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17 08:41
성경 해석의 4가지 기본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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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  

성경 해석의 4가지 기본 원칙

이 세상의 학문(문학)은 꼭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해석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통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는 노벨 문학상이 발표된 직후, 기자들이 그를 찾았을 때, 한창 연극 공연 준비에 바빴습니다.
이때 기자들은 “‘고도를 기다리며’라고 하셨는데, ‘고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나는 작품 속에서 이미 밝혔을 것입니다.”
기자들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란 제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베케트는 “오늘 연극을 보시고 마음껏 즐기십시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어떻게 해석하든지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이것이 성경과 문학의 다른 점입니다. 문학이란 작가가 어떻게 썼든지 간에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해석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의 뜻에서 읽고 해석해야만 합니다.
문학이란 해석자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성경은 오직 단 한 가지, 성령의 해석만이 유일한 해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성경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원저자이신 성령님의 본 듯과 의미를 찾기 위한 부단한 기도와 묵상과 통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 성령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18, 26)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의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4, 8)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나게 하시고, 생각난 그 말씀들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사탄도 마찬가집니다. 사탄도 우리의 생각을 통해 지배합니다.
요한복음 13: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하고, 13:27 절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 지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3절에도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 하고, 사도행전 5:3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했습니다.

로마서 8:5~6절에서는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구약성경은 물론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생각난 말씀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24 절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하고, 27절에서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생각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한 그 말씀을 어떻게 깨닫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가장 최초의 사례는 성령을 받고 난 후 행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는 신약성경 전체가 성령의 빛에서 해석한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3:13-1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해를 돕기위해 성령이 “생각나게” 하시고, 생각난 것을 “깨닫게” 하시는 간단한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모두 내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하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묻기를,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하자,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 편집자는 “예수는 선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석을 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2)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도 같은 사례가 나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하고, 이어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8-39)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똑같은 사례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를 맞습니다.
이에 대해 요 12:15 절은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12:15-16)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 당시는 알지 못했으나, 성령을 받고 난 후,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일들이 생각났고, 생각난 그 말씀의 뜻과 행하신 일들의 의미를,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근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마10:19, 눅12:1, 요14:26, 16:13-15)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고, 고린도전서 2:10-161)  고린도전서 12:3절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그 빛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다 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 항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에서(요5:39, 딤후3:15, 고후3:14),
 

딤후 3:15 절과 요 5:39 절, 16:13-14절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딤후 3:15 절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란,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예수시다!”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대해 사도행전 7:55 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영이신 하나님에게 무슨 좌우가 있겠습니까?
다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사렛 땅에서 사셨던 그 예수가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셨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계1:8,17-19, 4:2-3,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는 말씀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그 하나님 곧 그리스도는 나사렛 땅에 오셨던 그 예수시다!”는 믿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다른 구절인 요한복음 5:39 절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성경”2) 이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 역사적 과정을 거쳐 AD 397년 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수많은 외경3) 이 있었음에도 신약성경 27권을 네 가지 원칙4) 에서, 정경으로 선택된 이후부터는 신약성경까지 포함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딤후 3:15절과 요5:39절을 통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나사렛 땅에 오셨던 예수시다!”는 믿음과 신약성경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되심5)”을 증언하는 책이란 원칙에서 해석하는 것이 설교자의 올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요16:13-14). 

 

