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9:27
(8)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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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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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성찰하는 지도력의 구조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 - 고전 13:12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롬 8:26

모든 목사들이 콜체스터교회 목사와 같이 그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까? 모든 목사가 다비다 크랩트리와 같이 대응할 수 있을까? 앨리슨을 상담하라면 마르다와 같이 끝나지 않을까?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 일 것이다. 목사마다 (또는 평신도마다)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여 언급할만한 가치조차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두 그렇다고 인정하기 전에, 나는 목회실천에서 이런 자명해 보이는 가정을 좀 더 깊이 고찰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나는 우리가 성찰적으로 지도하려고 할 때에 얻을 수 있는 주요 자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실천에 대한 구조주의자의 견해

기술적 합리성에 기초한 실천과 실천-성찰에 기초한 실천을 대조하면서, 도날드 쉔은 이 두 가지 실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서로 다른 현실에 대한 가정들을 대조시킨다.① 기술적 합리성은 현실에 대한 객관주의적 견해에 근거한다. 전문직업인들은 이 모델에 근거하여 현실을 파악한다. 성찰하는 지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천-성찰모델은 구조주의적 견해를 갖는다. 현실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들은 목회실천에도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는 양극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주의적 견해에서 시작하여 구조주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펙트럼을 간단히 요약적으로 이해하려면 내가 1장에서 소개한 세 사람의 야구심판을 회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심판은 "그 볼이 틀림없이 스트라이크이기 때문에 내가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서, 분명하게 객관주의적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두 번째 심판은 "내가 볼 때 그 볼이 스트라이크로 보이기 때문에 나는 스트라이크라고 선언했다"라고 함으로서, 온건한 구조주의자 또는 관점주의자에 속한다. 그러나 세 번째 심판은 "내가 그 공을 스트라이크나 볼로 선언하기까지 그 공은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아주 급진적 구조주의자를 대변한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이 양극단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자는 자기의 직업에서 실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며 전문직업인들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바로 거기에 실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발견해 내고 적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그것이 당연히 스트라이크이기 때문에 스트라이크라고 판정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실천과정에서 그들은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이 진리를 여러 가지 실천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다. 전문직업인들 사이에 서로간의 불일치가 생기면, 이 지식체계에 근거하여 판정을 내리거나 아니면 사실자체에 대한 이해를 더 정확히 하여 서로 일치한 의견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전문교육 - 의학, 법률, 신학, 또 다른 전문직 - 의 목적은 전문직을 지망하는 자들에게 현재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과학적이요 객관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목표는 자기의 전문실천의 목적 - 그것이 건강이든, 정의든, 구원이든 간에 - 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전문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전문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재는 항상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우리자신에 의하여 어느 정도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자와 그 인식의 대상은 아주 밀접하게 그리고 불가피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극단적인 구조주의자는 인식하는 자와 별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한다:"내가 그 볼을 스트라이크나 볼로 부르기 전까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재와 진리는 항상 인식자와 - 인식자가 개인이든지 또는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는 집단이든지 간에 - 종속관계에 있다.

좀 더 온건한 입장에서도 구조주의자들은 고도로 관점주의적이다: 나는 그것을 스트라이크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스트라이크로 선언한다." 우리는 상황을 볼 때 항상 특별히 유리한 위치에 서서 보며, 이것이 우리가 보는 것의 형태와 색상과 틀을 구성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틀을 감사함으로 검토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 우리 자신의 관점보다 그 일에 더 의미를 준다고 생각 할 때, 우리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도 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구조주의는 모두 1장에서 설명한 지식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전문지식과 실천도 구조적 견해에 따르면, 역시 관점적, 즉 그 상황을 보기 위하여 우리가 착용하는 안경에 따라서 다르게 구조된다. 우리는 실천의 목적에 관해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관해서 서로 다른 관점들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기본적인 가정들이나 우리가 선호하는 전통들이나 또는 다른 이론들과 발견들에 근거하여 목적이나 수단들의 공정성, 적합성, 또는 효과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은 상대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실천성찰을 해 나갈 때에,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구조들이다.

