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이야기
교회의 지도력을 맡거나 어떤 형태이든 환경에서 활동하는 목사들은 역사도 없고 형체도 없는 인간으로 이 상황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평신도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각기 자기의 역사를 가지고 온다.
부분적으로 그 역사에는 명백하거나 (죤의 경우처럼) 또는 좀 더 함축적인 신학적 관점, 즉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비전이 포함된다. 여러 가지 학문적인 신학들이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특정한 순간의 목회실천을 성찰하는데 조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학문적인 훈련으로서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신앙의 관점에서 인생을 추론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의미한다.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1983:35f)는 체질(habitus)이라고 이것을 명명했다: 즉 체질화된 일종의 습관으로서의 신학, 즉 영혼의 지속적인 방향성과 능숙성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인격적 지식으로서 신앙의 삶, 자신의 인생, 그리고 교회와 자기 교역의 목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준다. 그 자체로 체질(habitas)은 단순히 목사의 전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또한 목사의 또 다른 부차적 권위의 기초인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와 연관성이 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체질이란 의미에서의 신학은 성찰적인 지도자가 참여하는 상황과의 대화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지도자의 실천목적을 결정하며, 특정한 잇슈들을 구조화하고 그 상황에서 자기의 역할을 결정하는데 기여한다. 그것은 또한 그 상황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합당한 방식들과 부적절한 방식들에 대한 한계를 설정해 준다. 우리는 체질로서 신학이 존의 우선순위 결정을 위한 성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았다. 그리고 다비다 크랩트리가 콜체스터교회의 목회실천을 구조화하고 재구조화할 때에 신학이 어떻게 그녀를 지도했으며, 앨리슨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역할을 정의하려는 마르다의 고투에 신학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았다. 그들의 하비투스(체질로서의 신학)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적용해야할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상황과 성찰적으로 대화하는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3장에서 애써 설명한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들은 내 자신의 교역비전에서 자라난 것이며, 내가 교회실천에 대하여 심사숙고한 바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한 기본적인 기독교신앙과 생활에 대한 비전이 없이는,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때에라도, 비 신학적인 교역접근을 초래한다. 다른 가치들 - 예를 들면, 성공, 성장을 위한 성장, 효과, 동질성 등 - 이 우선권을 취한다. 1장에 언급한 여러 개의 목회삽화들은 이런 문제를 반영한다: 자신은 교회가 잘되어가고 있다고 프라이드를 가졌는데 평신도들은 비전이 없고 영적인 깊이가 없다고 불평하는 교회, 회의에서 회의로 바쁘게 뛰어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고있지?" 하고 자문하는 목사 등.
자기의 하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 그것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 - 안수교역자로서 자기의 역할을 구성하는 특수한 자기의 방식이다. 구체적인 역할의 틀은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기 자신을 보며 자기의 목회를 실천하는 최우선적인 틀(구조) - 예를 들어 죤의 자기이미지는 도시목회자 - 을 가지고 있다.
사무엘 블리자드(Samuel Blizzard,1985)는 이러한 역할구조를 "통합적 역할"이라고 칭하였다. 통합적 역할이란 목표지향적인 이미지로 자기가 교인들과 교회협력자들과 지역사회집단들과 그리고 일반대중들과 전문인으로서의 관계에서 최우선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들은 목사로서 최우선적인 역할을 교회의 영적지도자로 틀을 정하고, 교인들의 영적 순례과정에서 교훈과 모범으로 교인들을 지도하고자 한다. 어떤 목사들은 자기들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말씀의 종으로 틀을 정하고 설교와 가르침을 중심으로 자기의 교역의 초점을 집중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목사로서 자기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제사장으로 생각하고 성례전적 인격으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과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에 초점을 모은다. 또 다른 목사의 최우선적인 통합적 역할은 목사 또는 목자 또는 더 최근의 용어를 사용하여 목회상담자이다. 또 다른 목사는 경영학적인 용어로 자신을 정의하여 교회개발행정가로 최우선적인 틀을 정하고 영향력이 있고 생동적인 교회기관을 개발하고 조직하며 경영하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의 최우선적인 과제를 전도자 또는 증인으로 이해하며 또 다른 이들은 자기의 최우선적인 역할로서 사회참여가요 해방자이미지를 선호한다.
