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1.역사
1-1. 역사 자료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의 통치기에 비잔틴 시대(326-638년)가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은 비잔틴기독교제국의 종교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비잔틴 시대가 시작되기 전(2-4세기)의 예루살렘 공식 명칭은 아엘리아 캐피톨리나(Aelia Capitolina)였으며, 콘스탄틴 황제 때 예루살렘으로 환원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역사 자료들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다양한 연대기: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의 역사 기록 등.
(2) 예배 문서들
(3) 수도승들의 傳記: 이베리아의 베드로(Peter the Iberian), 유디미우스(Euthymius), 사바스(Sabas)와 같은 수도승들의 전기.
(4)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기록
(5) 순례자들의 여행기: 보르도의 순례자(the Pilgrim of Bordeaux), 에제리아(Egeria), 플라센티아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Placentia) 등 비잔틴 시대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쓴 여행기가 있다.
1-2. 건축 활동
콘스탄틴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 예루살렘에서는 시내에 있는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와 감람산에 있는 주기도문교회(the Eleona Church) 건축 등 교회당 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성벽도 콘스탄틴 황제가 재위에 있던 비잔틴 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예루살렘에서의 건축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건립된 주요한 교회로 시온산의 성시온교회(the Church of Holy Zion)와 감람산의 승천교회(the Church of the Ascension)를 꼽을 수 있다. 5세기 중반 유도키아 여왕(Empress Eudocia)은 도시의 발전과 건축을 위해 상당한 액수의 공채를 발행하였다. 이 여왕은 시온산에 성벽을 새로이 축조하였으며, 실로암 연못가에 교회를 건립하였고, 도시 북쪽에 성 스테반(Saint Stephen)을 기념하는 교회(성스테반교회)를 건립하였다.
5세기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크리스챤 순례자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 시내에 자신들의 집을 짓기도 하였다. 유디미우스(Euthymius),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사바스(Sabas) -그들의 사역은 예루살렘의 도시 특성과 종교적인 지도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었다-와 같은 유대광야에서 온 수도승들이 주도하여 예루살렘 근방에서 수도원제도(monasticism)의 핵심 골격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한편, 하드리안(Hadrian) 이래 금지되었던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 및 방문이 438년 유도키아(Edocia) 여왕에 의해 허락되었다.
예루살렘은 6세기에 이르러 그 장려함에 정점에 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가 재위에 있을 때 많은 건축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네아”교회(the "Nea" Church)와 카르도(Cardo)의 남쪽 연장 부분이다. 비잔틴 시대 말기에는 예루살렘 자치 구역이 성벽 바깥까지 확대되었으며, 북쪽과 서쪽에 근교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이 주거지역들에도 교회, 수도원(monastery), 수녀원(convent), 장례식장, 상점, 공장 등이 있었다. 예루살렘 북쪽과 감람산에는 아르메니안 공동체의 종교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614년,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불에 탔고 수천 명의 기독교 신자들과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시신들을 안치해놓았던 도시 내의 건물들과 35개소의 주요 현장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수도승 스트라테기우스(Strategius)의 글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데스투스 감독(the patriarch Modestus)이 파괴된 교회들 가운데 일부를 복원하였는데, 성묘교회도 이때 복원되었다.
2. 메데바 지도에 나타난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6세기 말의 모습이 메데바 지도(Medeba map)에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20여개의 망대(tower)와 몇 개의 성문이 달려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2-1. 성문과 도로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main gate)은 북쪽의 성스테반문(Saint Stephen's Gate)이었다(A문). 이 성문은 하드리안 황제가 아엘리아 캐피톨리나 시대를 연 2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매우 장중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다마스커스문(Damascus Gate)의 기초 아래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성문 안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으며, 광장 중앙에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기념주(pillar)가 있다(1).
이 광장에서 시작되는 두 大路가 남쪽으로 뻗어가면서 예루살렘 시내를 종단하고 있다. 이 두 도로 가운데 제1 카르도(I)는 성스테반문에서 시온산 북쪽에 있는 시온문(B)까지 예루살렘 시내를 북에서 남으로 양분하고 있었다. 카르도 전체 모습이 메데바 지도에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카르도의 양쪽 도로변에는 두 줄의 원기둥 위에 설치된 지붕이 있는 주랑이 있었다. 건축상의 증거들에 근거하여 판단할 때, 카르도의 북쪽 절반은 아엘리아 케피톨리나 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남쪽 절반은 비잔틴 시대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2 (동쪽) 카르도(Ⅱ)는 다마스커스문 안쪽에 있는 광장에서부터 남쪽으로 뻗어있는데, 메데바 지도를 보면 제2 카르도에는 주랑이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2 카르도는 두로포이온 계곡을 따라 뻗어있다.
또 다른 도로(Ⅲ)가 제2 카르도에서 동쪽으로 분기되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따라 古都의 동쪽 성벽에 있는 오늘날 성스테반문(<Saint Stephen's Gate>, 혹은 사자들의 문<Lions' Gate>)이라고 불리는 베냐민문(the Gate of Benjamin)(D)까지 뻗어있었다.
예루살렘의 서쪽 성벽에 관한 것으로, 메데바 지도에는 현재의 자바문(Jaffa Gate) 자리에 다윗문(David's Gate)(F)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한 도로(Ⅳ)가 “다윗 망대”와 연접해 있는 다윗문이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Ⅴ), 현재의 아르메니아 구역 도로(Armenian Patriarchate Street)까지 이어졌었거나, 아니면 그보다 약간 동쪽에 있는 시온산까지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2. 주요 건물
메데바 지도에서 카르도 주변에 표기되어 있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주요 건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북쪽의 성묘교회(2)
②“네아”교회(3)
③ 시온산 정상에 있는 성시온교회(18)
가옥들과 그밖의 다른 건물들도 메데바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데, 주로 성벽 안쪽에 밀집되어 있다.
