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 신학
(Mark C. Talyor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세계를 우리는 흔히 포스트 모던시대라고 부른다. 문학, 건축, 예술, 과학, 종교뿐 아니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무엇이든 정형화된 것을 거부하는, 구조적인 틀을 거부하는 거대한 물줄기가 바로 이 포스트 모던의 조류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구체화된 이론이라기보다는 종잡을 수가 없는, 끝이 보이질 않는 미로, 사상적인 흐름, 진행 또는 혼돈(chaos)등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에서 1960년대부터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몇몇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제 한물 지나간 낡은 사조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생성발전 단계에 있는 개념이라고 보는 편이 한결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을 부정한다면 곧 20세기 후반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적인 측면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여기서는 연구 범위의 특성상 상세히 다룰 수 없는 부분으로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 연장이며 계승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특히 신학적 입장에서 포스트 모던사상을 고찰해 볼 것인데 이 고찰에 관한 당위성은 오늘날 한국교회만을 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교회 성도들의 감소, 예배나 예식 등 포괄적인 교회 문화의 이질적인(?) 변화 등이 모두 이 포스트 모던이라는 거대한 사상적인 흐름의 영향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흐름이 있다. 그렇다면 이 포스트 모던이라는 사상은 어디에서 생겨났으며 또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알아야 그 흐름을 파악하고 또한 나름대로의 대안까지도 마련할 수가 있을 것이다.
포스트 모던 신학이라고 한다면 테일러(Mark C. Talyor)를 중심으로 하고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데리다와 푸코를 선두라고 할 수 있으며 데이빗 그리핀을 전성기로 이끈 학자라고 그 흐름을 대강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사상에 대해 알고 있기를 현재가 그 시대이고 또한 그러한 영향이 곳곳에 미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을 특히 우리의 관심분야인 신학에 접목을 시킨 사람이 누군지는 사실 잘 모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앞서 언급한 테일러(Mark C. Talyor)라는 학자로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인 해체라는 모험을 처음 시도했다고 할 수 있는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푸코(Michel Foultcault), 블랑쇼(Maurice Blachot), 데리다(Jacques Derrida)로 이어지는 해체주의적인 사상을 처음 신학의 경지로 끌어들여 나름대로의 사상을 전개한 학자이다. 니체에서 데리다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은 그 자체의 고유한 통일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해체주의 신학은 그 끝이 없고 혼돈과 괴리만이 남는 신학으로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테일러만을 놓고 보자면 그 결말이 혼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알게 된 것으로서 이 테일러 자신이 포스트모던적인 해체 사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혼란한 세상에서 새로운 관점을 열어 줄 것이다."라는 긍정의 꿈을 안고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또한 데리다도 그가 해체를 주장하게 된 동기는 나름대로의 진리를 찾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특히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인 사상을 해체하는 과정을 보면 우리가 성경에서 진리를 찾을 시 한 번쯤 생각해 봄직한 논리가 아닌가하는 반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에게 있는 성경은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성경은 우리가 사용하고 또한 과거에 사용되었었던 언어라는 틀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대문에 상고자(해석자)들이 그곳에만 얽매여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유기체적인 말씀이 그곳에 얽매여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데리다의 텍스트 이론 등을 볼때 우리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상당한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이 해체주의 학자들은 나름대로 혼돈을 탈피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이 어떻게 모든 부분에서 그리고, 특히 신학의 입장에서도 혼돈과 무질서로 밖에 정의될 수 없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발제물에서는 이 해체에 관한 부분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계보는 다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테일러가 말하는 핵심사상 중 하나인 영원 회귀(The Eternal Return)만을 보더라도 데카르트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해야 하는 문제로서 너무나도 길고 복잡한 발제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간소화하여 이러한 해체주의 사상을 핵심적으로 집대성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데리다(Jacques Derrida)를 필두로 하여 그의 사상을 신학에 혁신적으로 접목시킨 테일러와 함께 그 관계를 중심으로 어떠한 이론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경과 경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테일러의 포스트 모던 비/신학
테일러(Mark C. Talyor)는 그의 저서 <방황하는:포스트모던 비/신학>(Erring : A Postmodern A/theology)에서 하나님의 존재, 자아의 실존, 신의 창조세계의 확실성, 진리의 객관성, 선과 악의 구별, 역사의 의미 등의 전통적 개념들을 해체시키고 해체적 비/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테일러의 해체신학은 데리다의 해체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말 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로고스 중심사상을 부정하는 데리다의 해체사상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는 데리다를 따라서 전통적 로고스주의가 사용하는 양자 택일의 논리가 아닌 양자 긍정과 양자 부정을 동시에 사용하는 플라톤의 파르마콘(Pharmakon)의 논리를 수용한다. 데리다의 해체는 어떠한 소속, 이론적 당파, 교조성도 거부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고, 나아가 다양한 철학적 선입견들과 싸우는 이러한 입장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 1부에서는 서구 신학적 테두리에 본질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가지 개념에 대한 해체의 함축을 천명한다. 그것은 신, 자아, 역사와 책으로서 현대주의적 종교비판을 시도했던 인본주의적 무신론에서 신의 죽음이 표현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무신론의 신학적 테두리를 분석한다. 인본주의적 무신론은 신적 창조자의 속성을 인간 피조물에게 전위시킴으로써 자아의 이름으로 신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고전적 신학은 현대주의적 인간론으로 도치된다. 고전적 신학은 지배와(Dominion)와 통제(mastery)의 사고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자기에 대한 확언과 더불어 기계기술 의식의 중심에 있는 유용성과 소비의 원리를 구체화한다. 그것은 가기 도취적(narcissistic)이고 허무주의적(nihilistic)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확언은 결국 자기 패배이다." "역설적으로 신의 죽음은 자아의 사라짐에서 절정을 이룬다."
