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9:00
(5)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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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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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교회지도력의 중심과제들

교역은 끊임없이 변화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특별한 관심과 관계가 있다.

-에드워드 쉴레베크-

본 장의 초점은 교회지도력의 핵심과제들에 관한 것이다.⸁ 누구든지 교회지도력의 권위를 재고하거나 시정하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이 수행하여야 할 과제들을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목적은 "성찰적인 실천가"로서 지도자가 해야할 핵심과제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찰적인 실천가"는 다음 장들에서 상술하게 될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제1차적인 과제: 기독교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

제4장에서 우리는 여러 다른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합당한 형태와 표현으로 말씀의 계속적인 성육화라고 교회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동일성을 시사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Barth,1962:739)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교회의㈝ 사회학은 어디에서도 존재한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이든지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것을 미리 배제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은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하에서 공동체의 기독교적 정체성의 보존을 위한 특별관심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에드워드 쉴레베크의 교회지도력의 제1차적인 과제에 대한 간결하고도 유익한 설명이다. 나는 "기독교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용어보다는 기독교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것은 더 역동성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현재의 존재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과정가운데 있는 교회의 정체성도 의미한다. 어떻든지 간에 1차적인 과제는 서로 다른 변화하는 컨텍스트에 합당한 방법으로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때 특정한 지교회의 문화와 정체성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룰 것이다. 사람들은 그 교회의 독특한 문화를 "읽고", 그것을 존중하며,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교회를 지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안수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일차적인 과제는 그 교회의 특정한 문화와 컨텍스트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그 교회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회중이 교회가 되도록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의 특정한 정체성은 또한 그 교회의 기독교 정체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핵심과제의 여러 가지 측면들

지도력에 관한 중요한 연구에서 필龼 셀즈니크(Philip Selznick,1957)는 3중의 지도자의 과제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기관의 사명과 역할을 규정하는 것, 그 목적을 기관의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리고 기관과 기관의 회원들에게 안으로부터 그리고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에 직면하여 자기들의 독특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이 세 가지 지도력의 요소는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전하는 제일차적인 과제의 여러 다른 차원들을 지적해 준다. 이것들은 또한 앞장에서 설명한 교회의 기능적 범주들, 즉 의미, 소속감, 그리고 능력배양과 병행하여 재설정할 수도 있다. 이 범주를 사용하여 다시 설명하면, 지도력의 과제는 첫째, 의미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을 명료화하는 것이요, 두 번째, 공동체 형성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관의 구조들과 관계들을 세우는 것이요, 세 번째, 교회의 공적 교역의 지원으로 교회와 교인들을 도와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능들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는 한 가지 단일 과제를 세 가지로 상호 연계시켜 설명한 것이다. 이것들은 다이아몬드를 짤라낸 면에 비유하여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하나이지만, 그 다이아몬드를 바라볼 수 있는 면들이 여러 개 있다. 각 면에서 독자적인 각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전체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나의 면은 완전하게 그 다이아몬드에 속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지도력의 기능 하나 하나는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의 핵심적인 교역의 과제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삶 속에서 그것들 하나 하나를 따로 분리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도력 특히 목사의 지도력을 특성화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할 때에, 전통적인 역할설명이 - 가끔 서로 분리되고 연결되지 않는 과제들처럼 설명하므로 - 애매하여 불분명하던 것을, 새롭게 연결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 세 측면들을 하나 하나 설명하고 실예를 통하여 그것들의 의미와 상호의존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의미 해석

첫째로, 목사의 기능은 의미의 해석자이다. 목사가 구체적인 목회를 통하여 수행하는 것들 - 설교,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일, 교육, 상담, 조직의 지도력 - 의 대부분은 교회와 교인들을 도와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보여 준 하나님의 목적의 빛 안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기들의 삶을 성찰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들은 희망, 두려움, 좌절, 실망, 도덕적인 딜레마, 인생의 변화, 그리고 인생의 위기에 부딛치며, 그때마다 우리는 궁극적인 인생의 의미와 함께 의미의 문제에 부딛치게 된다. 인생의 전기들 - 자녀탄생, 사춘기, 결혼, 이혼, 퇴직, 죽음 등 - 도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순간들이며, 새롭고 가끔은 예기치 않은 경험으로 의미의 구조를 깨뜨려 버리려고 위협한다.