블리자드는 목사마다 일반적으로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하나 이상의 통합적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통상적으로 지배적이 된다. 그것은 그 목사의 대부분의 실천 사례들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어느 목사가 상황의 틀을 구조화하는 또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하고 단지 한가지 방법을 고집하거나 또는 그가 다른 대안적인 틀을 구조화할 수 없다면 - 그들이 막다른 골목같다고 할지라도 - 그 목사는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목회실천상황을 지도할 중요한 기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죤의 동료들은 교회발전의 시각에서 자기의 역할의 틀을 구조화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목사로서의 그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히려 교회의 하부구조가 강화될 때에 교인들을 도시교역에 더 효과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역시 다양한 비 신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며 이것들은 우리의 실천구조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족의 영향들, 우리가 자라난 지역과 인종적 문화로부터 받은 영향들, 우리가 속한 사회계층이나 성별의 영향, 교육의 영향, 다른 교회들과 교역상황에서 과거에 경험한 그 경험의 영향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지식사회학이 밝히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이런 요소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들을 형성하고, 상황해석의 구조를 만들고, 그 가운데서 우리자신의 역할의 틀을 만들어 대응하는 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흑인들의 희생당함, 억압, 그리고 부정의의 경험은 그들에게 의심의 해석학을 주어서 그들의 실재와 해석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아주 깊이 그리고 당연하게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여권운동과 특히 성 차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모두 남성과 여성이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④ 이와 같이 우리는 세대차이가 행동과 실제해석 모두에 미치는 영향을 점차 깊이 인식해가고 있다. 예를 들면, 베이비 붐 세대는 대공황시기에 성장한 사람들보다 형성시기에 상당히 다른 경험들을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특정한 세대가 실제를 구조화하는 사고의 틀을 아주 다르게 만들었다.⑤
우리는 목사의 역할을 맡거나 성직자 복장을 입을 때에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로만칼라를 하든지 제네바까운을 입든지 간에 이것들이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을 뒤에 감추지 못한다. 이것들은 우리자신들 보다 더 크신 한분으로부터 우리의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회상시키는 중요한 상징이지만, 그것들이, 에릭슨의 용어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로 도망치게 놔두지 않는다(Erikson,1969:266).
요점은 이런 배경자원들을 중요치 않은 것으로 무시해서는 안되며, 그것들이 우리교역실천과 목사로서 우리의 권위에 선으로 그리고 악으로서 미치는 계속적인 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들은 우리의 실천에서 명시적이기보다는 암묵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과 그것들의 영향을 좀더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것들이 가져오는 강점들과 통찰들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조장하는 맹점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제한점들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 "네 자신을 알라"가 성찰하는 지도자에게 기본이 된다.
