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8:16
알기 쉬운 평신도신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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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40  

알기 쉬운 평신도신학(1)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우리는 주님이 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믿음과 세례가 하나임을 믿는다.(엡 4:5,6) 그러나 이 땅의 교회들은 서로 갈라지고 다투는 일이 많다. 서로 다른 주의와 주장들을 내세우면서 저마다 자기가 정통이라고 한다. 별스런 이단들까지 일어나 우리를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를 달았다고 다 교회라 하기 어렵고, 신자라고 하여 다 성도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대부분은 잘못된 성경의 해석에 그 원인이 있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 될 수 있는지를, 오해의 소지가 생기기 쉬운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따라가며 몇 회에 걸쳐서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성경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에 대한 내용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성경은 어떠한 책일까?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명한 걸작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게 마련이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복음이 전파된 나라인 경우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항상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일상생활과 목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성경에는 사람의 한계를 초월하여,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만든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를 모든 일에 능치 못함이 없는 자로 만든다. 사악하고 불의하던 자를 어린양처럼 유순하고 순전하게 만든다. 성경은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다(렘 23:29).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좌우의 날선 검이다.(히 4:12)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떡이요(신 8:2), 생수다.(요 7:38) 달콤함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송이 꿀이다.(시 19:10)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다.(시 119:105)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사실로 확인되어진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약 40명에 달하는 사람을 사용하셨다. 그들은 신분이나 직업이나 경험이나 학식에서 매우 다양했다. 그 중에는 왕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고, 서기관이나 학자도 있었다. 농부와 어부와 의사 등도 있었다. 맨 처음에 기록된 책과 맨 나중에 기록된 책 사이에는 약 1,500년의 시간이 흘렀다. 10년이 강산을 변하게 하는 것에 비하면 1,500년은 너무나 긴 세월이다. 이처럼 여러 인물들과 여러 시대에 걸쳐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통일이 되어 있다. 마치 다양한 악기가 하나의 관현악을 조화 있게 연주하는 것과 같다. 시간, 공간, 그리고 능력의 제약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성경은 자기의 의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성경을 없애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성경을 불태우거나, 찢어버리거나, 깊은 지하에 쳐박아 두거나, 읽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성경은 사람의 글이므로,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문필가인 볼테르는 앞으로 100년 이내에 성경이 사라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을 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의 책을 펴낸 바로 그 인쇄소는 25년 후에 성경을 인쇄해 내었다. 성경은 사람으로서는 만들어낼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하나님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언의 책이라고 할 만큼 예언들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예언, 한 인물이나 가문에 대한 예언, 자연의 징조들에 대한 예언 등 수많은 예언들이 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혈통, 베들레헴에서 난 아이 등으로 구약에만 무려 456회나 등장한다. 다윗 임금이 시편 22편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의 모습을 예언한 내용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자세하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 예언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장차 되어 질 일을 미리 통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이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계시의 기록인 성경(3)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돌이나 나무로 깎고 새겨서 만든 죽은 우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에게는 지혜와 총명의 신이라고 할 만큼 온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을 그 근원부터, 그리고 그 종국까지 아시는 지성이 있다.(사 11:2) 시랑하고 기뻐하고 진노하시는 등의 감정이 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마침내 이루고자 하시는 의지가 있다.(빌 1:7)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체는 다른 인격체와 더불어서 교제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혼자서 지내야만 할 경우를 당하면,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 복잡함과 피곤함에 지친 사람은 독방을 선호하지만, 로빈손 크루소처럼 오랜 세월을 혼자서 지내는 사람은 애완동물이라도 기르면서 서로 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사이에 피차 교제를 나누고 계신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살아 있는 인격체인 사람들과도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한계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여 부모님과 불화하고 불효하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자신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알게 해 주신다. 사람이 모르던 것, 또는 알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서 알게 하여 주시는 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바람 날개나 구름수레나 햇빛이나 비 같은 자연현상, 또는 선진들의 행적(역사)을 통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시인은 낮의 해와 밤의 달이 가진 힘과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많이 노래했다. 족장들과 열왕들의 행적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와 선한 자를 각각 어떠한 결과에 이르게 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여러 섬세한 지체들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일반계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심과 구속 주가 되심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의 눈은 흐려지고 귀는 어두워져서 보기는 보고, 듣기는 들어도 올바로 깨닫지를 못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배로 하나님을 대신하기 바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계시, 즉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 이때에는 꿈이나 환상, 우림과 둠밈, 제비뽑기, 불기둥, 구름기둥 등이 그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여호와의 사자나 천사를 통할 때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보리떡과 물고기를 5천명에게 먹이심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보여 주신 경우처럼, 이적들이 효과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얼마 전 어떤 TV 프로에는 신기한 꿈 이야기가 등장했었다. 몇 차례의 신기한 꿈으로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선조의 잊혀진 무덤을 찾았다는 줄거리였다. 교회 안에서도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종종 있다. 애굽의 술객들처럼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무덤이나 찾는 식의 계시가 아니라, 항상 죄인의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혹시 계시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그것이 이미 성경에서 주어진 구원 진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지는지를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아야 한다. 사탄의 속임수를 피하기 위한 영분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분별이 어렵다면, 조용히 그 결과를 기다려 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선을 이룬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는 선을 이용해서라도 죄악에 이르게 할 뿐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어떠함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마 7:17-18)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시간이나 장소나 인종이나 성별이나 노소에 따른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셨고(요 14:6), 그렇지 않는 사람은 절도요 강도(요 10:8)라고 하셨다. 구원의 유일한 길에 관한 계시가 모든 사람들에게 오류나 와전이 없이 똑같이 제시되기 위해서는 잠깐 있다가 잊혀지는 말이나 현상이 아닌, 글로써 기록되고 보존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3.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 (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고 말했다. 사도 베드로도“경의 모든 예언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벧후 1:21)고 썼다. 이 말씀은 성경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기록되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계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계시를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영감이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한 사람들의 특성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사람의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거나, 영적으로 치우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지나친 문자적 해석은 대부분의 율법주의적 오해를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지나친 영적 해석은 많은 신비주의를 만들어 낸다.

