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9:24
(6)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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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1  

제6장 권위있는 지도자: 성찰하는 지도력의 역동성

경영자들은 서로 독립된 하나 하나의 문제들과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문제상황들과 부딪친다. 나는 그런 상황들을 메스 (mess)라고 부른다. 문제들이란 분석을 통해서 그런 메스로부터 추출한 추상개념들이 다… 경영자들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메스를 조정하는 것이다.

-럿셀 아코프-

목사들이 의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도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고, 공적 교역을 실천할 수 있게 능력을 배양시킬 때에, 그들은 여러 가지 수준의 복잡성에 부딪친다. 어떤 잇슈들은 평범하여 어려움이나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들과 실천 테크닉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평범하고 문제성이 없는 상황들은 여기에서 나의 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초점은 더 복잡하고 보통이 아닌 잇슈들, 즉 목사들과 평신도들의 능력에 도전하고 권위의 질문을 제기하는 잇슈들이다. 우리는 조그맣고 평범한 문제들을 훨씬 많이 만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또한 우리는 럿셀 아코프(Russel Ackoff)가 메스라고 부른 복잡하고 역동적인 문제덩어리들, 제대로 규정되지도 않고, 구조화도 되지 않고, 끝이 없는 문제군들도 만난다. 10대 청소년들이 사고로 죽은 후에 의미있는 목회적 대응을 하는 것이든, 어려운 설교본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든, 예산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든, 직원들간의 갈등을 처리하는 것이든, 논쟁 중에 있는 사회적 잇슈에 어느 편을 드는 것이든 간에 - 이것들은 몇 가지 실예들에 불과하지만 - 그러한 잇슈들은 거의 평범한 상황으로 끝나지 않고 교과서적 해결도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합당한 대응방법에서도 의견일치를 보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들 가운데 한 분인 카릴 마니(Carlyle Marney)가 한번 아주 냉소적으로 이야기한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이생은 누구에게나 결코 가만히 누워 있지도 않으며 오래 있어주지도 않는다"(Kratt,1979:89).

하나님의 백성들의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해야 할 도전은 그들에게 부딪쳐오는 구체적인 메스들 가운데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메스에 대응할 자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 도전은 잘못된 위험이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 때에라도 기독교적 정체성을 존중하며 대응할 수 있는 자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의 해석자요, 공동체를 세우는 자요, 그리고 공적 교역능력을 향상시키는 자인 목사들의 특별한 도전은 개인들과 교회가 기독교적 적절성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도록 지도력의 권위를 행사라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도전에 대응하는 방법이 본 장과 나머지 2장의 주제이다. 이 3장들은 2장에서 개발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근거하였다. 특별히 2장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부차적인 목사권위의 기초들, 즉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회상해 보라. 또한 개인적인 권위와 제도상의 (직위의)권위의 구별을 회상해 보라. 나는 또한 인격적인 권위가 의미있게 중시되고 있으며 그것은 계속적인 경향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 두 가지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를 원하며, 목사가 메스의 상황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에 부딪치는 도전에 합당한 대응방법으로서 이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 필요한 전문성에 대해서 본 장과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그러한 전문성은 안수식에서 공인 받을 수 있다(직위와 권위). 그러나 그것은 실천에서 증명되어야 한다(인격적 권위). 마지막 장에서 나는 필요한 전문성이 어떻게 신성성과 관계가 있는지를 검토하겠다.

메타 교역 방법론

목사들이 권위있게 역할을 실천하려면 어떤 종류의 전문성이 필요할까? 신학교 교과과정의 구성에서 보여주는 것은 안수교역과 교회의 여러 가지 역할에 합당한 다양한 지도력 이론들과 테크닉, 그룹 다이나믹스, 성경, 신학, 교회역사, 윤리 등에 대한 실천적 지식이 목사의 전문성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나 교역상황에서 부딪치는 의미, 소속감, 능력향상에 대한 잇슈들을 건설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제들을 신학교에서 숙달한다. 이것이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고 끝날 수 있을까?

