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
논문/ 남경우
제1장 총론
종말론은 선교에 영향을 끼친다. 여러 종말론의 입장 가운데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은 한국 선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조선 개화기에 복음을 전했던 다수의 미국 선교사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 조선의 선교사는 대략적으로 6개교단으로부터 파송되었는데 이들중 대부분의 선교사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였다.
미국 남장로 교, 미국 북장로 교 그리고 미국 남감리교, 미국 북감리교, 호주장로교,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에 약 80%의 선교사는 미국에서 파송되었다. 본 논문은 개화기 미국 선교사의 종말론이 한국 선교에 끼쳤던 영향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후 그들이 가졌던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류대영은 제국주의 침략 앞에 망해가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었는데, 미국 선교사는 이일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조선인들을 사랑할 수있었는지의 문을 던진다. 그는 이러한 선교사의 태도가 우리의 개신교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두고두고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류대영 2013, 450).
본 논문은 류대영이 던진 질문과 관련하여 왜 미국 선교사는 조선인들의 가장 급박한 필요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는지 부분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개화기 조선인들의 가장 긴급한 필요를 뒤로 하고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 사역에 치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확신 때문이었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확신했던 다수의 미국 선교사는 임박한 종말의식 속에서 조선인의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아직도 미국의 복음주의 그룹안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에 미국과 한국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세대주의 종말론자 홀 린세이와 같은 사람의 책을 통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현대에 일어난 사건을 세대주의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 홀린 세 이의 해석은 미국 중심의 반공 이데올로기, 근본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WCC를 거짓 예언자로 보고 곡과 마곡을 러시아로, 이만만을 중공 군대로 보고 일곱인을 중동 전쟁으로 보면서 여섯째 인을 핵 전쟁의 시작으로 보고, EU 당시에는 ECC를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성경의 예언을 문 자적으로 보기에 혈통적 이스라엘에 집착한다. 이러한 관점은 약 30, 40년 전의 미국 복음주의에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미국 정치의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 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무모 할 정도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이들의 생각은 다수의 한국 지도자와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별히 세대주의 종말론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성도들뿐 아니라, 선교사와 선교사 후보생에게도 큰 영 향을 끼쳤다. 임박한 종말론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는 선동적인 가르침이 불어넣어준 열정은 때로는 지식 없는 열정을 낳았고, 미지근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비판과 함께 분열을 일으키는 동시에 많은 젊은이들의 선교 동력을 불어 일으키고 있다.
필자는 이 소고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 교회와 선교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선교가 이전보다 복음의 가르침에 부합된 선교로의 회심을 경험하길 바란다. 지난 시간 동안 선배들의 귀한 헌신과 섬김으로 열매 맺은 한국 선교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동시에 진지한 성찰을 하는데 조그만 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 기독교는 경제적인 성장에 발 맞추어 양적인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 전례 없는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우리는 성찰 할 여유조차 사치인 양, 브레이크 없는 열차와 같이 질 주해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와 교회는 코비드-19를 맞이했고, 폭발적인 성장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어둡고 아픈 상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처들 앞에 변화와 개혁의 필요는 느끼지만 무엇을 어떻게 우선적으로 점검하고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와중에 한국 기독교는 성경을 통한 면밀한 신학적인 성찰과 동기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양적인 성장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달려오는 가운데 우리가 놓쳤던 본질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의 실수를 되짚어 보 아야 한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사회 갈등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선교 전방에 많은 선교사를 보냈지 만 선교 후방인 교회는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불연속성 그리고 탈육신적인 성도들의 태도와 모습, 상호 협력과 어우러짐 대신 혐오와 배제를 조장하는 기관으로 오히려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와 선교계는 지난 날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에라도 겸 손하게 우리의 선교를 돌아보아야 한다. 행여 우리도 성경적인 본질보다 실용적인 방법에 치중하며 속도와 배가 그리고 외적인 열매에 치중했던 부분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쉬운 말 성경은 잠언 19장 2절에서 “지식 없는 열심은 바람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르면 잘못을 범하기 쉽다”고 경고한다. 이런 면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에 의해 고취된 선교적 열정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무지를 인 정하고 성경을 통한 성찰을 면밀히 해야 할 것이다. 건강한 선교는 건강한 종말론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소고가 우리의 선교를 더욱 성경적인 지식의 토대 위에 세우고, 한국 교회가 이전보다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제2장에서 조선 개화기 미국 선교사들이 가졌던 종말론과 선교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론이 개화기 조 선의 선교 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들의 종말론은 교회와 선교와 선교지민의 삶에 어떤 영 향을 끼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제3장에서는 다수의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세대주의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 선교에 끼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 한국 교회와 단체의 선교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제 4장 결론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세대주의 종말론을 극복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성경에 부합된 선교를 위하여 몇몇 학자들의 생각을 인용하며,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의 종말론과 선교를 제안하고자 한다.