구약성경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은 희랍어(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 재료는 대부분 소나 양의 가죽이나 파피루스(나일강 연안에 자라는 수초이름으로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종이 대용품으로 많이 사용했다)이었다. 여러 민족에의 복음전파는 성경이 번역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라틴어, 수리아어, 콥틱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한국어 등의 번역본들이 생겨났다. 인쇄술이 생겨나기 이전의 영구적이지 못한 재료는 다시 베껴 써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본들이 생겨났다.

최근 일부에서는 어떤 특정한 사본이나 역본을 원본처럼 여기거나, 오직 그것만을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서 다른 사본이나 역본들을 소홀히 하는 일이 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을 마치 오류투성이인 것처럼 무시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의 영감은 최초의 원본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본이나 역본을 인정이나 일획의 가감이 있을 수 없는 책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서 사본과 역본의 과정에서도 역사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을 깨닫도록 계시를 주시고, 또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내용이 바로 전달되도록 사본과 역본의 과정에서도 당연히 간섭하셨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집된 약 80만 가량의 역본들 중에서 약 79만 5천 역본들은 거의 차이가 없다. 혹 있다면 그것은 영어의 honour와 honor의 차이에 불과하다(u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나머지도 특별한 구절의 의미나 표현을 수정했거나 생략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본이나 역본을 절대시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본들과 역본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여 원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4. 신앙생활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인 성경(6)

사람의 생각이나 생활에는 일정한 기준이나 규범이 있어야 한다. 일정한 기준이 없이 닥치는 대로, 또는 상황에 따라서 적당하게 대응하면 방종에 이르게 된다. 신앙생활과 신학은 오직 성경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께서도 친히 하늘에서 아버지에 대하여 보고 들으신 바를 전하실 때,

성경의 교훈을 들어 설명하셨고, 마귀를 물리치실 때도 성경을 이용하셨다. 이 점에서는 선지자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7)

우리는 성경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가면 가고 성경이 멈추면 멈추어야 하다. 성경이 66권으로 기록된 것은 종이가 모자라거나 남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주신 계시를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했을 것이다.(요 21:25) 그러나 그 일부만을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기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요 20:30,31) 성경에서 지나기 때문에 이단이 생겨나고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성경 아닌 것을 더 하려거나 덜 하려는 일이 적지 않다. 구약을 경히 여기고 신약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각종 신화들로 각색되어 있어 그 속에서 원래 복음만 찾아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요한계시록에만 매달리는 사람도 있다. 주관적인 선입관이 성급하게 내린 결론들이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사두개인들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판단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복음서나 율법서에서 뿐만 아니라 예언서나 시가서나 역사서에서도 우리에게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성경에다 무엇을 더하려고 하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1) 개인의 경험, 특히 신비적인 체험을 더하는 유형이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성경도 내 자신의 체험 속에서 효험이 되어 질 때에라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체험으로 확인되지 않는 성경은 한낱 하나의 책에 불과하고, 그 안에 있는 약속들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그러나 체험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보편화시킬 수가 없다. 어느 신령한 목사님의 체험을 나도 똑같이 가져야 한다거나, 내가 한 체험을 반드시 다른 사람도 가지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체험은 성경을 대신할 위험이 매우 높다. 마치 사람들이 멀리 있는 법보다도 가까운 주먹을 더 무서워하는 것처럼, 개인의 체험은 성경보다 더 위에 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성경으로 자기의 체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험으로 성경을 판단하려 든다. 자기보다 더 많은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비굴함을 느끼고 자기와 같은 체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교주가 되어 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남달리 삼층 천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체험했던 사도 바울께서 14년 동안이나 그 사실을 침묵하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지도 않았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후 12:2-4)

(2) 성경 이외의 다른 책이나 전통을 더하는 유형이다.

고대 랍비나 교부들의 기록 또는 교회의 결정들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것들은 때때로 성경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설로 여겨져서, 성경보다 이러한 것들의 가르침을 더 중시하는 경우를 생겨나게 한다. 성경에 개인적인 체험을 더하는 것 못지않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불건전한 권위주의와 교권주의가 쉽게 자라난다. 마치 주님께서 크게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성경 66권에 외경을 더하는 경우를 잠시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성경 66권 이외에 15권(에스드라 상, 에스드라 하, 토빗, 유딧, 에스더 첨가서,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또는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아사리아와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 상, 마카비 하)을 더하는 일이 있다. 이 책들은 성경을 이해함과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함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책들을 성경(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허황된 경우가 많으며 성경과 모순되는 경우까지 발견된다. 그리고 그 연대나 지명 등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전통적으로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체험이나 전통이나 외경을 막론하고 그 무엇도 성경에 더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생활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로 삼았다. 종교개혁자들은 특히 이것을 강조하여‘오직 성경(Sola scriptura)’그리고‘모든 성경(Tota scriptura)’을 그들의 핵심적인 좌우명으로 삼았었다(*) 글쓴 이 /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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