성경의 이야기들, 교회의 역사, 신학, 그리고 교역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은 배우는 것은 하나이고 이러한 자원들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실천에서 사용하며 특히 새로운 자원들을 발굴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특히 현대세계가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복잡한 실천의 "메스"에 부딪칠 때는 더욱 그렇다. 목사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전문성은 구체적인 지식과 실천에서 그 지식을 성찰하면서 활용하는 능력의 결합이다. 이 양자는 모두 필수적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교역에 대한 일종의 포괄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메타 방법론으로 목사가 활동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들과 변화하는 컨텍스트에 자기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목사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을 의미하는 말로 메타 방법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이 방법론은 예를 들어 설교, 목회상담, 그리고 갈등조정 등의 목사의 특정한 역할들과 연관된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과 테크닉들이다. 내가 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들은 그러한 메타방법론이다.

도날드 쉔(Donald Schoen,1983,1987)의 최근의 저작들에 의하면 이 메타 방법론은 "성찰적인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의 의미는 교역의 실천상황에서 복음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절하게 교회를 지도하는 능력이다. 성찰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일종의 실천의 해석학이다. 그것은 상황을 "읽는"능력이며, 상황을 읽는 동안에 복음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위하여 지식, 경험, 그리고 기술자원들을 이끌어내고 필요한 경우에는 새로운 자원들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자기와 함께 교역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뢰와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인격적 스타일과 정체성을 의미한다(나는 이것을 7장에서 성찰적인 지도력이라는 제목으로 다룰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목사들은 평신도와 상하관계의 불균형적인 방식이 아니라 파트너쉽 관계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다이나믹스를 상술하기 전에 내가 왜 메타 방법론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싶다.

신학교육에 대한 한가지 계속적인 불평은 그것이 목회현장의 "현실세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이론들은 목회현장의 구체적인 상황들과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자기들이 교실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자기들에게 부딪쳐오는 구체적인 교역의 잇슈들과 연관시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자주 불평한다. 이런 불평을 표현하는 한가지 투박스런 말은 "모든 이론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프란시스 베이컨의 철학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가상적인 행복을 위해 가상적인 법칙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높기 때문에 거의 빛을 비출 수 없는 별들과 같다"(Wood,1985:64f에서 인용).

교단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자주 이 비슷한 발언을 하는데 특히 최근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에게 불평을 토로한다, "그들은 교역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목회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들은 별로 없다. 그들은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이론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훌륭하지만 어떻게 실천에 옮길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반대로 많은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 졸업생들의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에 당황하여 고개를 흔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잘못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목회적 역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성경적 신학적 기초들을 교육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비전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교역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도 상실하지 않았는가?" 평신도들도 비슷한 불평을 하고 있다. 제1장에서 소개한 목회삽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신도들은 가끔 그룹을 지도하는 능력, 최근의 재정관리지식, 교회성장전략, 공적인 발언능력 등등에서 목사의 교역능력을 찬탄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모자라다고 느끼고 있다. 목사는 "영적인 깊이가 없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들과 잇슈들과 복음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목사는 더 광범위하고 도전적인 관점에서 예산을 사용하고, 새로운 교인들을 전도하고, 여러 가지 교회프로그램들을 만들고, 활동하게 만드는 교회의 목적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 불평들은 서로 모순이 된다: 어떤 이는 실천적인 능력이 모자란다고 불평한다. 다른 이들은 신학적 지식과 사고가 교역실천을 지도할 만큼 준비되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불평자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하나의 문제를 다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론과 실천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한 집단은 성서연구, 역사연구, 신학과 윤리학, 실천의 여러 가지 측면들에 대한 이론들을 포함하여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실제적인 교역과제수행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불평한다. 교역실천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이들은 단순히 이론-실천잇슈의 또 다른 면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단순히 목사들이 실천에서 경험을 쌓고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적용하는 법들을 발견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소망사항에 불과 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실천적 지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생동안 진흙탕을 헤메이며, 신속한 해결을 약속하는 테크닉을 찾아 여기 저기 방황한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성찰적인 지도력이다. 성경적인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마른 뼈들이 어떠한 형태를 입을 수 있는 지를 비전으로 볼 수 있는 능력과 성령께서 그 뼈다귀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능력이 부족하므로서 그들은 또한 교역실천의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력: 정밀검토