제2장 조선 개화기 미국 선교사의 종말론과 선교
필자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면서 인도네시아의 약 700종족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12개의 기독교 종족들의 삶을 표면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12개의 그리스도인 종족의 삶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와 그들이 전한 복음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필자의 지인인 인도네시아 자생 선교 단체의 대표는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들에게 전한 복음은 지금 이 땅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구 선교사들이 가르친 천국은 죽어서 가는 장소의 개념으로만 전해졌고, 이로 인하여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던 인도네시아의 여러 기독교 종족은 선교사들과 더불어 선교지민의 현실의 필요에 대하여 무관심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기독교가 이 땅에서 책임 있는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기독교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한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인 미국 선교사와 그들이 전한 복음, 특히 천국에 대한 가르침, 즉 세대주의 종말론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개화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론
류대영은 미국은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 중산층 기독교인들은 ‘후 천년주의자’에 가까웠고 ‘전 천년주의자’는 적어도 수적인 면에서 소수에 불과했다고 말했다(류대영 2001, 38).
박응규(UngKyu, Pak)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으로 후 천년주의 영향을 받아오던 미국은 남북 전쟁 이후에 전 천년주의의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면서 남북 전쟁 이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면서 후 천년주의에 대한 신뢰도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Pak 1998, 81-82).
류대영은 개화기 조선 시대에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무디의 영향을 받은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 이후부터 약자로 SVM으로 표기)에 집중하는데, 그 이유는 SVM의 동력을 미국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전 천년설적 세계관”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1906년부터 1909년까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 거의 50% 이상이 SVM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온 선교사였음을 밝힌다 (류대영 2001, 53). 그는 베버(T. Weber)의 말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전 천년주의자들은 도래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선교에 적극적인 것은 당연하다”(Weber, 1979, 67: 류대영 2001, 38에서 재인용).
이필찬은 이러한 종말론적 위기감에 의해 SVM에 속한 선교사들이 ‘세계의 운명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라는 전통적인 믿음과 연결하여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 이전에 세계를 구원하자는 사명감으로 고취되었다고 말한다(이필찬 2007, 553).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이 주는 위기감과 두려움은 세대주의 종말론의 대환난 시대와 예기치 않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이 19,20세기에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성행했으며 이 입장은 그리스도가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고, 이후 대환난 시대가 도래하며 예수님은 교회 시대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몰래 재 림하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Grudem 1997, 419-420).
류대영의 실제적인 조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조선 개화기 다수의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일어난 종말론의 관점에 대한 변화와 더불어, 북장로교 선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SVM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 외에도 다수의 선교사들은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기 당시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이후 증손녀 엘리자베스 언더우드와 구분하기 위하여 ‘선교사 원두우’로 표기한다)의 증손녀인 엘리자베스 언더우드(Elizabeth Underwood)는 1890년대에 접어 들어 마펫(마포삼열, Samuel A. maoffet, 1634-1939)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주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한국 선교는 기관 사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과 전 천년주의 신학으로 선교의 방향을 과감하게 전환하였다고 말한다(Underwood 2017, 106-107).
언더우드(Underwood)는 지구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믿음은 미국 선교사로 하여금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복음 전도 사역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하였다고 말했다(Underwood 2017, 391).
이와 같이 개화기 조선 다수의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 아래 있었다.
조선 개화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세대주의 종말론과 선교 정책의 상관성
개화기 조선 다수의 선교사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언더우드(Underwood)는 개화기 모든 선교사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특히 알렌 선교사의 신학적 성향은 그의 글에 공개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그의 활동과 발언을 살펴볼 때 알렌의 생각은 후 천년설적인 사상과 부합했다고 말하기도 한다(앞의 책, 92-93).
