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의 의미 (고전 11:17-26)
여성도의 머리 문제에 대해 교훈한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교회에서 파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성만찬에 대해 교훈한다. 이는 모두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성도의 머리 문제가 교회와 세상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면, 성만찬 문제는 세상과 다를바 없는 교회의 모습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영적으로 해로운 예배(17~22절)
바울은 2절에서 전통을 잘 지킨 고린도 성도들을 칭찬했는데, 성만찬과 관련해서는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하고 끝내면서 강하게 책망했다(17a, 22b절). 그는 “너희 모임(예배)이 도리어 해롭다"고까지 한다(17b절). 그들 중에 '파당'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파당'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이레시스'는 영어 'heresy' 어원으로, '이단'이라는 뜻이다(19절). 바울은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도 하는데, 이는 "너희의 식사는 주의 만찬이 아니다"라는 뜻이다(20절). 당시에는 주일 저녁에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성만찬을 거행했는데(참조, 행 20:7), 문제는 먼저 온 부자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빈손으로 늦게 올 수 밖에 없는 노예나 노동자 교인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고 마셨다는데 있다. 가난한 성도들이 도착할 때쯤이면 먼저 온 부자들은 식사를 마치고 포도주까지 마셔서 취하기까지 했고, 먹을 음식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21절). 바울은 이런 행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책망한다(22절). 왜 예배하기 위해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있느냐고 질타한다. 이는 예배가 아니라 친목모임에 불과했다. 이처럼 주님을 기억하지 않고, 형제를 배려하지 않는 모임은 예배가 아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예배(23~26절)
초대교회의 예배는 지금처럼 정형화된 예전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식사 교제에 약간의 종교적 의식이 가미된 모임 정도로 오해할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성도들에게 성찬식의 의미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그들을 질타한 후 다시금 그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성찬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의식이기에 결코 웃고 떠들며 식사를 나눌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23~25절).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성찬을 거행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6절). 성찬이 단지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세상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다 그렇지만, 특히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이 교회 안에서 재현되는 시간이다. 비록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일이지만, 우리가 성찬을 나눌 때 우리 안에서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나는 의미를 가진다. 이 놀라운 신비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될 수 없다.
우리는 예배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하나가 되며, 형제들과 하나가 되는 시간이 바로 예배이다. 참된 예배를 회복함으로 주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모든 성도가 하나 되고,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룰뿐 아니라 그 선한 영향을 세상으로 퍼뜨려야 한다. 이런 역동적인 예배가 우리의 예배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