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8:52
(2)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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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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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권위의 정의

교회는 돌 위에 새긴 질서와 안전과 영원의 언약이다. 그러나 정치학에서도 친밀한 관계의 삶에서도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 하는 것은 환상일까? -리챠드 세네르

교회에 대한 세네트의 묘사는 내가 앞장에서 이야기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한때 질서와 안정과 영구성의 성채로 보이던 것이-그래서 교회를 지도하던 목사의 권위를 위한 견고한 기초로 보이던 것이-많은 사람들에게 그 신성성과 절대성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세네트의 관찰은 독일의 시인 하이네 (Heinlich Heine)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그는 친구와 함께 프랑스에 있는 아미엔즈의 대성당 앞에서 있었다. "하인리히, 어째서 이제는 이처럼 엄청난 건축물을 더 이상 짓지 못하는 거지요?"하고 친구가 묻자 하이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나의 친구여,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네, 우리 현대인들은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저런 고딕 시대의 대성당을 지으려면 견해보다 더한 것이 꼭 필요하다네."①

권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무엇일까? 세네트가 질문한대로, 건축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환상일까? 질서와 안전과 의미를 제공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든지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구조들까지라도, 유지할 수 없는 것일까? 세네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요 나도 이에 동감한다. 대성당들을 짓도록 영감을 불어넣은 확신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지라도-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역사화에 물들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의 가능성들이나 무오한 교회나 무오한 성경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나는 권위와 권위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가 환상이거나 감소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범스티커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우리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우리는 권위가 권위주의적이 되고 억압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두려워 할 수 있다 ;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의 가장 깊은 진리와 규범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하지 않고는 어떠한 공동체 안에서도오랜동안 함께 살아갈 수 없다;또한 명료한 음성과 해석과 실천 능력이 있는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없이 공동체는 계속 유지될 수 없다. 어떠한 공동체도 어떤 형태로도 공동체를 생존하게 하고 그 공동체의 목표들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지도력이 없이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권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공동체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적은 독재이다. 그것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순종을 강요한다. 공동체의 적은 권위를 오용한 권위주의요, 개인 각자가 자기에게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의 적이다.

인간 공동체에 진리인 것은 동시에 교회에서도 진리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수행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의 권위에 교인들이 기꺼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런 핵심적인 신조들과 가치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언어로 선포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갈등들은 조정되어야 한다. 교회와 다른 공동체들과 사이의 경계선들은 분명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교회 생활과 사역에 대한 지침은 확실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지도력을 의미하며, 지도력은 권위를 의미한다. 결정적인 질문은 권위가 있어야 하느냐 이든지 지도자들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권위인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지도자인가?이다

권위에 대한 하나의 관점

권위는 어렵고 복합적인 개념이다. 권위의 여러가지 의미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쟁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② 오히려 이 책은 목사와 평신도 모두의 교역에 적용할 수 있게 권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개발하려는 시도이다. 본장에서 개발하는 권위에 대한 관점을 그 자체로서 소중하지만, 이 책의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권위에 대한 개념들을 재정립하기 위한 기초로 사용하고자 한다.

권위와 힘(power)은 가끔 대조적인 개념이면서도 가끔 교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양자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힘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 힘은 그것을 사용함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느냐 그렇지 않으냐와는 상관이 없다. 한사람의 지도자가 그 힘을 사용함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사용할 때, 그 지도자는 폭력 또는 강압적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권위는 합법적인 힘이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 한 사람의 지도자의 지도를 따르거나 그 집단의 규약의 정하는 명령에 따르거나 또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에 그들은 집단 생활에 방향을 지도하는 지도자, 규약, 또는 성경의 권위-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명령이 그 집단의 핵심 가치, 확신, 그리고 목적과 일치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문화적 대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집단에 속한 개인은 세금을 내거나 교통법규를 단속하는 경찰관에게 순종해야 하는 경우와 같이 맹종의 요구에 항상 기쁘게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승락해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요구하는 자의 적법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또는 그 요구의 적법성을 인정하기 때문에)그리고 순종하는 것이 전체의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복종한다.