신학교육에 관한 최근의 저작에서 찰스 우드(Charles Wood,1985)는 신학교육의 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전과 식별이라는 두 가지 시각적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헬라의 시인 아킬로쿠스(Archilocus)로부터 한가지 이미지를 빌려온다:"여우는 많은 것들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만을 안다"(68). 고슴도치는 사물에 대한 응집력 있는 비전을 개발하는 능력을 비유하다. 반면에 여우는 모든 복잡한 것들 가운데서 구체적인 것을 보는 능력을 대변한다. 우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능력으로 여우의 능력을 가지든지 아니면 고슴도치의 능력을 가지든지 둘 가운데 하나이지, 두 가지 능력은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드는 한 사람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즉, 우리는 전체로서 기독교 복음을 응집력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비전), 동시에 기독교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의 성격을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다(식별)(Wood,1985:69,73).

그는 신학교육의 핵심과제가 이 두 가지 능력을 개발할 수 있게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드의 초점은 신학교육의 구조와 실제에서 비전과 식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비전과 식별이라는 그의 비유는 성찰적인 지도력의 핵심요소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익한 방법이다. 비전이 없이 우리는 교회성도들을 현상을 뛰어넘게 지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식별이 없이는, 즉 구체적인 현실상황에서 실천하는 정확한 그림이 없으면 비전은 실현될 수 없고 오히려 창조력보다 냉소주의를 더 조장시키게 될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들이 물어야 할 결정적인 질문의 의미를 정의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능력을 배양시키는 과제를 수행하려고 할 때 어떻게 비전과 식별을 함께 얻을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존재의 비전은 어떤 방법으로 구체적인 상황들과 장소를 적절하게 육체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실천의 요구에 더 가깝게 연결된 이론들을 개발하는 일일까? 그것은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는 더 좋은 테크닉을 배우는 일일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불충분한 것일까?

이런 문제들을 심사숙고하는데에 도날드 쉔의 저작은 특별히 자극제가 되고 유익하다. 쉔은 MIT 대학교의 도시연구와 교육담당교수이다. 최근에 발표한 두 권의 저서(Schoen,1983,1987)에서 그는 "성찰적인 실천"이라는 죤 듀이(John Dewey)의 초기 아이디어를 확장시키고(1933), 그것을 전문실천에 적용시켰다. 쉔은 "성찰적인 실천"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시키면서, 이론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키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들을 비평하고, 실천의 성격에 대한 건설적인 설명을 제사하였다.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은 신학교육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첫째로 나는 성찰적인 실천에 대한 쉔의 주요통찰들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것을 사용하여 두 가지 교역실천 사례를 해석 할 것이다.

성찰적인 실천가

전문인들의 실천을 광범위하게 관찰한 후 쉔은 전문직업인들의 실천에서 이론-실천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이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가정은 일종의 "기술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으로 도출된 이론과 일련의 기술들에 하나의 표준체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직업인들이 실제문제에 부딪칠 때, 그들은 분명한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이런 이론들과 테크닉들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있어 그 목적은 건강이요, 변호사에게는 성공적인 법정소송이요, 사업경영자에게는 이익이다(쉔,1987:33).