알렌은 선한 사역을 하다 보면 복음 전파의 기회를 얻게 되고 상류층에서 시작하여 하류층으로 내려오는 한국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1886년 2월 알렌이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로 보낸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미약하게 개종 사업을 추진하기보다는 근대 문명을 소개하는 여러 기관을 설립하여 조선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알렌 자신의 선교 철학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알렌이 복음 전도 사역에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조선의 정부 기관에 장로교 선교사들의 참여를 지지한 이유는 후 천년설에 근거한 신학적 전제뿐 아니라, 알렌이 조선과 서구의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앞의 책, 93).
이렇게 알렌과 같이 후 천년주의 입장을 가졌던 미국의 종말론의 대세가 전 천년주의로 바뀌고 있었음에도 알렌과 같이 후 천년주의를 지지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선교사들은 미국의 대세적인 종말론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특별히 미국 북 장로교의 전 천년주의적인 공식적인 입장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온 선교사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우리의 행동과 무관할 수 없는 것처럼, 개화기 조선 시대에 파송된 선교사들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론은 그들의 선교 정책과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에도 언급되지 않은 “7년 동안의” 대환난 이전에 일어날 성도의 휴거와 임박한 종말론을 믿고 가르치기에 세상에 대하여는 의례 소극적이고 다분히 이원론적인 삶의 태도를 지향하게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심대하다면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과 방향에 미치는 영향 또한 동일하다.
언더우드(Underwood)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천년주의 종말론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취함으로써 전체적인 사역의 기조를 기관 사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으로 전환한 것과 관련하여 미국의 북장로교와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의 변화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원두우 선교사의 초기 선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서 원두우 선교사처럼 전 천년주의적 생각을 가진 선교사들이 입국하고…선교사들은 1890년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 특히 일본으로부터 근대화와 세속적 이념이 유입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과 서북 지역 사람들이 복음 전도에 대해 보여준 “놀라운” 반응을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몇몇 선교사들만 시도하다가 이제는 북장로교 선교사 전체가 복음 전파 노력을 더 기울여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선교 사역 실제와 선교 정책 면에서 주한 선교부의 복음 전도 정책 채택은 한국인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던 근대적 교육과 교육 기관의 도입을 거부하는 것과 같았다(앞의 책, 106-107).
이와 같이 미국 북장로교의 전 천년주의 종말론은 다수의 한국인들이 소망했던 근대적 교육과 교육 기관의 도입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 선교사의 종말론과 선교 정책의 상관성은 원두우 선교사의 부인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ilias Underwood)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록 자신은 영어와 고등 교육 모두를 추진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한국인을 불러 모아 그들을 구원시키려는 방안에 부정적”이라고 보고하였다. 특히 기독학교로 설립된 곳의 교육 사업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선교사들은 한 명씩 차례로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자신들의 교육 사업을 대체할 사람을 보내주어 자신들은 전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1896년 4월 미국 선교부로 보낸 릴리어스 언더우드(Lilias Underwood)의 편지를 보면 “사실은 선교사 모두가 전도하기를 원합니다. 가르치는 일은 이제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PHS,1896년 4월 22일)라고 말한다. 실제로 교육 사업에 관여하던 선교사들은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세속 교육에는 한 마음으로 반대하였다(앞의 책, 111)
이렇게 편지에 나타난 것처럼 영혼 구원에 우선성을 두고 교육 사업을 2차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단지 언더우드만이 아니라 다니엘 기포드, 메리 기포드, 수단 도티, 헬렌 스트롱,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교육 사업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필요성을 개진하고 있었다고 한다(앞의 책 각주 인용, 111).
그렇다고 자신을 전 천년주의자라고 공공연히 말했던 원두우 선교사가 교육과 의료 사역의 필요성을 완강하게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교육과 의료 사역은 복음 전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확실한 수단으로서 임시 방편의 해결책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앞의 책, 94).
언더우드(Underwood)는 전 천년주의자였던 증조부 원두우 선교사가 지녔던 선교의 방향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 정책에 부합된 것이었음을 밝힌다.