교회도 의미의 위기들을 경험한다. 미래에 대한 결정, 특정한 프로그램에 대한 갈등, 제한된 자원들 사용하는 방법문제의 딜레마, 대인관계 및 집단간의 갈등, 그 외에 수 많은 그런 잇슈들이 생겨나 성찰과 해석과 결단을 촉구한다.

목회과제는 이런 경험을 하는 개인들이나 집단 유기체로서의 교회회중들 곁에 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위기와 마주설 수 있게 도우며, 복음의 빛 안에서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이 이런 경험들을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며, 복음 안에서 그 경험들을 조직하고 재조직(reframing)하여 기독교적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그 경험에 대응하도록 협력한다.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목회과제는 교인들에게 전통의 상징들을 열어주어서 그 상징들 속에 숨겨진 의미로 구체적이요, 가끔은 개인적, 사회적인 생활을 위협하는잇슈들을 신선하고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조명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의 실예를 제공해 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굉장히 혼란스런 경험이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자들(예,Festinger,1957)이 인식부조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의미의 위기로 우리의 기대들 또는 신념들이 모순과 같이 보이는 객관적인 사건들이나 다른 신념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을 때에 생겨난다.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요, 하나님의 약함이로되 세상의 지혜보다 더욱 지혜롭다는 바울의 재해석(reframing)과 기독교 경험의 중심상징으로서 십자가 - 부활 주제의 사용은 의미해석의 강력한 실예이다. 이런 의미해석은 초대교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즐거워할 수 있게 했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앙 안에서 자기들의 삶의 경험들을 재조직하여 사명에 헌신할 수 있는 힘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우리는 진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가르침과 상징들이 불분명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접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 소년이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그 학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이런 편지를 집으로 보낸 것과 같다,"그 예배당은 하나님의 시대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그림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멋진 스테인 글라스로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자주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들과 상징들이 "하나님의 시대"에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존중하여 모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식별해 내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다. 장로교 목사로서 웰레이스 알스톤(Waldce Alston,1970)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의 언어들을 부활이 없는 죽음으로 보내고 있다."

목사인 우리들도 그러한 식별이 어려움을 발견한다. 토마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소설 Three Cheers for the Paraclete(1968:119-120)에서, 한사람의 제사장은 설교의 말씀들과 기도들과 예전이 신성을 빼앗긴 성체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걱정한다, "자기 속에 잘못이 있는 것일까?" 케닐리의 제사장은 직접적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간접적으로 정통을 위하여 정통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대답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목사의 권위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목사가 전통의 언어들을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권위있게 설교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설교준비를 하면서 설교본문 옆에 "이것은 취약점, 지옥같이 소리지르라"고 표시한대로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칠지라도 그 설교는 권위가 없을 것이다. 알스톤(1970:4)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필요한 것은 목사들이 갈등으로 가득한 지교회에 기꺼이 머물면서, 교회의 전통에 충 실할 뿐 아니라, 현금의 순간의 역사적 정황에도 합당한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를 위 해 씨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추어 정신과의사나 아마추어 사회학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기꺼이 거절하고 자기들이 훈련을 받은 대로 안수 받을 때에 위임받은 대로, 즉, 믿음의 공동체인 지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신학자가 되려고 하는 목사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의미해석자 또는 신학자로서의 목사의 역할을 중요시하지 아니하는 시대를 거쳐 왔다. 신학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교과목 가운데서 실천적인 과목들을 선택하지 않고 실천을 뒷받침하는 기초과목들을 거절한다고 불평한다. 동시에 어떤 신학교들은 설교학을 선택과목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의미해석무시를 조장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의 목사계속교육은 교회운영을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개발을 포함하여 목사의 해석적인 역할보다는 조직개발과 갈등조정에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 평신도들은 자기들의 삶에 대한 신앙의 의미를 분별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갈망하며 계속하여 신호를 보내고 있다. 거듭되는 지교회 연구조사에서 교인들은 교회가 자기들의, 영적인 삶을 깊이 있게 하는데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희망(그리고 그 희망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최근의 전국적인 연구조사에서, 천주교회들과 개신교회들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꼭 같은 잇슈들에 대한 현재의 성직자지도력에 비슷한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Hoge, Carrol, and Scheets,1989). “자기들의 영적인 삶을 깊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의 것들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 그것은 평신도들의 기대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들의 목사가 그들의 자신의 이야기들 -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교회의 이야기들 - 을 자기들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수 있게 기독교신앙의 이야기들과 상징들과 연결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목사가 알스톤이 이야기하는 바대로 교회회중을 위한 신학자가 되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는 초기 뉴잉글랜드 교회생활에서 유래한 관행으로 이런 기대를 상징화한다. 그것은 평신도가 성찬상에서 성경을 취하여 설교시간에 목사에게 그것을 드리는 관행이다. 설교가 끝나면 목사는 성경을 회중들에게 돌려주고, 그것을 다시 성찬상 위에 놓게 한다. 우리가 이런 관행을 통하여, 상징하는 것은 우리는 말씀의 권위아래서 살고 있으며, 우리는 목사에게 그 말씀을 해석해 주도록 요구하며, 성만찬에서 빵을 쪼개는 것처럼 목사는 전통을 쪼개어 그 속에서 우리의 경험들에 의미를 제공해주는, 진리를 해석해 줄 것에 대한 확신이다. 그 성경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끝내고 우리에게 교역을 행하도록 부르시는 그 여러 현장으로 흩어져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성을 우리에게 회상시켜 주는 것이다. 목사도 교회회중들도 항상 그 예전의 기대를 따라서 완전히 성공적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을 주일마다 기억나게 해주는 강력한 권면이다.

