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침)례파의 기원과 역사
Ⅷ.
재세(침)례파 운동
지금까지 우리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에 의한 개혁운동과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난 교회개혁 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는 16세기 개혁운동에서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던 재세례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혁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군림해왔던 수많은 체제들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자들과는 구별되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재세례파였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을 중심한 루터의 개혁운동,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운동이었으나 종교개혁의 서자 혹은 좌경적 개혁운동(Left-wing Reformation)으로 불렀고, 종교개혁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다. 적어도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사 관련서적에서 재세례파가 독립된 별장(別章)으로 취급된 경우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1) 침례교 교회사가인 윌리엄 이스텝(William Estep) 교수는 “16세기 재세례파처럼 부당한 평가를 받아 온 종파는 일찍이 없었고, 이들은 잘못 이해되었기보다는 차라리 무시되어 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재세례파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재세례파 운동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1960년대이래 이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재평가를 위한 논구가 일고 있지만2) 지난 400여 년간의 무시나 오해 그리고 부당한 평가를 불식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재세례파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1. 재세(침)례파의 기원과 역사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의 교회사 교수인 윌리암스 (George H. Williams)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루터파(Lutherans), 쯔빙글리(Zwinglians), 칼빈파(Calvinists) 그리고 성공회(Anglicans) 등에 의해 이루어진 온건한 개혁운동인데 이 개혁운동을 ‘행정적 개혁’ 혹은 ‘관료적 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종교개혁운동의 주류로 이해되어 왔는데 윌리암스 교수는 이들을 ‘고전적 개혁’(Classical Reforma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콘스탄틴황제 이후 형성되어 온 소위 국가교회(state church), 곧 제도화된 교회(established church) 안에서 관헌(국가 혹은 정부)의 지원이나 보호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지스티어리얼’(magisterial)이라는 형용사로 개혁운동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두 번째로는 온건한 개혁과는 달리 다소 과격하거나 급진적이었던 여러 형태의 재세례파(Anabaptists), 신령파(Spiritualists) 그리고 복음주의적 합리론자들(Evangelical Rationalists)들을 통칭하여 ‘급진적 개혁’(Radical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3) 이들은 유럽의 오랜 국교회(國敎會) 전통을 거부하고 콘스탄탄 이전의 고대교회로의 복귀를 근간으로 하여 보다 철저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래디칼’(radical)한 개혁운동으로 분류하였다. 윌리암스 교수의 이러한 분류방식은 그 이후의 교회개혁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회개혁운동사에 있어서 이 양자를 구별하는 윌리암스 교수의 표준은 일차적으로 개혁자들의 교회론 혹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개혁운동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국가나 정부 등 세속권력집단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느냐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즉 전자는 교회개혁운동에 있어서 제도화된 교회 안에서 세속권력과 제휴 혹은 지원을 얻으며 교회를 시민사회와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후자는 서구의 오랜 국교회(國敎會)전통은 거부하고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에로의 복귀를 근간으로 했고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배제하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종파주의자들(sectrians)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의 주된 이념이 개혁(reformatio)이라고 한다면 재세례파나 신령파 혹은 합리주의자 등 급진적 개혁자들의 주된 이념은 국가교회형태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귀(restitutio)였다.4)
재세례파의 유형
재세례파 운동은 한 지역에서 어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일한 개혁운동이 아니라 스위스, 독일, 모라비아, 화란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 운동으로서 이 운동 또한 몇 가지 유형과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발트(Willem Balke)는 재세례파를 7개 분파로 분류하였고5) 윌리암스 교수는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으나 필자는 오웬 차드윅(Owen Chadwick)의 분류를 따라 다음의 4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첫째,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당시의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l), 펠릭스 만쯔(Felix Manz)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 둘째 발타샤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ar)와 한스 뎅크(Hamns Denk) 그리고 필그림 마르펙(Pilgrin Marpeck)을 중심한 남부 독일에서의 재세례파 운동, 셋째 모라비아의 훗터 공동체, 넷째 화란과 북부독일에서의 메노나이트(Mennonite)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들 간에는 일치점과 상이점이 있고 거의 유사한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스위스형제단’이 재세례파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재세례파로 불리게 된 것은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고 ‘신자(信者)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신자의 세례’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신자의 세례란 성인이 된 후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후 베푸는 세례를 의미한다. 즉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의미이다. 이들이 재세례파라고 불린 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재 세례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재세례파를 칭하는 아나밥티스트(Anabaptist)라는 말은 희랍어 ‘아나밥티스모스’ 곧 ‘다시 세례받는 자’라는 의미에서 온 말이다. 이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한 것은 앞서 말한 바이지만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아세례를 받으므로 자동적으로 속했던 국교회 제도에서 떠나 재침(세)례를 받은 이들을 구별하여 별도의 교회를 구성하였다.