상황 이야기
맥킨 타이어는 두 번째 배경요소에 관심을 촉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그 상황의 이야기이다. 존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자체는 자기이 이야기를 갖는다. 교회마다 독특한 환경과 성격을 가지며,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 교회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기를 구체화시키고자 한다. 그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즉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이야기의 표현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제임스 호프웰(James Hopewell,1987:16)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교회들은 언제 어디서나 복잡한 행동들이 얽혀있는 모임이다. 각 교회는 자기교회의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 독자성 안에서 세상적인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사명을 독창적으로 육체화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자기교회문화를 존중하여 그 문화 안에서 지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이야기에는 독특한 민족적인 역사가 강하게 가미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교회생활의 중요한 사건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 교회의 과거와 현재의 성자들과 죄인들, 그리고 특별한 경험들이 또한 그런 역사를 만들어 낸다. 교회의 특별한 경험들은 서로에게와 자기들에게 당면한 도전들과 기회들에 응답하는 독특한 방식들을 만들어 낸다. 또 교회의 특성들 - 교회크기, 교인들의 나이, 교인들의 자원들, 그리고 교회 컨텍스트가 주는 요소들 - 도 역시 그 교회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사건들, 경험들, 특성들, 그리고 특색들은 교회들이 공통된 기독교 전통과 교단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우라도 서로간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교회들은 특별한 교회라는 자기 이미지와 스타일 - 예를 들면 어머니교회, 제일교회 등 - 을 가지며 다른 교회들은 덜 자랑스런 자기이미지 - "산골움막교회" - 를 갖는다. 어떤 교회는 지가 교단 명칭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 - 칼빈장로교회, 웨슬레 기념연합 감리교회.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자기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명칭에 담고 있다 - 굳건한 반석 독립침례교회, 은혜 루터교회, 불세례 오순절 성결교회. 또 다른 교회는 자기교회의 지리적 위치를 담고 있다 - 서부시장 연합감리교회. 어떤 교회는 근엄하고 격식에 따른 예배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교회는 격식이 없이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어떤 교회는 가족과 같이 서로 친밀하게 얽혀있고, 다른 교회는 같은교회 교인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개인적인 유대를 갖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갈등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처리하지만 다른 교회는 회피하고 거절하면서 숨길려고 한다.
어떤 교회는 공격적인 전도를 하지만 다른 교회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교회 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들이 먼저 이니시아티브를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정식교인이 되고자 하면, 분명한 중생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교육과 점진적인 신앙성장을 강조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돈의 청지기직과 교회재정을 영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목사가 설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그런 잇슈를 예배시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 어떤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가 사회적 잇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그러한 행동을 개인들에게 맡겨야 하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런 개인들이 행동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교회는 자기교회를 성소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쉼을 얻게 하고 새 삶을 살게 하려고 한다. 다른 교회는 행동주의적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공격적인 전도를 한다. 또 다른 교회는 사회정의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⑥ 이상의 것들은 교회가 자기를 정의하고 자기의 특성을 표현하는 수 많은 방식들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 것이다. 이런 차이들의 목록은 각 교회마다 자기자신의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기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그 교회의 현실을 구조화하는 방법, 교인들의 상황의 틀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결정한다. 이런 것들은 앨리슨의 경우와 같이 목사와 완전히 다른 대응방법을 주장하게도 한다.
지도자들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 이런 이야기의 뿌리깊은 구조들을 발견한다. 다비다 크랩트리가 평신도 교역을 활성화하려고 처음으로 시도했을 때, 그녀는 교인들이 신앙에 대한 이야기, 특히 주일예배와 월요일의 생활과의 연결문제 등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지적한대로 죤의 교회는 자기나름대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지도력훈련을 위한 수양회와 뚺겼들을 싫어했다. 이런 것들은 그 교회의 문화에 낮서른 것들이었다.
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할 때만 아니라 갈등과 위기가 발생할 때도 그 교회의 독특한 성격들이 나타난다. 대예배시에 복음송가를 부를 수 있느냐의 갈등, 예배시에 거룩한 댄스를 허용할 수 있느냐의 논쟁, 목사의 도덕적 실패문제, 교회중진이 교회에서 자기 딸의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손님들에게 술을 주겠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논쟁, 교회중진이 자살한 경우 - 이런 경우에 그 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며, 투명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 강력한 회중교회전통의 뿌리를 가진 어느 연합그리스도교회의 집사들은 전통적인 회중교회가 예배드리는 중심장소로 지정한 "예배당"에 선물로 받은 십자가를 걸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3년간 거의 정기적으로 열연 공방전을 벌여왔다. 청교도의 뿌리를 가진 회중교회의 문화를 어기면서 거기에 십자가를 걸어도 좋은가?
제임스 호프웰(James Hopewell,1987:9ff)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러한 구조들을 교회안에서 발견할 때, 그것들이 너무도 인간적인 것들이라고 당혹한다. 그 이유는 너무 성스럽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한다고 믿도록 훈련받았다.마치 신약성경의 초대교회와 같이 완벽한 교회를 오늘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에 반해서 우리는 교회안에 인간적인 성격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교회의 실패로 보고 정죄한다. 그러나 호프웰은 신약성경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안에는 인간집단의 모호성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한다,"교회는 복잡하게 얽힌 모임들이지만, 위선적인 집단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인간공동체의 직접적인 성취이다"(11).