이런 기술적 합리성모델이 목사의 직에 적용될 때, 그것은 다른 전문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향하는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학문적 규범에 따라서 엄격한 학문성을 갖춘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신학교로 간다. 예를 들면, 성경과 성서비평에 근거한 원리들, 교회역사, 신학과 윤리학 등의 지식을 배우고, 교역실천의 기술들을 배우러 신학교에 다닌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이론들을 적용하는데 필요한 방법들과 기술들을 배운다. 예를 들면, 설교 또는 상담의 기술, 또는 교회성장의 테크닉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운이 따른다면 그것을 개인구원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든지 또는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라고 정의하든지 간에 교역의 목적 또는 목표에 대한 비전을 개발할 것이다. 졸업에 즈음하여, 우리는 지교회나 다른 교역상황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잇슈들,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과 테크닉을 적용하여 성공적으로 목회 할 수 있을 것이며, 공식적인 계속교육과정을 통해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들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 개발되는 실천이론들과 기술들을 보충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권위는 우리가 가진 - 그러나 평신도는 갖지 못한 - 전문성에 있으며, 교역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학과 이론들을 적용할 때 권위는 저절로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이 예를 들어 의학이론들보다 덜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교역실천의 목표에 대한 정확한 의미 - 예를 들면 구원이든지 해방이든지 - 도 역시 건강의 경우에서보다도 더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목사가 주어진 상황에 실제로 적용하려는 수단들은 더욱 논쟁의 소지가 많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사의 실천에서도 일반적으로 기술적 합리성의 모델에 유사한 '이론에서 실천에로'의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참으로 19세기말에 시작된 교역의 전문화와 신학교육에 대한 강조는 신학교육을 교역실천의 요구들과 더 밀접하게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더 기술적으로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수단들을 목적에 맞추므로서 더 과학적이 되게 하려고 했다.⸂ 폴 더글라스(H.Paul Dougas)는, 20세기초의 중요한 교회생활 사회학자로, "과학적인 교인화"의 개발을 촉구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누구나 교회와 목사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과학적으로 결정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전문직들도 그 당시에 더 과학적이요, 더 기술적으로 합리적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쉔의 저작들은 이러한 전문교육 실천모델들과 그것에 근거한 전문적인 권위에 대한 가정에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전문직들과 전문학교들이 자기 회원들에게 깊이 있게 가르치고자했던 가치들과 규범들의 중요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합당한 전문직의 실천행동을 지도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또한 쉔은 꼭 배우지 않으면 안될 전문지식의 실체 - 이론들과 테크닉들 - 의 중요성도 거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도전한 것은 가치나 규범 - 나의 용어로 비전요소 - 이나 또는 이론들과 테크닉들이 기술적 합리성의 방법으로 구체적인 사례의 실천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오히려 그는 전문직업인들이 부딛치는 실천문제들 중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부분들이 평범한 것이 아닌 것들로 불확실성, 불안정, 유일성, 그리고 목적과 합당한 수단들에 대한 가치갈등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는 실천에 대한 기술적 합리성의 가정들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론들을 적용하는 한 가지 최선의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천의 목적(들)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쉔은 전문직업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안정된 교과서적 해결책이 통하지 않는 "메스들을 조정하면서" 보낸다는 아코프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실천의 수단뿐 아니라 목적까지도 불분명하다. 그 상황과 성찰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만 그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교회에 대한 상황적 관점은 앞서(4장) 언급한 바 있다. 거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씨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거기에서 교역실천에 대한 교과서적 해결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 하나의 교역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최선의 방법은 없다. 어떤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냐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려는 노력가운데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원들과 관점들을 종합해 나가는 성찰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일들이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행위는 필수적이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화하는 암시를 발견한다.

