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8 09:21
밀교(密敎)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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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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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密敎)란 무엇인가?

 

1. 밀교(密敎)란 무엇인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중생(衆生)이 깨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위치가 아라한(阿羅漢arhan)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부처(佛 buddha)가 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이런 대승(大乘)의 정신을 토대로하여 '즉신성불(卽身性佛)'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즉신성불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써 삼밀(三密)의 청정을 이야기하고, 여기서 삼밀이란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말한다. 인간(人間)의 언어(言語)와 생각과 행동은 절대적(絶對的) 진리(眞理)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릇이고 진리와 합일(咸一)을 이룩하는 비밀(秘密)의 통로(通路)로 인식(認識)되어진다. 그러므로 입으로는 진리의 음성으로서 진언(眞言 mantra)을 염송하고, 명상해야 할 형상으로서 만다라(曼茶羅 mandala)나 얀트라(圖象 yantra)를 마음에 새기며, 신체의 움직임으로서 좌법(座法), 호흡, 인계(印棨 mudra)등을 종교의례(宗敎儀禮)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다.

 

2. 밀교(密敎)의 특질(特質)

 

밀교는 복잡한 요소가 혼합되어 성립한 것으로 간단히 정의(正義)하기는 어렵지만 그 특징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주술적(呪術的)인 의례를 조직화(組織化)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神秘主義)이다.

주술은 신이나 운명 혹은 자연현상 등 우리들의 행(幸)·불행(不幸)에 대하여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신비적인 수단에 의해 작용시켜 원하고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하려는 의도나 수단이다. 또 신비주의는 우주(宇宙)의 중심(中心), 절대자(絶對者)인 신(神) 등으로 불리우는 존재와 자기와의 내면적(內面的) 결합(結合)을 감지(感知)하여 얻는 심리상태(心理狀態)이다. 그러므로 주술과 신비주의는 전혀 같은 것이 아니면서도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로, 어떠한 종교라도 이러한 주술적,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갖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교에 있어서도 이들 두 가지 요소는 이미 초기경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그 존재가 표면화(表面化)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 경전(經典) 가운데서 밀교는 대승의 근본교의(根本敎義)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점점 본질화(本質化)하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대승불교가 여러가지 종교적 입장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관대했다고 볼 수 있다.

 

3. 밀교(密敎)의 발생과 인도(印度)에서의 전개과정

 

인도에서의 약 1700년에 달하는 불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 보자면 먼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직접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45년 동안의 시기인 초기불교(初期佛敎=근본불교)가 있었고, 불멸(佛滅) 후 비교적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生存)해 계실 때와 불교의 모습이 비교적 잘 지켜져 그 원초성(原初性)과 원시성(原始性)이 보존되었던 100년 동안의 원시불교(原始佛敎)의 시기, 그 다음 약 600년간 많은 부파(部派)와 분파(分派)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敎理體系)를 세우며 실천하고 정착화(定着化) 했던 시기인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개인 수행과 아비달마 연구에 빠져 대중과 유리되어 가자 의식있는 재가불자(在家佛子)들과 진보적 승려들이 이를 소승(小乘)이라 비판하면서 '근본불교(根本佛敎)'로의 회기를 내세우며 보살이 주체가 되어 일반 대중이 함께할수 있는 대승불교(大乘佛敎)운동이 아주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시대가 300여년이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불교의 자비정신이 최고로 고취되었고 대승불교가 성숙할 무렵에 밀교의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한다.