이것을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야기한다면,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교회나 또는 교회 기관인 교회의 목적과 기본적인 신앙과 일치하며 거기에 기여한다고 인정하여 그것을 적법한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목사나 평신도 지도자가 적법하게 힘을 행사할때 - 즉 권위를 가지고 힘을 행사할 때 - 그는 옳다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교회의 교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도하고, 영향을 미치고, 조장하고, 또는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계층적이요 상의하달방식이요 권위주의적인 형태로 권위를 행사하며 교인들은 종속적이요 복종적이 되게 할 수도 있다. 또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교역의 권위를 주장하게 지도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집단이 힘을 행사하는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동안에 지도자는 권위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적법성에 대한 강조는 권위의 관계적 성격을 뒤받침 한다. 권위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집단이나 기관의 인정함 없이 어느 개인이 개인 스스로 소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어느 개인은 상당한 카리스마나 또는 다른 필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목사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깊이 있는 음색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 상당한 매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이 그의 영향력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힘의 행사가 적법하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런 특성들은 권위로 해석되지 않는다. 권위는 성문화된 규정에 정하는 바에 따라 적법하게 행사하는 공식적인 인식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적법성을 받아들임으로 보여 준 바와 같이 약간 더 비공식적인 인식일 수도 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안수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거나 감독의 임명을 받는 것은 적법성을 부여받는 공식적 또는 구조화된 방식들이다. 지도자로서의 적법성은 좀더 비공식적으로 교회나 공동체의 부언의 동의에 기초할 수도 있다. 즉 목사는 자기의 신앙적 진정성이나 증명된 능력, 또는 이 양자 모두 때문에 지도할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진정성과 능력은 안수와 청빙의 기초라고 가정할 수 있으나, 교회나 공동체가 지도할 완전한 적법성을 목사에게 부여하기 전에는 목사는 진정성과 능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 안수받은 목사들은 가끔 이 순간을 제 2의 안수로 경험한다: 이것은 온 교인이 그 목사의 적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본장의 뒷부분에서 그리고 다음장에서 이런 잇슈들을 상술하고자 한다. 요점은 권위가 하나의 관계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도할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집단이나 공동체와 분리해서 권위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 권위

교회가 어째서 권위를 부여 받는가를 논하기 전에 한가지 더 일반적인 견해를 이야기하고 싶다. 권위에 대하여 논의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정치적 법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행위의 통제를 제 1차적으로 강조한다. 목사와 다른 전문가들도 때때로 행위를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은 견해들과 신념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을 갱신하고, 사람들의 현실을 정의하는 방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의사들과의 토론에서 폴 스타(Paul Starr)는 이것을 사회적 권위에 대조해서 문화적 권위라고 불렀다.

목사는 설교하거나 가르치거나 또는 상담할 때에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싶어하고 행동에 영향을 주고 통제하는 데에 관심을 덜 갖는다.

목사는 개인들이나 집단의 그들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나, 목사의 제 1차적인 의도는 다른 사람의 의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그 교회가 그 목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힘, 즉 적법한 힘의 사용이라고 할 것이다. 참으로 교회와 같은 지원 집단에서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의 행사하는 권위의 대부분은 그 성격상 사회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이다.

문화적 사회적 권위는 흔히 결합되어 나타난다. 교인들에게 교회의 선교를 위해 헌금으로 지원하라고 요구(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는 그들이 왜 선교를 지원해야 하는지 하는 인식을 갱신하는 설교를 먼저 한 후에(문화적 권위의 사용), 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의 해석(인식갱신을 위한)없이도 목사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교인들이 그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더 열심히 헌금할 것이요, 더 많이 헌금할 것이다.

대체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문화적 권위 행사는 사회적 권위 행사에 앞선다. 의사들도 목사들도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국가의 강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자원 단체는 목사가 교육을 통해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한 때 목사도 수찬 정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는 경제적인 복종의 수단으로 추방-아미쉬는 이것을 격리라고 불렀다-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수단은 아직까지도 원칙상으로는 가지고 있으나 이제 그런 수단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의 지옥불을 믿거나 지옥을 있는 그대로 믿었던 때에 그런 수단들이 가졌던 무기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③

목사는 복종을 강제하는 권한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총회의 결의나 법으로 강제하는 권한이 규제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천주교회 감독들은 교리가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감독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강제적인 권한이 없다. 실제로 1988년 선거에서 주교들은 임신 중절을 반대하면서 임신중절을 찬성하는 당이나 후보자에게 투표해서는 안된다고 천주교인들에게 가르친다면, 교회의 세금공제 혜택을 철폐할 수 있다는 법정 소송을 제기 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④

끝으로 문화적인 권위는 과거의 지성적인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문화적 목적물들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그런 권위는 성경과 같은 신성한 텍스트 속에나, 사전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공인된 참고서나, 또는 미국헌법과 같은 창립 문서등에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현실을 해석하거나 애매하거나 갈등이 있는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에 협의할 수 있는 권위들이다. 이것은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즉 목사는 지도력을 행사하는 근거로서 성경을 내세울 수 있다.