첫째, 전 천년주의자 선교사는 타락한 세상의 기관을 적법한 “기독교의 대변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고, 둘째, 선교사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사회복음”적 접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주 주창하는 기독교는 인도적 봉사 기관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였고 주한 장로교 선교기관의 핵심인물들이 본국 선교부와 서신 연락을 통해 보수적이고 전 천년주의적인 선교 방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근대주의 신학과 세속 교육에 치우친 선교 후보생들은 주한 선교부에서 배제되었다.
요약하면 이 시기의 장로교 선교는 정석적인 기관 사역에서 벗어나 있었고 자신들의 전 천년주의적이고 반근대주의적인 신학 노선을 명확하게 밝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여러 기관에 대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태도 변화는 단순히 선교 개념의 표명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상황과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
만약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세속 교육과 영여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요구를 그토록 강하게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며…기독교에 대한 요구와 반응이 엄청났던 한국 북부 지방…한국 북부 지방이 기독교 복음에 대해 보여준 수용적인 태도로 인해 복음에 대한 반응이 별로였던 남부 지방에서도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에서 물러나게 만든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앞의 책, 111-112)
개화기 조선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비단 종말론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직면하고 있던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서북 지방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놀라운 반응은 선교의 정책과 방향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었다. 하지만 개화기 조선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대부분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였들 가운데 다수의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세대주의 종말론은 조선의 선교 정책의 방향 그리고 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들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그들의 삶과 선교 정책에 영향을 끼쳤고 조선의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류대영은 조선 개화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세대주의 종말론이 선교 정책과 함께 맞물려 조선 정부와 식민 지배하에 있던 조선인들과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한다.
조선 개화기에 미국으로부터 전래된 개신교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였다…그런데 개항 이후 시간이 갈수록, 민족사의 비극적 전개와 맞물려 그 “환경”은 기독교의 수용과 전파에 이로운 쪽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수용된 기독교는 개종자 개인들에게 “구원”을 제공하는데 머물렀다. 러일 전쟁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개종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구원받은 개개인은 늘었지만 그것이 민족의 “구조적” 구원을 위한 대대적인 노력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신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정치에 순종적인 종교였고…미국 선교사는 미국의 국가적 이해와 분리되어 있었고, 이들은 미국 정부의 힘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 밖에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스스로를 비정치화시킴으로써 개인에게 구원을 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그들은 지배적 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필요하면 순종하는 선택을 거듭했다…그들은 조선 기독교인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류대영 2013, 444-445).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은 한 사람이 삶의 전체, 즉 개인과 시대를 해석하고 행동하는 관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런 점에서 개화기 조선에 내한한 선교사들이 전했던 복음과 종말론은 한국 교회와 선교지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칠수 밖에 없었다. 간략하게나마 개화기 조선 선교사들이 가졌던 종말론과 이를 통한 선교 정책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개화기 조선에 내한한 선교사들이 전해준 종말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의 종말론과 세대주의 종말론 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다루어 보고자 한다.
제3장 종말론과 선교
종말론은 지금도 선교의 방향과 내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다수의 미국 선교사가 가지고 있던 종말론인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한국 기독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류대영은 제국주의 침략 앞에 조선이 망해가는 상황에서 조선이 가장 필요한 것은 독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교사들은 자신이 섬기는 조선인들의 가장 절박한 필요에는 무관심하고 조선인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지 질문한다(류대영 2013, 450).이러한 모순적인 선교 상황 역시 미국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론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종말론은 개인의 삶 전반으로부터 한 단체의 정책과 방향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세대주의 종말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세대주의 종말론인 세대주의 전 천년설에 대하여 알아보고,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한국 선교에 끼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 그리고 세대주의 전 천년설
그루뎀(Grudem)은 millenium이란 단어는 천 년을 의미하며,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계20장 4-5절에 나타난 용어라고 설명한다(Grudem 1997, 413).