 

대승불교가 중관(中觀)과 유식(唯識)과 같은 고도의 관념체계를 가지고 현학적으로 흘러가면서 다시 대중과 유리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굽타왕조(320∼500년경)가 등장하면서 바라문교를 국교(國敎)로 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굽타왕조의 치하에서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불교였지만 브라만교의 영향을 피할수는 없었다. 일찌기 불교에 의해서 크게 타격을 받았던 바라문교는 민간신앙(民間信仰)과 혼합하고 또 인도의 사회조직(社會組織)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힌두이즘으로 부흥(復興)하였는데, 재가신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승불교의 교단(敎壇) 안에 민중의 일상생활 규범이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것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시 대중들에 퍼져있던 주술과 신비주의적 의식을 수용하여 밀교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밀교 700년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예배(禮拜)의 의례(儀禮), 공양(供養)의 방법, 브라만의 종교의례, 주술(呪術) 등도 불교에 흡수되었다. 인도의 모든 토속 신들이 불교의 세계로 흡수되어 불교의 불·보살·명왕(明王)·제석천·범천(梵天)·팔부신중(八部神衆 등으로 환생(還生)되었다. 이러한 흰두이즘의 종교적 특징으로 7세기 중엽부터 대승불교는 급격히 밀교화되었다.

 

인도에 있어서 불교의 쇠퇴는 외적인 요인으로는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으로 온 여파(餘波)이다. 이슬람교도의 인도 원정은 이민족(異民族)의 이슬람교로의 개종(改宗), 노예와 물자의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점령지(占領地)를 오랫동안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寺院)과 성지(聖地)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승니(僧尼)를 학살했다. 13세기 초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 본토로 부터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인 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의 세력이 가장 왕성하였을 때 조차도 불교는 바라문교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으며 바라문교가 힌두이즘으로 부흥함에 따라 불교는 점차 힌두화되어 마침내는 본질적(本質的)으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4. 밀교(密敎)의 시대적 분류와 특징

 

밀교를 분류하는 방법으로 인도, 티베트 등 모든 불교권에 걸친 밀교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분류 방법이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초기밀교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초기밀교(初期密敎)란 인도에서 4세기로 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이다. 예를 들면 병을 치료하는 것, 장수하는 것,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현실적인 요구를 설하는 다라니 경전, 제존을 대상으로 하여 공양하고 관상하는 일군의 밀교경전은 이 시대 산물이다. 존격(尊格)의 도상상(圖上象)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먼저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석가여래가 중심이 된 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관음(觀音)·문수(文殊)·미륵(彌勒) 등의 새로운 보살 그룹이 등장하고 있다. 5세기경에는 변화관음(變化觀音)이 성립하여 십일면·천수·불공견삭 등 특이한 양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기밀교

 

다음 중기밀교란 7세기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正經)> 등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이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존격, 상징, 범자에 의한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三密行)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더욱이 밀교의 필요 불가결한 실천체계의 제요소인 호마법(護摩法), 공양법(供養法), 관정법(灌頂法) 등이 설해져 있다. <금강정경>은 대일경에서 보다 체계화(體系化)되고 세밀(細密)한 실천법(實踐法)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금강정경이 의도하는 바는 우리들이 다섯 단계의 명상법(五相成身觀)을 통해 우주의 진리인 대일여래가 되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며 이것을 시각적으로 불·보살의 세계로 나타내는 것이 금강계 만다라이다.

 

금강승(金剛僧)의 금강은 금강석(金剛石)처럼 변화하지 않는 '아(我)'와 '법(法)'의 자성(自性)을 의미(意味)하고 이 금강의 성질(性質)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금강성(金剛性)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강성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성(空性)과도 동일시하여 공성승(空性僧)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그 수행법(修行法)인 요가는 성적쾌락(性的快樂)과 결부(結付)되어 있다. 즉 진언승에서는 지혜(智慧)와 방편(方便)이 중심 교의(敎義) 이지만 금강승에서는 지혜는 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방편은 동적인 고로 남성에 비유되어 이 남녀의 교합(交合)을 요가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만다라, 무드라, 만트라는 이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불, 보살, 명왕 등과 복잡하게 조합되어 세세하게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밀교의 모습은 그 교의에 있어서나 의례 , 조사 존상에 있어서 종래의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후기밀교

 

마지막으로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불교라 불리고 있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때로는 좌도밀교라는 이름하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힌두이즘의 탄트리즘에서 시바와 샤크티와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般若)와 방편(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에 있어서 양자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지혜와 방편에 의해서 얻어진 궁극의 경지인 열반(涅槃)을 반야방편(般若方便)이라 하여 대락(大樂) 혹은 보현(普賢)이라 부르는데 곧 남녀 교합의 경지이다. 이렇게 성적행위와 일치하는 금강승의 요가를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도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 밀교라 하였다.