그러므로 성찰하면서 지도하고자 하는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중의 과제를 갖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에 대하여 자기성찰을 하여야만 한다(그것이 실천상황에서 그들의 해석과 응답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교역하고 있는 환경의 이야기도 이해하여야한다(상황의 틀을 만드는 그 교회의 독특한 방식).⑦ 이 두 가지 요소들은 전경요소라기 보다는 배경요소로서 빙산의 물에 잠긴 부분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잘 고려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해야할 지도력에 견고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를 사용하면, 그것들은 좋든 나쁘든 간에 교회드라마의 계속되는 줄거리에 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전경(前景)요소들
우리가 목회실천을 구조화할 때에 전경에 속한 요소들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가 더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원들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특별히 설명이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성경과 전통, 경험으로부터 얻은 이론들과 실예들(자기 것들과 다른 삶의 경험들), 환경, 또는 컨텍스트의 요소, 그리고 상황으로부터 오는 반응들이 그것이다.
기독교 이야기: 성경과 전통
성경과 전통은 함께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양자는 기독교 이야기의 규범적인 중심으로 각 교회는 기독교 이야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나는 이미 성경과 전통 어느 것도 역사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사실 역사성은 우리의 모든 지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도 전통도 우리에게 오늘의 잇슈에 대한 대응, 방법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청사진이나 모형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충실한 목회실천과 교회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서 성경과 전통의 역할이 감소되지 않는다. 이 양자는 광범위한 상황하에서 복음에 충실하게 응답하려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투를 반영한다.
처음부터 선한 이유로 교회는 성경에 지상권(至上塯)을 주어왔다. 처음에는 히브리백성의 역사와 증거인 구약성경에, 뒤에 예수님 탄생이후 첫 100여년 동안의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와 증거인 신약성경을 묶어 기독교 경전으로 제정되었다. 고백적인 신앙에서 출발하여 교회는 신구약성경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신앙과 실천의 권위라고 일치를 보았다. 신구약성경은 이야기들과 가르침들,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자세히 얘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과 모든 피조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가장 분명히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교역실천과 인생, 그리고 오늘 교회의 언어를 평가하고 구조화하는 패턴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를 끌어당기는 천연자석이요, 출발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은 사도시대 이후 여러 세기 동안에 실천과 신앙의 새로운 구조에로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였다. 새롭고 이전과 다른 도전들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충실하려는 기독교인들의 그 이후의 고투를 기록한 전통은 또한 아주 중요한 실천을 위한 자원들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복수를 사용하여 전통들이라고 쓰고있다. 그것은 우리가 활용할 풍부한 유산들 속에는 다양하면서도 가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과 행동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⑧
목회결단에서의 성경과 전통의 역할을 논하면서, 제임스와 에벨린 화잇헤드(James and Evelyn Whitehead,1981:14)는 최근의 신학, 특히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단번에 주신 "신앙의 저장고"로 보는 과거의 정태적 탈역사적 접근에서, 성경과 그 이후의 교회의 역사에서의 전통화과정(Process of traditioning)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에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새로운 강조는 역사적이요 역동적인 접근으로 변화하는 환경에서 하나님께 충실하고자 고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형성적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찬송가 가사와 같이, "새시대는 새의무를 가르친다." 성경에 대한 (또는 전통에 대한)역사적-비평적 접근은 더 역동적인 접근을 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더 최근에, 성경과 그 이후의 교회역사연구에 사회적인 인류학적 통찰의 사용은 전통화 과정의 역동성과 신앙과 충실성의 문제로 고투하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⑨