메데바 지도에 나타난 것을 보면,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의 도시 계획과 구성(town plan and layout)은 아엘리아 케피톨리나 시대 로마시의 주요 자치구의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많은 건물들, 특히 종교 건물들이 예루살렘을 기독교적인 비잔틴 문화(Christian- Byzantine)의 도시 특성을 담아내고 있다.
3. 탐사 활동(Excavations)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에 대한 연구는 먼저 고대 교회당들에 집중되었다. 이전에 교회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교회당을 건축할 때 이따금씩 고대 교회당의 잔재들이 발굴되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래 예루살렘 성벽과 古都의 남쪽과 북쪽 주거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967년 예루살렘이 재통합(reunification)된 후 예루살렘 지역에서 광범위한 탐사 작업이 이루어져 새로운 유물‧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학자들은 이 발굴물들을 토대로 하여 도로 설계도, 주거지역, 수많은 교회들과 종교 시설들의 위치 등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의 모습과 일상 생활 형태에 대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4. 예루살렘 성벽(The City Wall)
4-1. 탐사 활동
오벨(Ophel)의 동쪽 구역, 성전산 남쪽에서 워랜(C. Warren)은 1867-1870년 사이에 비잔틴 시대 성벽 일부(길이 240m)를 조사하였다. 이 성벽의 북쪽 부분은 헤롯이 성전산 주위에 축조한 성벽(the Herodian Temple Mount enclosure)의 남동쪽 모퉁이에 인접해 있다. 그곳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건너다보면서, 오벨의 동쪽 경사면 꼭대기 부분을 따라 뻗어있다.
케뇬(K. Kenyon)은 1967년 S2 구역에서 비잔틴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 오벨 성벽의 안쪽 면의 약간 확장된 부분을 탐사하였다.
1970년대, 마자르(B. Mazar)는 오벨 구역에서 탐사 작업을 수행하여 이 성벽 안쪽 면의 대부분을 발굴하였다. 이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3m 정도이며, 성벽의 안쪽 면과 바깥쪽 면은 잘 다듬은 정사각형의 돌로 축조되어 있고, 양쪽 면 사이의 틈은 자연석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성벽은 몇 개의 우묵들어간 가로층(several recessed courses)으로 된 폭이 넓은 기초 위에 축조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양쪽으로 몇 개의 망대가 세워져 있다.
오벨 남쪽에는 비잔틴 시대의 성벽이 다윗성이 있는 산의 동쪽 경사면 꼭대기 부분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실로암 연못 주위에 있는 바위 절벽 위의 A2 구역에서, 실로(Shiloh)는 폭이 넓은 성벽 유적을 약간 발굴하였다. 그는 이것이 비잔틴 시대 다윗성의 남쪽 방어용 성벽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3 유적층).
블리스(Bliss)와 딕키(Dickie)가 1894-1897년 사이에 성전산 남쪽 경사면에 있는 비잔틴 시대 성벽 일부를 조사하였는데, 몇 백 미터되는 조사 구간에는 망대가 5군데 있었고, 성문이 1곳 있었다. 이 부분의 비잔틴 시대 성벽은 제2 성전 시대에 축조한 제1 성벽을 따라 뻗어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제1 성벽 위에 다시 축조된 곳도 있고 제1 성벽과 약간 떨어져서 축조된 곳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잘 다듬은 정사각형의 돌로 축조되었며, 이전에 축조한 성벽에 사용되었던 돌이 다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4-2. 성벽의 축조 방식과 연대
발굴된 성벽들은 비잔틴 시대 성벽이 전체적으로 혹은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건축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비잔틴 시대 성벽들은 대부분 잘 다듬은 정사각형의 돌벽돌로 축조되었으며, 이따금씩 직사각형의 돌벽돌이 사용되기도 했다. 파괴된 제2 성전 시대의 건물이나 성채에 사용되었던 가장자리를 다듬은 돌이 재사용된 경우도 적지 않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은 돌벽돌로 축조하였고, 그 사이는 돌과 몰타르(mortar)으로 메꾸었다. 간혹 성벽을 쌓은 돌벽돌과 돌벽돌 사이를 회(plaster)로 접착시키고 있다. 성벽의 두께는 모두 3m로, 예루살렘의 초기 성벽들보다 폭이 좁다. 성벽들은 몇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성벽보다 폭이 넓은 기초 위에 축조되어 있다.
고고학의 증거로 볼 때, 예루살렘의 비잔틴 성벽은 대체적으로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로마 시대 말에서 비잔틴 시대 초)로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축조한 주 요인은 4세기에 콘스탄틴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후 종교적인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중요성 커졌기 때문이었다.