우리의 구조들은 위의 설명가운데서 암시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바 단순히 주관주의와 원자론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사회나 종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문화를 공유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교회를 포함하여 우리의 종교전통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문화를 공유한다. 이런 공유하고 있는 문화들이 우리에게 언어와 상징들을 제공하고, 우리의 세계관과 지각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서로간에 커뮤니케이트 할 수 있게 해준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보게 하고 알게 해 주는 그것들을 보고 안다.

두 번째로, 또 다른 종류의 상호작용, 즉 인식자와 인식대상간의 상호작용이 주관주의와 원자론적 인식에서 성찰하는 지도력을 구출해 준다. 진리는 인식하는자와 관계없이"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완전히 주관주의적으로 "여기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식하는 자와 인식대상의 - 그 인식대상이 또 다른 자기이든지 아니면 물질세계이든지 간에 - 사이에 있다. 영성과 교육의 관계를 쓰면서 파커 파머(Parker Palmer,1990:55f)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진리는 우리들 사이에, 즉 독립적이요 책임적이라고 이해되는 인식자들과 인식대상과 의 대화에서 발견되는 관계 속에 있다. 이 대화는 인격적 진리를 주관주의로부터 구 해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나의 지각과 욕구에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진정성 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찰적인 지도자가 행사하는 권위는 상대적으로 균형적이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또 다른 말이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성찰적인 대화 가운데서 진리가 발견된다는 상호작용에 기초한 것으로 그 대화는 그 상황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포함시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떤 방법으로 교회의 지도력에 적용할 것인가? 우리가 권위를 객관주의적으로 행사하느냐 아니면 구조주의적으로 행사하느냐 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할까? 물론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가볍게 지나가서는 안되는 잇슈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목사다. 특정한 상황들에 따라서 다르게 접근할 것이요 이것은 목회실천에서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변수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객관주의자들에게는 의미를 해석하거나 공동체를 세우거나 또는 교회의 공적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일을 하거나 상관없이 주어진 목회상황에 대응하는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다. 합리적 실천접근 방법은 목적들과 수단들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곳에 실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의 실제응답들 가운데 상당한 차이들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나쁘게 말하면 그들이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이다.

어떤 객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발견한다. 이것은 성경 무오론자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든지 그 상황에 적절한 말씀을 발견하게 하고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게 인도한다.② 또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전통에 엄격히 근거해서 진리를 발견하며, 특히 교황과 같은 최고의 권위의 무오성 또는 그 뒤에 있는 교회공의회의 무게와 같은 신앙과 실천에 속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전통 속의 진리를 주장한다. 근간의 로마카톨릭 신앙에서 일어난 중요한 고투가운데 하나는 교황 요한 바울 Ⅱ세가 로마카톨릭 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 고수하라고 촉구한 점증하는 객관주의자 입장에 대해서다.

성경문자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 전통주의자들 외에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아직도 또 다른 객관주의자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5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폴 더글라스(H,Paul Douglas)의 과학적 교인화의 개념은 교회가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에 관한 법칙들을 발견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은, 더글라스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비슷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가지 예로 어떤 목사들은 교회 컨설런트와 연구자들의 발견과 이론들을 복음의 진리와 같이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자주 어떤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예를 들어 라일 샬러(Lyle Schaller)와 같은 컨설런트의 글을 - 나는 그의 통찰을 상당히 존중하지만 -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존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중스럽게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한다.

구조주의자 - 물론 나는 성찰적인 지도자를 이 유형에 포함시킨다 - 는 목회실천상황에 대응할 최선의 한가지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덜 확신을 가지고 접근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대응책들을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상대주의적 가정을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장에서 설명한바 있는 성찰적인 지도자와 상당히 비슷하게 기능할 것이다. 우리는 4장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교역에서 도출한 기준들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확신들이 우리를 지도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이런 확신들은 성경과 여러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인 교회전통에 의하여 전달받는다. 우리는 또한 사회과학자들과 현대교회 실천연구가들의 이론들과 통찰에도 의지하고 또한 다른 상황들에서의 경험에도 의지한다. 그러나 각각의 교역상황과의 성찰적인 대화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당한 응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상황에서 자기의 복음의 이해에 충실하고, 특정한 상황의 독특한 성격과 다이나믹스에 합당한 응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한" 그런 상황에서 교역실천을 구조화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이다.