의미해석은 마치 일차적으로 언어적이요 인식적인 일이라고 들리겠지만, 사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은 추론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 즉 우리는 느끼고, 보고 냄새맡고, 듣는 등의 일을 한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고 개념화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어려움을 느낀다. 아나 파블로바에게 어떤 질문자가 "당신이 춤출 때 무엇을 이야기합니까?"하는 질문에 대답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내가 만약 그 대답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춤을 추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파블로바의 대답을 반영하면서 오린 클鲜(Orin Klapp,1969:19-20)은 이것과 또다른 비추론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비술"(mystique)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사람이 말로 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깨달아 아는 전체의미이다. 교회가 하는 대부분의 의미해석은 이와 같이 비추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배를 통해서, 음악에서, 성례전에서, 예배장소의 상징에서, 교회예산의 우선 순위결정에서 상징화되는 것들에서, 친교시간의 커피와 도우넛에서, 상을 당한 가족을 찾아가 묵묵히 함께 앉아 주는 데에서 우리는 항상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자로서 행동하면서, 목사들은 내가 제2장에서 문화적(사회적인 것과 구별하여)권위라고 부른 것을 행사한다. 그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방법을 통제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실재에 대한 정의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다. 목사는 불일치를 다룰 수 있게 도와주며, 이런 자원들과 그들의 경험사이에 연결을 지어주려고 한다. 그 언어와 상징과 예전과 믿음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되며, 그들의 경험들은 새로운 가능성들과 새로운 희망에 열려지게 된다.

공동체 형성

교회는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는 소속공동체로 고독과 고립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다른 사람들과 돌봄과 자원의 관계를 맺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나누게 하는 곳이다. 교회는 기독교생활의 덕으로 교인들을 양육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런 공동체생활의 특성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통치의 표지로서 정의와 화해의 의미를 증거한다. 이것은 두 번째 지도력의 과제, 즉 공동체형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 과제와 의미해석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각각의 과제는 서로 강화하면서 기독교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복음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과 윤곽을 정의하도록 돕는다. 복음의 의미는 친교를 제공하며, 돌봄과 지원을 표현하며, 정의로운 공동체에 참여할 때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반대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이야기들까지도 천박한 정신을 가진 불공정한 공동체에서는 실현이 어려움을 가질 것이다.

생명력이 있는 기독교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교회와 같은 제1차적 공동체들은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1967)이 "실현촉진 구조들"(Plausibility Structures)이라고 칭하는 것들의 실예이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대화를 통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적 예전적 표현들을 통하여 독특한 실제이해의 실천을 촉진하여 신뢰성을 유지한다. 피터 버거는 이렇게 주장했다(Peter Berger,1967:46-47),"모든 종교적 전통들은, 여러 가지 교회론들을 개발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계속적인 실현촉진(Plausibility)을 위해서 구체적인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는 이것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금언의 한 가지 일반적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실현촉진구조가 약하면, "기독교세계도 흔들리고 기독교의 실재도 자명한 진리로서 ㈛개인들에게㈝ 교회의 짐을 함께 지고 갈 수 있게 만들 수 없다. 실현촉진구조들이 견고하면 할수록, 그것에 기초한 세계도 견고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의 소속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기독교이야기의 해석은 더 가능성이 있고 생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유로 해서, 교회에의 소속차원은 선택항목이 아니다. 공동체형성은 제1차적인 지도력의 과제이다. 목사들은 모이는 공동체의 관계들과 구조들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도와야한다. 에베소서 저자의 가르침대로,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엡4:13).