나날의 삶을 성찰하면서 그리고 특히 전문직업인들의 실천을 관찰하면서 쉔은 유능한 직업인들이 실제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적인 실천모델을 제안하였다. 그는 또한 성찰적인 실천모델을 사용하는 전문교육 접근방법을 제안하였다. 쉔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통상적인 상황들을 제외했을 때 전문인들은 "행동과 성찰"(reflection-in-action)이라고 부르는 과정, 즉 전문가의 입장에서 예술적 기교와 직관에 상당한 양의 시간들을 투여하고 있다. 이론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행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아는 복잡한 방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유능한 전문인들은 특별하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면, 그것들을 교과서적 사례로 취급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할 특수한 상황으로 보고 처리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치와 최초에 파악한 대로 그 문제를 둘러싼 상황들에 상응하여 그 문제의 틀과 그 문제에서 자기들의 역할의 틀을 만들면서 시작한다. 즉, 그들은 관점에 따라 한 부분씩 차근차근 틀에 맞추어 나가면서 그 문제에 대한 최초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 문제가 자기네들이 경험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나 경험에서 발견하는 다른 문제들과 유사한지를 묻기도 한다. 그것은 이것과 같은가? 아니면 저것과 더 유사한가? 그러나 그 잇슈에 대한 최초의 틀을 포함해서 그 문제를 검토하면서 사용하는 '행동하면서 깨달아가는 방법'은 쉔(Michael Polany:(1958)을 이어서)이 "암묵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는 얼굴을 인식하거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에 하는 것과 같이 간접적인 추론이 없이 은연중에 깨달아 아는 지식이다.

암묵적 지식과 추론적 지식들을 모두 사용하여, 성찰적인 실천가들은 상황을 경험하면서 최초에 내린 해석이 암시하는 문제에 대응하려고 몇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쉔은 이것을 "골격만들기 실험과제"(frame experiment)라 부른다. 그것은 탐험적인 시도일 수도 있다. 성공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나 기대없이 그 상황에 파고 들어가는 탐험작업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을 탐구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해낼 수 있다면 탐험적 시도는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Schoen,1983:145). 그것은 마음가운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신중하게 시험하는 시험추진(move-testing)실험일 수도 있다. 이 때에 기대하던 목적이 나오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실패한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이 생겨날 때가 자주 있는데, 그것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 저러한 대응책들을 시험하면서 더 효과적인 대응책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대응책이 자기의 목표에 가장 효과적일까를 결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과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실험과제들을 실천하고 성찰하면서(reflect-in-action), 성찰적인 실천가들은 여러 가지 대응책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선택한 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갈 수 있다. 특히 무언가 될 것 같을 때 그렇게 한다. 그들은 다른 해결책들을 시험하면서 그 문제와의 관련성을 평가한다. 또는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처음의 이해를 재평가하고 그 문제의 틀을 재구성하고 또 다른 즉석 실험을 할 수도 있다. 틀을 구성하고 실험하고, 틀을 재구성하고 다시 실험하는 과정은 어떤 해결책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현재로 이 문제는 처리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그 과정의 성공과 실패는 전문가의 경험과 암묵적인 지식의 일부가 되며 이것은 미래 실천의 본보기가 된다. 잇슈에 따라서 실천-성찰의 연속성은 단번으로 끝날 수도 있고 더 많은 시간과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다음은 쉔이 관찰한 이 과정의 요약이다:

하나 하나의 경우마다, 전문인들은 불확실한 것들이나 독특한 것들을 발견하면 놀라 거나 의문에 빠지거나 혼란을 경험한다. 그는 자기 앞에 당면한 현상들과 자기 행위 에 암시된 전 이해들을 성찰한다. 그는 시험을 하면서 그 상황에 새로운 이해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상황의 변화를 창출하려고 한다.

누군가 '실천-성찰'에 참여한다면 그는 실천의 컨텍스트의 연구자가 된다. 그는 이 미 확증된 이론과 테크닉의 범주에 의지하지 않고 그 독특한 사례에 대한 새로운 이 론을 창출한다. 그의 탐구는 이미 동의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들을 연구하는 데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수단들과 목적들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자기가 만든 문제상 황의 틀에 따라 이 양자를 대화식으로 정의한다. 그는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나누지 않는다. 그는 결정방법을 추론하면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가 지금 시험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실천행동이기 때문에, 실행은 그 탐구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불확실하거나 독특한 상황에서까지도 실천성찰은 계속 진 행된다. 그 이유는 이 방법이 기술적 합리성처럼 양분된 이중구조가 아니기 때문이 다.