요약하면 목사의 역할은 목사가 행위에 영향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데서 사회적 권위를 포함하지만, 목사의 역할의 대부분은 현실을 바르게 정의하고, 의미와 가치를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는 데에서 문화적 권위에 속한다. 앞장에서 나는 목사가 동료 세속 전문인들과 비교하여 약간 결함이 있다고 한 이반 밸러(Ivan Valler)의 판단을 인용하였다,"그는(목사는)해석하는데 비해서 세속의 전문인 동료들은 처방한다 ; 그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건에 의미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우리가 사회적 권위와 문화적 권위 사이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처방하는 것 보다 해석하는 것이 결함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행동을 처방하거나 또는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종류의 권위를 이야기 하는 것뿐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양자가 모두 중요한 권위라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권위의 기초

어째서 하나의 집단은 지도자나 그룹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인가? 그들의 신뢰를 보증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잘 알려진 중요한 하나의 대답은 세가지 형태의 권위에 대한 막스 웨버(Max Weber,1968:212-271)의 이론이다. 권위는 전통적인 근거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 전통적 권위는 아주 오랜 전통의 신성성에 대한 공인된 믿음과 거기에 근거해서 행사되는 권위의 적법성에 근거한다(215). 또는 권위는 카리스마적 근거 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이 권위는 어떤 특정 개인의 뛰어난 신성성, 영웅적 삶과 행위, 또는 모범적인 성품과, 그 사람이 세우거나 인정한 규범적인 모범이나 질서에 대한 충성에 근거하는 권위이다(215) 마지막으로 권위는 합리적-법적 근거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 이 권위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제정한 규칙--권리의 정당성을 신뢰하는 믿음에 근거하는 권위이다(215). 웨버는 이런 묘사는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했다 ; 즉 위에 묘사한 것은 권위의 순수한 모습을 기술한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이 형태들이 약간씩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어느 한 형태가 지배적으로 들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를 포함하여 현대의 기관들 가운데서 각각의 권위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유서 깊은 전통에 근거한 권위가 있다 :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해 왔고, 그렇게 계속 행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어느 교회든지 보면 자기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자를 자처하는 비공식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 또한 목사의 역할의 한 측면은 역사적으로 교회의 전통, 특히 성경적 전통의 보호자의 임무를 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가 카리스마를 그의 성품과 동일시하여 그 의미를 평가절하지만, 카리스마는 아직도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근거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보통 강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카리스마는 하나님이나 신성한 것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거나 새롭고 의미있는 미래를 구상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등의 신비한 매력에서부터 우러나온다. 히브리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모형이지만 동시에 히틀러도 독일의 신성한 과거 역사와 1000년 왕국의 비젼을 보여준 점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중요한 모형이다.

웨버의 견해에 따르면 , 전통적인 권위도 그리고 카리스마적 권위도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법적 권위, 즉 이성이나 기술적인 능력, 그리고 법적인 재가에 근거하여 부여받은 권위가 제 1차적인 권이이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목사들을 포함하여 전문적인 권위는 대체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합리적-법적 근거에 기초한다.

우리는 권위를 부여하는 웨버의 세가지 근거들을 약간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이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 데 더 쉬울 것이다. 시작하면서 우리는 먼저 궁극적 기초와 부차적인 기초를 구분하여야 한다. 궁극적 기초들은 권위의 근거가 되는 기초 경험들과 확신들이다. 부차적 기초는 집단에서 적법하게 힘을 사용하는 자격을 규정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다.