목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한 가지 길은 세례를 통해 개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성찬상 주위로 사람들을 불러 교제하는 성례를 집례하는 것이다. 지금 설명한 해석적인 역할, 특히 비추론적 요소들 중 어떤 것들과는 분명한 중복이 있다. 성서신학자 웨인 미크스(Wayne Meeks,1983)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대한 멋진 분석에서 사회학의 수단을 사용하여 이런 연관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공동체형성의 강력한 상징적 수단 일뿐 아니라 인식 불일치에 직면하여 의미를 해석해 주는 강력한 상징적 수단을 창출한다. 교회에로 개종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특히 부유한 여인들), 예술가들, 장사꾼들, 주인들, 노예들 등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공통된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 상위하는 신분들, 즉 제1세기 사회에서 부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부분적으로 무시당하는 신분들이었다. 그들의 예전, 특히 세례와 성만찬은 새로운 실재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하는 강력한 비언어적 상징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 공동체에로의 가입은 사회에서 그들을 규정하던 옛 신분에 대한 죽음이요,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성도들 서로와 교제하는 새로운 의미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새로운 가입자들이 자기들의 옛 정체성을 벗어버리고(가끔 문자 그대로 그들의 입었던 옷을 벗어버림)과거를 씻어버리며, 그리스도와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교제로 일으켜 세움을 받는 드라마를 경험케함으로 이것을 비언어적으로 상징하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을 새로운 공동체와 일체가 되게 하며 연대성을 향상시키며, 독특한 기독교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도왔다.

이런 성례전은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적인 비추론적인 수단으로 계속되었다: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가입시키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역에로 부르시는 사건이요,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간의 교제를 새롭게 하며, 깨어진 삶을 살아가는 자를 위해 교역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냄을 받아 종의 교역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회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들과 다른 예전들은 공동체형성을 위한 목사들의 역할의 중심이었다.

공동체형성은 또한 공동체의 본질과 기능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신학적 사회학적 통찰들을 필요로 했다. 즉 공동체형성에는 공동체와 그 역동성을 이해하는 능력, 경영과 행정기술들, 그룹 관계와 갈등조정의 기술들, 또한 정치적 설득적 능력들이 필요하다. 그 목적은 공동체의 구조들과 과정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에 충실하고, 회중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 그 크기, 자원들, 정황들 - 에 합당한 공동체의 생활을 창출하는 것이다.

목사계속교육의 기회에 조직개발과 갈등조정 등에 대한 강조가 많아지고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목사도 신학교육자들도 항상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서 경영과 행정의 역할을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또는 신학적 근거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1950년대의 사무엘 블리자드의 연구(Samuel Blizzard,1956)들은 이렇게 세속적인 일같이 보이는 행정적 역할과 조직관리 역할들은 최소의 만족을 주고 있으며, 규범적인 관점에서 최소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블리자드의 연구는 30년 이상 지난 오래된 것이지만, 그 발견들은 아직도 교역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실시한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연구에서 (Carroll and Wheeler,1987), 광범위한 교단 배경을 가진 2400여명의 목사들을 조사하였다. 목사들에게 지교회 담임목사의 여러 가지 역할이미지를 설명하는 항목들을 주고, 하나 하나의 항목을 자기 묘사에 적합한 순으로 등급을 매기라고 요구하였을 때, 응답자들은 압도적으로 "말씀의 교역자/교회회중의 교사"를 자기이미지로 선택하였다. 물론 이것은 의미해석과제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세 가지 공동체를 세우는 자의 이미지들 - 집례자/예전집례 제사장, 조력자/촉진자, 그리고 특히 교회행정가 - 은 자기묘사 이미지로 상당히 낮게 평가되었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1956)가 안수교역자에게 적절한 이미지로 "목회지도자"를 제안했을 때에, 비평가들은 이것을 "대경영자", 목사에 대한 경영지향적 비신화적 견해라고 비난했다. 휴와 갚(Hough & Cobb,1985)은 이것을 목회의 경영자모델이라고 칭했다. "목회지도자"는 물론 이런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니버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니버는 이 모델을 수도원전통에서 빌려왔으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지도자로서의 목사상의 의도했다. 니버가 지적한대로 그러한 역할은 교회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초대교회 감독(episcopos)의 역할과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갖는다. 초대교회 감독은 한 교회나 더 많은 교회의 관리가로서, 성례전을 집례하며 모여있는 공동체생활에 목회지도(행정을 포함하여)를 하였다. 교회는 변화하는 환경가운데서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한 지도력을 계속 필요로 하고 있다.