그러므로 성경과 그 이후교회의 사상과 실제는 목회실천을 구조화하는 핵심자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인식해왔으며, 특히 우리의 설교와 교육에서 성경의 중심성을 상당히 중시해왔다. 그러나 다른 목회실천에서는 별로 그렇지 못해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국면의 실천에 꼭 같이 중요한 자원이다. 그것들은, 데이빗 켈시(David Kelsey,1975:192)의 유익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오늘의 실천의 '기독교적 적합성'을 판단하는 패턴이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가 계속하여 당면하게 될 그런 잇슈들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의 실예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가끔 우리는 그실예들을 보면서 잘못이라거나 또는 불성실했다고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실천잇슈들의 틀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응답가능성들을 판단하는 언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것들은 또한 오늘의 교역실천 잇슈에 대한 해결책을 구조화하는 경계선과 제한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천구성에 대한 우리자신의 책임의 고리를 제거해 주지는 않는다.⑩
하나님의 교회(테네시 주, 클리블랜드 시)목사의 경험으로부터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여 이것을 설명하고 싶다(Brooms,1988).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그 교회는 자기정체성을 시사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특색들을 가지고 있다: 즉 그 교회는 강력한 근본주의적 성경의 존중과 사회교역에 대해서 상당히 반대하면서 내면적인 영성생활과 개인적인 성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교회는 마약거래와 가난으로 찌든 도심지에 위치해 있다.
목회학 박사과정에 참여하면서, 그 목사는 자기교단과 더 넓은 의미의 오순절-성결운동의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그의 상상은 데이빗 모버그(David Moberg,1972)와 다른 사람들이 "대 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사로잡혔다. 즉 그것은 금세기초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악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거의 배타적으로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전환을 의미한다. 그가 오순절-성결운동의 유산들 더 많이 읽을수록, 예수님의 교역을 기록한 성경연구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교회의 경향성의 부적절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역의 구조를 너무 협소하게 만들고 있었고, 성경과 자기교단전통 모두에 불성실하였다. 결과적으로 설교와 가르침에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충성하자"는 구호아래 성찰과정에 참여하고 의식의 틀을 재구성하도록 자기교회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오순절-성결운동의 전통을 검토하고,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사회봉사요원을 초청하여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문하였다. 아주 조그만 일이지만 아주 중요한 스텝으로 교회에 음식 저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역사회의 마약퇴치운동을 지원하였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은 자기들이 서있는 성경과 전통에 관심을 모으고 교회실천을 재 구조화하고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교역실천의 자원으로서 컨텍스트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은 이 목사와 교회가 복음의 이야기와 자기교단의 유산의 빛 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원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모델들을 제시해주며, 이 모든 것은 그 목사와 그의 교회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전혀 낮서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요 자기교단의 특별한 전통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새로운 전망은 전에 불가능해 보이던 문을 열어주었다.
위의 사례에서 분명히 본 바와 같이, 성경과 교회전통은 변화의 지렛대를 제공해주며 이것은 그 교회의 정체성이나 이야기속에 명백히 드러나 있기보다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지교회는 여러 가지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더 넓은 기독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교회는 여러 가지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더 넓은 이야기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의 초점은 선택적이다. 그 목사가 거절되었거나 숨겨졌던 요소들을 자기 자신과 교회의 의식속으로 가져왔을 때, 잊어버렸던 그 이야기들이 자기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었고, 현재의 실천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체성 위에 하나님께 충실히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신학자들은 그렇게 숨은 요소들을 "그림자 전통"이라고 불렀다. 그 전통들은 명시적으로 나타난 전통에서 떨어졌거나 거절당하였거나 무시되었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의 그림자로서 아직도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들은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지레장치로서 생명공동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특히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은 여성들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그림자전통을 발견해내므로서 교회생활에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경과 그 이후 역사에 널리 스며들어 왔던 가부장제도 때문에 거절되고 무시되어 왔던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으로서 자기들의 이야기가 좀 더 넓은 기독교이야기 속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숨어있던 전통들은 그림자로부터 나와서 전통과 현재의 실천모두를 비평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지렛대를 제공해준다.