블리스와 딕키는 역사 자료(the historical sources)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발굴한 시온산의 남쪽 지역에 있는 성벽이 5세기 중반 유도키아 여왕 때 축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 시온산에 있는 성벽은 로마 시대 말기와 비잔틴 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이 확실한 다른 비잔틴 성벽들 -예를 들면, 오벨 성벽, 다마스커스문 근처에서 발굴된 성채와 성벽-과 축조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그러므로 시온산의 남쪽 지역에 있는 성벽이 비잔틴 시대 초기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비잔틴 시대 말기에, 예루살렘 성벽 일부가 보수되었는데, 동쪽의 오벨에서 발굴된 것처럼 조잡하게 쪼갠 커다란 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 보수 작업이 고아랍 시대(the Early Arab Period)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5. 다윗성(City of David)과 남쪽의 두로포이온 계곡(중앙골짜기)
5-1. 탐사 활동
1923년에서 1925년 사이에, 마카리스터(Macalister)와 던켄(Duncan)은 다윗성의 북쪽 지역 중앙에 있는 비잔틴 시대 私家들의 유적들(the remains of private houses)을 발굴하였다. 이 시대의 가장 오래 된 유적층에서 발굴된 유적들 가운데 도로 변의 가옥은 중앙에 마당이 있고, 그 주위로 네 개의 방이 둘러서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의 방바닥에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모자이크붙임(쪽매붙임)이 되어있고, 벽에는 밝은 색의 회칠이 되어있다. 그리고 네 개의 방들 가운데 한 방의 지하는 회칠한 벽에 물고기가 그려져 있는 저수조이다. 아비 요나(Avi Yonah)는 건물의 구조와 쪽매붙임에 근거하여 이 가옥을 비잔틴 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크로푸트(Crowfoot)와 피츠게랄트(Fitzgerald)는 1925-1927년 사이에 다윗성의 북서쪽 끝부분에서 탐사 작업을 하였는데, 비잔틴 시대의 것인 두 유적층에서 방대한 양의 건물 유적을 발굴하였다. 둘 가운데 시기가 더늦 유적층에서 발굴된 사가(私家)들은 넙죽한 돌판이 깔려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리막 경사가 진 도로(폭은 약 5m) 양편에 서 있다. 도로 양편에 있는 건물들로부터 흘러나온 하수는 중앙 하수관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건물 유적들 가운데 15개의 방이 있는데, 그 방들의 벽 가운데 일부는 3m 정도의 높이까지 남아있으며 도로쪽으로 출입문이 나있다. 그리고 그 방들 가운데 일부에는 쪽매붙임과 여러 가지 회를 바른 석조시설(plastered stone)이 되어있는데, 이는 그 건물이 도로 가에 위치한 상점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로 동쪽에 있는 집의 한 방에서는 청동과 유리 그릇들을 모아놓은 것이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들의 연대를 6세기 후반부로 추정하였다. 이 건물들은 614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침략 때 파괴되었으나 후에 다시 복원되었다. 마그네스(J. Magness)는 이 건물들 속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분석한 후 이 건물들이 고아랍 시대(the Early Arab period)까지 계속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8년 크로푸트(Crowfoot)는 중심 발굴지의 남쪽 부분을 굴착하였는데, 포장된 도로의 다른 구역과 비잔틴 시대 말기에 그 도로를 따라 서 있었던 건물들의 파괴된 잔재를 발굴하였다. 그 방들 가운데 일부는 바위를 파내고 만들었으며, 바닥에 쪽매붙임이 되어있는데 현재 그 파편들이 남아있다. 한 건물의 쪽매붙임을 한 바닥 중앙에서는 원형으로 된 일곱 줄의 희랍어 비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케뇬(Kenyon) 또한 1961-1967년 사이에 다윗성의 M, N, R 구역에서 비잔틴 시대 건물들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실로(Shiloh)는 1983년, 다윗성의 남쪽 부분인 K구역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하던 중 세 번째 유적층에서 4세기에 세워진 건물을 발굴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비잔틴 시대로부터 연속되는 4단계의 건축 과정을 식별할 수 있었다. K 구역에서 나온 다양한 발굴물들은 다윗성의 북쪽과 두로포이온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멀리 서쪽까지 비잔틴 시대에 활발한 건축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해 준다. M, N, R, K 구역에서 발굴된 건물들은 비잔틴 시대 말기에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혼잡하게 붙어 살던 자취이며, 마자르(B. Mazar)가 오벨(Ophel)에서 발굴한 유적들과 비슷하다.
5-2. 실로암교회(The Church of Siloam)
블리스(Bliss)와 딕키(Dickie)는 1894-1897년 사이에 실로암교회의 유적을 발굴하였으며, 5세기 중반 유도키아 여왕(Empress Eudocia)이 이 교회당을 건축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교회당 건물은 실로암 연못(the Siloam Pool)의 북쪽에 세워져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어떤 부분은 2.5m이상 높이로 남아 있다. 이 교회는 입구가 북쪽에 있으며, 교회 본당으로 내려가려면 안뜰(atrium), 나르텍스(narthex), 회랑(vaults)을 지나야 한다. 이 교회(16 x 28m)는 2단계의 건축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남쪽 복도는 실로암 연못 쪽으로 문이 나있는데, 주랑의 현관을 지나면 실로암 연못에 닿는다.
6. 오벨(Ophel) 및 성전산 남서단(南西端) 부근
마자르(B. Mazar)는 1968-1978년 사이에 오벨 및 성전산(the Temple Mount) 남서단 부근에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비잔틴 시대의 건축 단계를 알 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것들을 발굴하였다.
6-1. 오벨에서 발굴된 유적들
비잔틴 시대 초기인 4-5세기에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오벨에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들은 열주식(peristyle)이며, 전형적인 형태는 마당 주위로 방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벽은 매끄럽게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때로는 프레스코 화법(fresco)과 치장벽토작업(stuccowork)을 이용해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지붕은 방 한 가운데 있는 석재 아치에 나무 서까래를 얹어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바닥은 땅을 다지거나 돌판을 깔았다. 건물 바로 밑부분은 저수조였다.
7066번 건물은 본래 로마 시대에 성전산 남서단 근방에 세운 것인데, 약간의 증축과 개축 과정을 거치면서 비잔틴 시대 초기까지 계속하여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화재로 인하여 일부 파손되었다. 발굴된 화폐로 보건데 그 화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산 근처에 정착하였던 361-363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산의 서쪽벽 돌에 새겨진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이와 비슷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곳에 새겨진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 . .”(사 66:14).
오벨 지역에 있었던 대부분의 건물들이 오마야 왕조 시대(Umayyad (Omayyad>)의 건축 공사 때 그리 심하게 파괴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비잔틴 시대 말기 오벨 지역의 도시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가(私家)들의 유적이, 일부는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발굴된 건물들의 설계도는 다소 획일적인데, 건물 중앙에 있는 마당 주위로 몇 개의 방이 있으며 마당쪽으로 방의 출입문과 창이 나있다.