공적 교역능력을 배양하기

세 번째 목회과제는 능력배양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을 반영한다. 그 목적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인들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이다. 약간 더 곻부르게 그것을 설명한다면 이 과제는 모이는 교회생활과 흩어지는 교회생활의 상호작용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목회과제는 공동체개발사역자들이 하이티에서 창출했던 역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생기를 불어넣는 자"(animateurs)라고 부르는 지도자들이다. 즉 자기들의 처한 상황에 건설적으로 대응하며, 자기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집단형성 및 활성화 테크닉들을 훈련받은 자들이다. 이 추진자(animateur)들은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며, 해결책을 실제로 수행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자기 그룹을 지원하는데 테크닉을 훈련받았다. 한 분의 저자(Hollar,1988)는 다음과 같이 그 목표를 설명했다,"열쇠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그룹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요, 밖에서부터 그들의 결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역할이 목사들에게도 요구되고 있다. 목사들은 교회의 벽을 뛰어 넘어서 세상속에서 섬기는 집단과 개인교역자들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추진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과제도 쉬운 과제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사회환경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에 일치하는 신앙적인 언어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그러한 세속사회는 말이나 또는 행동을 통하여 공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기껏해야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역겨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신앙적인 언어와 행동의 적절성을 무시하려는 상황에서 신앙의 능력과 적절성을 주장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과제가 아니다. 어떤 때에 이것은 자기신앙과 그 의미를 담대하고 분명하게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도 방어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증거와 더불어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과 기꺼이 대화하고자하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신방법을 가진 자처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겸손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뜻이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고 저런 경우에는 무엇인지에 불분명할 때에 특별히 중요하다. 나는 한번 나의 동료교역자에게 자기와 자기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가서 자기가 신청한 켐퍼스밖에 있는 커피점에서 맥주 파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증심사에 동행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목사는 그것을 자기 사역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 커피점 가까이에 있는 장의사의 주인이 그의 신청에 의의를 걸었다. 그 장의사는 자기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자기교회목사를 데리고 왔다. 사회를 맡은 심사관은 놀랍고 혼동이 된다고 고백했다:"나는 목사님을 한쪽 테이블에 모셔 본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양쪽 편 모두에 목사님을 모시고 온 경우는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덕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것일 수 있다. 임신중절권, 차별철폐를 통하여 과거의 부정의에 새로운 옷을 입히려는 노력, 학교군의 설정에 인종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 몇 가지만 보더라도 이와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잇슈들에서 이것은 얼마나 옳은 말인가. 그러나 가끔 요구되는 것은 궁극적인 자세보다는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1955:84ff)가 부차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적 확신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확신을 살아가는 부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우리와 같은 궁극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세상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나날의 실제생활을 존중하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공동선을 위하여, 즉 일터에서나 지역사회나 국가생활에서 발생하는 잇슈들에 더 인도적이요 공정하고 또는 정의로운 해결을 시도하고자하

