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김명희 역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
믿음생활에서 영적인 삶이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심리학적으로 영적인 삶에 대해 접근하는데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신앙적 고민은 교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네덜란드인으로 제수이트파의 사제이다. 그는 심리학을 공부하여 노틀담대학과 예일대학에서 가르쳤지만 신앙적 고민으로 인하여 페루의 빈민가로 간다. 다시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결국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L' Arche) 정신박약 지체인 공동체에서 생활하다가 1996년 9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여 권이 넘는 그의 저서들은 이러한 그의 고민에 찬 삶을 잘 반영해 준다. 특히 그는 자기 자신의 사목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자신을 철저히 분석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그 둘이 결국 연장선상에 있음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글은 매우 설득력이 강하다. 또 실제로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책에 옮겨 놓고 있는데 <거울 너머의 세계(Beyond the Mirror)>는 그가 당했던 교통사고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실감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고, 이제 소개하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the Beloved)>도 역시 그가 10여 년 동안 알고 지낸 한 젊은이에게 보낸 편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프레드 브래트먼(Fred Bratman)이라는 한 유대인 젊은이가 "나와 나의 비그리스도인인 친구들이 들을 수 있도록 영성에 관한 글을 써 주십시오"라고 요청한데 대한 답변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요청은 곧 저자의 종교적 전통을 모르는 자들(세상의 생존경쟁 속에서 날마다 아우성 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느냐는, 도전적이고도 절실하게 필요한 요청이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저자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고 이 유대인의 요청과 같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실감하는 본인에게 이 작은 책은 몇 가지 공감대와 감동을 주고 있다.
나우웬은 머리말에서 그가 프레드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프레드의 사랑어린 요청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소개해 준다. 전체가 3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각각 '사랑받는 자가 되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라는 제목 아래 그 내용이 펼쳐지고 있다.
첫 부분인 '사랑받는 자가 되다'에서 저자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부터 난 소리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 17)는 말씀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는 이 말씀이 그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전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선 우리의 존재의 핵심진리를 표현하는 이 사랑 받고 있다는 음성을 듣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는 바로 교만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자기 거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을 듣더라도 자신의 가장 깊은 내부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인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에서 저자는 사랑받는 자가 되면 사랑받는 자가 되어가야 한다고 피력한다. 이 의미는 사랑받는 자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에는 붙잡히고(taken), 축복받고(blessed), 상처받고(broken), 나누어 주는(given) 네 단어가 필요한데 그는 이것을 빵을 잡고 축복하고 떼어서 나누어주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붙잡힌 것의 의미는 선택받은 것으로 더 잘 표현될 수 있으며, 이 선택은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함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어느 누구도(심지어 부모라도)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영적 투쟁이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3 가지 지침이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세상의 거짓말을 과감히 버리는 것, 선택받은 자라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알려주는 사람들과 장소를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 셋째로는 감사를 말함으로써 이겨내는 것이다.
축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며, 이것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으로,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단언이라고 저자는 독특한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곧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 축복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말을 많이 하지말고 성경 등을 통하여 경청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그 축복을 듣기 위하여 민감하게 의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낭비라고 생각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보통 피하거나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과 친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가 이르게 될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상처를 축복 아래 갖다 놓는 것이 중요하다. 저주 아래에 있는 상처는 그야말로 고통과 방해거리일 뿐이지만 축복 아래에 있는 상처는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용납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나누어주는 삶이 있어야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은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행복은 가지고 있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이 나누어줌은 살아있는 동안 뿐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재능과 은사의 차이이다. 재능은 거의 없으면서도 은사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최종적인 상처가 되는 죽음은 최종적 선물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죽음은 단순히 이별이나 상실, 실패가 아니며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큰 의미를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이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을 다룬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거나 돈과 명예를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추구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면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참되게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은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예'라는 반응을 통하여 그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우웬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선택 교리와 영적인 전쟁 등의 문제를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고민과 뚜렷한 몇몇 지침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과 구체적인 방법들이 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이 책의 중간 중간에 섞여 있는 공동체 이야기와 프레드에 관한 추억들은 그의 글이 얼마나 현실적인 삶을 토대로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우웬의 깊은 묵상과 통찰력, 삶에 근거한 신앙과 그 글들은 정말 소중한 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런데 그의 글 후기에는 이 편지를 받아 본 프레드가 자신이 처음에 요청한 질문에 적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음이 적혀있다. 즉, 이 글은 프레드에게 어느 정도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나우웬은 자신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혼란에 빠졌는데 갑자기 이 글을 어느 교회의 지도자 과정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속적인 친구들을 사용하여 그분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놀라고 있다. 교파를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부러운 면도 없지 않지만 이렇게 복잡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놀랄 수 있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