말씀을 해방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제 1세기 에베소, 고린도, 또는 로마뿐만 아니라 20세기 라고스, 보스톤, 불룸필드, 또는 에섹스 졍션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육체화 된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에서 시작된 교회의 역사는 구체적인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그들의 살고 있는 무수한 문화들과 사회에 합당한 방식으로 자기 집단과 자기개인의 삶속에서 말씀을 육체화하려고 발버둥치며,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 투쟁의 역사이다.
시대마다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은 예수님의 교역, 죽음, 그리고 부활을 근본적으로 육체화하고 있느냐 하는 형태로 발견되어진다. 이것을 프락시스(praxis)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국 하나 하나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실천은 정확히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의 내용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형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이빗 켈시의 용어대로(1975:192f) 우리자신의 교회의 모습과 실천이 정말로 기독교적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약간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개인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알라스테어 맥킨타이어(Alastair Macintyre,1981:201)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를 대답하기 전에 '내가 어떤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가?'를 대답할 수 있을 때에라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 중요한 사건의 앞과 뒤에 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조명해 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처한 끊임없이 변하는 복잡한 환경의 이야기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판단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교회의 성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몇 가지 특성들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영들을 시험해야 하는" 우리의 필요를 감소시켜서는 원리들의 목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조심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한다. 나는 또한 다른 이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그것들을 약간 다른 뉴앙스를 가지고 이해할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우리들 각자는, 내가 7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자신의 교역의 비젼을 얻기 위하여 우리 나름대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의 과제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중심적인 경향성을 나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교역은 하나님과의 새롭고 해방시키는 관계에로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교역의 시작에서부터 분명히 보여준 바 있는 예수님의 가난한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의 동일시, 치료와 섬김의 실천에서 표현된 그분의 사랑, 억압구조들에 대한 반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가르침 - 이 모든 일들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참여시키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들의 가치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하셨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하나님이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 또는 평화의 나리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남자들과 여자들을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쳤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가져올 하나님이 나라는 사랑(용서, 서로사랑, 이웃에 대한 적극적 관심)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불평등과 억압을 영구화시키려는 전통적인 구조들과 관계의 패턴들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상대화시키는 나라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불러 능력을 배양시키고 자기의 교역에 동참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서로와 맺은 새로운 관계를 증거하며, 다른 사람들도 불러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에 참여시키고자 하신다. 그들을 따르는 공동체에게는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 자신의 교역을 계속 할 수 있게 은사와 자원들을 나누어 주시고 있다.
이 세 가지 중심적인 경향들은 바울이 말씀한대로, 예수님의 생애와 교역의 요지를 요약한 것이다,"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이 세 가지는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형체화 시켜야 한다고 암시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시는 여러 다른 측면의 활동들을 시사하며, 그것은 여러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하에서 우리의 실천들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도록 조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웃을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깊이 있는 관심을 가지게 하는 새로운 공동체에의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힘을 배양시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의미, 소속, 그리고 능력향상
우리는 구체적인 실제상황 가운데서 계속적인 예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스스로 발견해내지 않으면 안되지만, 나는 교회가 의미, 소속, 그리고 능력배양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두 번째 가정을 제안한다. 이 기능적 범주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연관된 교회의 과제를 상기시켜 준다. 물론 다른 공동체들도 자기회원들에게 의미와 소속감을 주고 능력을 배양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족공동체나 알콜중독자 치유협회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수 많은 "12단계"그룹들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기능적 범주는 교회가 예수님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에 그 교회생활에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는 교회가 제공하는 의미를 규정한다. 그것은 교인들이 참여하는 교회의 소속구조에 형체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인들에게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능력을 배양시키고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과제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좀 더 자세하게 이것들을 설명하고 싶다.