궁극적인 기초

웨버의 이론으로 돌아가서 권위를 부여하는 궁극적인 기초를 고찰하면서 시작해 봅시다. 수많은 해석가들( 예 Nisbet, 1966:251이하)이 지적한 바와같이, 웨버는 카리스마를 한 형태의 권위 이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웨버가 실제로 이것을 완전히 논술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것들과 그것과 사회와의 관계를 보는 웨버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카리스마는 한 사회나 집단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권위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는 힘의 한가지 표현이다.⑤ 신성의 힘인 카리스마는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알라, 도, 나치의 "피와 땅", 또는 미국식 생활방식등 어떠한 용어로 정의하든지 간에 그들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모든 사회기관과 권위의 개념들이 그뒤에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근본주위자들이 종종 글자를 영과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이 사실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성경의 개념이나 교회전통 뒤에 숨겨져 있다 그 신성불가침의 것은 명시적으로 -예를 들면 하나님이나 알라와 같이-있는 그대로 인식되고 명명될 수도 있으며, 또는 예를 들어 "미국식 방식"⑥과 같이 하나의 집단이나 기관의 문화를 특징지우는 핵심신념들과 가치들의 형태로 묵시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어느 누가 권위를 가지고 합법적으로 사용한 힘은 궁극적으로 신성불가침의 힘이나 또는 그 집단의 핵심 신념과 확신에서 도출된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존 쉬츠(John Shutz)는 사도바울이 행사한 권위의 연구에서, 하는 것은 목사나 제사장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이것은 신성불가침의 것을 해석하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이며 기능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지 또는 좀 더 조심성있게 한 기관이나 그 목적에 대한 일련의 핵심가치들과 신념의 용어를 사용하든지 간에 신성부가침의 개념에 있어서 사회기관의 중요성을 지적해 준다. 이것이 하나의 특정한 집단 안에서의 권위의 궁극적기초이다. 지도자는 그 집단의 핵심 가치들과 신념들을 보호하고, 해석하고, 대변하며 , 그것들을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자로 신뢰를 받기 때문에 권위를 부여 받는다. 나는 이것이 모든 기관에 해당되는 사실이지만 교회와 교회가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서의 권위(합법적인 힘)는 목사의 권위를 포함하여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확신에 특별히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가지 역사적인 경험들과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아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들과 그 확신위에 근거한 경험들은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행사나는 힘의 궁극적인 근원이요, 그 힘을 정의하는 특성이 된다. 그것들은 성경이나 전통과 같은 다른 권위들의 적법성의 궁극적 기초도 된다.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의 전통(들)에 권위를 부여하고, 권위자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근거하여 세워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로서 신성불가침에 대한 확신과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들을 식별할 수 있다는 확신들의 공유를 의미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명한 것이며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성경의 무오성과 교회의 가르침의 무오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교회의 가르침의 직을 통해서 분명히 알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의 가르침과 훈계는 권위적이다. 그들의 이러한 무오한 근원에서 분명하게 계시되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확실성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한 불일치가 초대 교회부터 교회의 역사에 점철되어 왔지만, 오늘에 와서 그러한 불일치는 첨예되었다. 우리의 하나님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의 역사화와 상대화가 점점 심해지면서 초래된 신앙의 위기를 이야기한 앞장의 논의를 회상해 보라. 이러한 깨달음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이 자명한 것으로 믿어오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수많은 기본적인 신앙의 확실성들을 침식 시켰다. 우리는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에 근거하여 역사화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계속하여 권위로서 기능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무오함을 믿기 때문도 아니요, 역사적 경험들의 상대화를 피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적법성을 고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명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힘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비젼의 근원으로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과 훈계들이 그들 자신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을 분별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목사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무오성을 주장하거나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의 옷을 입었기 때문도 아니요, 교회가 그들에게 목사의 직을 위임했기 때문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힘과 목적을 믿을 수 있게 대변하고 해석하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그들을 이런 식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적법성을 획득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에서 힘을 사용하는 부차적인 기초들에 우리를 인도한다,.

즉,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특히 목사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더 구체적인 이유를 고찰하게 우리를 인도한다.

권위의 부차적 기초들

수많은 부차적인 요인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종교지도자들이 권위에 역사적으로 기여해 왔다. 거기에는 제사장 계급의 일원으로서 계승, 독특한 신체적 또는 심리적 자격의 소유, 성스러운 전통에 대한 특별한 지식, 카리스마와 모범적인 성결, 또는 여러종류의 전문성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하나씩 검토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이미 그들 중 몇가지를 웨버의 이론을 이야기 하면서 소개하였다. , 오히려 , 본장에서의 토의는 현금의 종교지도자들의 역할에 적절한 두가지, 즉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이 두가지 기초들 중 어느 하나를 가지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양자는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회학자 친구 한사람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랍비의 아들이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그는 까만 성직의 의복을 입는 랍비나 제사장을 만날때마다 뱃속 깊이에서의 경외감정이나 일어난다고 나에게 고백하였다. 이것을 그는 불합리라고 칭했다. 그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만드는 의복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랍비인 자기 아버지에 대한 계속적인 존경의 한가지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자기 아버지와 다른 성직자들이 대변하는 -그 아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라도- 신성불가침의 힘에 대한 경외이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타고 시운전하면서 교회앞에 서있는 자기 가족의 제사장 앞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 차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자기 아내와 자녀들에게 설명하는 TV광고도 이 비슷한 경외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 제사장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이요, 그래서 그 TV광고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신성불가침을 신뢰를 요구한다.