이것은 권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객관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 성경이든지, 전통이든지, 또는 과학적인 교인화든지 간에 - 한사람의 지도자로서 자기의 권위에 대한 더 안전한 기초를 갖는다. 특히 그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이나 전통이나 또는 교회실천의 법칙에 대해서 비슷한 확신을 공유할 때에 더욱 그렇다. 지도자는 단순히 성경의 장절을 인용하거나 전통을 인용하거나 또는 교역실천의 법칙을 인용하여, 이 객관적인 진리들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1장에서 논의한 이유들 때문에 그러한 객관주의적 접근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실행이 불가능하다. 권위있는 지도자는 지금도 많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도자의 권위는 기독교 존재의 비전을 형성하고 그 비전에 충실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교역상황에 합당한 대응을 구조화할 수 있도록 교역의 파트너를 돕는 능력에 있다. 그러한 상황들은 거의 단순하고 분명한 대답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구조화하기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주요 자원들 몇 가지를 고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또 하나의 교역실천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목적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역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죤은 중간정도 크기의 도시에 있는 도심지의 루터교회에 시무하고 있다. 그 도시는 부유한 교외지역과 빈곤한 도시중심 지역간의 뚜렷한 불균형으로 특성화될 수 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대략 250명으로 대부분이 중류층과 중하류층의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년이나 그 이상의 나이든 교인들이 많으며, 교외에서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도 약간 있다. 다음의 토의가 시작된 시점에서 대략 교인의 17%가 흑인들이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주변에 살고 있다.

캠퍼스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죤은 그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서 도시 목회의 가능성을 보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훈련, 전문성, 그리고 신학적 입장은 도심지에서의 교회교역에 대해서 역동적인 비전을 갖게 했으며 목사로서 자기의 역할을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나는 나 자신과 교인들이 함께 도시의 미해결의 잇슈들에 참가하고 짓밟히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희망의 틕불을 비쳐주는 기대감을 가졌다…‥"

캠퍼스 교역을 하면서 그는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과 대학교와 관련은 없지만 대학교회에 매력을 느끼고 출석하는 안정된 교인들이 연합된 교회를 경험하였다. 새로운 교회에 부임하면서, 그는 이 모델이 비유적으로 새 교회 개발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는 이 교회가 일시적인 학생교인에 비유할 수 있는 교회주위의 저임금의 교인들과 "교외에 살면서도 도심지교회의 생동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6-7개 교회를 지나서 이 교회로 출석하는 교외지역의 안정된 핵심교인들의" 혼합된 교회일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 교회에 부임한 이래 5년간에 그는 이 비전가운데 일부를 실현하였다. 그는 이 도시 안에서 두드러지고 상당히 유능한 목사로서 도시 생활의 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기관들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역할을 맡은 그를 인정하고 지원했다. 교인들은 특별히 교회에서의 설교와 예배에서의 그의 지도력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가 교회를 대표해서 그 도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흑인 부목사를 초청하자는 그의 제의를 교회가 받아들였다.

죤과 여러 목사동료들이 나눔과 지원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비공식적 조찬모임에서 죤은 자기를 고민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잇슈들을 내놓았다. 그는 도시참여교역의 대부분이 자기 개인의 사역이요, 그의 교인들의 교역이 아니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교회는 그의 노력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 교역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해서 목사가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영역의 도시생활에서의 자기의 교역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지금하고 있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내적생활의 필요들을 채우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하고 있다. 그는 소위 "하부구조들"(infrastructure)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무시해왔다. 예배당건물은 페인트칠부터 변소고치는 것까지 실질적으로 수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음악프로그램과 교회학교는 "위기상태"에 있다. 당회와 위원회들이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는데 교인들은 그러한 활동이 자기네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개발되어야 하지만, 콜체스터교회와 꼭 같은 이유로 훈련 뚺겼과 수양회에 거의 열정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특별히 중요한 새신자들에게 교회가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집중했다. 교회의 주위에 있는 이웃들 - 주로 낮은 수입의 흑인들 - 가운데서도 새신자가 약간 있었으나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일시적인 교인들에 불과했다. "그것은 마치 회전문과 같아요"하고 그는 이야기했다. 교외에서 차를 운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새신자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새신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루터교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전혀 믿음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잇슈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자기가 마치 제방을 자기 손가락으로 막은 네델란드 소년"같다고 느꼈다. 이러한 잇슈들에 필요한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도시문제에 참여하려는 자기의 헌신과 서로 충돌했다.