6-2. 성전산 남서단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들
비잔틴 시대의 가장 인상적이며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 성전산 남쪽 성벽의 삼중문(the Triple Gate)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건물이 5세기 중반 유도키아 여왕(Empress Eudocia) 때의 것으로서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소나 수도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성전산의 남서쪽 가까이에 있는 한 건물의 1층(floor)에서 백회반죽을 바른 석조 상인방(上引枋; lintel)이 발굴되었다. 상인방에는 일곱 가지가 달린 장식 촛대(menorah), 향 삽(an incense shovel), 루랍(a lulab), 그리고 황소뿔로 만든 각적(角笛; shofar)과 에트로그(ethrog)로 짐작되는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들은 비잔틴 시대의 유대교를 연구할 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상징들이다. 또 다른 장식 촛대 그림들이 이 건물의 벽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명기의 몇몇 절을 기록한 양피지 조각인 메주자(mezuzah)를 놓기 위한 벽감(notch)이 삼중문 남쪽에 있는 큰 건물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굴물들은 유대인들이 614년의 페르시아의 침략 이후, 또는 638년의 아랍에 의한 점령 이후에 성전산 근처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그리스도인 주거지(the Byzantine Christian houses)에 임시로 정착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잔틴 시대 말, 성전산의 남서단 남쪽 지역에 -중앙 저수지와 여러 갈래의 수로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개 시설이 만들어졌다. 이 농업 지역의 남쪽에는 성전산의 남쪽 성벽까지 평행을 이루는 70m 정도 길이의 두꺼운 성벽이 설치되어 있다.
7. 남서부 언덕(The Southwestern Hill)
남서쪽 언덕에서 발굴된 비잔틴 시대의 유적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교회들-그 교회들 가운데 네아교회(the Nea Church)가 首 교회이다-의 유적과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의 중앙 도로(thoroughfare)인 카르도(Cardo)를 포함한 도로 유적이다.
비잔틴 시대에 민간인들이 남서부 언덕에 정착하여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3세기가 끝나갈 무렵 제10 로마 군단(the Tenth Roman Legion)이 그곳에 있던 주둔지로부터 철수한 이후였다. 하지만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그보다 늦은 시기, 특히 6세기에 이루어졌다.
남서부 언덕에서 발굴된 비잔틴 시대의 유물‧유적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아비가드(Avigad)가 1969-1982년 유대인 구역(the Jewish Quarter)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유물들의 대부분은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있다. 카르도와 네아교회 외에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마름돌(ashlar) 벽돌로 쌓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성벽이 있는데, 유대인 구역과 아르메니안 구역(the Armenian quarter)의 경계에 있는 아라랏 도로(Ararat Street) 위에서 발굴되었다(R 구역). 그리고 벽돌을 쌓아서 만든 온돌을 이용해 물을 덥히었으며 대리석판으로 만든 목욕통이 있는 비잔틴 시대 말기의 공중목욕탕이 유대인 구역의 북쪽 부분에서 발굴되었다(C 구역). 다른 구역에서 발굴된 것들 중에 육중한 벽의 일부와 비잔틴 시대의 전형적인 쪽매붙임을 한 바닥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의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았다는 증거를 제공해 준다.
7-1. 카르도(The Cardo)
아비가드(Avigad)는 1976-1981년 X구역에서 비잔틴 시대의 카르도(Cardo) 유적을 발굴하였다. 카르도 유적은 오늘날의 유대인로(Street of the Jews)와 하바드로(Habad Street)를 따라 있는데, 카르도에 의해 유대인 구역이 남에서 북으로 양분되고 있다. 카르도의 남쪽 부분은 암반을 떠내고 평평하게 다듬은 후 바위 위에 곧장 포상석(鋪床石)을 깔았다. 반면에 카르도의 북쪽 부분은 땅을 몇 미터씩 돋운 다음 그 위에 포상석을 깔았다. 도로 중앙은 다른 부분에 비해 포상석이 불룩하게 깔려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해서 도로 가장자리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는 경사를 이루고 있다. 카르도의 서쪽 가장자리는 커다란 마름돌을 쌓아서 만든 축대인데 한 부분만 원형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카르도 동쪽에는 큰 돌로 건축한 아치 형태의 아케이드가 다듬돌로 쌓은 축대 위에 길게 서 있다. 아치 가운데 일부는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는 그 이후의 건축시 재사용되었다. 카르도(폭 22.5m)는 지붕이 없는 폭이 넓은 도로와 지붕이 있는 양 가장자리의 주랑(stoa)으로 구분된다. 주랑의 지붕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데, 목재 서까래 위에 기와를 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지붕은 도로 안쪽으로 경사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평평한 지붕을 지탱해주는 서까래를 얹은 벽의 홈이 도로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서있는 벽 위쪽에서 발견되었다.
카르도 남쪽 부분은 암반을 떠낸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도로 안쪽으로 빗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도랑을 깊게 파고 그 위에 포상석을 덮은 배수구가 북쪽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기둥들 가운데 두 개의 기둥만 원형(原形)대로 발굴되었고, 나머지는 그 이후의 건축 공사 때 재사용된 상태 또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기둥의 기부는 그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어떤 것에는 석공(石工)을 나타내는 희랍 문자가 새겨져 있다. 기부와 기둥은 단단한 석회암(limestone)으로 만들어졌고, 문자는 그보다 덜 단단한 석회암에 비잔틴 시대의 전형적인 고린도식(Corinthian style)으로 새겨져 있다.