의미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우리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의 빛 안에서 우리의 삶과 경험을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고 모순되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발달 순환주기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위기들, 질병, 고통, 죽음의 경험들, 어려운 가치 선택들, 부부와 가족 긴장, 직업과 소명의 위기, 부정의와 억압의 문제, 국제적인 긴장과 갈등, 환경문제 등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타조와 같이 파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개인적 집단적 도전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적인 과제들 중의 하나는 우리 존재의 근본구조를 위협하는 이런 위기들과 도전들에 맞서서 그에 대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의미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공동의 기억들(오랜 세월을 내려온 이스라엘의 이야기들, 예수님의 이야기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들)과 공동의 희망(정의와 평화로 하나님이 통치하심)의 빛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들과 경험들을 해석할 수 있게 우리를 도와주는 하나의 컨텍스트를 제공해 준다. 이 기억과 비전의 빛 안에서 우리의 경험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초월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이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우리 인생의 일상적인 경우들과 특별한 경우들 모두에서 교역의 기회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이유로 생동력있는 예언적 설교와 교육과 목회지도가 모이는 것이 교회의 생활에 그처럼 핵심적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우리가 소속한 공동체로서 우리가 의미의 잇슈를 다룰 때에 수용과 돌봄과 지원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관계들과 구조들을 제공해 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발견하게 해준다. 이것이 종교란 단어 religious, 즉 '함께 묶어준다'는 뜻 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묶어준다" 임무는 하나님의 나라에 개인들을 소속시켜 주므로서(예를 들면 세례로) 오늘 이 시대의 개인주의와 고립에 반대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갈라놓는 분리의 장벽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간의 관계에 새로운 깊이를 더해 주며(예를 들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덕, 즉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성령의 열매들로 양육해 준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싶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 나의 어머니는 하지 말라와 하라의 긴 목록을 주는 대신에 "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기억하라"는 단 한마디 충고만 나에게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의 성격으로 상징되는 내가 속한 가족의 성격을 나에게 회상시켜 주며, 그것에 충실하라고 나에게 요구란 것이다. 주말에 가정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과 친구들과 기쁘게 재결합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수용과 돌봄과 지원을 경험하며, 다시 한번 나의 가족이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세워야 하는지를 기억나게 해주는 기회이었다.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도 비슷한 기능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를 함께 묶어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지만, 믿음의 의미 개연성을 강화시킨다. 이런 핵심적인 임무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 - 성만찬, 상담목회, 친교의 기회, 지도력과 행정, 갈등조정 - 의 여러 가지 국면들의 중요성을 더해준다.
교회의 공동생활에 특성을 부여하는 처음 두 가지 과제들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제들은 교회의 세 번째 핵심과제인 능력배양의 공동체에 공헌하는 수단들이다. 종교를 그 기능의 각도에서 해석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크하임(Emile Durkheim)은 신념이나 의미에 대조해서 종교의 소속기능에 특별한 강조를 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신앙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신자들은…종교의 기능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행동하게 하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느낀 다. 자기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신자는 단순히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진리 를 깨닫는 자만이 아니라,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실존의 고난을 견디 어내는 것이든지 또는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든지 더욱 큰 힘이 자기 속에 있 다고 느낀다. ( 1915:463-464 )
뒤르크하임의 기능적 관점을 기독교적인 범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교회의 공동생활에서 지원을 받으며 양육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이야기와 비전으로 우리의 경험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때에, 우리는 또한 우리의 나날의 삶 - 일하고, 놀이하고, 가족생활을 하고, 공동체생활과 국가적, 우주적인 일을 하는 동안에 - 을 통하여 예수님의 계속적인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향상을 받는다. 모여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맥락이 하나님이 우리를 교역으로 부르시는 우선적인 상황들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의미를 발견하고 소속감을 즐거워하는 공동체만이 아니다. 교회는 또한 참여자들이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 받는 공동체이다.
에스겔서 47장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광야를 지나서 바다에까지 이른다. 그 강물이 어디로 흐르든지 그곳에 생명을 일으키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 강물은 광야를 기름진 밭으로 만들고 거기에 짐승들이 살며 열매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 그 물은 사해의 죽음의 바다를 물고기로 가득한 바다로 만든다. 그 비전은 성전의 생활과 활동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성전은 갱신과 능력배양이 시작되는 장소일 뿐이다. 성전에서의 공동생활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한다. 성전에서 중생하고 능력배양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 속에 흩어져 살면서 그곳에서 갱신과 능력배양의 대리인들이 된다. 그러므로 모임과 흩어짐은 기독교생활의 필수적인 리듬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을 추론하는 방식은 안수교역자의 독특한 역할을 규명하는 방식을 제공해준다. 의미의 해석자로서, 공동체를 세우는 자로서, 그리고 대중교역의 지원자로서 안수 교역자는 독특한 사명을 갖는다. 나는 다음 장에서 안수교역자의 이 세 가지 역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교역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봉사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교회에 대한 세 번째 가정은 교역은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불러 참여시키려고 하는 섬김(service)이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의 독특한 은사들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바로 클레멘쇼의 금언 "전쟁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장군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만은 없다" 진리를 교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을 망라해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합의에 도달한 한가지는 바로 이러한 포괄적인 교역개념이다. 안수교역자의 지도력에 관하여 아직도 심각한 불일치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역(ministry)이 하나님의 전체 백성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서는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제2바티칸공의회의 초점일 뿐 아니라,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서, 세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도 비슷한 것을 선언하고 있다."광의의 교역은 하나님께서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 - 개인이든지, 지교회든지, 보편적인 교회든지 간에 - 을 불러 참여시키려는 섬김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실예로 최근에 발표한 루터파 교회의 교역선언(미국루터교회,1984:15)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역은 이 세상의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한시는 사역이다."고 선포하고 있다.