 

5. 밀교(密敎)의 지리적(地理的) 전파

 

다른 불교의 유파가 그러했듯이 인도에서 발생한 밀교는 여러 가지 문화의 유전에 호응하면서 각각의 불교권으로 전파하여 갔다. 그 흐름의 방식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경로를 요약하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북전(北傳)·비단길 루우트

- 남전(南傳)·남해안 루우트

- 동전(東傳)·히말라야 루우트

 

우선 북전(비단길 루우트)이라고 이름한 흐름은 인도 불교의 대부분이 거친 경로이다. 즉 인도 중심부에서 육로 케시미르, 간다라를 경유해 힌두쿠시 혹은 파미르 산맥을 넘어 비단길의 동쪽으로 해서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 루우트는 현장(賢張)을 위시하여 인도에 간 대다수의 구법승, 혹은 인도에서 동쪽으로 온 승려들이 밟았던 길이다.

 

남전이라고도 하는 남해(南海) 루우트 또한 밀교 유전상(遺傳上)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육로(陸路)에 비하면 위험성을 띠고 있으나 구법심(求法心)에 불타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바다를 건너간 것이다. 남해로의 주류(主流)는 동인도(東印度)의 타무라리푸티와 남인도(南印度)의 칸치 등에서 출항(出航), 스마트라, 쟈바 등을 지나 중국남해(中國南海)를 북상(北上)하여 중국의 남쪽에 이르는 길이다.

 

이상의 두 가지 루우트가 최종적(最終的)으로 중국까지 도달 했음에 반해, 세번째의 루우트는 인도에서 곧 바로 티베트로 통하는 것이다. 티베트에 전래된 밀교는 시대와 더불어 당연히 변화하고 있으나, 중국에 전하여진 밀교가 초기·중기의 두 시기의 밀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9세기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도와 접촉을 가졌던 티베트는 이슬람 침략시에 인도의 많은 승려과 함께 비크라마시라 사원의 방대한 전적(典籍)이 전하여 지면서 후기밀교(後期密敎)를 대량(大量)으로 유입(流入)하게 되었으며, 티베트 대장경의 조직에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와 밀교(密敎)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공사상(空思想)은 밀교에서도 교의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공성의 인식이 지혜이며, 지혜를 실현하므로써 현실의 상태를 그대로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밀교 경전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과 중생구제의 자비 및 그것의 수단을 설하고 있다.

 

초기의 대승교단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이를 지지하는 재가자들에 의해 결집된 재가주의가 농후한 집단이었고, 그들의 종교생활은 예불(禮佛)·예탑(禮塔)과 경의 독송(讀誦), 좌선(坐禪), 재가신자에 대한 설법(說法)·교화(敎化)에 힘쓰는 것이었다. 대승화가 확산 되어감에 따라 점차 부파교단으로부터의 개종자가 늘어가면서 대승 자체 또한 아무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출가 생활을 찬미하게 되었고, 부파의 계율이 편리(便利)·적당(適當)한 것으로 이해되어 점차 채용(採用)하게 되었다. 부파불교를 전체적으로 소승이라고 공격하는 초기의 태도가 완화되어 진 것이다.

 

후기 대승불교의 사상적 경향이 중관(中觀)·유식(唯識)·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의 이론적 토대로 하여 각 학파간에 대립의 양상이 나타나면서 불교 본래의 종교적(宗敎的)·실천적(實踐的) 면이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밀교는 종교적(宗敎的) 체험(體驗)을 중시한다. 즉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를 종교적 의례(儀禮)와 작법(作法)이 엄격히 규정된 의궤에 의하여 신비적(神秘的)으로 체험함으로써 부처와의 합일(合一)을 이룬 즉신성불을 이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밀교에서는 상징적(象徵的) 의미를 중시한다. 궁극의 진리는 문자(文字)와 언어(言語)로 표현이 불가능(不可能)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자 각자의 종교적 체험에 의하는 것으로 밀교에서는 신체와 언어와 마음의 삼자(三者)를 삼밀(三密)이라하고 이 삼밀의 상응(相應)에 의하여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해 진다. 이러한 삼밀의 수행에는 일정한 작법(作法)의 차례가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적인 의례(儀禮)를 통하여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 될 수 있다.

