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28 18:32
[1]이스라엘 12지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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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837  

이스라엘 12지파 연구

 

1. 서론 - 12라는 숫자의 상징성

 

1. 오늘부터 ‘이스라엘12지파연구’라는 제목으로 13주로 계획되는 시리즈설교에 서론으로 누가복음22장47-49절을 본문으로 정하였습니다. 요즘 사순절 기간 중에, 스킬더목사의 ‘수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읽으시면서 묵상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그 설교집1권의 23번째 설교인, ‘불경스럽게 된 조화’라는 제목의 뜻과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2제자중의 하나인 가룟유다가 배신의 키스를 하는 이 장면은, 단순히 인간적인 배신감 정도의 아픔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이루실 비젼 자체가 깨뜨려져 버리는 순간이라는 구속사적 맥락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사명 성취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 사명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인데, 그 나라가 바로 구약성경에서는 12라는 숫자를 통해서 약속되어 왔습니다. 곧, 완전수 3과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인 4의 더하기는 7, 곱하기는 12인데, 이 네 가지 숫자는 성경의 숫자상징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3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고, 4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상을 나타냅니다. 그 둘을 더하기는 7은 하나님의 본질의 속성(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 곱하기 하여 얻은 12는, 하나님(3)께서 이 세상(4)을 통해서, 당신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요소가 결합되어 성취되는 하나님의 비젼성취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의 대표적인 예는, 6일간의 창조사역 후에 오는 안식일이 대표적입니다. 세상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속성들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안식년과 희년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12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야곱의 12자녀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지파를 이루고, 나중에는 예수님의 12제자들과 새예루살렘성의 열두대문과 열두기초석으로 이어지는 상징들입니다.

 

2. 이런 숫자들에 너무 지나친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안되지만,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대만큼은 우리가 상고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과제입니다. 그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성경의 깊이를 그 깊이만큼 파고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는 이 숫자의 상징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1장17절은 족보를 기록한 후에,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14*3=42입니다. 이 42라는 숫자도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니 생략합니다(광야생활 때 진을 친 장소들의 숫자이면, 성전이 42개월 동안 짓밝히게 될 것이라는 예언 등). 중요한 것은, 분명히 42라는 숫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데, 그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헤아려보면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두 41명입니다. 이것은 14대,14대,14대는 숫자로 계수하면서 일종의 트릭을 쓰고 있는데, 다윗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명을 센 후에는 다윗을 빼놓고 솔로몬부터 14명을 헤아려하는데, 다시금 다윗을 포함해서 14명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이렇게 합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족보의 서문도 헬라어 원문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דוד)이라는 이름 각 철자들이 갖는 숫자의 값을 모두 합치면(4+6+4), 14입니다. 14대별로 나눠서 강조하는 이유도, 다윗에게 초점을 맞추는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축하는 바는, 예수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만 아니고, 나아가서, 다윗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는 예언들이 모두 완성되고 성취시키는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3. 다윗을 통해서 이루져야 했을 이스라엘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12지파로 형성된 왕국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공동체, 곧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제사장나라로서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 다윗의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왕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왕이었던 다윗의 왕국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실패했던 다윗왕국의 비젼을 완전하게 성취할 메시야가 왔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4. 이 비젼성취에 대한 사명을 예수님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밤을 새며 기도하시고는 12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12명의 제자들이었을까요? 바로 구약의 사라져버린 12지파의 회복이 그 목적입니다.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남유다왕국의 2지파는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포로 되어 잡혀갔다가, 70년 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해서 귀환령이 발하여지고 그 난민들이 고토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유다지파”중심으로 돌아왔고(그래서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됨), 나머지 지파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버렸다고 하겠습니다. 그 12지파를 회복시키는 의미가 12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냥 숫자로만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 12지파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12제자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5.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하면, 오늘 본문의 의미, 곧 유다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입을 맞추면서 인사를 하면서, 로마 군병들에게 예수가 누군지를 가리켜준 것은, 단순히 배신의 입맞춤에서만이 아니라, 스킬더 목사가 강조한 것처럼, 예수님의 비전이 뭉개지고 박살나버리는 그 순간이었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심장에 다가왔던 피맺힌 고통과 아픔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젼,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이 비전과 그것이 무시되는 것의 이 아픔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교회의 분열만큼 주님의 마음에 큰 아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 뒤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요17장)를 보면, 그 기도의 핵심은 제자들의 하나 됨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전도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못하면, 우리 주님을 다시 한 번 더 짓밟는 것과도 같습니다(히10:26-31).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맥락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히10:19-24).

 

6. 우리가 이스라엘 12지파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구약의 12지파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은 바로 요한계시록의 14만4천과 새예루살렘의 12대문에 대한 계시의 말씀에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12기초석과도 연관됩니다. 사소한 주제가 아닌 것임이 분명합니다. 벌레같은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며, 12지파를 이루되, 대제사장의 흉패에 새겨진 보화가 되어 새예루살렘의 12대문로 이어지는 계시의 역사는, 바로 우리들의 구원의 과정에 대한 교훈의 말씀들이기도 합니다. 열두 아들부터 한 지파씩 살펴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들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2.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진짜 장자를 보라!