그는 계20장 2-3절에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말씀 안에서 천년 왕국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가진다고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앞의 책, 413)
그루뎀(Grudem) 역시 전 천년설을 역사적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로 나누며, 전 천년설은 현재 교회 시대는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고난의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교회 시대 말엽의 대환난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 때 죽었던 자들이 일어나 그들의 육신은 영혼과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을 다스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떤 전 천년설 학자는 문자적으로 천년을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긴 시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앞의 책, 416).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7단계를 구분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교회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몰래 재림하시고 신자를 부르실 때까지 계속되다가 이 땅에서 들림을 받은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고 이 일 후에는 7년 대환난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7년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되어 예언된 많은 표적들이 임하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의지하는 유대인들의 수가 차게 될 것이며, 환난 중에 전도가 활발해질 것이며 특히 거듭난 유대인들이 활발하게 전도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환난 이후에 그리스도는 성도들과 함께 다시 재림하고 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왕으로서 통치하며, 천 년이 지나면 다시 배도가 일어나고 그 때 사단과 그의 세력은 참패를 당하게 되며 마침내 불신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있고 그리고 나서 영원한 나라가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교회와 이스라엘을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세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교회는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회개 이전에 이미 들리워 올라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환난 이전 전 천년설은 그와 같은 구분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리고 환난 이전 전 천년설은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성경적인 예언들을 해석하기를 고집한다. 특히 이스라엘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 확실하게 적용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내려질 하나님의 복에 관한 예언들은 미래에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예언들은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 입장의 매력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무 때나 임할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도를 반영한다(앞의 책, 419-420).
이필찬은 세대주의 신학은 이미 죽었다고 확언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말초 신경과 감정을 자극하는 세대주의적 감성이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이필찬 2014, 9).
이필찬은 라이리(Charies C. Ryrie)가 이해하는 세대주의를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세대주의의 주요 특징은 각각의 세대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통치 관계가 바뀌며, 따라서 인간의 책임도 세대마다 바뀌게 되며, 그에 합당한 계시를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를 구분하는 데 시험, 실패, 심판 등은 2차적 특징으로 필수조건은 아니다. 세대주의자는 반드시 전 천년주의자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전 천년주의자 중에는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의 필수 조건은 첫째, 세대주의자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둘째, 영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아니라,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하며, 셋째, 세대주의에게 구원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부분일 뿐이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엡1:6,12,14).
따라서 세대주의에게 성경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그리고 문자적 해석을 지지하는 이유로는 첫째, 철학적으로 언어 자체의 목적인 문자적 해석을 요구하며, 성경도 언어의 특별한 사용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셋째, 논리적으로 만약 문자적 해석법을 사용하지 앟는다면 모든 객관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일관된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일관된 문자적 해석의 결과…세대주의는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종말론에 적용하며 따라서 구약의 예언이 천년왕국 시대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세대주의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천년 왕국에서 성취된 구약의 예언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 해당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교회는 환난이 시작되기 전 지상으로부터 들려 올려질 것이다(이필찬 2014, 12-14).
마스덴(George M. Marsden)은 전 천년주의 운동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그의 글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전 천년주의자 운동은 19세기 부흥주의, 복음주의, 경건주의, 미국주의와 다양한 정통주의 전통들의 복잡하고 얽힌 뿌리로부터 나왔다”(Marsden, George M. 1980, 201: 보쉬 2017, 500에서 재인용).
보쉬(Bosch)는 19세기 미국의 다양한 전통들로 얽힌 복잡한 뿌리로부터 나온 전 천년주의 운동은 다양한 아종을 낳았다고 말한다.
재림주의(Advetism), 성결 운동, 오순절 운동, 근본주의, 보수 복음주의이며, 예외 없이 이 모든 그룹들은 세계 선교 사역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말한다. 서로 간에 상당히 다른 점도 있지만 여러 공통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전 천년주의 진영에서의 공동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었고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제칠일 안식교의 원조인 윌리엄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의 시작을 예견하고 독일인 중국 선교사 칼 구즐라프와 중국 내지 선교회 허드슨 테일러의 종말론적 기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Bosch 2017, 501).
세대주의 전 천년설과 선교의 관계를 논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천년주의, 세대주의 그리고 세대주의 전 천년설에 대하여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선교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과 선교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은 당대에 유행했던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한국의 모 선교 단체와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직도 한국의 일부 선교 단체, 선교사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필찬은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땅 끝에 이르는 복음 전도를 재림의 조건으로 간주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과 신비 체험을 강조하는 모습은 신사도 운동과 연결 되어 있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36-37).