카르도 남쪽 부분의 서편 가장자리를 따라 몇몇 도로변 상점들이 암벽을 파내고 들어서 있다. 이 상점들의 문지방과 문설주는 바위를 떠내거나 돌로 만들었다. 상점들 가운데 몇몇 집은 암벽에 있는 벽감으로 보건데 목재 지붕이 얹혀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 구역에서 발굴된 카르도는 유스티아누스(Justinian)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527-565)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연대 추정은 층위(stratigraphic) 형태, 도자기 모양, 건축 공법, 건축 디자인, 그리고 네아교회와의 상관성 등을 근거로 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건설된 카르도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카르도의 연장(延長)이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카르도를 확장하여 예루살렘의 두 머릿 교회인 북쪽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와 남쪽의 네아교회를 연결하는 중앙 도로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재위 기간 중에 도시 남쪽 부분의 공사를 진척시켰다. 이 도로는 매우 장엄하며(magnificent street), 로마 시대에 건설한 북쪽 부분과 설계는 같지만 형태는 비잔틴 스타일이다.
7-2. 네아교회(The Nea Church)
“네아”교회 유적은 아비가드(Avigad)가 1970-1982년 사이에 (T구역에서) 몇 차례에 걸쳐 탐사작업을 함으로써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유대인 구역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네아교회는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여 건축한 교회로 543년에 봉헌되었다. 네아(Nea: ‘새로운’이란 뜻의 희랍어)교회라는 이름은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며, 본래의 교회 이름은 “성모 마리아 새교회”(the New Church of Mary, Mother of God)이다. 당시의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기록에는 네아교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힐렐 게바(Hillel Geva)의 설명에 의하면, 네아교회 건물은 614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략 당시 또는 638년에 있었던 아랍의 침략 당시에 일부 파괴되었으며, 9세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반면에, 필립 킹(Philip J. King)은 이 교회 건물이 746년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졌으며, 그후 복원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네아교회의 입구는 서쪽, 카르도가 끝나는 부분(T-1 구역)에 있다. 중심 출입구들 가운데 암반을 깍아서 만든 출입구의 문지방이 하나 남아있다. 이 문지방은 건물의 기단(podium; 基壇) 부분인 견고한 벽에 설치되어 있다. 네아교회의 남동쪽 모서리 부분은 1975년 벤-도브(Ben-Dov)에 의해 古都(the Old City)의 남쪽 성벽 아래(beneath)에서 발굴되었다. 이 남동쪽 모서리 부분의 외벽은 커다란 돌로 축조되었으며, 북쪽 외벽과 비슷하다. 네아교회의 남쪽 벽은 古都 성벽으로부터 북쪽으로 40m 정도 떨어져 있는 바테이 마핫제(Batei Mahsseh) 아래 언덕에서 발굴되었다(T-2구역). 교회의 남쪽 벽 가운데 (길이) 66m가 발굴되었으며, 그중 가장 높게 남아있는 부분은 높이가 7.5m에 이른다.
네아교회는 카르도의 남단 동쪽 지역에 있다. 아비가드는 네아교회가 서편에 나르텍스(narthex)가 있었던 초대 교회 예배당(basilica)의 설계도에 따라 카르도 쪽을 향하여 건축되었으며, 동쪽 벽에 후진이 3개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네아교회의 크기는 어림잡아 115 x 57m 정도로 추정된다.
7-3. 다윗 망대와 아르메니아 정원
존스(Johns)는 1934-1947년 사이에 다윗 망대(the Citadel<David's Tower>)의 마당 부분에서 탐사 작업을 수행하여 비잔틴 시대 말기의 흰색 쪽매붙임을 한 바닥과 건물 일부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제2 성전 시대의 성벽 안쪽에서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여기서 발굴된 것들 중 주목할만한 것은 희랍어 글귀가 적혀있는 상인방(lintel) 파편이다.
아미란(Amiran)과 에이탄(Eitan)은 1968-1969년 다윗 망대에서 로마 시대로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걸쳐 있는 유적층에 대한 탐사 작업을 계속하였으며, 존스는 I 유적층(비잔틴 시대)에서 급수 시설과 벽의 일부분을 발굴하였다.
게바(Geva)는 1979-1980년 다윗 망대의 마당 남쪽 부분에서 탐사 작업을 하여 많은 건축물들의 잔재, 특히 비잔틴 시대 말기 건축물들의 잔재를 찾아내었다. 시반(Sivan)과 솔라(Solar)는 1984-1988년 사이에 다윗 망대의 남쪽 도랑(fosse) 구역을 탐사하여 비잔틴 시대의 큰 연못을 발굴하였는데, 이 연못은 암반을 떠내고 만들었으며 회칠이 되어 있었다.
케뇬(Kenyon)과 투싱햄(Tushingham)은 1962-1967년 사이에 다윗 망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르메니아 정원 구역(L 구역)에서 탐사 작업을 하여 여러 가지 유물‧유적들을 찾아냈다. 6세기 후반부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층(I)에서 건물 기초(foundations), 후진(Apse) 일부, 채색 쪽매붙임 일부 등의 교회 잔재를 발굴하였다. 이 쪽매붙임의 아래 부분은 부채꼴 모양이고, 위 부분은 토끼모양이며, 그 중간 부분에는 희랍어 글귀가 적혀 있는데, 글귀의 끝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비잔틴 시대 말기에 속하는 Ⅱ 유적층과 Ⅲ 유적층에서 발굴된 것들 중에 한 가운데에 마당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둘러서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방들은 순례자들의 숙소나 상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시온산(Mount Zion)
8-1. 갈리칸투(Gallicantu)의 성베드로교회 터에 있는 수도원과 교회
비잔틴 시대 수도원과 교회 유적이 1889년 카톨릭 교부들(the Assumptionist Fathers)에 의해 시온산 남동쪽 언덕, 갈리칸투의 성베드로교회 터에서 발굴되었다. 이 수도원과 교회는 기독교 전승에서 그리스도 수난 당시에(at the time of the Crucifixion)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Caiaphas)의 집이라고 전해져 왔던 제2 성전 시대의 건물이 있던 그 자리에 세워져있다. 게르머-두란트(J. Germer-Durand)가 발표한 탐사 작업의 결과 및 그 발굴물들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에 건립된 교회를 그 후에 재건축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서쪽은 바위를 깍아내고 동쪽에는 벽을 쌓아 땅을 수평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의 넓이는 20 x 14m 이다.