셋째, 영원한 생명의 빛에서(요8:12, 10:10, 20:31),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차례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4:10, 6:4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특히 마가복음 10:17-31을 보면, ‘영생’(막10:17절)이나, ”하늘에서의 보화“(막10:21), “하나님의 나라“(막10:23절), “구원“(막10:26), “내세에 받을 영생”(막10:29-30)이란 단어가 모두 동일한 뜻으로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과 “세상을 구원하려 함”(요12:47)이며, “영원히 죽지 않고”(요11:26), 영생을 얻게 함(마18:8, 19:29, 25:46, 눅10:25, 요3:15-16, 5:24, 6:40, 54, 17:2, 롬5:21)이란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단 한 구절로 줄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설교자의 성경 해석 역시 이런 목적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구원의 복음 선포,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 이것이 설교의 목표라 봅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설교의 목적을 상실하고, 시간마다 도대체 어떤 목적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증언을 하는 것인지, 좌충우돌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토록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인지 설교자는 깊이 명심하고 “그리스도 영광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구원의 희망, 영생의 희망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 봅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보내리라”(말4:5-6)는 말씀으로 끝나고, 신약성경은 “다시 오리라”(계22:20-21)는 말씀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설교 역시 희망을 주는 설교여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빛에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구원과 영생과 평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넷째, 더하지도 감하지도 말라(계22:18-19)는 당부에 대하여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원칙 곧 성령의 빛, 그리스도 영광의 빛, 영원한 생명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설교자라면 “더하지도 감하지도 말라”는 기본 원칙까지도 모두 이해한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 봅니다. 

성경의 실제적 원저자인 성령께서는 신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통해 7가지의 복6) 을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여기서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한 재앙”이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복이 약속되었다 할지라도 “예언의 말씀을 들은 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고 하신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설교자들이 이같은 경고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베드로 역시 사도 바울의 글을 포함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자기 멋대로 풀다가 멸망 길에 빠지지 말라는 뜻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3:15-17). 

왜 이와 같은 당부와 경고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럴만한 가능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란 “자신이 듣고, 보고, 경험한 사실들에 대한 증인이요, 대언자가 되어야 합니다(행2:14-36). 설교자란 증인과 대언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내가 들었다! 보았다! 만났다. 나는 이 일에 증인이다!”라고 담대히 전해야 할 증인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할 사명을 가진자란 점에서, 결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뒤바꾸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설교 때마다 반복해 봅니다. 

 

 

각주

1) 고린도전서 2:10-16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2) 예수께서 “이 성경”이라 하실 당시는 구약전서를 가리키지만, 이 구절이 담긴 요한복음을 포함한 신약성경이 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정한 이후 “이 성경”은 신약성경까지를 포함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신약성경 27권까지를 포함한 66권을 정경으로 확정한 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 이후부터는 구약전서뿐만 아니라 신약 전서까지를 포함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그 기준이 디모데후서 3:15 절인 것입니다. 

3) 신약성경의 외경으로는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유아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니고데모 복음서, 히브리인의 복음서, 에비온 복음서, 도마 복음서, 애굽인의 복음서 등이 있고, 행전들 중에는 안드레 행전, 도마 행전, 바울 행전, 베드로 행전, 요한 행전, 빌라도 행전 등이 있고, ‘묵시록’이란 제목으로는 베드로 묵시록, 바울의 묵시록 등이 있고, 서신들 중에도 바나바서, 라오디게아서, 클레멘트서 등이 있다. 

4) 정경화에 대한 4가지 기준 원칙
  첫째 정경 선택의 기준 ‘사도성’
  “사도에 의해서 쓰여진 것인가? 아니면 사도에 준하거나, 사도가 쓴 책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쓴 글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이 같은 규정은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선택할 원칙을 정할 때도,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1-22)고 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의 기준 ‘내용’에 따른 선택의 원칙
  “문서 내용이 정경으로 구분될 만큼 영적인 성격과 훌륭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수많은 외경과 위경이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선택의 기준 ‘보편성’
  “많은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책인가?”라는 기준이 정경 선택의 원칙으로 삼은 것입니다.
  네 번째 선택 기준 ‘영감성’
  “그 문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의한 것인가? 저자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의한 것인가?”라는 판단 기준이 정경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예수’는 다른 표현입니다. 4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만 나올 뿐입니다. 사도행전부터는 ‘그리스도 예수’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사람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뜻이고,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 당하시고 부활하사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자 계시는 그리스도 곧 그 하나님은 나사렛 땅에 사셨던 예수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부터는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기에 ’그리스도 예수‘라고 표현하나, 간혹 ’예수 그리스도‘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나사렛 땅에 오셨던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증언이 필요할 때 이를 표기한 것입니다.

6) 요한계시록 7가지 복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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