 

밀교(密敎)성립의 교리사적 배경을 보면 대승불교 교학(大乘佛敎敎學)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있으며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대승불교교학을 실천화(實踐化)·종교화(宗敎化) 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적 대립(對立)을 극복하고 석가모니의 근본적인 교설(敎設)인 실천도(實踐道)로써 불교의 특성을 재규명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밀교는 대승불교교학의 제반 문제점을 실천화의 원리로서 극복하고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갖게 하였으며 또한 인도의 고대신앙(古代信仰)과 문화 및 제반 요소에 불교의 차원 높은 교리적 의미를 부흥하여 인도종교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수용하였다.

 

밀교는 사상적으로는 원시불교(元始佛敎)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까지의 주요한 교의와 사상이 전승되고 고대인도(古代印度)의 문화와 제반 요소가 외형적(外形的)으로 집약(集約)되어 밀교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대승경전(大乘經典)에 나타나는 밀교사상(密敎思想)은 대승불교에 밀교적 요소가 도입(導入) 되어 있어 아직 밀교가 독자적(獨自的)인 사상(思想)으로 독립하지 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밀교의 독립을 뚜렷하게 하는 것은 대승경전의 설주(設主)인 석가모니에서 부터 밀교경전의 설주(設主)인 대비로자나불(大毘盧자羅佛)로의 변화(變化)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밀교적 요소가 대승불교 속에서 독립하여 밀교(密敎)로 확립(確立)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밀교는 이분적(二分的)인 교리(理想)와 수행(思想)을 합일하여 대승불교의 교리적 사상을 실천적(實踐的) 입장에서 정리(定理)하였다.

 

밀교에 있어서는 어떤 교의(敎義)이던지 그것이 실천적인 명상(명상을 통해서 통찰되고, 다시 의식화되어 비교적인 실천에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일체법(一切法)의 본성은 명상을 통해서 통찰되고 이러한 깊은 통찰은 굳은 신념을 낳게 한다.

 

밀교에서는 대승의 교의를 명상을 통해서 깊이 통찰하여 지혜와 자비가 둘이 아닌 일체 공의 종교성을 증득하고 이를 실천한다. 따라서 대승의 교의인 자비가 밀교도들에게 수용되면서 일체의 교설이나 일체의 의식과 의례 및 일체의 신비적인 실천은 모두 자비라는 특징을 갖추게 되니 이것은 일체중생을 불행으로부터 구제하려는 것이다. 공성과 자비가 완전히 하나로 된 것이 보리심이다.

 

우리나라의 밀교(密敎)

 

1. 삼국시대(三國時代)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년)이니, 진왕 부견이 승 순도와 더불어 불상 및 경전을 보내온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또한 백제에 전해진 것은 침류왕 원년(384년)에 진(晋)나라로부터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바다로 백제에 건너와서 불교를 홍포하였다고 하며, 신라에는 법흥왕 15년<528년>에 고구려로부터 온 사문(사문) 묵호자(묵호자)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불교가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공인된로 시점이며, 불교의 전래는 그 이전부터 민중들에게 전파가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전해진 불교는 어떠한 것이였던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백제와 고구려에 아무 저항없이 받아 들여졌다면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에 중국에 이미 전래된 대승불교의 경전 중에는 현세적(現世的)인 공덕(功德)을 설한 재앙(災殃)을 멀리하고 복을 비는 밀교적(密敎的)인 경전(經典)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것은 제18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6월<372년>이였다고 한다. 주왕(奏王) 부견(符堅)이 사자(使者)와 승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낸 것이 불교 전래(傳來)의 초전(初傳)이다. 앞에서 그가 가지고 온 경전(經典)의 내용은 확실치 않으나, 대승불교 중에서도 밀교적(密敎的)인 것도 전해졌으리라고 본다.