나는 쉔이 설명하는 방법론의 여러 측면들을 실예로 보여 주기 위하여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성찰적 실천에 대하여 두 가지 점들을 첨가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찰적 실천의 과정은 그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여러 전문직업들 사이에 충분한 유사성이 있지만, 쉔은 성찰적인 전문인들이 같은 문제에 접근할 때에도 직업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직업 안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쉔의 주장에 따르면(Schoen,1983:274ff), 그 차이들은 전문인들이 실천성찰에 가지고 들어오는 적어도 네 가지 요소들의 차이들 때문이다:

전문인들이 실재를 설명하고 자기들의 실험을 수행하는 매체, 언어, 그리고 레파토리 의 차이들(예, 건축가는 스케치 페드를 사용하고, 엔지니어들은 모델들과 실험도면을 사용하고, 목사나 사회봉사직들은 대화와 상호관계를 사용하고 있다);

전문인들이 그 상황과 정찰적인 대화에 가지고 오며, 그 상황의 틀을 만들기 위해 서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합당한 목적과 수단의 한계를 정하며, 결과를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가치들(쉔은 이것을 "식별 체계"라고 함)의 차이들;

전문직업인들이 현상들에 의미를 만들어가는 포괄적인 이론들의 차이(이론들은 문 제들에 구체적인 해결을 제공하지 않고 그 문제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언어를 제공한 다);

자기들의 과제들을 설정한 역할 구조들의 차이

첫 번째 차이는 우선적으로 직업들간의 차이에서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같은 직업 안에서의 차이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성찰적인 지도력의 비전화 차원과도 중요한 관계다 있다. 참으로 전문인으로서 목사의 가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비전과 교회의 목적의 이해를 형성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첨가하여, 목사가 배운 지식과 이론들 - 성경과 전통, 신학연구, 사회과학들과 다른 여러 가지로부터 얻은 것들 - 은 그가 당면하고 있는 현상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언어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자기의 최우선적인 과제 - 예를 들면, 전도자, 예언자, 교사, 목회자, 또는 행정가로서 - 를 어떻게 구성하느냐하는 점은 교회의 비전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실천-성찰이나 식별에 참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나는 이 잇슈를 다음 장에 다시 다룰 것이다.

쉔이 지적한 또 다른 요점은 관계적 차원에서의 권위의 적절성이다. 성찰적으로 일하는 전문인들을 관찰한 바에 따라, 그는 성찰적인 전문인들의 권위가 전통적인 전문가 권위 모델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찰적인 전문가들도 권위를 가지지만 그 권위는 전문인들의 전문성을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가 아니다. 오히려 전문인과 고객(목사들은 고객을 교회성도들로 읽으라)이 "성찰적인 계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Schoen,1983:298f). 그들은 함께 참여하여 고객이 당면한 잇슈들을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고객은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전문인과 함께 직면하고, 효과적으로 판단하기 위하여 기준을 공적으로 만들며, 적절한 성취를 지원하고, 보상하고, 표현하기로 동의한다. 전문인은 자기가 가진 특수한 지식과 성찰적인 전문성을 그 관계에 가져오며, 고객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한다. 전문인과 고객 쌍방은 상대방을 종속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통찰과 은사들과 성찰능력을 그 상황에 가져오는 사람으로 존중한다. 전문인들은 고객의 질문과 비판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들의 권면과 상담의 의미를 공적으로 성찰하려고 기꺼이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쉔이 지적한 대로 (1983:299),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성찰적인 전문인은 무조건적인 권위의 보상, 즉 자기의 능력에 도전 받지 않고 실천 하는 자유, 상대적이지만 취약성이 없다는 위로, 복종의 기쁨 등을 포기한다. 그에게 열려진 새로운 만족은 대체로 고객에게 해준 자기의 충고의 의미, 자기의 실천적인 지식,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발견에서 온다.

간단히 말해서, 성찰적인 실천가는 지금까지 비난받아 온 전문모델인 불균형적인 권위관계를 상대적이긴 하지만 균형적인 모델로 바꾸어서, 실천상황의 메스 잇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당한 상호존중과 나눔과 합심노력을 행사한다.

