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再浸禮派 / anabaptist.
기독교의 한 종파로,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난 급진 종교개혁의 한 부류이며 현재까지도 남아 이어지고 있다.
1.1. 재세례파? 재침례파?
재세례파라고 부를지, 재침례파라고 부를지 의견이 나뉜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모두가 침수세례(浸水洗禮, baptism by immersion[effusion]/ 줄여서 침례)를 세례방법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가톨릭이 자리잡은 관수세례(灌水洗禮, aspersion)[1]를 세례방식으로 하는 자들도 많았다. 즉 세례 방식에 딱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재침례파라는 번역명은 아나뱁티스트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명칭이다. 굳이 번역하면 재세례파가 아우를 수 있는 명칭으로 보인다. 자생적으로 한국의 아나뱁티스트를 표방하는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도 재세례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2. 주요 주장
사도들의 시대 이후 진정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역사' 알리스터 맥그래스
재침례파를 연상할 때 재침례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초기, 즉 16세기 이들의 주장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교회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과격하게 해석해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이들이 볼 때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은 선제후나 제네바 시 참사회 같은 관을 등에 업은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교회 개혁이란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어떤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침례파 중에는 성경 해석을 근거로 반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현재까지 논쟁으로 길게 이어진 건 재침례(아나뱁티즘)란 개념이 대표적인데 이는 기독교의 '유아세례'와 관련이 깊다. 사실 이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로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해 배교자의 재침례가 필요 없고 유아세례를 인정하고 주는 걸로 정리되었고 이는 중세 내내 가톨릭 신앙 내의 철칙으로 지켜져 왔다.
그러나 재침례파는 아무런 자신의 의지가 없던 아기 때 받은 세례가 의미가 있겠느냐라고 주장했고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섰을 때에야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유아세례의 효력을 부인하고 다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재침례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세례에 대해서는 문서 참고.
이는 주류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주류 종교개혁 세력인 루터파, 칼뱅파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으므로 가톨릭이나 루터파나 칼뱅파에서 재침례파는 당시 이단이었다. 가톨릭 지역에선 재침례파 신도들을 붙잡아서 발에 무거운 돌을 묶은 뒤 너희들 좋아하는 물이나 실컷 처먹어라면서 그대로 강에 풍덩 집어던지는 식으로 죽였다. 17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가톨릭 지역에서 살해된 재침례파 신도와 관련자만 1만명이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다. 루터파 지역에선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이들은 처음엔 교화 대상으로 여겼다가 무력폭동으로 사이가 벌어지자 진압을 찬성했다. 스위스에선 울리히 츠빙글리와 재침례파 스위스 형제단의 갈등은 있었지만 가톨릭처럼 무력으로 한판 붙지는 않았다. 장 칼뱅은 재침례파 과부인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는데 어디까지나 가톨릭의 탄압에 맞서는 현실에서 재침례파는 이단이긴 하지만 교화대상으로 봤다. 영국 국교회[2]의 잉글랜드에선 재침례파 적발 시 1회엔 경고, 2회째엔 추방, 3회째 적발 시 처형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다. 에드워드 6세 시절 두 명의 재침례파 교인이 여러 번 적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교하다가 처형당한 기록이 있다.
결국 칼뱅과 루터를 관청과 손을 잡은 불완전한 개혁으로 비판하고 유아세례와 사유재산 폐지, 평화주의 및 무저항을 주장했던 재침례파들은 종교개혁기의 분파 중에서 가장 민중과 가까웠고 권력과 거리를 멀리했던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뮌스터 반란이 진압된 후 세속권력과 각을 세우며 과격 노선으로 치닫던 재침례파 노선들은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세속 권력과 거리를 둔 메노파와 후터파 아미시들은 유럽에서 하도 핍박받으니까 집단으로 미국에 이주했는데 후터파는 미국에서조차 탄압받는 바람에 캐나다로 또 이주해야만 했다.
2.1. 사상
재침례파는 재침례를 주장한 것 외에도 여러 주장을 펼쳤다.