 

그의 전거(典據)로서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단지 '인과(因果)를 보여 화복(禍福)으로 인도하여 점차로 익히도록 하되 당시의 민도(民度)에 맞게 이끌어가니, 어려운 가르침은 펴지 않았다'고 하고, 나라에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順道)가 그곳에 있도록 했다. 여기에서 순도가 전한 불교는 오직 민도에 맞는 것으로서 화복(禍福)으로 인도하였다고 하는 것은 밀주(密呪)와 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측(推測)한다.

 

백제(百濟)

 

백제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이는 제15대 침류왕(沈流王) 원년에 인도승(印度僧) 마라난타(摩羅難陀)였다고 한다. 그가 동진(東晋)으로 부터 해로(海路)로 백제로 왔으리라 추정되며, 당시(當時)에 동진에는 밀교경전(密敎經典)이 많이 번역(飜譯)되어 유포(流布)되고 있었으므로 그가 전한 불교는 밀교적인 것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에 어떤 저항(抵抗)을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가 전한 교법이 민중(民衆)의 정서(情緖)과 접하여 아무런 이질감(異質感)을 주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였으므로, 민중은 물론 궁중(宮中)에서도 그를 예경(禮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한 불교는 백제민중이 믿고 있던 토속신앙(土俗信仰)과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이였다면 그것은 밀교적 요소를 가진 것이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新羅)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에 비하면 100년이나 뒤지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신라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삼국 중에서도 가장 큰 마찰(摩擦)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고유신앙(固有信仰)이였던 샤머니즘 내지는 외래사상(外來思想)으로 앞서 들어온 도교적(道敎的)인 요소(要所) 등과 어떤 마찰이 없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피의 희생이 따랐고, 이 피의 희생인 이차돈(異次頓)의 죽음으로써 불교가 수용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차돈의 죽음에서 보여지는 기적(奇績)이나 기타 수많은 이적(異蹟)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때에 신라불교도 국민의 수복(壽福)과 멸죄(滅罪) 등 현세(現世)와 내세(來世)에 복락(福樂)을 누리는 것을 앞세우는 밀교적인 대승불교가 가장 쉽게 수용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라의 밀교 계통의 고승으로는 명랑법사(明朗法師)와 들수있다. 명랑법사가 당(唐)나라에 유학 갔을 때는 밀교(密敎)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명랑은 이러한 많은 밀주법(密呪法)을 전수(傳授)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문무왕(文武王) 8년<668년>에 당의 공격을 받았을 때 문두루(文豆婁 mudra, = 神印)의 비법(秘法)으로 적군을 싸우기도 전에 침몰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비법을 펼치기 위해 단(亶)을 모았던 곳에 절을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 하고, 명랑을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로 삼았다고 한다.

 

2.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신라의 무열왕(武熱王)과 문무왕(文武王)때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統一)하니, 이러한 신라인의 정신을 한 곳에 뭉치게한 어떤 힘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 모두 밀교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소(小)·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두루 간직하고 있던 터임으로 그것이 고스란히 신라에로 넘겨지게 된 것 이였다. 그리하여 신라불교는 호국적(護國的)인 민족불교(民族佛敎)로서, 또는 통불교(通佛敎)로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높은 교리와 실천력(實踐力)을 가지고 민중(民衆)의 생활을 주도(主導)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現狀) 속에서 신라의 불교는 밀교 이외의 다른 가르침이 민중을 일깨우고, 그것을 하나의 힘으로서 분출(噴出)토록 한 것이 바로 신인종(神印宗)을 중심으로 한 밀교였다고 생각된다.