그는 중국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에 그 사역의 왕성함과 상관없이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이 운동이 교회의 이슬람권 선교에 매우 지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이필찬 2014,37).
그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그들이 ‘땅 끝’이라고 여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무슬림이 있기에 그들을 지나 땅 끝에 이를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37).
보쉬(Bosch) 역시 복음 전도를 재림의 조건으로 생각하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가리켜 이런 생각은 세대주의 종말론자의 특징이며 이들의 영향력은 이 시대 복음주의 진영에도 건재하다고 설명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주의자는 우리가 할 일에 대하여 강조점을 둔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19세기 후반 이후 50년 동안 여러 명의 선교지도자들이 창설한 선교 조직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주요 “선교 본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교 과업의 성공적 완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에 복음 전파는 “종말이 오기 전에 성취되어야 할 조건”으로 여겼고 이는 우리가 마치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전 천년주의자들은 복음 전도의 목표를 왕을 다시 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확신은 여전히 이 시대의 복음주의 진영 안에도 건재하다(앞의 책, 502).
윌리엄 허치슨(William R. Hutchison)은 피어슨 선교사의 글을 통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 안에서 어떠한 계획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보쉬(Bosch) 역시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서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피어슨(A.T.Pierson)은 천년 왕국을 도래시키는데 필요한 돈과 헌신된 복음 전도자의 수를 추산하기도 했다”(Hutchison. William R. 1987 ,164: 보쉬 2017, 502에서 재인용).
이러한 피어슨(Pierson)의 생각은 세대주의 전 천년주의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가지는 큰 열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들의 헌신으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어둡고 힘든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치르고 가난과 슬픔 가운데 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고 미래의 희망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위로를 얻었다.
박응규는 이와 같은 신앙의 특징은 위기 상황을 강한 종말론적 기대로 이겨나갈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전도나 개인 경건에 박차를 가하게 함으로 귀한 신앙적 유산을 남기는 일에 일조하였다고 말한다(박응규 1999,41)
한국 교회가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준 긍정적인 영향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주는 영혼구원의 우선성, 임박한 종말론과 두려움, 그리고 이로 인한 이원론적인 태도는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면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에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SVM 운동에 참여했던 선교사들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열정적인 기도와 함께 ‘선교’에 대한 지나친 열정을 불어넣는다. 선교가 삶의 최우선적인 가치가 되어, 선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회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는 대상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점이 지나치게 되면 ‘선교’가 ‘미셔니즘(Missionism)’이 되어 선교와 선교 사역이 삶의 최우선 가치가 되는 위험한 선교를 꿈꾸고 위험한 선교 사역을 하게 된다. 한 단체가 이러한 입장을 가졌을 때에는 개인의 필요와 부르심을 존중하지 않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 안에서 선교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지체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저급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을 당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박응규는 전 천년설로 고착화되어 가는 종말론적 경향을 언급하면서 한국 교회는 1884년(잠복기) – 1910(발화기) – 1919년(개화기) – 1934년(고착기) – 1945년의 각 단계를 지나면서 전 천년설이 형성되어갔다고 말한다(박응규1999, 40).
이렇게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형성되어 가면서 한국 교회와 선교에 긍정적인 영향 외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문자적 성경 해석이 준 부정적인 영향이다. 이필찬은 세대주의 전 천년설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인한 부작용을 낳았다고 언급한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연역적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 특별히 요한 계시록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묵시 문학이요 서신이며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들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본문에 대한 왜곡을 가져오게 된다. 문자적 해석으로 접근할 때 요한계시록의 많은 본문들은 재림으로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연역적 성경 해석이란 어떤 전제를 정해 놓고 그 전제의 정당화를 위해 무수한 참고 구절을 문맥의 고려 없이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재림이나 휴거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이러한 성경 구절의 사용에는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경우가 매우 많이 존재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는 이러한 문자적 해석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장르가 상징적 표현을 많이 있는 묵시 문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이에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장르의 특징에 걸 맞는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본문의 의도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림에 고착된 요한계시록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이필찬 2007,573).