엄격한 정교분리: 국가와 종교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하며 어느 쪽이 다른 쪽의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이런 정교분리 사상은 재침례파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가톨릭 교회와 영주가 주교 노릇을 하던 국가교회로 발전한 루터교회 및 칼뱅교회의 엄청난 핍박을 받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순수한 자기 결단에 따른 신앙: 재침례파는 철저하게 환경이나 다른 이의 강요 혹은 국가의 법률에 따른 신앙의 강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결단으로 갖는 신앙만이 올바르다고 보았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가지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만인제사장주의: 초대교회에서 교권적인 사제가 없었듯이[3] 재침례파는 교권적인 사제를 부정했으며 성직자가 있어도 교권적으로 군림하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신도의 신앙에 관련한 도우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모든 신도가 기본적으로 리더십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을 가장 말 그대로 실천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평화주의: 신약성서의 평화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한다. 주류 보수 기독교가 정당한 전쟁의 권리를 긍정하는 것과는 달리[4] 재침례파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도 없으며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따라 재침례파는 병역을 거부하며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고 예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실천하여 평화를 만드는 자(피스메이커)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여 종교와 문화 등을 초월한 분쟁 중재와 조정에도 앞장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제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의지하고 복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예수 이해이며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하려 하는 제자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제자의 삶도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본다.[5]
3. 역사
재침례파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세력은 아니었다. 지역별로 스위스 일대에서 활동하던 스위스 형제단,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일대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 남부 독일 일대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로 나뉘며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지상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폭력 용인파와 신약성서에 입각해 폭력에 철저하게 반대한 비폭력주의자들로도 구분된다.[6]
3.1. 뮌스터 반란
결국 폭력을 용인한 과격 재침례파들은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1534년 2월 독일 뮌스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재침례파의 지도자였던 멜키오르 호프만이 성인에게 재침례를 베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뮌스터 주교를 몰아낸 후 뮌스터를 장악하고 신정정치를 시도했는데 가톨릭 교도를 무신론자와 동급으로 보아 척살 대상으로 삼아 살해했고 대부분의 반대세력은 입을 다물거나 도망갔다. 모든 여자는 결혼할 것을 명령하며 12세 소녀부터 60세 노파까지 강제 결혼시켰고 자신들은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아내를 10명 이상씩 두고 거부하는 여성은 살해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화폐는 없었으나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직통으로 받았다며 이를 근거로 새로운 귀족제도를 만들었고 호화 생활을 누리며 곧 자신들끼리 싸우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들은 결국 1535년 6월 쫓겨난 주교가 데리고 온 제국군에게 진압당했으며 주모자들은 모두 처형당해 성 람베르트 성당 첨탑에 시체가 매달려 전시되었다. 오늘날에도 아래 사진처럼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매달았던 철창이 성당 첨탑에 그대로 매달려 있다.
3.2. 메노나이트(Mennonite)의 등장
이런 가운데 본래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부였던 메노 시몬스는 가톨릭에 실망하여 가톨릭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는데 이 과정에서 재침례파의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메노 시몬스는 재침례파 중 비폭력주의자인 오비파와 폭력 용인파인 멜키오르 호프만파 사이에 고민하다가 "그리스도인이 어찌 영적인 무기를 내버려두고 세속적인 것을 취하겠는가"라는 입장에 따라 오비파 쪽으로 돌아섰다.
멜키오르 호프만파는 뮌스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혹독하게 진압당해 멸망했기 때문에 끝내 메노 시몬스의 선택은 옳았다. 메노 시몬스는 오비파의 지도자가 되어 비폭력 평화주의노선을 강조했는데 이로 인해 이들이 후대에 메노나이트(메노파)로 불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의 인권사상으로써 노예 탈출 조직 등 노예제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을 실천했다.
메노나이트와 그 분파인 아미시(Amish)를 혼동하는 사례가 많은데 심지어 미국에서도 메노나이트와 아미시를 혼동하며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도 'mennonite'라고 치면 대개 아미시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만 이 둘은 엄밀히 말해 약간 다르며 아미시가 아닌 메노나이트들의 상당수는 그냥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산다.(맨해튼에 사는 메노나이트 이야기) 물론 'Old-Fashioned'라고 해서 정말 아미시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주로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했고 미국이나 유럽 기준으로는 흔하지 않다. 현재 중미와 남미에 약 350,000 명 정도의 전통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초보수 메모나이트가 여러 고립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독일계가 많다. 이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속 교육 등은 19세기 농촌 생활과 다르지 않다.
