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림택권 목사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
인류의 질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매일 달려간다. 달음박질하는 속도는 누구나 다 같다. 벌써 32년 전의 일이다. 성지순례 갔던 길에 시내산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경 사본인 이른바 ‘시내산 사본’을 둘러본 뒤 옆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방마다 유리 벽으로 돼 있었고, 그 안으로 소중한 보물들을 엿볼 수 있었다. 한 칸에는 놀랍게도 인간 해골들이 있었고 옆 칸에는 다리뼈들, 또 다른 곳엔 팔뼈들만 보관됐다. 언뜻 에스겔이 본 ‘마른 뼈 환상’(겔 37:1~6)이 연상됐다.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라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꿈과 비전의 사람이었던 요셉은 거절해야 할 때 믿음으로 “아니요”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뤄놓은 애굽의 정치적 기반 위에서 영예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떠날 때 300여년이나 묵은 자기 유골도 함께 출애굽하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믿음’(히 11:19)이 있었던 아브라함의 후손 요셉도 부활 신앙으로 유골 유언을 남겼다. 앞선 시내산 수도원 수도사들도 부활 소망의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다 이 세상을 떠났으리라 믿는다.
해골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 분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분도 죽은 뒤 무덤에 묻혔다. 그런데 그분을 안장한 그 무덤이 비었다. ‘빈 무덤’이라는 사실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인간이 짜낼 수 있는 모든 이론은 다 동원된 것 같다.
그분이 실제 죽은 게 아니라 잠깐 기절했었다는 이른바 ‘기절설’부터 당시 권력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는 ‘도적설’ 혹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어딘가에 옮겼다는 ‘체면유지설’, 장례 다음 날 새벽 여성도들이 무서워서 다른 빈 무덤을 찾아 부활했다고 제자들에게 알렸다는 ‘타묘설’, 제자들이 지나친 기대로 부활했다고 선전했다는 ‘환상설’ 등 여러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며 ‘사람은 죽으면 끝이다’는 결론을 얻고자 하는 이론들뿐이다. 거짓말이 너무 오래가는 것 아닌가.
우리는 왜 죽음을 무서워하는가. 첫째 이유는 죽음으로 모든 관계가 끝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죽음은 우리의 최후 원수다.(고전 15:26) 두 번째는 불확실한 사후, 즉 죽음이 무엇이고 사후 세계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 설계에 들어있지 않았다. 기껏 죽음으로 끝날 사랑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죽음은 침입이며 인류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등진 결과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주님도 우리를 대신해 죽음과 사투를 벌였는데 실패한 것 같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멸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죽음은 무죄한 그분을 건드릴 권리가 없다.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자는 자’와 언젠가 죽음을 맞을 우리를 건드릴 최후의 권리도 없다.(살전 4:13~18) 죽음은 영원한 영광으로 가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