이론, 모델, 그리고 사례들
목회실천의 잇슈에 당면했을 때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수 많은 자원들 가운데 신학적인 비전과 성경과 교회전통들을 무시하면서도 통찰들, 이론들, 모델들,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사례들을 먼저 끌어들인다. 특별히 여기에는 실천신학, 사회학, 심리학, 또는 조직개발 등의 부차적인 학문들로부터 도출한 이론들, 모델들, 그리고 테크닉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실천에 적용할 수 있다고 발견한 모델들과 실천사례들, 그리고 자기가 비슷한 도전을 받았던 이전경험에서 온 해결방안들도 목회실천에 적용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목사들은 특별히 교회컨설탄트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적용한다. 병든 교회를 치료하고 살아 있는 교회로 만드는 치료책들을 나의 동료는 새로운 형태의 지혜문서라고 불렀다. 교회지도자들은 지혜문서를 성경보다도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자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좌절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실증주의와 교역에 대한 기술적 합리적 가정의 최악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죤이 교회성장에 대한 단순한 몇 가지 원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그가 고민하는 한가지 하부구조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앤디의 통찰을 무시했다면 그와 반대의 잘못이 발생했을 것이다. 오히려 죤은 자기의 기독교 이야기의 이해와 상황의 다른 요소들과의 대화속에 앤디의 통찰을 첨가하였다. 그 대화를 통하여 그는 앤디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들을 비평적으로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대응책을 만들었다.
요점은 우리의 성찰적인 대화들은 독백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대화에는 이론들과 테크닉들과 사례들뿐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와 기독교존재의 비전이 함께 참여하여야한다. 그것들은 교역실천의 중요한 자원들이다. 이런 통찰들을 통해서 특정한 실천상황을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 상황과 다른 상황들의 관련성(차이와 유사점들)을 보게하고, 기독교 이야기에 충실한 대응책들을 구성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선택에 도움을 주는 모델들과 분석의 틀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아주 빈약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환 경
현장 작업 감독자들과 그들과 함께 일하는 신학생들을 위한 뚺겼에서, 우리는 하나의 특수한 상황에 어떠한 목회가능성이 있는가를 보기 위하여 하나의 사례를 검토하였다. 토론의 한 부분으로서 나는 환경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나는 참석자들 가운데 좌절감이 팽배해 가는 것을 감지했다. 드디어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이 모든 사회학적 쓰레기들을 치워버립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를 진정한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문제에 예수님을 오게 해야지 통계나부랭이를 이야기해서 되겠습니까?" 목사 한사람도 그녀의 항의에 동조하여, 그룹원들에게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성공은 가장 맛있는 닭고기를 요리하여 팔았기 때문이지 환경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무비판적으로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적용하는 것과 같이 분석의 마비증상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학생과 목사에게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목사에게 그의 비유는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성공한 간이 음식연쇄점은 자기의 후라이드 치킨이나 햄버그를 가장 잘 팔리는 장소를 결정하기 전에 가능성있는 장소들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교회가 시장조사에 근거하여 교역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회실천이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목회실천은 목회의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제한을 주기도하는 특정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⑪ 나는 "아마도"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이유는 환경의 모든 요소가 다 교역실천의 상황마다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 분명하게 타당하냐 하는 것은 당면한 잇슈에 따라 달라진다.
환경은 시간적이다. 현재의 환경이든 과거의 환경이든지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금의 순간에 영향을 주는 한에서는 의미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은 물리적이요 인간적인 생태학이다. 그것은 개인들과 제도들과 물리적 환경과의 특색있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환경은 또한 인구통계학적이다. 그것은 인구통계, 나이, 성, 인종적 민족적 특색, 교육수준, 수입, 그리고 직업 등을 표현한다. 인구 통계학은 다시 개인들과 집단의 사회적 세계를 통합하며, 어떻게 잇슈들과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임신중절갈등에 관한 아주 뛰어난 분석에서, 크리스틴 루커(Kristin Luker,1984)는 임신중절합법화에 반대하는 행동주의자와 임신중절합법화를 찬성하는 행동주의자의 사회적 세계를 소개한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각각의 집단이 "내면적으로 응집력이 있고 상호간에 공유하는 세계관을 갖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암시적이요, 결코 완전하게 명료화하지 않으며, 더 중요하게, 반대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159). 그리고 그녀는 적대자들이 세계관을 특정한 인구통계학과 사회적 계층에 연결시킨다.