이제 위에서 설명한 약간 추상적인 토의를 교역실천의 두 가지 구체적인 실예를 사용하여 지상으로 가져가 보자.

다시한번 콜체스터 교회의 실예를 사용하자.

앞장에서 소개했던 콜체스터 교회를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그 교회는 특별히 비전과 식별의 상호작용의 좋은 실례일 뿐 아니라 실천-성찰의 많은 특성들을 교역상황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비다 크렙트리가 콜체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았을 때에, 그녀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을 강조하는 교회의 비전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기술적 합리성의 모델을 사용했다면, 그녀의 첫 번째 단계는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들을 발견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워싱턴 DC에 소재한 구세주 교회의 모델과 같은 평신도 교역 활성화 모델을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콜체스터 교회에 그대로 본 받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많은 목사들은 최근에 나온 교회성장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배워서 곧바로 그것을 자기교회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시작했다면, 구세주 교회나 또는 다른 뛰어난 교회의 모델을 자기 교회상황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던 많은 교회들처럼, 그녀도 아마 아주 고약하게 실패했을 것이다. 공동교역을 해야 한다는 그녀의 비전과 콜체스터 교회의 실제상황은 새로운 교회에 부임했을 때 대부분의 목사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 과정은 매우 느리지만, 그녀는 실천-성찰의 방법론에 아주 가까운 과정을 택하고 문제의 틀을 구성하고 다시 구성하는 여러차례의 절차들을 사용했다.

첫 몇 달 동안에 그녀는 쉔이 이야기하는 탐구적 실험과정에 가까운 일들을 했다. 그녀는 교회와 그 지역의 평신도들을 이해하고, 가능성이 있는 출발지점을 찾아보고, 그 비전을 실현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애물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요약하면, 그녀는 콜체스터 교회에 적절하게 공동교역을 실천하려고 할 때에 그녀와 교회가 직면하게 될 문제의 틀을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비전의 실현은 가능한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비전은 다만 목사의 소망 사망에 불과한 것일까?

예를 들어, 그녀는 이전에 있었던 교회의 분쟁으로 교회가 갈라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서 좀 더 복음적인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남아있는 교인들은 누구에게든지 상처를 입힐까 보아서 신앙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농사를 짓거나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는 나이 많고 오래된 교인들로부터 인근도시의 생산직 근로자나 경영자로 일하는 젊고 새로운 교인들까지 다양한 수준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서로 대조적인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은 처지였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다른 많은 교회들과 같이 콜체스터 교회도 자기들의 직장생활을 포함해서 공적생활에 개입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초기의 교회의 반응조사는 그녀가 교회를 지도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잇슈의 틀을 구성하기 위한 그녀의 처음 노력들은 그녀와 그녀의 공동교역의 비전을 지지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프로그램식 대응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평신도 교역에 대한 설교,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은사의 발견" 이라는 주제의 수양회, 그리고 평신도교역에 대한 컨퍼런스 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아이디어들과 재료들 중 얼마는 과거의 경험과 평신도교역의 잇슈들을 다룬 다른 사람들의 재료들이었다. 처음에 교인들 중 상당부분에게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여러 지점에서 저항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시 성찰하면서 그 잇슈에 관한 틀을 재구성하여야 했다. 그녀는 수양회와 컨퍼런스가 중류층과 경영스타일의 교인들에게 더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양회와 컨퍼런스로는 중하류게층과 근로자들에 덜 효과적이며 이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그 프로그램들에 벌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로 목사와 그녀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은 새로운 전략들을 세웠다. 그 결과로 목사와 그녀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은 새로운 전략들을 세웠다. 여기에는 청취팀 운영, 언약그룹, 교인들의 직업현장에 목사가 찾아가는 "그림자 전략", 신앙과 매일의 삶을 연결시키는 계획적인 주일 예배시간운용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전략들이 열매를 맺었지만, 그녀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더 깊은 문제를 깨닫고, 그 잇슈에 대한 또 새로운 틀을 구성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여려가지 프로그램들에 새로이 첨가시켜야 할 것들, 즉 보통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첨가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지속적인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것들을 제도화시켜야만 했다. 새로운 제도화는 곧바로 끝나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교회운영에 있어서 교인들의 은사와 자원들을 사용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구조보다도 "교회로 들어오는"구조인 모이는 교회구조를 더 크게 강조하여야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러므로 새로이 그 잇슈의 틀을 재구성하면서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그 상황이 단순히 새로운 프로그렘을 개발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그 비전을 지원할 수 있게 구조들과 과정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 이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의 새로운 경영구조를 개발하고 실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목사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모두가 실천성찰을 계속해 나가는 지속적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 외부의 컨설탄트를 사용하여 그들의 비전실현이 어느 정도까지 와 있으며 다음 과정을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인가를 평가하는 것을 포함한다.