이러한 문자적인 해석은 한국 다수의 교회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모단체에 영향을 끼친 백투예루살렘 운동 안에도 나타난다. 이필찬은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에 이루어지지 못한 구약의 약속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 439).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회교권 선교를 목표로 시작했던 중국 교회의 취지와는 다르게 메시아닉 쥬와 인터콥과 같은 단체들에 의하여 변질되어 다윗 시대 예루살렘의 영광을 문자 그대로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메시아닉 쥬에 의한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송만석 장로와 같은 그룹의 지지를 받으면서 진행되고 있다…백투예루살렘 운동의 요지는 간단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문자 그대로 회복될 것을 믿는 것이다.
예루살렘도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백투 예루살렘이다.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심적이다. 모든 성경 해석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이들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한 종말적 약속들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 재림을 통해서 이러한 구약의 약속들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재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의 반대 논리도 성립되는데, 이러한 약속들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강력하게 한국 교회에 작동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회복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강하는 형국이다. 인터콥은 세계 선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회복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인터콥이 세계 선교(세계 선교는 이스라엘 선교로 귀착된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면, 송만석 장로와 메시아닉 쥬와 같은 그룹은 이스라엘의 회복,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회복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루살렘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도 없다는 극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백투 예루살렘 운동의 해석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약속들의 성취를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선지자들의 약속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잘못 해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도 한다.
1948년에 혈통적 이스라엘의 독립에서 성취되었다고 보는 무화과 나무 비유가 대표적인 예다. 세속적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제 영적인 회복을 남겨두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과 맞물려 발생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그토록 간절한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재림에 대한 갈망의 동기가 올바른 성경 이해에 근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이필찬 2014, 438-439).
실제로 필자는 선교 동원가로서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다수의 형제 자매들과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의외로 많은 선교사를 꿈꾸는 형제 자매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경도된 선교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 소수의 형제 자매들은 문자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님의 다시 오시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교를 꿈꾸며 준비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선교에 대한 공부와 나눔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진리를 깨닫고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고 선교는 하나님의 자신의 것이기에 그 분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선교는 명령인 동시에 언약이기에 우리는 선교의 명령에 순종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영광스럽게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은 일관되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열방과 땅 끝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샘플로 그리고 단순한 통로로 선택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원의 경륜이 있음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구약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이 받는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이스라엘 모델’을 통해 보여주시는 동시에 그것을 보며 사모하게 된 열방을 초청하고자 했음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실패하는 듯하지만 사도 행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뿐 아니라(행2:5),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 즉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행2:9-11)에게 성령님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온 열방의 온 족속에게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혈통적 유대인과 새롭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된 이방인들을 동일하게 신약의 이스라엘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스라엘을 신약의 교회가 아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필찬은 세대주의 종말론에 경도된 이들이 혈통적 이스라엘 선교만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선교라고 규정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이스라엘로 내몰아 그들의 인 생을 허비하게 만들었으며, 여러 단체들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 정착하는 일에 헌금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이필찬 2014, 9).
이필찬의 말대로 잘못된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재정을 허비하게 하고, 세대주의 종말론의 문자적인 성경 해석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성경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잘못된 해석이 낳은 왜곡된 선교를 낳게 하는 뿌리와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면밀한 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둘째,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지나친 재림에 대한 강조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이필찬은 이와 같이 재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배타적 내세주의를 가지게 하고, 이는 지상에서 변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공동체로서의 소명을 간과하게 하고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이필찬 2014,8-9).
이러한 종말론은 세상에서 변혁의 존재로서의 부르심을 망각하게 하는 동시에 이 땅에서 허락된 삶에 대하여 이원론적인 태도를 지향하게 한다. 성경적인 현실주의가 아닌, 성경적 이상주의에 빠져 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현실의 필요를 은근히 무시하는 영성을 자극하게 된다.
박응규 역시 세대주의 종말론의 경향이 개인적이고 타계적인 방향으로 치우칠 때에 성경적인 종말론의 한 부분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종말론에 담긴 우주적 차원의 종말론이 소실되는 것을 지적하였다(박응규 1999,41). 박응규는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 역시 초월적이며 전 우주를 포함하는 차원을 가지고 있고 개인 구원과 사회의 전 영역과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음을 밝힌다(앞의 책, 41).