는 사람들과 공동의 장을 찾는 것이 포함된다.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부차적인 것에 남아 있으므로서 훨씬 순수하게 궁극 적인 것 즉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이것은 거듭하여 부차적인 것이 정확히 궁극적인 것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는 것이며, 그것은 무거운 양심이 아니라 분명한 양심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 가운데서 능력을 배양하는 역할이 실제로 의미해석과 공동체형성 역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만약 목사의 의미해석자로서의 역할이 가족, 직장, 또는 공적생활의 구체적인 잇슈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명을 발견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그 목사는 이미 능력배양의 역할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목사가 교회의 공동체형성에 참여하면서 개인들을 치료하고, 새 힘을 얻게 하며, 지탱하고, 기독교생활의 참의미를 따라 양육하고 있다면, 그 목사는 이 사람들의 공적인 생활을 지원하는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 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수행할 수 있다. 첫째로, 모이는 교회생활에서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이는 교회에서 공적 지원과제를 강조하는 것은 공적교역의 제1차적인 장으로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목사도 laos,즉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 목사들이 모이는 교회생활에 제1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공공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모델을 보이고, 공적인 사건에서 종교의 상징적 대변자로 행동하므로서 더 넓은 사회에서 중요하고 생생한 역할들을 수행해야 한다. 나는 19세기의 주장과 같이 목사의 역할을 교회의 내적인 생활에 제한시키거나 아니면 오늘날 아주 널리 퍼진 바와 같이 교인들의 역할들(목사와 평신도)을 사적인 영역에 제한시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여러 해전에 나는 두 사람의 동료교수와 함께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드 시의 공적인 생활과 종교와의 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Mckinney, Roozen, and Carroll,1983; Mckinney and Carroll,1984). 제1차적인 발견은 교회회중이 어떻게 공적인 생활 - 그것이 전도하여 새신자를 얻는 것이든, 사회봉사를 제공하는 것이든, 사회개혁에 참여하는 것이든 간에 - 과 관계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 목회지도력이 규정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것과 목사가 직접 공적생활에 참여하여 그 역할을 어떻게 실제모범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교회회중이 공적생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참여하는가(또는 참여하지 않는가)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여기에 첨가해서 우리는 지역사회 지도자들에게 종교와 종교전문인들과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목사들과 신부들과 랍비들이 공적인 사건들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면, 종교자체의 부재로 본다.

공동목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공적세계의 제도들 속에서 날마다 일하는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들이다. 그리고 평신도의 제1차적인 사명은 이곳에서 자기가 담당한 교역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이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한다. 종교기관의 대표자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넘어서, 목사들은 교회-사회 컨텍스트 상호작용의 수단에 대한 전문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지역사회의 다이나믹스와 공적인 잇슈들을 분석하는 능력, 그 잇슈들의 부차적인 성격과 그 잇슈들의 기독교 이야기와의 관계의 이해, 그리고 그런 잇슈들에 대한 성찰과 참여에서 타인들과 함께 협력하려는 (교회안에서와 교회밖에서)자발성 등이 포함된다.

세 가지 과제들의 종합: 실예

이 세 가지 교역의 핵심과제들 하나 하나는 설교, 교육, 조직관리, 사회분석 등의 역할에서 그에 합당한 특수한 방법들과 기술들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필요조건을 공유한다. 하나 하나의 과제는 성찰에서 타인들을 지도할 능력을 필요로 한다. 즉 이 세 가지 과제는 모두 상황들을 분석하고, 그 상황들의 기독교이야기와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리고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그 상황에 대응하는 방안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이것은 다음에 내가 상술하고자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가장 짧게 설명한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력에 대해 상술하기 전에 한 가지 실예를 통하여 이 세 가지 과제들의 토의를 종결짓고자 한다. 앞서 나는 이 세 가지 과제들을 하나의 돌의 세가지 면, 즉 하나 하나는 구별되면서도 전체의 부분이라는 비유로 설명하였다. 나는 상호관계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하고자 한다. 기독교 정체성에 관련된 의미들은 소속감에 초점과 목적을 제공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소속을 위하여 소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속하고 있다. 소속은 다시 상호커뮤니케이션과 예전적 행위를 통하여 의미를 탐구하고, 훈련하고 지탱하는 컨텍스트 - 실천구조들 - 을 제공해준다. 의미와 소속 모두는 다시 공적생활에서의 교회교역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수적이다. 공적생활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다시 의미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생겨나게 하고 지원적이며 지탱적인 공동체의 필요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세 가지 핵심과제들을 사고할 때, 우리는 다음의 실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생활과 사명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들의 역할들에 대해서 통전적으로 볼 수 있다.

