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13:47-50)는 천국을 ‘지혜로운 어부’ 대신 ‘그물’(net)에 비유하여 “세상 끝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는 구절을 추가하여 ‘심판하는 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심판 날의 세상 끝’(아이온 쉰 텔레이아)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ego(겉사람)의 종말이며, ‘악인’은 ego(겉사람)이므로 ‘내면의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착각일 뿐이며, 시간의 종말이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One)이며,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고, 지금이 바로 영원이다. 시간과 공간이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는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죽음과 고통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幻想)이며, 개념이다. 《바가바드기따》에서 ‘나’는 “모든 생명 있는 형상들의 처음이요, 중간이며, 끝이다”고, 성경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다”(계 21:6)고 하였다. 영원한 참나(One)의 진리차원에서 시간의 종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히 13:8).
동양적인 역(易)신학은 “시작과 끝은 음양(陰陽)의 관계처럼 나뉠 수 없으며, 종말은 옛 세대의 끝이면서 새 세대의 시작, 즉 진리의 자각이다”고 한다. 우리는 승천 후 종말에 심판하러 오시는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편재하고 계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One) 영靈이 되는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골 3:11). 불경(佛經)에서는 “우주법계가 본래로 청정한 세계이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정토(극락)요 마음이 부정하면 바로 예토(현실세계)가 된다”(유마경, 마 5:8)고 한다. 따라서 천국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즉 상대성을 초월하여 절대인 하나(One)가 되는 깨달음이다(요 17:11, 고전 6:17).

‘지혜로운 어부’는 바다(무의식 세계)에서 내면의 이원성인 ‘작은 고기’(거짓 나)를 버리고 일원성인 큰 물고기, 즉 영원한 생명인 진리(참나)를 찾은 자, 즉 깨달은 자(One)이다. 그는 현실세계에는 매순간 변화되고 있으므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며(諸行無常, 諸法無我), 생멸(生滅)이 끊어지는 그 자리(One)가 바로 절대행복의 열반(천국)이라는 진리를 자각한 자이다. 우리는 무가치한 이원성의 작은 고기(ego)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의 큰 물고기(신성)를 깨닫는 행복된 천국의 삶을 누려야 한다.
예수는 잠자고 있는 죄인을 찾으시며, 그 혼(푸쉬케, ego)의 잠을 깨워서 하나(One)가 되도록 기도하셨다(요 17:21). 하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ego의 거짓 나를 생명인 참나(신성)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제거해야 하며(爲道日損), 마치 성전(ego)을 허는 것이다(요 2:19). 장자(莊子)도 “물고기(참나)를 얻고 나면 그물(거짓 나)을 잊는다”(得魚忘筌)고 하여, 득실(得失), 시비(是非), 증애(憎愛) 등의 분별을 초월한 깨달은 자(One)를 강조하고 있다. 진리 깨달음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 즉 …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자각)하라 하셨으니”(행 17:29-30)라고 하였다.
따라서 보이는 것은 허상으로 실재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실상(참나)으로 실재한다(고후 4:18). 우리는 지혜로운 어부처럼 허상의 개별적인 ‘나’(거짓 나)를 버리고 실상의 보편적인 '나'(참나)를 자각(회개) 함으로서 고통과 번뇌를 벗어나 ‘영원한 천국(열반)을 체험할 수 있다(막 8:35). 천국(참나)의 특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행복과 자유자재(自由自在)로서 걸림이 없으며, 번뇌의 더러움이 없이 청정하다(常·樂·我·淨, 눅 17:21).
구자만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