이제 이러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내세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향한 계명을 간과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세대주의 종말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태도가 어떻게 선교에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스캇 선퀴스트(Scott Sunquist)는 1974년 세계 도처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 새로운 에큐메니칼 성격을 띤 복음주의 선교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50개국 2,700명의 대표들은 “전 세계의 사람들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하라”는 주제를 가지고 선교를 위한 연합을 시도했다(Sunquist 2015, 320) 이 주제와 관련하여 복음주의권에서 다소 낯선 주제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는데, 그것은 중남미의 대표들이 강조한 사회적 책임에 관한 이슈였다. 이를 통하여 조금 더 포괄적이고 철저한 선교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위의 책, 320).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 안에서 일부 선교사들은 이전과 달리, 선교지민의 필요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역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인식하는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로잔 대회의 결정처럼 전 인격적이고 보다 더 균형 있는 선교를 감당했다. 반면 일부 선교사들은 여전히 영혼 구원의 우선성 앞에서 계명을 따라 섬기는 긍휼 사역은 영혼구원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고 따르는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입장을 지지할까? 이들은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지향하기에, 복음주의권에서 대두된 사명과 계명이 균형을 이룬 총체적인 사역과는 상관없이 선교지민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한 사회적 책임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에 대하여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경향을 지닌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교회 공동체를 이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한 공동체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세상에 대하여 이원론적이고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천국’을 단지 죽어서 가는 공간적인 장소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과 주기도문에서 말 하는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세대주의 종말론의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지 않는 일상의 모든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어야 하는 필요를 간과하기가 쉽다. 하나님의 왕권 회복을 위하여 계명과 사명의 긴장을 유지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과 순종에 대하여 균형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 또는 복음 전도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지지 못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대안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외에 장차 우리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이원론적인 삶을 낳고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한 성도를 양성할 수 있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최고의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ission), 즉 선교의 목적인 제자 삼는 일, 즉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을 놓친 교회와 선교계를 향하여 일침을 가한다. 윌라드(Willard)는 ‘Commission’에서 ‘C’와 ‘M’을 떼어내어 ‘Omission’으로 바꾸는 워드 플레이를 통해 선교계가 하고 있는 최고의 실수가 무엇인지를 인상 깊게 드러냈다. 그래서 최고의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ission)을 최고의 누락(The Greatest Omission)으로 바꾼 선교계의 아픈 현실을 지적했다(Willad 2007, 13).
이를 통해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 명령인 제자도의 상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교회와 선교계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 삼는 일’임을 기억하게 했다.
이 소고에서는 충분히 다룰 수 없지만 로잔 대회의 미전도 종족 운동 안에서 중요한 구절로 삼았고, 세대주의 종말론을 따르던 이들이 중요시했던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대한 해석 역시 왜곡된 부분이 있었음을 자세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영향력은 우리의 선교를 계명과 사명 사이에서 균형 잡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선교의 가치인 ‘제자 삼는 일’보다 서구의 실용주의적이고 과업 중심적인 그리고 경영적인 방식의 양적 선교를 과도하게 지향하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선교는 성경에 입각한 건강한 선교를 지향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선교는 취약한 신학적인 한계뿐 아니라, 실천적인 한계를 규정짓게 한다. 과거 선배들의 뜨거운 열정과 개척 정신은 영광스러운 선교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단순하고 순결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종족과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드린 선배 선교사들의 귀한 선교 사역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러한 감사와 함께 우리가 물려 받은 선교 유산 앞에서 이제 우리는 선교와 관련된 말씀에 대한 성경 신학적인 고찰과 우리의 선교에 대한 선교 신학적인 성찰이 절실하다.
1988년 이후 한국 교회는 선교의 기회에 동참하고 성장해 오면서 최근 수 년 사이에 교회의 정체기와 맞물려 선교의 정체기를 맞이했다. 이에 더하여 코비드-19는 우리의 선교 사역을 강제로 멈추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우리의 선교와 선교 행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이 우리의 선교에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을 고찰하고 우리의 선교가 더욱 성경적인 기초 위에 세워지도록 재조정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며 하나님의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종말론의 방향을 논의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