어떤 목사들은 이러한 동일시를 유도하고 일부러 엄숙한 목소리와 다른 제스쳐를 사용하면서 자기의 거룩성을 상징적으로 보이려고 하지만, 많은 목사들은 그러한 동일시를 싫어하고 그러한 동일시가 종종 가져오는 경외를 달가와 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를 강조하면서 , 어떤 목사들은 목사 까운 대신에 T셔츠를 입는다든지 전통적인 까만색을 밝은 색깔로 바꾸어서 자기들의 성직을 현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소년과 같이 보이고 싶어하기도 하고 소녀와 같이 보이고 싶어도 한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동일시를 피하기는 매우 어렵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목사는 이 사회에서 구조화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이다. 이것이 바로 목사가 가지는 권위 또는 합법적인 힘의 근원이다.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도록하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를 지도하는 권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교회의 확신에 긍극적으로 기초한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 있어서 도 마찬가지이지만 결론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힘을 실제로 구현하고 또는 그들은 핵심적인 신앙과 가치들을 성육신하고 있다는 신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현존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 통로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권위자로 인정 받는다. -웨버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들은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다. 자기의 권위에 대하여 바울의 내세운 증거는 우리가 이미 본바와 같이 하나님이 부르심의 결과로 자기 에게 임한 영적인 힘에 대한 호소이다 요아킴와츠(joachim Wach 1944:34)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를 누리는 사람들은 신과 특별히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인정 받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험에 관계하는 모든 자가 제 1차적이요 간접적으로 그 경험에 관계된 모든자는 종교적 인간의 삶에서 제 2차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전통에서 보면, 이런 형태의 종교적 권위에 적어도 두가지 주요 변형을 볼 수 있다 : 하나는 천주교의 변형(또는 제사장적 변행)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적(또는 경건주의적)변형이다. 이 두 형태는 실천에서 자주 합병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천주교적 변형을 설명하면서 어반 홈즈(Urban Homes)는 제사장들을 "성례적인 인격"데오토코스("하나님 - 나르는 자"),"비법전수자"라고 불렀다. 홈즈에 따르면 91978:67),"비법전수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에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말과 행동, 제사장의 현존 바로 그 자체를 통하여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적 변형이 더 크게 강조하는 제사장의 도덕적 성격이나 경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실상을 통해서 신성불가침을 나르는 자(hearer)로서 제사장의 신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홈즈는 전문적인 교역 모델에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 내가 믿기로도 그렇다 전문적인 교역 모델은 도구적 기술을 선호하여 교역자의 존재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16세기 트렌트 교부들이 세운 신학교들은 - 문제그대로 "오판"-신학생들을 세상적인 영향에서 보호하여 성례전의 직무를 위해 양육시켰다. 학문적 관심들과 목회기술들은 제사장의 직에 들어갈 수 있는 영성형성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다, 더 나아가서 독특한 성직자의 제복을 입고 독신을 유지하는 것은 신성불가침을 나르는자로서의 제사장의 독특성을 상징해왔다.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 (19세기에 미국의 개신교도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했다)은 천주교의 교역모델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성례전적 신학에 동의하지 않은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자기들의 목사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나 실천적인 목회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사의 권위의 핵심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면적인 소명, 즉 성령의 은사가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으로 인도할 수 없다. 복음주의자들은 성직자의 성례전적 역할이나 대표자로서의 역할보다도 목사가 가진 인격적 소명 또는 내면적 부르심에 더큰 무게를 주었으며, 계속해서 주고 있다.

내면적인 부르심의 중심성은 18세기에 일어난 논쟁, 즉 길버트 테네트(Gilbet Tennet) 가 이끄는 대부흥운동의 지지자들과 필라델피아 노회의 반-부흥운동주의자들간의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반-부흥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바와 같이 목사후보생이 교역훈련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교역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부르심을 꼭 받아야만 하는가? 테네트의 아주 확고한 대답은 '중생하지 못한 목회의 위험"이라는 고전적인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설교에서 무엇보다도 그는 중생하지 못한 목사를 "자기도 수영할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사람"에 비교했다. "그렇게 하면 사도행전에서 보는대로 물에 빠질 것이요 바보와 같이 죽고 말 것이다..."(Smith,etal.1960:326)

교인들은 끊임없이 목사가 하나님과 가까웁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91987)

대부분의 신자들은[목사를] 그의 의식집례자의 역할 가운데서만 보며 그의 인격을 미화시켜 이상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어느 여인은 자기 목사의 설교가 자기와 같이 평범하고 죄 있는 사람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고 놀라워 했다."어떻게 저분과 같이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특성들을 알 수 있을까? 나는 그 분이 우리같은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도 자기들과 같이 죄있는 인간이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사를 세상의 더러운 것들 보다 조금 위에 있는 자요, 평범한 사람들 보다 무언가 다른 사람으로 보고자 한다.(122)

