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마치 문둥병환자를 대하듯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도 가까운 사마리아를 두고 멀리 요단 강 동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곤 했다. 성경을 거슬러 가면 스룹바벨이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하려 할 때, 이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참여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스룹바벨을 비롯한 족장들이 매몰차게 이를 거절한 것이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 유대인에게 참혹한 냉대를 받는 이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둘로 분단된 사실을 알고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 각각의 왕조가 이어져 간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패역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기니 하나님이 이를 용서치 않고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에, 남 유다를 바벨론에 넘겨주었다.
유대민족에게 뼈아픈 실향(失鄕)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본 압제 35년 동안, 일본은 우리 민족성을 말살하려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개명(改名)을 강요하고, 천왕에게 억지로 참배케 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앗수르는 이스라엘 민족성을 말살하고 그들의 종교를 이교화(異敎化)시킬 속셈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앗수르에 이주시켜 원주민과 결혼시키는 방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자연히 민족이 혼혈화(混血化) 되고 종교의 순수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나름대로 종교의 순수성을 지켜오던 유대인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의 긍지에 먹칠을 당한 셈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예루살렘 성전에도 들이지 않고 멀리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따로 성전을 세워 예배를 드리며 서로 원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실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요단 강 동편으로 돌지 않으시고 질러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 분명 쇼킹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통과할 때 제자들의 만류가 분명 있었을 것이며, 하는 수 없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벌레 씹은 얼굴이 가히 상상이 된다. 거기서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만나 그를 회심케 함으로 당대를 뒤엎는 증인으로 삼으셨다.
예수는 유대인의 편협한 생각을 뒤엎은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관계는 사랑으로 성립됨을 말씀하신다. 종교의 순수성보다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은 없는가? 용서치 못할 사람, 납득하지 못할 사람은 없나 돌아보고 오늘 사마리아로 향해 발을 옮겨보자. 예수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