창세기29:31-32

 

1.지난 주일에 12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해서 서론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젼이 그 숫자에 담겨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첫 번째 아들인 르우벤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이 르우벤이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초점이 되겠습니다. 그 답을 질문형식으로 표현하자면, “참된 장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2. 먼저 그의 출생의 기원을 살펴봅시다. 야곱의 결혼과정과 레아와 라헬과의 결혼과정은 너무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알고 있다고 하면, 왜 레아가 그 첫아들의 이름을 ‘보라 아들이라’(르우벤)고 불렀는지 이해가 됩니다. 일종의 처연한 인간적 애절함, 남편의 사랑을 호소하면서, 주목을 요구하고 있는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그만큼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르우벤의 성품의 특징을 나중 창세기48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저주?)에서 보면,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였”지만, “물의 끊음”같다고 하니, 그 마땅한 모습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성품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전체의 성품도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합환채를 따와서 모친에게 주려는 애틋한 심정도 있고(창30:13), 야곱이 형들에 의해서 죽임 당하려고 할 때, 우물에 빠뜨렸다가 나중 살려줄 생각도 했습니다(창37:21-22). 하지만, 그의 성품은 안정이 되지 않아서, 아버지 야곱도 르우벤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르우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창42:37-38)을 보아도 분명합니다. 레아가 “보라 아들이로다”고 하였지만, 그 아들을 야곱은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때에 불만이 누적되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자기 아들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의 성품은 불안정해집니다. 그것이 양육의 법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르우벤의 잘못만을 강조하는데, 르우벤의 잘못을 책하려면, 먼저 그 부모의 양육에 대해서 잘못을 책해야 우리가 배울 것을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예 애당초부터 장남을 장남으로서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곱 자신도 차남이어서 장남이 아닌 애환을 겪었던 인생인데, 똑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르우벤이 장남으로서의 영적 위치를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소실과 더불어 동침한 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입니다. 소실을 두었다는 것 그 자체도 함께 책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인생의 연약함과 범죄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4. 이런 개인 르우벤의 모습은 그 지파의 모습에도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성품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고 인내했다가 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생활 중에도, 레위지파의 고라자손들과 더불어서 반역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민16:1; 신11:6). 그런 모습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도 전 정복한 처음의 땅을 그들이 요구하였을 때에도(수13:8-23),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요단 맞은 편”을 요구하고 정착하였던 것입니다(민32:37-38). 그리고 그 뒤 이곳 지역의 역사를 보면, 사사도, 선지자도, 영웅도 없고, 단지 다윗의 군대 가운데 용감했던 삼십 명의 부하와 더불어 ‘아디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대상11:42). 아마도 아디나의 지휘 아래 있었던 르우벤 자손들이 얼마 있기는 하여서, 헤브론에 있던 유다지파만의 왕이었던 다윗에게 나아와 그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데 일조를 하기는 합니다(대상12:37~40). 긴 역사의 관점을 보게 되면, 그 지역이 제일 먼저, 아람왕 하사엘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고(왕하10:32-33), 나중(BC740년)엔 앗수르왕 디를랏 빌레셀에 의해서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습니다(민32:1-33; 대상5:26). “끓는 물”같은 그의 성정과 그 지파의 성향은 스스로 자신의 장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지파만의 안녕을 우선시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사명에 실패한 사람, 사명에 실패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보라, 아들을! 하였지만, 볼 것이 전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 이런 지파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5. 먼저, 이 지파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패한 모습 그대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심장에 새겨져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흉패에 2단3번째에 석류석으로 상징되었던 것이 바로 이 르우벤지파입니다. 석류석은 ‘에메렐드’의 다른 이름인데, 푸른 바다의 물결을 연상한다고 해서, 삶의 풍파가 많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르우벤지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패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연약한 모습 그대로 보석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광야생활의 진을 칠 때에 남쪽에 위치했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최소한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가 맨 앞에 위치하고 그 다음에 (유다-잇사갈-스불론)이 한 무리로, 그 다음에 성막이 오고 그 뒤에 (르우벤-시므온-갓)이 따르며, 또한 그 뒤에 성물들이 따르고, 그 뒤에 나머지 여섯지파(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단-아셀-납달리)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은 그렇게 표시가 뚜렷하게 나지 않는 위치에서 최소한의 역할은 하였던 것 같습니다. 끓는 물같은 지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역할은 감당하면서 끓는 물 같았던 같습니다. 끓는 물같아도 쓰임새는 또한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지파를 위하여 예언하기를,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살마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33절)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모습입니다. 좀더 분투하라고 권하고 명령하면 따라오지를 못하고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책망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격려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손잡아 주면서 이끌어야 할 그런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사사시대에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혁파한 뒤 부른 노래를 보면,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삿5:15)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하여 큰 결심을 하고 나서면 놀라운 승리를 이루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기적인 공동체인데도,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벗어버려야 공동체르 위한 큰 결심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변덕이 심하고 성정이 안정되지 못하여 별로 큰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나 공동체가 “큰 결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6. 그런 자들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르우벤 지파에게 속하는 1만2천명 속에 속하는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입니다(계7:5). 그것도 순서상으로 유다지파 바로 그 다음 두 번째로 기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21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성의 대문위에도 그 이름이 새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그 마음 속에 선한 소원이 일어나 그 소원을 좇아 행한 사람들의 지복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 끓듯이 온전치 못한 우리 인생들을 보석같이 여기시고, 또한 정금같은 새예루살렘의 대문으로 여겨주시는 이는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구속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시고, 그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들을 보라!는 르우벤의 진정한 의미는, 진짜 그 아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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