루터교회의 선언은 교역의 장으로서 세상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는데서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교역이 오직 목사가 최우선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모이는 공동체와 동일시한다면, 평신도는 목사가 하는 것과 교역을 동일시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목사는 자주 이런 동일시를 하도록 평신도를 도와주고 부추겨 왔다. 어느 성공회목사가 표현한대로, "우리목사들은 목사의 일 - 교회를 돌보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 - 에 너무 중독이 되어서 평신도의 교역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 결과로 평신도는 기껏해야 지원계급이 될 뿐이요, 최악의 경우에는 스타 - "진짜"목사가 공연하고 훈도하는 것을 관람하는 청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물론, 자기들 자신이 그런 공연을 원치 않을 때에는 언제나 새로운 배우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성 있는 교역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하여 행하시는 역사"라는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매우 다른 드라마(극장의 비유를 그대로 사용한다면)가 연출될 것이다. 주연 배우들은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들이고, 교역의 무대는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즉 평신도 교역자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모든 장소들, 가족, 지역사회, 직장,
정치 등이 될 것이다.
먼저 이야기한 에스겔의 성전이미지는 교회생활의 리듬을 고려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성전해석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신약성경의 시각에서 본 평신도에 대한 충격적인 성서연구에서, 토마스 길레스피(Thomas Gillesper,1978:13-33)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어떻게 유대주의의 성전의 상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빌딩이나 거룩한 장소를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성전은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새로운 성전의 제사장들은 목사만이 아니라 전체 하나님의 백성 모두이다. 길레스피는 자기의 분석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하나님이 이 세사에 거하심은 건물안에라기 보다는 사람들 가운데이며, 분리된 장소 에서 소중히 보호받는 백성이 아니라 세상으로 사명을 수행하라고 보냄을 받은 백성 이요,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틈새에서 구원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백성이요, 거룩한 곳과 세속적인 곳을 오가며 분열된
이중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앞에 성실하게 살아가 는 백성을 의미한다.
평신도 교역을 이야기하면서 한 사람의 평신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상이 우리의 제단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무실은 성전이요, 우리의 동료 직장인들은 함께 축제를 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러면 우리의 직장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로 변한 것이다."
길레스피는 공동교역의 비전이 "평신도들의 능력이 배양되고, 목사들이 기꺼이 동역 하려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나아가려고 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32). 이 말은 이 비전실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암시래 주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데이빗 슐러와 그의 동료들의 광범위한 평신도 연구조사의 결론(1975:73)을 기억하고 있을 줄로 믿는다,"최근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교역이 그처럼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역이 참여하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들이라고 보기보다는 단순히 방관자로 여기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평신도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의 교회에서의 임무는 나타나서 자리에 앉고 헌금을 바치고 입을 닫아 잠그는 것이다"(로마카톨릭 신자들은 "기도하고, 헌금하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것을 약간 바꾸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이 아직도 평신도에게 교역에의 소명과 권위를 깨닫게 하고, 지도를 받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도록 평신도들을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이와 똑같은 무게의 도전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특별한 역할을 행사하며 평신도교역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목사는 이것을 지기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자기들이 받은 독특한 소명의 핵심으로 보아야 한다.
한 교역, 다양한 은사들
교회에 대한 네 번째 가정은 공동교역은 기능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비유는 현대적 의미의 목사-평신도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목사가 없었다. 동시에 그 비유는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몸 안에 여러 가지 다른 기능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한 기능은 다른 기능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몸의 유기체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는 지혜는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지체들을 지원해야 하며, 몸의 목적, 즉 해방과 화해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교역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완성을 위해 공헌한다는 것이다.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평신도교역의 최우선의 장은 모여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셀리아 한(Celia Hahn)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985:50), "세상의 소금이 소금그릇에 들러 붙어버린다면, 우리는 모두 곤란하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이 모이는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교역의 은사들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의 평신도의 최우선적인 역할들에 비해서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목사가 교역을 실천할 최우선의 장은 모이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의 교역이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목사를 사적인 영역의 목회자로 만들므로서 19세기의 목사와 같이 공적 역할의 단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목사가 모이는 공동체안에서 우선적인 지도력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는다. 서로 다른 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는 열쇠는 상호협조와 상호의존이다. 즉 각자는 다른 사람이 받은 교역에의 소명과 권위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교역이요, 언약적 관계로 목사와 평신도는 이것을 위해 부름받았다.