재세례파의 개혁의 이념이나 교회관, 국가관, 세례관 등은 개혁교회와는 매우 달랐다. 따라서 이들 재세례파는 당시 국가권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온건한 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도 끊임없는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는 무정부적인 반란집단으로, 당시 교회로부터는 이단적인 종파운동으로 취급받아 왔다. 특히 칼빈은 재세례파를 천주교와 동일하게 이단적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교리를 비관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한편으로는 로마천주교를, 다른 한편으로는 재세례파를 공격하였다.
재세례파의 기원
제3장에서 살펴 본 바대로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쯔빙글리의 지도력 하에서 1523년 1월 29일 제1차 공개토론회가 개최하면서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1524년 6월의 제2차 토론, 1524년 1월의 제3차 토론이 있은 후 개혁은 크게 진전되고 있었다.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쯔빙글리와 함께 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48-1526)이며 이때는 1521년 11월의 일이었다. 이 때로부터 쯔빙글리의 신약성경 원리에 기초한 개혁정신에 찬동하는 이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했는데, 콘라드 그레벨 외에도, 펠릭스 만쯔(Felix Manz), 안드류 카스텔베르거(Andrew Castellberger)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고 이들은 곧 ‘형제단’으로 불리워졌다. 이것이 소위 ‘스위스 형제단’(Swiss Barthen)의 시작이었으며 재세례파 운동의 역사적 연원이 된 것이다. 이들의 개혁의지는 불과 3년이 못되어 스승인 쯔빙글리를 능가하였고 따라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다.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의 개혁이 너무 보수적이었고 지나치게 점진적이라고 생각했다. 1523년 10월에 있었던 제2차 토론 때부터 그레벨 등 스위스 형제단과 쯔빙글리 사이에는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견해차란 교회의 본질 및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이견이었다. 미사 및 성상들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쯔빙글리나 시의회와는 달리 스위스 형제단은 철저하고도 즉각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부터 쯔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 사이의 분열의 조짐이 노정되어 갔다. 그해 12월 29일 쯔빙글리는 시의회의 점진적이고 타협적인 개혁을 지지했는데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가 시 당국의 정치적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진리를 유보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결국 쯔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 사이의 결별을 가져왔다. 2차 토론 이후 스위스 형제단들은 오직 ‘신자의 세례’를 주장하며 중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참 교회의 이상을 갖고 있었다. 블랭크(Fritz Blanke)에 의하면 콘라드 그레벨과 그 무리들은 이미 1524년에 신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례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재세례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쯔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찬동하고 이를 시행했는데 그 근거는 구약의 할례를 통한 부모의 언약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위스 형제단 지도자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근거가 없으며, 8일 만에 행하는 수동적이 할례를 유아세례와는 근본적으로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25년 1월 그레벨과 만쯔, 그리고 스탬프(Simon Stumpf) 등 급진주의작들은 저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로만 은밀한 화합을 가졌는데 이것이 스위스에서 일어난 재세례파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즐겨 모이던 장소는 노이스탓트(Neustadt) 거리에 있던 펠릭스 만쯔의 집이었다. 여기서 유아 세례의 타당성에 관한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유아 세례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설교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보고 한편 놀라고 당황하여 재세례파를 비난하는 결렬한 설교를 시작하였다. 저들은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세속정부에 대한 견해도 온당치 않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쯔리히 시의회는 스위스 형제단의 재세례 요구는 법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보아 법적 조치를 강구하게 되었다.