그러한 관점은 근본주의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회에 속한 한분의 신자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나는 x박사9목사)에게 문제를 가지고는 결코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녀는 목사를 비판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는 하나님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분이라는 칭찬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가 제사장직의 성례전적 성격에 있든지 또는 복음적 설교자의 인격적 거룩성에 있든지 간에 천주교적 관점과 복음주의적 관점을 모두 안수받은 목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믿는데에 동의하고 있다,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요 도구라는 확신이 있다. 이것은 평신도가 그들의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중요한 존중과 신뢰의 요인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기초하여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목사에게 평신도와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논술할 것이다. 본장에서는 원리상으로 그 대답은 아니지만 가장 실천적으로는 예라는 사실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바울의 권위의 사용을 연구하면서 슈프(shüts)는 바울이 권위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바울이 약할 때에 바울에게 임하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능력과의 특별한 관계에 호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린도전서 1-2;고린도 후서 11-13장을 보라)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능력이 자기와 같은 지도자들만이 특별히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을 들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세기 말에 와서 바울 이후의 교회들은 사도들의 영적 권위를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와 구별하기 시작했다. 4세기에 와서 교회는 모든 성직자들을 평신도들이 얻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자로 보았다. 평신도는 영성적으로 2급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장구한 성직자주의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적 능력의 오용-인생 가운데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라는-은 목사의 권위의 하나의 중요한 부차적 기초이다.

전문성과 권위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부차적 기초는 전문성이다. 이것은 교역과 교회의 사명에 아주 중요한 자원으로서 지식과 기술을 목사가 가졌다고 믿는 것이다. 권위의 부차적인 기초로서 지식 또는 전문성은 특별히 웨버가 주장하는 세 번째 타인의 권위, 즉 합리적-법적 권위이며 이것은 현대 전문 직업의 특성이다.

전문성을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의 초기에 사도전승의 순수성은 사도들의 후계자로 보았던 장로(후에 감독이라 불림)들에게 위임되었다. 그들의 책임에는 교회의 생활을 감독하며 돌보는 것도 있었다. 버나드 쿡(Bernard Cooke,1975:419)은 이것의 실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과정의 초기에는 신학교를 세우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교훈, 모범, 그리고 실습훈련을 통하여 교역의 비결이 전수되었다.

그래서 가장 엄격하고 가장 협의의 사도적 전승에 첨가하여, 설교, 예전집례 요리문답 구성, 그리고 공동체 조직등의 감독 전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직무의 숙달은 분명히 감독이 사람들 위에 영행력을 행사는 권위 형성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은 특히 지교회담임 성직자들에게 항상 기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개혁교회전통에서 칼빈의 영향아래, 교역자의 학식이 강력히 강조되었다, 학자의 의복인 제네바 까운은 개혁교회 목사의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 전통은 뉴잉글랜드 청교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비록 뉴잉글랜드의 평신도들이 거의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대부분이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해석에서 목사의 전문성을 존경했다. 목사들이야 말로 성경을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고 해석을 위해 주석,사전, 그리고 다른 책을 접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은 목사의 권위에 중요한 근원으로 평가되었다(shout1987:32).청교도 목사들은 또한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남녀와 상담하면서 목회적 분별력을 보여 주도록 기대받고 있었다( Halifield,1983:81-82)교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거기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목사들이 분별과 상담에서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했다.

전문성은 교회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성직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기초의 한 부분이 되어 왔지만, 19세기 중엽에와서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그랬다. 이 때는 많은 사람이 전문직에 대한 현대적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Bledstein,1976;Larson,1977;Russoll,1980 등을 보라)이전에 전문직은 -특리법관,의사그리고 목사 -중요한 신분적 특권으로 생각되어 왔다. 전문 직업인들은 계층 질서가 분명했던 사회에서 자기들의 교양과 교육으로 특권을 누렸으며, 자기들네간의 직업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전원적인 농촌사회가 도시의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과거의 "신분"을 의미하면서 전문직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새로이 생겨나는 전문직종들과 함께 전문인들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지식과 봉사에 대한 전문적인 필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고 직업에 따라 집단화 되었다. 블레드 사타인의 주장대로 (1976:x),"가장 분명하게 중류 계층의 사람들이 전문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문지식과 봉사로 사회에 기여하여 자기들의 세상적인 자위를 향상하며, 직업사회에서 자기 위치의 상승을 기대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현대 과학과 케트놀러지의 등장은 상당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로 생겨난 전문인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실천의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이론은 중요한 인간문제들을 다루는 기술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현존하는 학교들을 개선하고, 새로운 학교들을 설립하여, 새로운 전문인들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대학교들과 전문학교들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상당수의 신학교들이 부분적으로 안수교역자의 전문화에 대한 새로운 강조의 결과로 세워졌다. 뉴잉글랜드의 조합교회 목회에 영향을 준 이러한 변화를 회고하면서 도날드 스콧트(Donald Scott,1978:145-155)는 그것을 "직무에서 직업"으로의 변화라고 불렀다.