이 책은 우선적으로 목사를 위하여 그리고 목사에 대하여 저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의 대부분은 새롭고 의미있게 목사의 권위와 책임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목사가 교역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신도들도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받은 역할과 책임들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권위의 기초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즉 그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를 지라도 형식에 있어서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 내용들은 그들이 실천하는 구체적인 역할과 환경에 따라서 다르고, 모이는 교회 안에서냐 또는 밖에서냐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2장에서 토의한 권위의 기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거기에서는 특히 목사의 권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평신도 교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앞서의 토의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교회에서의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는, 그것이 안수교역이든지 평신도 교역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힘에 동참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은사들의 궁극적인 기초로서, 그리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여 실천하는 교역의 성격들을 규정하는 데에 이 힘을 공유한다. 이 말은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에 생동력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은 전체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단순히 안수받은 목사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권위의 두 가지 부차적인 기초들, 즉 전문성과 신성불가침과의 관계는 또한 평신도 교역을 위한 권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목사의 권위가 부분적으로 자기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전문성에 기초하는 것과 같이, 평신도들이라고 해서 자기들의 특별한 교역에 전문성이 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이라는 용어는 자기의 신앙과 자기들의 특수한 교역영역과 그 신앙과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의미공동체라고 이해하
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평신도의 권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베르나 도치어(Verna Dozier,
1982:9f.)는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직업분야와 신학에서 모두 전문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평 신도는 실제로 안수교역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을 행하 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훈련을 알아야 한다. 목사들은 다른 분 야의 전문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목사가 그런 분야에서까지 전 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목사들이 자기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신앙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서 알게 하는 것은 분명히 목사들의 과제이다. 목사는 랍비(선생)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랍비는 교인들보다도 어떤 의미로서도 더 영적으로 천재성을 가졌다고 고백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학식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평신도들이 필요로 하는 학 식은 실제로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어떠한 평신도도 헬라어나 교회의 역사나 교회교
부들이 제기하였던 논증들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복음의 이야기를 알 아야 한다. 목사가 받은 훈련은 평신도에게 그 이야기, 즉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를 알게 도와줄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목사는 또한 기독교이 이야기와 평신도의 구체적인 직업영역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평신도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평신도 권위도 두 번째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 즉 신성불가침과의 진정성있는 관계에 기초하여야 한다. 2장에서 우리는 실제로 목사의 영성과 평신도의 영성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우리는 목사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사물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다. 목사의 직제의 권위는, 특별한 복장에 의해 상징되듯이, 그런 인식을 높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발달과정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요, 적어도 교역에 대한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는 평신도들 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운반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8장에서 약간 자세히 설명할 것이지만, 목사는 모이는 공동체에서, 거룩함의 선물의 상징 또는 그 선물을 기억나게 해주는 한 사람의 특별한 대표적 역할을 가졌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선물을 공유하며, 모두가 그것을 대변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먼저 내가 사용했던 가족비유를 생각해 보라. 내가 이미 지적했던 대로 나의 가족은 나의 소속감의 쎈타로 나의 어머니가 바랐던 것은 내가 집을 떠나 대학에 가 있을 때에도 가족이 나의 가치를 형성하고 나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의 부모님, 특히 나의 아버지는 우리가족의 가치를 상징하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에 못지 않게 나의 아버지와 내가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단순히 내가 하여야 하는 바의 모델이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에게 모종의 도덕적인 권위를 주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의 선물을 기억나게 하는 자로서 목사의 상징적 역할은 우리가 본바와 같이 목사의 권위의 하나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사를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틴 루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며, 그들의 이웃에게 "작은 그리스도"가 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이 부르심은 복음과 "작은 그리스도"가 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실현할 다양한 교역상황과의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전문성)과 함께 교역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권위의 기초이다. 이런 평신도의 권위의 기초는 외형적으로 목사의 권위의 기초와 유사하지만, 이 양자는 그 내용과 표현에서 차이가 있다. 이 권위는 교회교역의 질서 가운데서 평신도와 목사의 독특한 역할을 반영하며, 목사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물론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여있는 공동체에 있고, 평신도의 1차적인 역할은 흩어지는 교회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는 서로간에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와 안수 교역자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얻는 것은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주 목사와 평신도들에게 서로 다른 집단에서 그들 자신의 권위와 다른 이들의 권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해 보았다. 목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1) 나는 안수교역자로서 나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2) 교회의 평신도들은 안수교역자로서 나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나는 교역자로서의 평신도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4) 평신도들은 교역을 위한 자기들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평신도들은 같은 질문을 약간 바꾸어서 대답하게 한다:(1) 나는 평신도로서 나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나의 목사는 나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3) 나는 나의 목사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4) 나의 목사는 자기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나는 그들에게 그 결과를 서로 나누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게 하고, 방해요소를 나누게 하고, 더 효과적으로 공동목회를 할 수 있게 서로간에 협력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강한 지도력과 균형
본 장을 끝마치기 전에 마지막 가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사와 평신도간의 공동목회와 균형적 상호 의존적 관계는 강한 지도력과 양립할 수 있다.