그 토론은 교회성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앤디"가 죤의 하부구조문제와 새신자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회성장운동의 전략을 사용하는 교회성장 아젠다의 채용을 제의했을 때에 아주 활기를 띄게 되었다. 앤디는 자기가 자기교회에 부임했을 때 자기는 교회의 교인들을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이해하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교회성장이론들과 기술들을 배워야했다. 그것들은 죤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앤디는 "이것들은 실제로 효과가 당장 나타나는 테크닉들이요, 그것을 사용하면 새신자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앤디는 죤이 걱정하는 하부구조 잇슈들을 처리해본 경험을 가진 중류계층교인들이 성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앤디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이 여러 가지 형태의 억압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교역을 배제시킬 필요는 없지만, 죤은 자기와 함께 공동으로 교역할 수 중류계층 교인들의 조직경영과 기술들이 필요하다. 앤디는 이렇게 계속 이야기한다,"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어요. 당신이 만약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요. 당신이 그것을 하지 못하면 당신은 성장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의 교역의 질을 반드시 향상시켜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 점에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 다른 것들은 진짜로 필수적입니다… 그것들은 시행할 수 있는 단순한 것들이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이 그 잇슈를 토론하는 동안에 앤디의 비전과 전략들을 통합하는데 필요한 희생이 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특별히 그는 중류층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우선적인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이런 자기감정을 토로했다,"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안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여자도 남자도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주옥과같은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영감입니다. 나는 그것이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교회의 성격을 바꾸어야하는 어떤 방향을 택하기 싫습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 가운데 약간만 소개했지만 이 토론은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죤은 약간의 교회성장이론들과 테크닉들, 그리고 다른 전략들을 사용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겠다고 동의했다. 자기의 포괄적인 교회의 비전이나 생동적인 도시교역의 비전이나 루터교회의 말씀과 성례의 중심성에 대한 그의 의식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는 또한 그가 발견한 다른 하부구조의 잇슈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의 상황을 재검토한 몇 달 후에 죤은 하부구조 잇슈들을 심각하게 강조했으며 긍정적인 몇 가지 결과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생동적인 도시교역에의 헌신이나 교회의 포괄성이나 말씀과 성례의 중심성을 희생함이 없이 이것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빌딩수리와 유지에 대한 관심집중은 교회건물유지와 외형적 매력이 도시교회에, 폴 틸리히가 말하는 상징으로서의 중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였다. 빌딩은 그 자체의 의미를 뛰어넘어서 교회가 증거하는 하나님나라의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흑인부목사 청빙의 성공은 도시복음 증거에 열매를 가져왔으며, 교회주위에 있는 수 많은 지역사회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제 죤과 그의 부목사가 도시목회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비백인교인들이 30%로 증가된 반면, 교외지역 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매력은 감소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다른 하부구조의 잇슈들과의 고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요소들

우리는 상황과의 성찰적인 대화 중에 우리의 실천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런 짧은 이야기들과 교역사례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위의 사례는 두 가지 유형의 일차적인 자원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더 좋은 명칭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을 "배경"(Background)자원과 "전경"(前景)자원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배경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더 지속적인 부분들과 배경구조를 의미한다. 그것들은 명시적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인 것들이다. 이에 반해 전경자원들은 좀 더 상황적이요 구체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좀 더 명시적으로 활동하는 것들이다.③