이 교회는 동쪽에 중앙 후진(직경 5m)이 있고, 후진 주위로 방들(4 x 3.5m)이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교회당 설계로 되어 있다. 서쪽에는 홀(atrium)이 있는데, 크기가 16 x 9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입구는 북쪽으로 나있는데, 돌이 깔려 있는 계단식 통로를 거쳐 동쪽의 경사진 언덕을 내려가게 되어 있다.
교회의 한 쪽에서 방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일부 방바닥에는 쪽매붙임이 되어 있다. 한 방의 바닥에는 “주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는 시편 121:8의 성경 구절이 적혀 있고, 다른 한 방의 바닥에는 “성모 마리아의 가호가 있기를”(For the Salvation of Mary)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글귀들은 이 건물이 수도원으로 건축되어 사용되었으나 후에 교회로 바뀌어 사용되었음을 암시해준다. 교회 서쪽에서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욕탕 잔재-벽, 벽돌을 쌓아 만든 난방 기둥, 아궁이-가 발굴되었다.
8-2. 성시온교회(the Church of Holy Zion)
이 교회당 건물은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ak 26:17-29) 장소라고 알려져 온 곳에 세워져 있는데, 예루살렘의 감독(bishop)이었던 맥시무스(Maximus)가 340년에 건축하였거나, 아니면 그보다 늦은 386-417년 사이에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던 요한 2세(John Ⅱ)가 그의 재임 중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시온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모든 교회의 모교회(the Mother of all Churches)로 알려졌고,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모였던 장소(행 2:1-4)라고 여겨져 왔다. 메데바 지도에는 이 교회가 예루살렘 남부 지역, 카르도 남쪽에 표기되어 있다. 614년 페르시아인들이 팔레스틴에 침략했을 때, 성시온교회의 내부를 대부분 파괴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당 건물은 후에 모데스투스(Modestus)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고아랍 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성시온교회의 유적 일부는 1898-1899년 사이에, 古都 성벽의 시온문(Zion Gate) 남쪽에 있는 시온산 위에 주기도문교회(the Dormition Church)를 건축하던 중에 발굴되었다. 팔머(F. Palmer)가 초기 발굴지에서 교회당의 벽 가운데 일부를 발굴하였는데, 그 중 한쪽 벽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발굴물들을 토대로 하여 성시온교회를 재현(reconstruction)하려는 노력이 레나르드(Renard)와 빈센트(L. H. Vincent)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레나르드의 견해, 그 중에서도 성시온교회 터라고 그가 주장하는 위치는 현대 학자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레나르드는 이 비잔틴 시대의 교회를 네 줄의 원기둥(52 x 37m, 나르텍스 포함)이 있고, 동쪽 끝에는 세 개의 후진이 있었던 예배당(basilica)으로 재현하였다. 그는 또한 “다윗의 무덤”(David's Tomb)이 교회 중심 건물의 남쪽에 위치한 별관(a southern annex)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빈센트가 재현한 것은 레나르드가 재현한 것과 몇 군데 차이가 있다. 빈센트는 레나르드처럼 이 교회에 네 줄의 원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재현하였지만, 후진에 있어서는 레나르드와 달리 중앙 후진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재현하였다. 또한 빈센트는 나르텍스가 서쪽 끝에 있었다는 레나르드의 견해를 부정하였으며, “다윗의 무덤”이 교회당 건물 내부 남동쪽 구석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8-3. 다윗의 무덤
다윗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는 시온산에 있는 유적의 현존하는 벽들은 잘 다듬어진 정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한 고대 석조 건축물(ancient masonry)과 혼재되어 있다. 1949년에, 핀커펠트(J. Pinkerfeld)는 이 건축물을 조사한 결과 북쪽 벽이 고대의 것이며, 남쪽 벽과 동쪽 벽도 같은 시기의 것임을 밝혀냈다. 남쪽 벽과 동쪽 벽의 두께는 1.3m인데 비하여, 북쪽 벽의 두께는 2.8m이다. 북쪽 벽의 남쪽 면에는 벽감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 이 건축물의 길이는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10.5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너비(width)의 경우, 나중에 지은 건축물의 벽이 서쪽에 가로막혀 있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처음으로 지었던 건물은 바닥에 돌이 깔려있으며, 바닥에서 약 1.92m 높이에 벽감이 있다.
핀커펠트는 현재 “다윗의 무덤” 벽에 혼재되어 있는 고대 석조 건축물을 로마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고대 건축물이 성전산 쪽을 향하여 지은 회당(a synagogue)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는데, 이 건물의 북쪽 벽에 있는 벽감에는 율법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핀커펠트의 이같은 주장은 이 고대 석조 건축물이 하우란의 나베(Naveh in the Hauran)와 남쪽 유대 산지의 에쉬테모아(Eshtemoa)에 있는 고대 회당들과 건축 방식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 고대 석조 건축물이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의) 회당이었을 가능성이 4세기 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는 보르도의 순례자(the Bordeaux Pilgrim)가 쓴 글에도 나타난다(Itin. Burdig. 592). 그러나, 챠프릴(Y. Tsafrir)은 이 석조 건축물이 로마 시대에 이교도들이 세운 건축물로서 비잔틴 시대의 성시온교회 건물에 병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8-4. 그 밖의 도로와 건축물
19세기에 이루어진 시온산에서의 탐사 작업, 특히 블리스(Bliss)와 딕키(Dickie)의 폭넓은 탐사 작업의 결과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건축물들과 물탱크들의 유물‧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바닥에 흰색 쪽매붙임이 된 건축물의 한쪽 모퉁이가 고바트 감독 학교(Bishop Gobat School)의 운동장에서 발굴되었으며, 벽에 십자가와 희랍 결합 문자(monogram)가 새겨져 있는 작은 저수조가 “다윗의 무덤” 남쪽에서 발굴되었다. 크고 육중한 벽에 채색 쪽매붙임(7.5 x 5.7m)이 되어 있는 방이 시온산에 있는 로마 시대 공동묘지(the Latin cecemetery) 터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방은 비잔틴 시대의 공공 건물이나 수도원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케뇬(K, Kenyon)은 시온산의 동쪽 언덕에서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드문드문 산재(散在)하는 유적들을 발굴하였다(B. D. E 구역). 발굴된 유적들 가운데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은 제2 성전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동굴 위에(over) 세운 건축물에 병합되었다. 마르고브스키(J. Margovski)는 1970-1971년 사이에 古都 남쪽 성벽의 유황탑(Burj Kibrit<the Sulfur Tower>) 부근과 그 서쪽에서 비잔틴 시대의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발굴된 것으로는 바닥에 쪽매붙임을 한 방들이 달려있는 사가(私家)들, 도로, 水路 등이 있다. 특히 놀랄만한 것으로 바닥에 석판을 깔거나 쪽매붙임을 한 20여개의 방이 달려있는 건물(약 30 x 20m)이 있다. 이 건물은 제2 성전 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으며, 발굴자의 견해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6-7세기)에도 공공 건물이나 수도원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고, 비잔틴 시대에 일부 변형되었다.