공동교역의 강조에서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공동목회가 강한 목회적 평신도 지도력과 서로 모순된다는 가정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실시되었던 수 많은 교회의 사회학적 연구조사의 요약에서, 폴 다글라스(H. Paul Douglass)와 에드문드 부루너(Edmund S.Brunner,1935:254)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의 외적인 환경의 운명에 의하여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웃이 가는대로 교회도 따라간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환경을 뛰어 넘어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실패하는 상황에서 성공한 교회들" 대부분의 특성은 뛰어난 지도력에 있었다(1935:254)고 결론지었다. 더 최근에, 교인들의 계층적인 관심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사회봉사교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을 조사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참여의 결정적인 요인은 강력한 예언적인 지도력이다. 목사들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였을 때, 그 교회와 교인들은 우리시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Mods, Davidson, and Johnson,
1991:101)
나 자신의 큰 교회들과 작은 교회들 모두에 참여하고 연구한 경험도 이러한 일반화를 뒷받침한다. 강한 지도력은 교회활성화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강한 지도력은 공동목회를 희생하면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지도력의 한 가지 열쇠는 교회의 힘이, 게임이론가들이 말하는 제로섬게임(플레이어들의 득실의 합계가 항상 0이 되는 게임)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제로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힘은 한정이 있는 상품이라'고 가정한다. 어떠한 힘이든지 내가 그것을 너와 나누게 되면 그만큼 나의 힘은 감소된다. 그러므로 나는 방심하지 않고 나의 자원들을 비축하고 너를 나에게 종속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너도 같은 방식으로 응답한다. 만약 내가 너에게 준다면, 전제적인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것 같이 하고 아직도 너를 종속적인 관계에 메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로섬관계가 될 필요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그 힘의 근원이 되신 성령님의 힘을 나누어 갖는다고 이해하였다. 모든 지체들은 같은 힘의 근원으로부터 서로 다른 선물들을 받아서 (은사들) 전체의 유익을 위한다. 힘을 행사하는 비밀은 자기의 힘을 비축하거나 가족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다른 지체들을 강화시키고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한다.
힘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동목회를 믿는 목사는 권위주의적 그리고 가부장적이 됨이 없이, 즉 평신도들을 종속시키려 하고 2차적인 역할에 묶어두려고 함이 없이 강력한 지도자가 된다. 오히려 그러한 목사들은 평신도들의 은사와 지혜를 인정하고 그들이 필요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들의 은사와 지혜를 사용하도록 격려한다. 목사는 공동목회를 위하여 비지시적이요, 불간섭주의적인 촉진자 - 매우 무기력한 교역의 이미지 - 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목사는 자기의 훈련과 분별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개인들과 전체로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에 당면한 잇슈들과 그들에게 열려진 대안들을 검토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 목사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기억)와 어째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해야하는가(희망)의 빛 안에서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을 검토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목사는 교인들의 통찰과 비전을 실현하는 교역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교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영감을 주어야 할 것이다. 데이빗 멕클리랜드(David McClelland,1975:262)는 힘과 지도력의 연구에서, 이런 유형의 힘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적극적인…힘의 면모는 그룹의 목적달성을 위한 관심, 즉 삶들을 추진해 나갈 그런 목표들을 발견하며, 그룹을 그런 목표들을 위하여 조직하게 하며, 그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하는데 앞장서며, 그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할 수 있는 자신감을 그룹회원들에게 제공하는 등의 관심으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에 열거한 5가지 가정들이 합당한 교회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을 결코 하지 않는 반면에, 그것들이 다음에 이야기할 권위와 지도력의 재해석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을 포함하여 교회의 실천이 판단되고 형성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균형적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의 질서 안에서 목사와 평신도의 구별된 역할을 존중하는 권위관계를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