그러한 이해는 이런 잇슈들이나 그 비슷한 잇슈들이 합류하는 목회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목사를 포함해서 교회교인들은 다른 역할들과 네트워크들과 기관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들은 우리의 사회적 세계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충성을 촉구하는 교차적 압력을 행사한다. 마지막으로 또한 우리는 환경의 대안관계적 특색, 집단내부의 특색, 그리고 단체의 특색 등을 권력의 역동성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다.
요점은 이러한 컨텍스트의 요소들이 과외의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교회의 구체적 표현을 위한 배경이요, 성찰적인 지도자는 그것들을 상황과의 대화의 한 부분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상황으로부터의 반응
마지막으로 고려할 전경자원은 상황, 특히 교역에서 우리의 파트너로 일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응이다. 그런 반응의 중요성을 제5장에서 길게 검토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성찰적인 지도력은 균형적인 권위를 주창한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성찰적인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참여한 타인들을 파트너로 대우하고 자기의 자비로운 전문성의 수납자로 보지 않는다. 파트너들은 각기 상황과의 성찰적 대화에 기여할 관점과 전문성을 갖는다. 그들 각자는 목사전문가나 평신도 전문가의 그늘에 숨어 있기보다는, 상호간에 상호의존적으로 탐색하면서 대부분의 실천상황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발견한다.
칼 더들리(Carl Dudley,1987)는 자기가 부활주일에 다른 도시에 사는 부부의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여러 주일전에 요구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애기 양친가운데 한사람이 전 당회 서기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이 사실을 안 할머니는 당회소집을 급히 요구했다. 더들리는 "신학적 능변"으로 거절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응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 애가 자기의 증손녀라고 당회에 이야기했다." 당회는 투표에 들어갔다. 그들은 부활절에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달 후에, 더들리는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이 낳은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 어머니가 나아왔을 때, 나는 당회서기에게 예전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와 함께 서 주기를 요구했다,"누가 이 가족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서기가 세례 베푸는 장 소에 도착하기 전에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녀와 함께 몇 분의 친구가 일어서더니, 조 금 더 많은 사람이 일어서고, 조금 후에는 전교인들이 그 어머니와 애기와 함께 일어 섰다 (Dudley,1987:3).
이 사건은 더들리에게 감동을 주어, 몇 주일 후에, 부모없이 빈민가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대하여 설교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그 교회는 복지프로그램의 잇슈에 응답하여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일은 그 교회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목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그 할머니의 반응에서 생겨났다.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교회는 "가족"으로서 자기들의 책임을 보고 중요한 사회적 잇슈에 참여할 수 있게 활성화되었다. 성찰적 실천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그는 그녀의 증손녀의 세례의 잇슈에 대하여 자기방식으로 틀을 구조화하였으나 할머니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목사의 실천을 변화시켰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두 번째 애기의 가족의 잇슈에 대하여 다른 틀을 만들었다. 그녀의 반응은 목사와 그 교회의 새로운 응답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반응은 가끔 덜 직접적일 때가 있으나 그렇다고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니다. 다비다 크랩트리가 평신도교역을 권면할 때 보여준 교회의 반응을 회상해 보라.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도 일종의 반응이다. 교회가 보이는 미지근한 반응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녀는 그 잇슈들의 틀을 재구성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교회가 공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는 일에 반대하고 수양회와 세미나를 통하여 교인들을 훈련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는 틀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앨리슨의 저항적인 반응에 대응하려는 마르다의 노력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앨리슨의 지배욕은 마르다와 양립할 수 없는 앨리슨의 교회의 비전과 교회에서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다. 그 결과로 마르다는 앨리슨의 주장을 묵묵히 따르거나 아니면 이 정체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앨리슨의 저항뒤에서 노력할 수도 있다. 이것에 실패하면 마르다는 앨리슨의 저항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에게 하나의 자원으로서 반응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그것은 목사의 지도력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도자의 권위를 손상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도자의 독주를 버리게 만들고 상호적이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실천의 틀을 재구성하게 도와준다.