1975-1977년 사이에 벤-도브(M. Ben-Dov)는 古都 남쪽 성벽의 유황탑 과 분문(the Dung Gate) 사이에서 비잔틴 시대 말기의 私家 유적들을 여럿 발굴하였다. 실로(Y. Shiloh)는 시온산 동쪽 산 자락(the foot)에서 인상적인 비잔틴 시대 건물의 한쪽 모퉁이를 발굴하였다(H 구역). 그 건물 인근에서 두 차례에 걸쳐 건축되었음을 보여주는 수도원 유적이 조금 발견되었다(제3 유적층).
갈리칸투에 있는 성베드로교회(the Church of Saint Peter) 북서쪽에서, 게르머-두란트(J. Germer-Durand)는 돌을 깐 안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세운 크고 격조 높은 空洞 건물(atrium building)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아비-요나(M. Avi-Yonah)는 이 건물을 아엘리아 캐피톨리나(Aelia Capitolina)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과 비잔틴 시대의 건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사점들로 보아 이 건물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 건물에 근접하여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의 바닥에는 신발(sandals)을 묘사하는 그림과 “스테반이여, 행운이 있기를”(Good luck, Stephanos)이란 글귀의 쪽매붙임이 되어 있다.
시온산과 그 주변에서 고대의 도로 유적이 여럿 발굴되었다. 블리스와 딕키는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 남쪽 성벽에 있는 N문으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뻗어있는 도로를 발굴하였다. 그들은 이 도로의 유적을 140m 정도 발굴하였는데, 대부분 도로 밑으로 배수관이 지나고 있었다. 이 도로는 너비가 5.4m였고, 석판을 깔았는데 군데군데 바위를 깨고 평탄하게 다듬은 부분도 있었다. 픽스너(B. Pixner), 첸(D. Chen), 마가리트(S. Margalit)가 1979-1986년 이 도로의 일부 구역을 재탐사하였다. 게르머-두란트와 쉭크(C. Schick)가 발표한 이 도로의 다른 부분의 너비 역시 5.4m였다.
많은 탐사 작업들이 최근에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시온산 정상과 동쪽 언덕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브로쉬(M. Broshi)는 1971-1972년 사이에 시온문(the Zion Gate) 바로 남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수도원(가야바의 집) 마당에서 폭이 좁고 길다란 형태의 건축물 24m와 (종교상의 용도로 사용된) 비잔틴 시대 공공 건물의 쪽매붙임을 한 바닥 일부를 발굴하였다. 이 구역에서 발굴된 비잔틴 시대의 유물‧유적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남-북으로 뻗어있는 도로(길이 44m)인데 그 폭이 5.4m(步道의 연석까지 합하면 6.4m)였다. 시온산에서 발굴된 비잔틴 시대의 다른 도로들처럼 이 도로에는 잘 다듬어진 커다란 석판들이 깔려있다. 이 도로는 두 번의 건설 공사가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데, 앞서 건설한 도로 위에 겹쳐서 두 번째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각 단계마다 도로 밑에 배수 시설이 되어 있다.
9. 제2의 (동쪽) 카르도
메데바 지도에는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에 있었던, 도로 한쪽으로 지붕이 있는 주랑(a covered clolnade)이 연결되어 있는 제2의 동쪽 카르도가 표기되어 있다. 이 도로는 오늘날의 하-가이로(ha-Gai<valley> Street)를 따라 있는데, 다마스커스문(the Damascus Gate)으로부터 두로포이온 계곡을 따라 분문(the Dung Gate)쪽을 향하여 남-북으로 엇비슷하게 뻗어있다.
1970년대에, 벤-도브는 분문 서쪽의 古都 성벽 바깥 부분에서 탐사 작업을 하여 그때까지 발굴되었던 제2의 (동쪽) 카르도의 남쪽 끝지점의 위치를 밝혀냈으며(located), 그 연대를 비잔틴 시대 초기라고 추정하였다. 제2 카르도의 다른 부분은 일찍이 1930년대에 분문 안쪽에서 발굴되었다. 이 구역의 제2 카르도는 폭이 12m정도이며, 도로를 포장한 석판 밑으로 배수구가 지나고 있다. 이 도로의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바위를 파낸 홈에 세운 원기둥들의 基部(base)가 몇 개 발굴되었다. 원기둥의 서쪽으로 포장이 된 보도(side walk)가 3m 정도 확장되어 있고, 그 뒤편에 공터가 있는데 상점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구역의 남쪽 끝에서 도로가 분기되는데, 이 분기된 도로는 시온산 위쪽으로 뻗어있는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본 도로(the main street)는 남쪽으로 계속 뻗어서 두로포이온 계곡을 내려가는데, 계단으로 되어있다.