1950년대까지 제도적인 용어로, 목사는 하나의 전문직업인이 되었으며, 응집력이 있고, 자의식이 강한 직업집단, 즉 일종의 기구로 조직되고 규정되어서, 평신도나 공공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누가 성직자 계급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스스로 가지게 되었다... 목사이든 아니든 간에 성직자의 근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이제 전문직업인이 되었다. 그것이 성직자로서 자신의 정체감을 창조해주며 지탱해주고 자기의 역할을 규정해주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공동체 집단에 속하게 하며, 사회의 다른 집단과 자기들을 구별해 주는 것이 되었다.

권위의 근거로서 전문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특별히 높여주는 것은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을 규정해주는 것이 자기들의 전문성과 따라서 자기들의 권위를 향상시켜 준다는 스코트의 관찰이다.

전문인으로서 성격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존의 종합적인 관리자요 규정자로서 목사의 집단적인 적법성을 신장시켰다. 전문 기술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독점은... 공인된 개업자의 집단에 합당하게 소속되었으며, 그들간의 의식과 훈련을 거쳐 (이미 의식과 훈련을 거친 자들이 규정하고 지배하는)평신도나 아마츄어가 아니라 "전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시카고 대학교 총장 윌리암 레이니 하퍼(William Rainey Harper)와 같은 교육자들의 지도 아래, 교역자의 교육을 좀더 전문적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교역실천에 과학적인 근거를 세우려는 노력과 그 실천에 필요한 목회기술 훈련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 비평의 발달, 과학적인 신학의 개발노력, 그리고 특히 실천신학 분야의 폭발적 발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신학교육에서 과학적으로 교역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일어난 결과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것이었다.

성직자의 권위의 근거로서 전문성은 계속하여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거의 주요 모든 교단들은 안수교역에 필요한 신학교육을 요구하거나 그에 준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상당한 교육을 받은 평신도들로부터 오는 교육받은 성직자에 대한 압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단들에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전문성의 종류들도 다양하다. 그것은 교단이 다 가지고 있는 안수교역의 지배적인 이미지 또는 모델에 때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기대하는 안수교역자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schulleretal,1980),장로교단과 개혁전통을 가진 성직자들의 대인 관계 능력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남침례교회는 공격적인 전도를 강조하며, 정교회 신자들은 제사장의 예전 집례의 지도력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차이는 가치있는 전문성에 대한 교단적인 차이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전문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다르게 나타났다. 도날드 오스본9Ronald Osborn)의 미발표 논문을 인용하면서, 죠셉휴(Joaeph Hough)와 죤캅(John Cobb,1985)은 미국 역사에서 시대마다 지배적이었던 4가지 안수교역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대가(master)모델(주로 19세기 이전에)로 안수교역자들은 가장 교양있는 신사로 만능의 지식을 소유한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대가모델 다음에는 부흥사 또는 설교자 모델이 나타났는데 (주로 19세기에), 이때에 목사들은 설득력있는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전도의 심리학과 테크닉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건축자 (builder)모델로, 안수교역자들은 거대한 제도적인 교회를 개발하고 행정하며, 그 교회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했다. 이 모델은 20세기 초에 대도시에서 각광을 받았다. 마지막 모델은 경영자 모델로, 휴와 캅은 이 모델이 오늘날 요구하는 지배적인 안수교역의 이미지라고 믿었으며, 이것은 효과적으로 기관들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전문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휴와 캅은 이 모델에 특별히 비판적이었다. 이 모델은 결국 비신학적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의 비평에 동의하며, 제 5장에서 성찰하는 지도자로서의 교역자상을 제시하면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지금으로서는 전문성이 욕사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초라는 사실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정한 교역 모델이 무엇이든지간에, 교역 수향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추는 것은 교회가 자기의 자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권위자로 인식하는데에 하나의 근원이 된다.

요약하면, 성직자의 권위에 적어도 두가지 부차적인 기초들이 있다 :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다는 것 (로마 캐돌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변형을 가지고 있지만)과, 전문성이다. 이 두가지 기초는 서로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양자는 중생하지 않는자의 교역이란,s 테네트의 비탄과 같이 서로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는 요나단과 에드워드 주위에 모인 복음주의자들과 챨스 쉥시(charles chauncgy)주위에 모였던 합리주의자 사이에 분열되었던 뉴잉글랜드의 경우와 같이, 또는 더 최근에 전문교역 모텔에 대한 수많은 비평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상호배타적인 분열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나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앞장에서 기술한 권위의 위기 상황에서 이양자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성직자들의 권위회복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목사들이 오늘 이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에대한 신실한 해석자라고 평신도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르고 이것은 영성과 전문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며, 어느 하나를 배제하고 어느 하나를 선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인 권위와 제도적인 권위

권위에 대한 이런 관점에 또 하나의 구별이 있으며 나는 이것을 이미 암시한 바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수받는 사람의 권위를 그 안수를 통하여 가입하고, 사회적인 공인을 받은 공식작인 목사나 제사장의 직책에서 도출한 것인가? 아니면 안수받은 교역자의 권위가 자기 자신 즉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자신의 인격적인 자격이나 특성에서 도출한 것인가?