성찰적인 지도력에 대한 이 구체적인 실예는 여러 해의 기간을 거쳐 일어났다. 그러나 성찰적인 지도력의 모델은 또한 훨씬 시간제한을 받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목회 상담기간, 당회나 위원회의 중에 일어나는 잇슈, 매 주 해야하는 설교작성과 같이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과제들에도 이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 소요는 콜체스터 교회에서보다 훨씬 짧지만, 실천성찰을 통해 행사되는 기본적인 권위의 활용은 거의 비슷하다. 콜체스터 교회의 사례와 달리,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다음의 사례는 단기간에 시행되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 교인과의 좌절감을 안겨 준 만남

이 사례는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는 교인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어떻게 실천성찰의 모델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그 목사의 사례 재구성에서 그녀는 아기리스와 쉔(Argyris & Schon, 1974:41)이 제안한 실천사례 성찰방법을 사용했다.⸄ "마르다"목사는 큰 도시에 있는 오래되고 명성있는 미국연합 그리스도교회의 담임목사이다. 다른 도시교회가 경험하는 것처럼 상당한 교인 감소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 교회는 사회정의의 잇슈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그 활동을 하고 있다. 그 교회는 또한 교역과 선교를 지원하기 위한 상당한 기본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대화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교회는 교회의 기본재산의 투자를 감독하는 재정위원회에게 투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 교회의 입장을 보고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남아프리카와 방위비지원 잇슈에 대하여 이것을 요구하였다. 그 위원회의 의장인 "앨리슨"은 나이 많은 여인으로 또 다른 동년배와 한 사람과 함께 그 위원회에 오랜 동안 참여해왔다. 그녀는 교회의 요구를 처리하는 일에 반대하고 투자회수에 중요한 의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앨리슨과 마르다는 그녀가 그 교회목사로 시무해 온 2년 반 동안에 순탄치 않는 관계를 가져왔다. 앨리슨은 마르다가 그 교회의 청빙을 받을 때 그녀를 후보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었고, 투자회수잇슈 이전에도 이 둘 사이에 다른 갈등들이 있어왔다.

앨리슨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살고있고 교회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거동이 불편한 앨리슨에게 편의를 도모하려고 모든 다른 회의는 교회에서 했으나 재정위원회만은 앨리슨의 아파트에서 모였다. 그 아파트는 좁고 어둡고 너무 더웠다. 충분한 의자들도 없었다. 위원들 중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그 모임의 환경이 불편하고, 앨리슨 혼자 독주하는 지리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가끔 적대적인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목사에게 털어놓았다. 마르다는 이런 태도를 들었으나 그녀자신도 양극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앨리슨과 더 긍정적 관계를 맺고 싶었고 교회가 고민을 더하게 하는 제도가 아니라 위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그녀를 잘 섬기고 싶었다.

재정위원회가 모이는 날, 마르다는 자기 스케쥴이 중복되어서 그 회의에 출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 딜레마를 알려주려고 앨리슨에게 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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