제2 (동쪽) 카르도 유적은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로와 이 도로의 지선들은 본래 로마 아엘리아 캐피톨리나(Aelia Capitolina) 시대의 도시 계획(town plan)에 따라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의 경우, 제2 카르도는 두로포이온 계곡의 위 부분을 지나고 있으며, 성전산의 서쪽 성벽을 향하고 있는(facing) 유대인 구역 동쪽 가장자리의 가파른 바위 절벽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10.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
성묘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된 자리라고 전승되어 오는 그 자리에 326-335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여겨져 왔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Vita Constantini)에 의하면, 성묘교회는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나타나는 다른 항목들과 비잔틴 시대의 또다른 문헌들, 그리고 메데바 지도에 표기된 내용들을 통해서 볼 때 비잔틴 시대의 성묘교회는 몇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묘교회를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1) 예배당 (동쪽의) 뜰
(2) 예배당(순교자 기념 성당)
(3) 원형 홀의 뜰
(4) 원형 홀
성묘교회 건물의 중앙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은 예배당을 겸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상적인 예배가 드려졌다. 건물들 주위에는 여러 개의 기도실(chapels)과 방(rooms)이 있으며, 각 부분들이 어울어져 전체적으로 감동적이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필립 킹(Philip J. King)은 성묘교회를 다음과 같이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1) 예배당(the basilica)
(2) 골고다 바위(the rock of Golgotha)
(3) 무덤(tomb)
성묘교회는 614년의 페르시아 침략 당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재건축과 파괴가 몇 차례 반복되었으며, 가장 최근의 일로 1959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성묘교회는 카르도[Beth ha-Bad Street]와 크리스챤路(Christian's Street) 사이에 있으며, 130 x 60m 정도의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11. 무리스탄(the Muristan)과 古都(the Old City)의 북쪽 지역
성묘교회의 남쪽에 있는 무리스탄에서 비잔틴 시대 석조 건축물의 유적이 몇 군데 발굴되었다. 케뇬(Kenyon)은 무리스탄의 남쪽 지역(C 구역)에서 쪽매붙임을 한 비잔틴 시대의 방에 부수되어있는 통행문이 하나 있는 벽을 발굴하였다.
1977년, 마가리트(Magalit), 첸(Chen), 솔라(Solar)는 성묘교회 서쪽에 있는 크리스쳔路를 탐사함으로써 비잔틴 시대 초기에 건설된 포장도로 일부를 발굴하였다. 이 도로는 남-북 방향으로 뻗어있으며 큰 돌로 포장이 되어있는데, 어떤 돌은 금이 가있고 많이 닳아 있다.
11-1. 성세례요한교회(the Church of Saint John the Baptist)
성세례요한교회는 무리스탄의 남쪽에 있다. 이 교회의 삼엽형(trefoil-shaped) 바닥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 교회가 비잔틴 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1-2. 프로바티카의 성마리아교회(the Church of Saint Mary of the Probatica)
성전산 북서쪽, 사자들의 문(성스테반의 문; Lions' <Saint Stephen's> gate) 근처에 있는 성안네교회(the Saint Anne's Church) 터에서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요 5:1-9)을 기념하여 지은 교회라고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동정녀 마리아가 이 근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이상은 주로 Hillel Geva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
※ 예루살렘 도시 외곽지역에서 발굴된 비잔틴시대의 유물‧유적
-Michael Avi-Yonah-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교회와 수도원 유적들이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 성벽 바깥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교회들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무덤 위에나 근처에 기도실(chapel)을 지었는데, 이 기도실들은 대부분 현재 남아있는 쪽매붙임을 한 바닥이나 쪽매붙임 속에 적혀있는 글귀를 통해서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 성스테반교회(the Church of Saint Stephen)
도시 북쪽, 다마스커스 문 바깥에 있으며, 유도키아(Eudocia) 황제가 성스테반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2) 제3 성벽 근처에 있는 교회(the Church Near the Third Wall)
발굴자인 바람키(D. C. Baramki)는 이 건물이 5세기의 수도원 유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모자이크 형태로 볼 때 7세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무덤 및 기도실(Toms and Chapels)
※ 감람산과 기드론 계곡(The Mount Olives and the Kidron Valley)
-Michael Avi-Yonah-
(1) 주기도문교회(the Church of Eleona)
(2) 승천교회(the Church of the Ascension)
(3) 러시안 탑 남쪽에 있는 교회(the Church South of the Russian Tower)
(4) 베이트 하니나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Beit Hanina)
(5) 도미누스 플레비트 교회(the Church of Domonus Flevit)
(6) 겟세마네 교회(the Church of Gethsemane)
(7) 무덤 및 기도실
※ 동정녀 마리아 무덤교회(the Church of the Tomb of the Virgin Mary)
-Hillel Geva-
1937년, 존스(C. N. Johns)는 기드론 계곡에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무덤을 탐사하였다. 그후 1972년에는 바가티(B. Bagatti)가, 1973년에는 키프리아노스(Cyprianos)가 동정녀 마리아의 무덤과 그 주변 지역을 탐사하였다.
※ 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유물‧유적
-Michael Avi-Yonah-
(1) 힌놈 골짜기의 비잔틴 시대 무덤들: 대부분 유대인들의 무덤
(2) 다윗왕路(King David Street)에 있는 YMCA 건물 근처에 있는 무덤: 사[무엘](Sa[muel]) 감독의 무덤으로 추정
(3) 베이트 사파파(Beit Safafa)에 있는 무덤
※ 힌놈 골짜기 서쪽 언덕에 있는 교회
※ 자바문(Jaffa Gate) 서쪽에 있는 건축물들과 무덤들의 유적
-Hillel Ge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