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 시편 1편과 2편
Christ in the Psalms: Psalms 1 and 2
Joseph A. Pipa/ 박태현 역
당신은 시편을 즐겨 읽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합니다. 시편은 영혼의 거울이다. 칼빈은 시편에 대해 기록하기를, 시편은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도”라고 했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치듯이 여기서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묘사되지 않는 감정이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오히려 성령께서 여기서 삶에 대하여 모든 비통함, 슬픔, 두려움, 의심, 소망, 염려, 당황스러움, 간략히 말해서 사람의 마음이 동요되기 쉬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시편은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풍성한 계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시편의 풍성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시편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구약을 읽을 것을 가르치셨다(눅 24:27, 44). 성령께서는 시편 가운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하셨다. 어떤 시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예견하면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한다(예를 들어, 시 45편, 시 110편). 다른 많은 것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들로서 작용한다. 예표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어떤 것을 계시하는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이다(제사장, 희생 제사, 성전 등). 구속사에서의 다윗의 독특한 역할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 구주의 삶과 사역의 다른 측면들을 예고하셨다.
어떤 시편들은 다른 것들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보다 더 명백하게 예표적이다(시 2편과 시 22편). 이런 시편들 전체는 다윗의 경험을 통한 구주에 대한 계시이다. 하지만 다른 시편들은 보다 미묘하게 구주를 계시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윗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편을 지었을 때, 그는 신약 기록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던 특정한 경험들을 사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시편은 그리스도의 삶의 측면들을 그리는데, 특히 그의 고난을 그린다. 한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시편 31:5절을 사용한 것이다. 혹은 사단이 예수를 시험할 때 시편 91:11을 사용한 것이다. 이 시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예표들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전반적인 경험이 그 자체로 구주에 관하여 예표적이다. 몇몇 시편에서 그리스도는 감추어져 있는데, 말하자면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그런 시편들의 이상적인 성취가 시편을 작성자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시편 기자는 죄 없는 구주 외에는 그 누구도 취할 수 없는 주장을 하였다(시 17:1-5, 참조. 사 53:9, 고후 5:21).
나는 예표적 시편의 두 범주에 대한 예들로서 시편 1편과 2편을 검토하고자 한다. 시편 1편은 간접적으로 예표적이다. 그리스도는 그림자 가운데 숨겨져 있다. 시편 2편은 직접적으로 예표적이다. 각각의 행은 다윗의 경험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친다. 우리는 각각의 시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계시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다윗에 의해 작성된 이 두 시편은 짝을 이룬 작품으로 시편의 주제를 소개한다. 시편 1편은 의인의 특성과 축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의 심판을 택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통해 장차 그 심판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여준다. 게다가 이 두 시편은 서로 엮여 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축복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하고 시편 2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으로 마무리한다.
내가 진술했듯이 시편 1편은 간접적으로 예표적이다. 시편 1편은 3개의 연(聯)을 포함한다. 의인의 특성(1-2절)과 의인의 조건(3-4절), 그리고 의인의 확신(5-6절).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함으로 죄와의 접촉을 피하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한다. 하나님은 의인을 번성케 하시고, 특히 영적으로 번성케 하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여 겨와 같이 버리신다. 의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며, 반면에 악인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는 의인이다. 그리스도는 이 시편과 다른 모든 시편의 의인이다. ‘그 사람은 복이 있나니’에서 단수의 사용은 그리스도, 참된 의인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많은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는 패턴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죄함, 도움과 구원, 위로와 보호를 읽을 때 이 약속들은 그 배경에 감춰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속한다. 그가 이것들을 경험한 것처럼, 그것들은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였기에 우리의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27편에 약속된 축복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우리의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직접적인 예표로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발견하기 위해 시편 2편을 살펴보자. 내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편 2편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구속사에서의 그의 위치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위대한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편에서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그를 모든 사람과 나라들 위에 통치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시편을 4개의 연으로 나누었다. 나라들의 반역(1-3절)과 하나님의 반응(4-6절)과 왕의 확신(7-9절), 그리고 회개로의 촉구(10-12절). 이 시편은 다윗의 생애를 선명하게 연대순으로 기록하였다. 다윗을 왕으로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서 그를 왕으로 세우심, 원수들에 대한 다윗의 승리, 그리고 복종할 것을 촉구함.
물론 시편이 진전됨에 따라 다윗의 달은 점점 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빛을 잃어간다.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숙고할 때에 성령의 인도함으로 그는 자신의 위대한 아들의 경험을 예언하였다. 사도행전 4장 24절에서 교회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고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말 것을 명령했을 때,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그들이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그들을 시편 2편으로 인도하셨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행 4:24-29].
사도행전 4장 27절에서 다윗에게 이 말씀을 주신 성령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다윗에 의해 묘사된 그 거역의 성취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죄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시편 2편은 자신감이 넘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구원을 위해 확신 있게 기도할 수 있었다.
시편 2편을 통해 진전됨에 따라 다윗은 하나님의 왕적 아들의 높아짐을 옹호하였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바울은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하고,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1장 5절과 5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에 적용한다. 마지막 연에서 왕이신 그리스도는 열방을 불러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시 2:10-12). 그리스도는 금세기를 통하여 이 사역을 지속하신다. 시편 22편 22절에서 그는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1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설교 사역을 통해 선포하신다고 가르친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 첫 번째 두 시편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구주께서 시편 가운데 어떻게 예표적으로 계시되었는지 잠깐 들여다본다. 2부(部)에서 우리는 시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읽고 설교할 것인지 숙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