콜체스터 연합교회

콜체스터 연합교회⸅(연합 그리스도교회와 미국 침례교회연합)는 최근까지 도시화과정 때문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코네티커트 주의 조그만 시골교회이다. 1970년대에 주일 낮 예배에 대략 50여명이 출석하는 이 교회는 주로 농부들, 사무직과 생산직근로자들 그리고 조그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들은 성실하고 충성된 교인들이었으나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어서 그 동네와 교회에는 특히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사와서 교회에 출석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증가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들어와서 변화의 누룩이 되었다. 1980년에 그 교회는 다비다 포이 크랩트리라는 새 목사를 청빙하였다. 그녀의 지도하에 그 교회의 교인수도 증가되었고 교인들의 참여도도 높아졌다. 1988년에 평균 출석율은 대략 150명이었다. 더 중요하게 이 교회는 공적인 생활과 사명을 실천하는 데에서도 상당히 성장하였다.

크랩트리목사는 그 교회에 부임하자 더 넓은 교회전통에서 평신도 교역의 비전을 보고 그것을 자기목회와 조직의 지도력을 지도하는 이미지로 삼았다. 교인들 가운데 소수가 그녀의 비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교인들의 대부분은 많은 개신교도들이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듯이 형식적으로만 그 비전을 수긍하였다. 그 비전은 교인들이 가져야 할 더 광범위한 기독교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역을 목사의 교역으로 제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는 교회교인들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그 목사는 자기가 주도할 수 있는 설교와 교육의 기회에 일차적으로 그 비전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그녀는 교회수양회에서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발견합시다"는 제목으로), 그리고 특별강좌 등에서 ("주일 그리스도인을 뛰어넘자"는 제목으로) 먼저 그 비전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획과정을 지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 교회가 경험한 최초의 공식적 계획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공동 교역을 중심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동목회방안을 온 교회가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의 성공적인 돌파구는 1986년에 지금까지 해온 수양회나 신앙강좌들이 대학교육을 받은 전문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언어능력이 약간 낮은 근로자들이 대부분인 그 교회교인들에게는 낮서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왔다. 그래서 그녀는 세 사람의 평신도팀(한 사람은 기술자, 한 사람은 임원, 그리고 또한 사람은 자료분석가였다)을 만들고, 직업종사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하루 저녁을 보냈다. 목사는 조용히 관찰자로 남았다. 사람들 - 교사들, 사무원들, 그리고 생산직 근로자들 - 에게 그들 자신이 경험한대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만족했던 일들과 좌절을 느꼈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변함없이 다음의 질문을 하였다,"당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신의 직업에 어떠한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일이긴 했으나 피이드백은 그 경험이 그들에게 긍정적인 것이었고 어떤 이들은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음 단계는 12명으로 언약그룹을 만들고 신앙과 직업에 관한 잇슈들을 깊이 있게 나누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담임목사와 새로 부임한 부목사도 참여하였는데, 이것은 중요성에 대한 상징으로 두분 목사가 다 참여할 만큼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 성경공부, 직업상황에 대한 사례연구, 독서, 그리고 직업경험 나누기 등 - 그룹멤버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그 신앙이 자기들의 직업과 다른 국면의 생활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능력들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그들 대부분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예를 들면 약간 신비적인 성경의 개념들인 "정사와 권세"는 자기들의 직업상황과 교회실천의 구조적인 요소들이 그것들 자체의 생명을 가진 것 같고, 자주 사람들을 속박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탐구하면서 그들에게 새롭게 와 닿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해방자 그리스도 - 그 목사의 중심신학 - 의 의미도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룹멤버들은 또한 그룹 안에서 서로에게서부터 의미있는 돌봄과 지원을 경험했다. 그들은 나날의 생활에서 그들 자신의 교역수행을 서로 권면하고 서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른 언약 그룹들이 처음 그룹의 방식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더 많은 교인들을 언약 그룹들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목사는 새로운 컨퍼런스와 신앙강좌 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그 그룹들의 도움을 얻어 목사는 주일예배시에 특별소명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룹회원들은 기도의 내용을 도웁기 위하여 자기들의 실제 직업현장의 경험들 가운데서 얻은 통찰들을 제공하였다. 각기 다른 직업들을 기억나게 하는 것들을 매주일 예배시마다 한 가지씩 십자가 앞에 놓인 성찬상위에 장식하여 교인들에게 직업소명을 회상하게 하였다. 준비한 소명기도는 그 직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드리게 하였다. 예를 들면 전기공들이 그 날 예배의 초점이었으면, 전기선들과 전기기구들 몇 가지를 성찬상위에 장치하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전기공들이 함께 드렸다:

창조주 하나님이시여, 주님은 모든 에너지와 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위험스 러운 에너지를 선한 힘으로 방향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전기 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소 서. 근원을 추적하는 문제들을 인내로 견디게 하시고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하게 도 우소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서, 더 나은 봉사를 위해 노력하는데서, 그리고 사람들을 대우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교역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소 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Crabtree,1989:6)

다른 한편, 과목 숙제의 하나로 그 목사는 직장에서 일하는 자기교회 교인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즉, 그녀는 그들의 작업현장 경험을 관찰하면서 그들과 함께 작업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이것이 목회에 중요한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교인들의 일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만나고 있다.