이들도 분파가 많기 때문에 아미시와 같은 방식의 삶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볼리비아, 파라과이, 벨리즈, 아프리카 등지에도 존재한다. 계속된 탄압과 문명의 접근을 피해 벽지에 숨은 것으로, 후술할 '닫힌 사회'로서의 문제점이 자주 발생한다. 물론 도시 지역의 평범한 메노나이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3.3. 동유럽 이주
네덜란드와 독일 각지에서 분쟁을 일으키던 메노나이트 교회 신도들은 비스와강 하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비스와 강 하류 지역은 늪지대가 많았고 홍수 피해가 빈번했는데 네덜란드 출신이 많았던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해당 지역의 늪지대를 개간시키고 간척시킬 목적으로 초빙되었다고 한다. 메노나이트 신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시민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비스와 강에 정착한 메노나이트들은 네덜란드어와 저지 독일어 방언이 혼합된 "메노나이트 저지 독일어(Plautdietsch)"를 사용하였는데 폴란드에서 메노나이트 공동체가 사멸한 현재에도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메노나이트 이민자 공동체에서 사용한다.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메노나이트 교도 상당수가 프로이센 영토로 편입되었는데 군국주의 성향의 프로이센 왕국 정부는 메노나이트를 대상으로 징병을 하지 않는 대신 무거운 세금을 때렸다. 당시 프로이센 법에서는 군복무를 한 남성만이 토지를 새로 구입할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 메노나이트들은 인구가 늘어나지만 새로 농토를 구입하지 못하여 심각한 빈곤 문제에 처하게 되었다.
때마침 러시아 제국에서 볼가 강 하류 지역에 몽골계/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이 거주하던 볼가 강 하류 지역을 목초지에서 농경지로 개간해서 세수를 늘릴 목적으로 메노나이트들을 초빙하였고 여기에 종교의 자유와 병역면제를 미끼로 던졌다. 러시아로 이주한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약 6,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비옥한 처녀지를 개간하는 데다[7] 세금 혜택은 물론 종교 근본주의 공동체 특성상 출산율이 높아서 당시 의학 기술 발달과 더불어 인구가 금세 늘어났다.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19세기 독일계 러시아인 중 볼가 독일인 사회의 중추를 구성하고 러시아에서도 메노나이트 저지 독일어를 계속 사용했으나 전성기도 잠시였고 이후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8] 자세한 내용은 독일계 러시아인 문서 참조.
러시아나 미국으로 가지 못하고 비스와 강 일대에 남은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점차 루터교회에 동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해당 지역에는 1천여 명의 메노나이트 신도만 남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 폴란드 영토가 조정되는 과정에서 단치히, 아니 그단스크 일대는 폴란드로 넘어가고 독일인으로 분류된 메노나이트 신도들은 전부 독일로 추방당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저지대를 중심으로 한 메노나이트들이 폴란드 서부를 거쳐 볼가 강 하류 평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스위스를 중심으로 했던 후터파는 보헤미아, 트란실바니아를 거쳐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흑해 북부에 주로 정착했다.
3.4. 오늘날의 재침례파
미국의 아미쉬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재침례파는 메노나이트(Mennonite), 아미시(Amish) 공동체[10], 후터라이트(Hutterite) 등이 있다. 재침례파는 종교개혁 이후 근현대에 와서도 이단적이라는 이유로 주류 개신교의 배척과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후터파(Hutterite)는 미국으로 건너와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종교적 병역거부 문제로 미국 정부와 충돌한 끝에 캐나다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미국의 진보 지식인 상당수는 재침례파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을 국가에 배신당한(미국의 건국 이념인 “종교의 자유”와 모순되는 처벌을 받는) 순진한 사람들로 생각하며 동정하기 시작했다. 징병제와 내전, 남북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이미지가 병역기피자나 사이비 등으로 여겨지며 바닥인 것과는 그 배경 및 상황이 대조적이다.[11] 그나마 오늘날 여러 메노나이트 신학자들의 활약, 메노나이트들의 적극적인 국제 협력으로 인하여 메노나이트는 정통 교파로 인정받게 되었다. 심지어 한국의 보수적인 교단들도 메노나이트 책을 번역하거나 기관지에 관련 책을 호평하는 서평을 실을 정도로 예전에 비하면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었다. 현재 메노나이트는 세계교회협의회, 세계복음주의연맹 등 세계적인 기독교 교잔 연합체들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중이다.