 

신라에 들어온 밀교는 항상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신으로서 국난타개(國難打開)에 앞장섰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신라인들은 밀교(密敎)와 친하였고 신라에 들어온 모든 교리는 밀교와 융합(融合)되어 통불교(通佛敎)로서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고 할 수있다. 신라통일 이후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혹은 외유(外遊)하고 혹은 국내(國內)에서 교화(敎化)에 힘쓰는 중에 특히 밀교적인 부문에 대한 연구와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3. 고려시대(高麗時代)

 

우리나라에 밀교가 수용된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이지만, 그것이 가장 활발하게 신앙(信仰)되고 발전했던 것은 고려시대였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고려에서는 불법(佛法)에 의하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였고,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수행작법(修行作法)으로써 밀교는 인식(認識)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왕실의 독실한 귀의(歸依)를 받게 되었고, 민중의 깊은 신앙적 의지처(依支處)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의 밀교는 독자적인 신앙과 교단으로 발전하여 상당한 교세를 갖게 되었다. 고려에 있어서의 밀교는 교학(敎學)이나 사상적인 발전 보다는 수행작법(修行作法)이나 개인적 신앙 속에서 수용된 면이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確立)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아갔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은 도선(道詵, 825-898)스님을 대단히 숭배하였고 연등(燃燈)과 팔관(八關)도 매우 중요시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원래 연등과 팔관회는 불교의 고려적 수용과 그 전개 과정에서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佛敎儀式)이었으며, 도선의 사탑비보법(寺塔悲報法)과 그 사상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식(圖識)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연원(淵源)과 근저는 모두가 밀교에서 출발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태도에는 신라대로 부터 양대 조류가 있었다. 하나는 명랑으로 부터 효시가 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이고 다른 하나는 혜통으로 부터 시작된 총지계통(摠持系統)이다. 전자는 잡밀의 제작법을 위주로 하여 국가와 사회의 어려움을 극복(克服)하는 것이였으며 후자는 주로 진언을 지송함으로써 개인적 고난을 소멸하려는 것이었다.

 

4. 조선시대(朝鮮時代)

 

불교는 고려말까지만 해도 폭넓은 발전을 거듭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도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는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침체와 퇴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모든 왕조가 억불정책으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지만 태종·세종조의 종단폐합(宗團廢合)을 비롯하여, 사사혁거(寺社革去)와 사사전민(寺社田民)의 소멸, 승과(僧科)·승록사(僧錄司)의 폐지와 승니(僧尼)의 도성출입 금지 등은 자연히 한국불교의 발전과 종단의 위축을 가져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 되었다.

 

이와 같은 왕조의 불교억압 속에서도 밀교만은 타종단에 비해서는 물론이요 그 교학이나 신앙면에 있어서도 의연한 발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밀교는 그 관계 전적들의 간행이나 제종의식(諸種儀式)의 설행(設行)이 오히려 종단폐합 이후에 더욱 많이 행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밀교는 양부만다라와 같은 전통적 사상을 계승하면서 '칠대만법(七大萬法)'과 같은 새로운 법례관을 정립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밀교사상을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조선조의 밀교가 의식작법이나 교학면에서만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 신앙면에 있어서도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귀의(歸依)가 있었고, 승·속의 깊은 신앙적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조의 밀교는 정토와 선을 포섭 또는 상호융섭관계를 갖는 하나의 특성이 있었다. 특히 우리 나라 정토신앙의 염불법문이 각 종파에 분화·수업되었던 특성은 밀교의 그것과 짝하여 조선조에서는 더욱 밀접한 교섭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라니법문이 '정토왕생의 첩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밀교화된 정토신앙으로서의 미타진언류가 널리 지송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조에서는 의식문집들이 무수히 개간되어 널리 유통되었고, 그에 의한 관계의식들도 많이 설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정토관계 진언이나 다라니도 널리 신앙·지송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조에서의 밀교와 미타정토는 여러가지 면에서 상호융섭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밀교의 입장에서 보면, 정토신앙의 밀교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과 사조는 고려시대부터 싹튼 것이지만 그것이 조선조에 와서는 더욱 강화대고 보편화된 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중기부터는 선(禪)도 밀교와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그 말기에는 양자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밀교의 진언이나 다라니를 영이적(靈異的) 언어와 문자로 신앙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그것의 본래적 의미는 모든 복잡한 교리·사상을 한글자에 함축시킨 상징적인 뜻이었다. 그러므로 진언·다라니를 총지라고 한 것이다.