직업현장에서의 교역에 대한 강조가 발전하면서 목사와 지도자들 몇 사람은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지속적이 되려고 한다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한가지 더 깊은 잇슈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곧 우선적으로 교인들을 교회당에 데리고 오는 것과 모이는 교회생활을 지원하는 데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의 교역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은 "세상으로 나가는"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다음의 사실을 깨달았다(Crabtree,1988:18),"교회가 교인 자신들의 교역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게, 교인들을 진실하게 지원하려고 한다면, 교회생활의 제도속에서 그 지원을 육체화할 수 있게 준비시켜야 한다." 이것을 위해 그녀는 일단의 질문들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치리회와 위원회들을 초청하여 교회안에서와 특히 교회밖에서 평신도들의 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사역을 어떻게 갱신할 수 있을까를 심사숙고하게 하였다. 그녀는 평신도 교역의 능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배양시키기 위하여 소위 "경영시스템" 이라는 교회구조의 개요를 구체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역의 의미에 대하여 집사들과 토의하면서 더 큰 확신을 얻었다. 그 후에 그녀는 강화받은 후에 경영시스템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집사의 지도아래 "세상으로 나가는" 구조로서 교회를 재구조화하는 계획을 개발하기 위하여 특별 단기 위원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지금 진행중이요, 이를 통해서 수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자기 목사의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도 그런 비전을 갖지 못하고 더 전통적인 기대를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그들은 이런 교인들이 거절당하고 있다는 감정이나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관심을 쏟았다.

나는 여기에서 부분적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것은 매우 놀랍고 고무적인 이야기이다. 이것은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이다. 진정한 시험은 현재의 목사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공동교역에 관한 강조를 지탱하고 성장시킬 능력이 그 교회에 있을까에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역의 세 가지 핵심과제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성의 분명한 실예이기 때문이다.

목사의 최초의 초점은 세 번째 과제, 즉 직장생활에서 평신도들의 공적교역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설교와 교육, 즉 의미해석에서 강화되었으며, 그녀는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평신도들의 교역에의 소명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후에 교인들이 소명은 소명기도를 통해서 예전과 상징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의 과제를 그만두었다면, 그녀의 비전이 교인들의 의식속에 심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예배의식에 첨가하여, 언약그룹 경험은 아주 중요한 "실현촉진구조"를 제공하였고 소속감의 센타가 되어서 신앙과 매일의 경험을 솔직하게 지탱적이요 돌봄의 환경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그룹들은 실현촉진구조 뿐만 아니라 책임성 있는 구조가 되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확신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 확신을 따라 살아가도록 서로에게 책임을 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 비전이 교회의 정체성과 성격의 한 부분으로 구체화되고 육체화되고자 한다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그것은 제도화되어야 했으며, 그래서 경영시스템에 대한 강조는 아직도 그 교회에서 진행중이다. 그런 재구조화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는 늘 해오던 것보다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인지 하는 점은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형성이라는 중대한 과제이다.

나는 다른 교회도 이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많은 교회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비전의 구체적인 표현은 그 교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기들의 교회의 정체성을 독특한 문화와 상황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교회의 비전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그것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되고, 예전적으로 집례되어서, 교인들이 자기들 자신의 경험들과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목사의 해석의 빛 안에서 교회의 이야기들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지탱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대화와 나눔과 지원을 통해서 현실화되고 그 공동체는 비전의 육체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비전을 따라 살아가도록 지원 받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강력한 지도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의미해석자요, 공동체를 세우는 자요, 공적교역의 능력배양자로서 기능을 하는 목사의 지도력은 필수적이다. 이런 역할을 권위있게 행사할 수 있는 지도력의 특성을 나는 "성찰적인 지도자"라는 용어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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