지도력의 요소들의 공동작용
성찰적인 지도자가 자기의 실천을 구조화하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조금 장황하게 소개하였는데 혹자는 어느 쪽 발을 먼저 움직일까 멈추어 생각하다가 아주 움직이지 못하게 된 속담에 나오는 지네와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실천의 구조화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본 장을 마무리지으면서 지금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다만 앞장에서 언급한 프락시스에 기초한 실천-성찰의 과정을 다시 한번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본 장에 논하는 자원들을 생각하면서 앞장을 다시 한번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짧게 그 과정을 대충 요약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의 실천을 구조화하는 최선의 한가지 길은 없지만 - 만일 있었다면 기술적 합리성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의 메타방법론, 즉 실천의 해석학이 있다. 우리는 의미를 해석하든지, 공동체를 형성하든지, 또는 공적교역능력을 배양하든지 간에 이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다. 성찰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그 잇슈와 그 잇슈에서 우리의 역할구조를 만든다;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우리는 또한 그 상황의 역동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요소가 중요한가 아니면 저 요소가 중요한가 저울질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능성있는 대응책들을 시험하면서 그 상황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적절한 해결책이 발견될 때가지 계속한다. 전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자원들, 전방자원들과 후방자원들을 그 가운데 가져온다. 명시적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인 자원인 배경자원들이 그 잇슈를 최초로 구조화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배경자원들은 또한 어떤 전방자원들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 또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전방자원들은 그 상황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에게 열려진 가능한 대응책들을 알려준다. 이 전체 성찰적인 대화는 일종의 계획적인 사고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당면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심사숙고하여야할 것은 한가지 일만이 아니다.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과 자원들도 심사숙고하고 저울질하여야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 장면 가운데서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은 실천성찰의 어려운 훈련을 피할 수 있게 해주거나 모든 다른 방법이 다 실패했을 때에 나타나는 마술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또는 우리가 실천성찰의 과정을 다 끝낸 후에 뒷처리로서 또는 일종의 하나님의 보증으로서 성령께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단계에서 성령의 질문을 제기하므로서 나는 그러한 비판을 받기 꼭 알맞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주제를 마지막까지 남겨둔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정기적인 기도와 묵상훈련은 그리스도인 삶에 결정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교역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비전이나 하비투스를 세우는데 필수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실천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식별을 하는데도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실천-성찰과정은 기도와 명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계획적으로 사고하는 실천과 성찰은 그 자체가 일종의 기도로서, 우리의 대응책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게 우리 자신을 열어준다. 우리가 실천-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제로 주입시키려하지 않고 상호의존적으로 거기에 참여하여 충실한 대응책을 찾아가는 것도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힘쓰는 그 전 과정은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장에서 제시한 일반적인 기준 자체가 그것을 시험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우리의 실천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것인가? 그 실천은 용서와 상호성과 관심에 기초한 공동체를 양성하고 있는 것인가? 그 실천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해주는 것인가? 내가 믿기로는 실천의 구체적인 현장을 이 세 가지 중에 한 두 가지에는 직접적으로 목표를 두지 않고 어느 한 가지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모두와 근본적인 연결이 있어야한다. 이것들은 내가 주장한 근본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이 세 가지의 변형이라고 할 것이다.
실천-성찰의 과정은 쉽게 않다. 그것은 훈련과 고된 노력을 요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구성한 대응책들은 항상 완전하지 못하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본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알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성찰적인 대화가운데 임재하여,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고, 우리에게 가용한 자원들을 얻을 수 있게 하며, 반응을 일으키고, 대응책을 세우고자 하는 우리들을 인도하여, 기독교의 이야기에 충실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실천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도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