직책의 권위는 직책으로 제도화된 창설자의 카리스마나 가르침을 보존하고, 신성불가침의 전통을 보호하려는 종교집단의 관심을 반영한다. 미르시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59 : 101)는 "진정한 죄는 [신화[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가 안수받을 때에 동참하는 직책안에 제도화된 권위는, 예를들어 사도전승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진정한 죄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이다.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무모한 성경에 대한 확신은 이와 비슷한 시도이다. 권위는 사도전승의 계승자들의 안수를 통하여 제사장 직책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교회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한다.

직책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경우에, 성직자의 개인적 자질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권위는 전적으로 성직자 직책을 위임 받았다는 데에서 도출된다, 그레함 그린 (Graham Green)의 소설 힘과 영광(1946)에서 주인공은 믿음을 상실한 알콜 종두자 제사장이다,. 한번은 그가 경찰들의 눈을 피해 어느 시골 마을에 숨어 있을때에 그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몰려와 미사를 집례해주기를 요구했다. 직책의 권위 때문에 그는 자기의 말대로 "자기의 신앙의 결핍과 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4세기 도라티스트 논쟁시에 자격이 없는 제사장일지라고 접법하게 성례를 집례하면, 그의 내면의 동기가 그 성례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교회의 결정을 반영한다.

직제의 권위는 전통의 신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반면, 개인의 인격적 권위는 영성이든 전문성이든 간에 인격적인 권위가 전혀 없는 성직자가 가능하지 않게 지켜준다. 이것은 이 책에 근거하지 않고, 성직자의 인격적 자질과 성격이 성직자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도록 보장하는 인정에 근거한다. 그린의 위스키제사장은 그가 동참하게 된 제사장의 직제 때문에 성찬을 집례할 수 있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로 교회에서 시무했다면, 그는 심각 문제에 봉착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여기에 적용한다면, 교인들이 신학교를 졸업하여 갓 안수 답은 목사를 초청하여 교회를 지도하는 권위를 부여했다면(아마도 새로 교회에 부임하는 어떤 목사의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안수를 받았다는 데에 근거할 것이다. 교인들은 그 목사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교단의 증명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개인적인 성격과 자질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로서 개인적인 권위를 인정받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앞서 "제 2의 안수:(second ordination)이라고 불렀다. 이런 종류의 권위는 얻어가야 하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에 근거를 둔 권위와 전통능력에 근거를 둔 권위를 구별할때와 같이 직책의 권위와 인격적인 권위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가끔 갈등관계 있을 때가 있으며, 교단에 따라 양자중 어느 하나를 더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두가지 종류의 권위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며, 성직자가 기능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성직자의 사회참여에 관한 연구에서 해롤드 웅리(harold Quinley,1974:276-277)는 자기의 권위가 직책안에 제도화된 성직자들이 자기의 권위가 자기의 자질에 더 크게 의존하는 성직자들 보다 논쟁적인 잇슈에 더 깊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직책은 개인적 권위가 제공할 수 없는 자유를 그 직책을 가진 성직자들에게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제임스 무드(James Wood, 1981 :75이하)도 성직자가 공적인 권위(직책의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 교인들은, 자기들의 개인적으로 그 정책들과 실천들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라도, 교단과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논쟁적인 정책들과 실천들을 더 관용하여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성직자의 권위가 개인적인 자질과 관계 능력에 더 기초하는 교회와 단이 하는 것보다도 더 자기 교회나 단의 정책들을 도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민권운동이 한참일때에 남부에서 교회를 시무하던 무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사실임을 발견했다. 직책의 권위를 강조하던 교단에 있는 교회지도자들은, 교회의 인정에 자기의 권위의 기초가 있었던 우리의 동료들 보다도, 인종차별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 더 큰 제도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의 교회 교인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랬었다, 내가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 가운데 한 분은 자기가 나의 인종문제에 대한 견해에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내슈빌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내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내가 감리교단에 속했고 감리교단은 직책의 권위를 더 중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직책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위의 조화를 더 강력한 권위의 조화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우드(1981:82)가 지적한대로,"실질적으로 공인된 직책의 합법성을 중시하는 기관들은 자발적인 지원을 촉진하기 위하여 인격적인 자질에 따라 합법성을 신뢰할 수 있게 개발하고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직책의 권위와 인격적인 권위는 상호 강화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들-신성불가침의 대변자와 전문성-을 직책의 권위와 개인적 권위의 구별을 결합하여 다음의 도표와 같이 목사의 권위의 네가지 오리엔테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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