죤의 사례에서 배경자원은 죤 자신과 교회의 과거경험들이다. 죤은 자기가 가진 특수한 목회은사들 뿐만 아니라 아주 잘 준비되고 분명한 교역신학을 실천-성찰에 가져왔다. 그는 또한 그의 과거 경험들 - 예를 들면 켐퍼스 교역모델 - 을 가지고 왔으며, 이것은 생동하는 도시교회의 비전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자기의 새로운 역할을 구상하면서, 그는 그 교회를 자기가 원하는 교역의 씨나리오이면 무엇이든지 쓸 수 있는 백지설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그 자체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정체성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주조되고, 과거의 평신도들과 목사들에 의하여 구체화되었으며, 현재의 교인들과 컨텍스트위에 투영되는 것이다. 죤이 발견한 하부구조 잇슈들 중 몇 가지는 소수의 중류층과 중하류층의 약간 노화된 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그 교회는 그런 특성 때문에 계획과 목표설정에 반대하거나 또는 지도력개발의 공식적인 노력을 거부하였다. 그와 그의 교회는 루터파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관계와 교역이해에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새로운 교인들은 이런 배경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특별히 루터교회 전통을 가질 수 있게 해야한다. 이 교회는 또한 중소도시의 도심지교회로서 도심지교인들과 교외교인들 사이에 상당한 불균형을 노출하는 하나의 특정한 컨텍스트를 가진 교회이다. 이것도 역시 이 교회의 정체성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전경요소들도 죤과 그의 동료들간의 토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료들, 특히 앤디는 하부구조 잇슈들의 몇 가지를 처리하는 방안으로 그들 자신의 경험들과 교회성장의 여러 가지 이론들과 테크닉들에서 얻은 자원들을 제공했다. 그 자원들의 적합성을 성찰하면서, 죤은 루터교회 전통에서 받은 성경적 신학적 자원들과 통찰들을 사용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또한 교회의 교인들과 새신자 성장잠재력에 영향을 주는 교회의 사회적 컨텍스트의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한마디로 해서 배경자원들과 전경자원들은 상황에 대한 성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배경 요소들

그의 책 After Virtue 에서 알라스 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1981:194)는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배경요소들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명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묵시적으로 두 종류의 컨텍스트에 근거하여 하나의 특정한 행동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 행동의 주제가 어떠한 과거를 가졌으며 과거에 인과적으로 정리하면서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속한 배경의 역사속에서 그의 역할을 검토하고 현재 그 배경가운데서 맡고 있는 역할을 검토하면서 그의 진정한 계획을 발견한다." 우리는 계획들과 행동들은 자동적인 단위도 아니고, 주어진 상황에서 명시적으로 도출되는 자원들의 산물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복잡한 이야기들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활동하는 환경의 이야기와 우리의 개인적 이야기로 그것들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하여 생각해보자. 목사는 계속되는 교회의 드라마에서 목회적 역할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연출하는 한 사람의 배우이다. 교회의 드라마는 이 특정한 목사가 자기의 역할을 연출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그 목사가 그 장면에서 사라진 후에도 다른 목회 배우들과 함께 계속될 것이다. 그 목사가 교회에 들어올 때 각본은 목사나 교회 어느 일방의 독단으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교회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들과 목사와 교회가 각기 어떻게 드라마의 비전을 만들어 내느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지금 얽혀 있는 줄거리의 회전과 반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에 대한 한계를 지정하고 방향을 지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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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2 (2)리차드 포스트의 기도( 요약) 웹섬김이 02-21 71
3611 (1)리차드 포스트의 기도( 요약 웹섬김이 02-21 61
3610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웹섬김이 02-21 57
3609 (11)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66
3608 (10)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5
3607 (9)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5
3606 (8)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8
3605 (7)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61
3604 (6)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1
3603 (5)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45
3602 (4)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3
3601 (3)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48
3600 (2)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3
3599 (1)권위있는 목회자 (As one with Authority) 요약 웹섬김이 02-21 53
3598 트럼프, 백악관 내 ‘신앙 사무소’ 신설 웹섬김이 02-12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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