아미시가 아닌 일반 메노나이트 분파들은 크게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뉘는데 아미시가 아닌 재침례파 교회들(MCUSA 등)은 대개 진보파에 속한다.[12] 보수파 메노나이트(CMC)라도 평화주의를 아주 버린 건 아니고 쉽게 말해서 현대문명을 받아들인 아미시들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재침례파 보수 교단이 진보 성향 교단보다 출산율이 월등히 높은 데다 재침례파 인구 자체가 소수였던 이유로 다시 보수 교단 신도 인구가 더 많아지고 있다.
재침례파가 처음부터 모두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일부는 독일/폴란드에 잔류하여 지하교회로 신앙을 이어나갔고 또 다른 일부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으로 건너가기도 했는데 독일계 메노파들은 폴란드 그단스크 일대를 거쳐 볼가 강 유역으로, 스위스계 후터파들은 체코와 루마니아를 거쳐 우크라이나 일대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제국에서 특혜를 많이 주었지만[13]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에게도 병역을 강제 부과하는 등 실질적인 탄압이 이루어진 탓에 다시 북미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매노나이트들이 또다시 탄압받게 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재침례파 공동체는 끝내 와해되었다. 이후 소련이 종교적으로 이전보다는 관용적으로 변하게 됨에 따라 재침례파 공동체가 어느 정도 되살아나면서 상당수는 다시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소련 붕괴 후에는 월등히 잘 사는 독일로의 이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아무래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자체가 정교회가 대세인 나라이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어도 소수 종파 정도의 위상이다.
오늘날에 주류 개신교 안에서는 비록 유아세례 문제가 있기는 해도 재침례파의 자발적 신앙관과 교권주의 배척, 철저한 제자도 사상, 평화주의 등의 유산을 가진 재침례파의 사상들이 신앙과 헌신의 강요와 보수복음주의적, 근본주의적 폐단 등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개신교의 현실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14] 자신들의 교회에서 총기난사를 저질러 가족과 형제들을 죽였음에도 그런 범인의 선처를 탄원한 아미시 공동체의 이야기가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침례파의 여러 교파들은 오랜 탄압으로 인해 폐쇄성이 매우 강하고 전도도 하지 않으며 새 신자도 거의 받지 않는다. 보수 교파에서는 심지어 수세식 화장실의 사용 여부에 관해서도 공동체별로 이견이 나뉘는데 이런 상황에서 새로 선교를 하고 신자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미 이들은 그냥 그들은 그렇게 산다 수준의 폐쇄적인 부족처럼 되어 버렸다. 아미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캐나다로 이민갔던 메노파들도 캐나다 정부에서 의무교육을 확충하자 정부의 의무교육을 세속교육이라고 거부하고 다시 멕시코,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서 자급한다. 라틴 아메리카 현지인들 입장에서 이들은 전통생활을 고수하는 원주민이 아닌데도 굳이 옛날식 생활을 하는 신기한 사람들 취급이며 볼리비아에서는 성폭행 문제 처리 문제로 매노나이트들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지기도 했다.
그나마 브라질로 이민갔던 메노파들은 좀 진보적인 편이라 선교도 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선교 활동을 벌여 아프리카에도 재침례파 신도 수가 70만여 명 정도 된다. 물론 이들은 독일어를 쓰지는 않고 현지인이 개종한 경우다.
2018년 기준으로 전세계에 213만 명 정도의 신도가 있는데 신도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50만)이고 그 다음이 굉장히 의외지만 에티오피아(31만), 인도(26만), 콩고민주공화국(23만)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에 신도가 가장 많으나 4만여명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에도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KAC)가 설립되어 있고 도서출판 대장간이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재세례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온건 진보, 개혁적 성향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