1525년 1월 쯔리히 시 의회는 신자의 세례문제 때문에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1월 10일에서 17일까지 그레벨, 만쯔, 로이블린(Reublin), 블라우록(Blaurock) 등은 쯔빙글리와 블링거에 대항하여 세례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 토론의 결과와 관계없이 시의회는 1월 18일 쯔빙글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유아세례의 시행을 명했고 재세례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로부터 사흘 뒤인 1월 21일에는 로이블린, 해쩌(Haetzer), 볼티(John Botli), 카스텔베르거 등을 추방하고 그레벨과 만쯔에게는 어떤 학교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바로 그 날, 즉 1525년 1월 21일 저녁, 10여명의 스위스 형제단들은 펠릭스 만쯔 집에 모였다. 이들은 쯔리히 시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反)하는 속권의 발등으로 확신하고 이날 콘라드 그레벨은 게오르게(George of the House of Jacob)에게 처음으로 재세례를 베풀었다. 그레벨이 직접 재세례를 베푼 후 블라우룩은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도 재세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스위스 형제단들로부터 소위 재세례파가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개혁운동사에서 급진적 행동이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쯔빙글리파의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 세례만을 주장하여 재세례를 베푼 것이다. 로마 가톨릭 뿐 만 아니라 루터와 쯔빙글리와의 결별을 상징하고 있는 사건 가운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었다. 개혁자들이 성경에 의해서(by)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려 한 것에서 진일보하여 성경으로부터(from) 얻은 진리로 새로운 교회 건설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은 국가 권력과 교회가 결합한 형태인 당시 교회로부터 떠나 개혁 아닌 혁명을 지향하였다. 이것은 관헌의 지원을 받은 개혁 프로그램에 반대하여 급진적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하나의 시작이었다.
1)홍치모, 「종교개혁사」(성광문화사, 1977), 122.
2)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재세(침)례파에 대한 새로운 새로운 연구를 시도한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독일의 C. A. Corelius, 오스트리아의 J. Beck, J. Loserth, 스위스의 Emil Egli, 화란의 S. Cremer, W. J. Kühler 그리고 미국의 George H. Williams, Franklin H. Littell 등과 메노나이트(Mennonite)학자들인 John H. Yoder, Harold S. Bender 등을 들 수 있다.
3) George Huntston Williams, Introduction to PartⅠof Spiritual and Anabaptist Writers: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Radical Reformation..., vol. ⅩⅩⅤ i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Philadelphia, 1957, 19-38; "Studies in the Reformation: a bibliographical survey," Church History 27(1958), 46ff.; Introduction to The Radical Reformation(Philadelphia, 1962), ⅹⅹⅲ-ⅹⅹⅺ; Robert M. Kingdom, "Peter Martyr Vermigli and the Mark of the True Church",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Church History, eds. F. Forrester Church and Timothy George(Leiden: E. J. Brill, 1979), 199.
4) George H. Williams, The Redical Reformation(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2). ⅹⅹⅵ.
5)예를 들면 Willem Balke는 재침례파를 7개 분파로 분류하는데, a. 토마스 뮌쩌와 쯔비카우의 예언자들(Thomas Müntzer and the prophets of Zwichau), b. 스위스 형제단(The Swiss Brethren), c. 모라비아 공동체, 곧 훗터파(Moravian Communities, Hutterites), d. 멜키오르파(The Melchiorites), e. 뮌스터의 재침례파(The Münster Anabaptists), f. 메노나이트파(the Mennonites), g. 데이비드 조리스파(The group surrounding David Joris)가 그것이다. (W. Bake, Calvin and Anabaptists Radicals, Eerdmans, 1981,2-3 참고). 또 G. H. Williams는 복음주의적 합리론자(Evangelical Rationalist)와 신령파(Spiritualist)와 재세례파를 급진적 개혁운동을 분류하는데, 재세례파를 다시 3분파로 분류한다. 즉 a. 혁명적 재세례파(Revolutionary Anabaptist, Melchior Hoffmann) b. 정숙적 재세례파(Contemplative Anabaptist, John Denck) c. 복음적인 재세례파(Evangelical Anabaptist, Conrad Grebel, Menno Simons 등) 등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Williams 교수는 Thomas Müntzer를 재세례파로가 아니라 신령파로 분류하고 있는데 필자는 Williams 교수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또 H. Fast는 그의 Der linke Flügel der Reformation 서론에서 Thomas Müntzer와 그의 추종자들 뿐만 아니라 melchior Hoffman 과 뮌스터의 재세례파까지도 순수한 재침례파 공동체에 포함시키지 않고 도리어 저들을 열광주의자들(Fanatics)로 취급하고 있다(W. Balke, op. cit., 2. note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