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8 09:05
목사-장로-안수집사-권사-집사-성도’는 ‘카스트 제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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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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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장로-안수집사-권사-집사-성도’는 ‘카스트 제도’가 아닙니다 

▲이효준 장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란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보다, 물질 세계에 속박된 인간을 위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가리킵니다.

앞선 23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드릴 때”입니다. 중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빛을 받은 자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공예배 때나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될 정도로 많이들 사용하십니다. 심지어 비신앙인들도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지낼 때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자신의 편의대로 드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는 몸가짐과 용모를 단정히 준비하며, 주일 아침 예배 시간이 되면 잘 정돈된 의복을 입고 헌금과 성경책 등을 점검하며, 멀지 않으면 가능한 도보로 교회를 향하면서 이웃들과 마주치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 예배자의 참 모습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과거 저희 세대와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여름에는 반바지 차림이나, 감지 않고 자다 일어난 듯한 머리로 예배드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불편합니다. 더구나 요즘 시대는 성경책을 구경하기가 힘듭니다. 스마트폰 하나 달랑 들고 교회에 나오는 모습은 예배자로서의 품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 어르신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하루 전날 몸을 깨끗이 하고 교회에 입고 갈 의복을 깨끗이 세탁한 후, 비록 요즘처럼 좋은 옷은 아니지만 다리미로 식구들 옷까지 전부 손질합니다. 연보라 불렀던 헌금은 구겨진 곳을 다림질하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특히 어르신들은 깨끗이 다려입은 한복이나 양복을 입고 옆구리엔 빨간 성경책을 끼고, 지나가는 이웃들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밝은 미소로 교회에 가면, 동네 분들도 함께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손짓하던 그 시절 모습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요즘 주일 아침에 교회 나가는 모습은 실로 가관입니다. 자녀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고, 입고 갈 옷을 챙기느라 분주하며, 성경책을 찾기보다 스마트폰을 찾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며, 고3들은 교회 대신 학원으로 가는데 정신을 다 쏟으니, 시절이 바뀜을 한탄할 뿐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 말씀과 사랑은 절대 바뀔 수 없는데 말입니다.

왜 교회 나가는 주일 아침마다 그렇게 정신이 없을까요? 대통령이나 시장, 장관 등 기관장들이 모이는 시상식에 참석한다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요? 조그마한 소모임에 참석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데 이렇게 소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 해서 비싼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고 온갖 치장한 채로 예배를 드리라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오롯이 마음의 철저한 준비와 그리스도를 향한 정신을 한데 모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면 차량을 담당하시는 분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주차해서 여러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예배를 방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기심과 교만으로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툼이라도 생기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그날 예배는 엉망진창이 되어 다가오는 주까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배드리는 봉사자들이나 참석자 모두는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서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식당 봉사, 차량 봉사 등 모든 분야에서 담당자들의 지시에 잘 협조해 모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데 함께해야 되지 않을까요?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인 사랑이 부족한 탓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의 모든 봉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한 것이니, 모두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있고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비천해 보이고 무식해 보이더라도, 함부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판단의 주인은 주님 밖에 없음을 숙지하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정의롭고 정직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미웠던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용서하며 처음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아온 후,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미움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내면적 의미는 이웃에 대한 증오, 바로 원수의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미웠는데, 갑자기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평소 마음이 어둡고 무거우며 쓸쓸했던 이에게 갑자기 찾아가기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온갖 애를 쓰다 오히려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희생하신 주님을 떠올리며, 복음을 위해 사랑을 전하는 사명감을 갖고 찾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누구나 한때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기도 합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고, 말씀에 갈급해 하는 도움의 손길에 때로 거부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원수 같았던 친구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 역시 그 사람에게 원수가 아니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을 발견하고 먼저 믿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용기백배로 그에게 다가가 먼저 사과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예배자의 참 모습 아닐까요?

형제에게 노를 품고 욕하며 모욕하는 죄는 살인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 6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이웃에 대한 의무를 먼저 행해야 합니다. 이 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욱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서로 으르렁대며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려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당회부터 제직회나 각종 선교회 모임, 구역 모임이나 식당·차량 봉사, 성가대원들 간에도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 비신앙인들보다 못한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이 그 조직에서는 사라졌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찬양을 드리거나 기도를 한다면, 그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하는 진실된 예배가 아니라 사탄의 방해를 위한 모임이나 친목회가 아닐까요? 상대를 용서하거나 관용으로 대할 때, 본인의 마음도 훨씬 가볍고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를 욕하거나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든지, 상대가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 그리고 시기와 모함을 서슴없이 한다면, 교회가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성이 될 것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지도자의 잘못으로 수백 명이 교회를 떠나갔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원수처럼 적대시하는 현상은 차마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성도들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길거리에서 마주치기 전 멀리서부터 고개를 홱 돌리거나 그냥 지나칩니다. 정말 주님을 신뢰하고 믿는 성도들인지 분별하기조차 힘들 지경입니다. 비록 의견 충돌로 교회를 떠났지만,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관용과 사랑으로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요?

나아가 당회를 비롯해 교회 모든 기관들은 서로 소통해야 합니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는 ‘카스트 제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있을 때 존경하고 그 사람이 없을 때 칭찬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서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교회 발전을 위해 건의나 제안을 받았을 때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추고,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 해서 무조건 억누르거나 단번에 거절하는 행위도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옳은 말과 바른 말, 불평과 불만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옳은 제안이나 충고, 바른 이야기를 할 때 겸허히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있을 때 교회는 아름답게 부흥 발전하며, 비신앙인들도 오고 싶어하는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 먼저 자신을 낮추고, 내면의 모든 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교만이라는 불청객을 멀리하고 상대방을 수용할 수 있는 평화롭고 따스한 열린 마음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세상은 주님의 세계와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향기를 뿜어내, 비신앙인들도 교회를 나오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나보다 이웃을 향한 나눔과 사랑의 향기를 뿜어내는 ‘참 예배자’의 모습으로 기도하며, 예배를 예배답게 드림으로써 모두가 사랑하는 이 땅 모든 크리스천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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