 

선승의 밀교관과 밀교승의 선관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조에서는 선(禪)·밀(密) 융합적 신앙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큰 선승이었던 보우(普雨, ?-1561)스님은 물론이요 휴정(휴정, 1520-1604) 스님까지도, 주(呪)를 수지하는 사람은, 현세에 지은 업을 제압하기가 쉬워 스스로의 행에 의해 떨쳐버릴 수 있으나, 숙업(宿業)은 제거하기가 어려워 반드시 신력(신력)을 빌려야 한다......라고 하여, 진언지송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휴정스님은 종래의 헌공의식을 선가(禪家)의 취향에 맞게끔 개찬한 <운수단>과 <설선의>를 펴내면서 관계된 진언들을 삽입시킴으로써 의식 자체가 밀교적으로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 속에서의 신앙의 내용이나 의식면에서 더욱 풍부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하여 보우·휴정 이후부터는 많은 선승들도 자연스럽게 밀교의식에 참여하거나 진언지송을 일과로 하였다. 원래 선의 소의경 중의 하나였던 능엄경에서 진언만으로 독립된 능엄주가 각종 밀교의식에 원용된 사실에서도 조선조의 밀교와 선의 융섭된 모습을 볼 수 있다.

 

5. 근대·현대(近代·現代)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시대의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인한 침체(沈滯)에서 약간의 위상(位相)이 높아지게는 되나, 이는 일본의 문화정책의 일환이었을뿐 1911년에 제정된 사찰령(寺刹令)으로 전국에 있는 사찰이 일제의 통제하(統制下)에 놓여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많은 불교종파가 한국으로 들어오니, 그 중에 밀교계통(密敎系統)으로는 진언종(眞言宗)이 있었다. 이로부터 진언종의 사원(寺院)이 한국의 각처에 건립(建立)되었으나 그들의 활동대상(活動對象)은 일본인(日本人)에 한정되었다.

 

산중불교로써 위치가 굳혀져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찰이 민중의 생활터전과는 거리가 먼 산악지대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일반민중과 거리가 있었던 것을 일제치하에는 어느정도 생활 속으로 끌어내려졌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겠지만,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갑자기 결혼한 승려가 생겼고 이것으로 인해서 해방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끊임없는 종단분규의 요인을 제공해주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불교 종단이 많이 등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밀교에 속하는 종단으로서 총지종, 진언종, 진각종 등이 있다. 이들 종단에서는 소의경전으로서 대일경, 금강정경, 대승장업보왕경, 대승리취대파라밀다경 등을 받들고 교주로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수행방법으로는 각 종단이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주로 육자진언(六字眞言)과 준제(準提)진언을 등 여러가지 진언을 송지하는 삼밀관행을 수습하고 즉신성불, 밀엄국토(密嚴國土)로써 불국토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중에는 일본 진언종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것도 있다.

 

위와 같은 밀교계통의 종단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타의 모든 종단에서는 조석으로 드리는 예불이나, 불공에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봉송하니, 이 천수경에는 많은 진언이 있고, 반야심경도 반야경계통이지만 이것도 밀교경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반야공의 지혜는 밀교에 이르러서 완성된다는 취의에서 심경의 끝에 반야주가 나온다. 이뿐아니라 각종 주원문이나 수행정진에서 송주가 자고로 선과 봉행되어 행해지고 있고 또한 일부 선(禪)도량에서는 일자불정륜왕주 염불이라고 하여 염송하고 있으며 승원의 생활이 모두 진언으로 성화되고 각종 의식을 비롯하여 사구제·백일제 등 모든 불사가 거의 밀교적인 의궤에 의해서 행해진다.

 

고래로 부터 전해오는 이러한 한국의 불교에서는 인도의 탄트라리즘(=左道密敎)적인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이는 우리 나라의 유교적인 영향적으로 인한 또한 일본의 밀교와도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한국 불교의 모습이요, 한국밀교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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