2부에서 테일러는 해체적인 비/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 그는 신의 죽음이 신적인 것의 개념을 재해석하는 길을 준비한다. 그것은 극단적 기독론과 관련해서 이해된다. 비/신학적 관점으로부터 예수는 단어(Word)로 나타나고, 단어는 글(writing)로 읽어 진다. 여기서 글이란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텍스트가 아니다. 글이란 "現前 / 不在와 동일성 / 차이성의 상호작용"(the interplay of presence / absence and identy / difference)이다. 이것이 해체적 비판주의의 통찰이다.
글은 전통적 신학의 양극적 대립을 뒤집는다. 테일러는 책이란 모든 존재와 비 존재의 비 기원적인 기원(the nonoriginal origin)으로 본다. "모든 것은 단어의 발생적 / 해체적 작용 내에서 항상 이미 새겨진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글이란 신적 길(the divine millieu)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중간 길"이다. 이 길을 따라서 신의 글이란 반복적으로 단어의 무한한 산종(the unending dissemination of the world)으로 나타난다."
2. 해체신학
1) 신의 죽음
테일러는 니체의 신 죽음의 선언을 수용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외친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리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 신의 살해자이다."
테일러는 현대주의의 여명인 계몽주의(Enlightenment)이래로 신 죽음은 두 가지 대조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하나는 현대주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형식이다. 신 죽음의 현대주의형식은 인간주의적 무신론(humanistic atheism)에서 표현되고 포스트모던 형식은 "포스트 인간주의적인 비/신학"(posthumanistic a/theology)에서 표현된다.
여기서 테일러는 데카르트적 사고를 극단화한다. 이 사고는 진리의 확신을 동일화하여 모든 것을 인간으로 환원한다. 인간이 주관이 되면 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은 객관화된다. 여기서 신(神)도 사고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 바다를 마시면 그는 역시 바다의 창조자인 신을 마신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신의 살해자이다." 인간은 자기 의식을 발전시켰다. 이제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미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주의적 무신론이 살해한 신은 기독교적인 초월적 창조자(the transcendent christian Creator God)이다.
초월적 절대자는 자아의 본래적인 근거이며 저적 타자(the whole other)이다. 이 전적 타자는 인간 자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그림자로서 나타난다." "신은 죽음이다. 죽음은 절대적인 주인이다."(God is death, and death is absolute master).
현대의 인간은 자기의 주인인 신을 폐위시키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 살해는 자기 신격화의 행위이다. 테일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본질은 그 자신 원인인 신이 되는 기획"(The essence of the oedipal complex is the project of becoming God --- , causa sui.)이라고 선언한다.
인간주의적 무신론은 신의 실재를 단순히 부정하는 대신에 신적 주체의 속성을 인간적으로 환원시킨다. "주권적 신의 죽음은 이제 주권적 자아의 탄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적 무신론의 명제였다. 현대 후기적(postmodern) 비/신학은 이 신의 죽음을 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연결시킨다. 인간은 주권적인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자아상의 근저에는 초월적인 절대적 자아인 신의 형상이라는 신학적 형상이 잔재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자아의 근거인 신적인 절대적 자아의 죽음은 곧 바로 인간 자아의 죽음을 말한다고 본다. 신의 초월성의 죽음은 모든 자율적 자아의 죽음과 모든 인간성의 죽음을 구현한다.
2) 자아의 사라짐
테일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통적 신학적 관념을 해체한다. 그는 알타이저(Altizer)의 견해를 따라서 자아란 상대적으로 죄근의 발명이라고 본다. 알타이저에 의하면 "신이 전적으로 고립되고 분리되던 서구 역사의식에 있어서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자율적인 존재로 발견하게 되었다."
자아(selfood)의 시대는 바울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으나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인격적 주체성의 발견이 시작되었다. 어거스틴은 자서전(autobigraph)이라는 문학적 장르를 만들었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Phaenomenologie des Geistes)은 자아의식의 완성으로 나아 갔다.
여기서 인간의 자아의식은 신적 자아의 형상이라는 신학적 관념에 의하여 전제되어 있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신적 주체성의 죽음이란 곧 그의 형상인 인간 자아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테일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언급된 자아란 문자적 사실이 아니고 문학적인 창조로 본다. 그는 니체가 그의 <권력의지>(The Wille zur Macht)에서 행한 해석을 따른다. "주체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것 배우에 부가되고 고안되고 투영된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부산물로서 자아는 허구적인 텍스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아는 단지 허구"라는 니체의 견해를 따른다.
어거스틴은 시간성의 주체성을 분별하였으나 과거와 미래의 부재(absence)를 현재의 現前(presence)에서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주체성의 시간성(temporality of subjectivity)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이 서구의 존재 신학적인 전통에 더욱 비판적이었다면 혁명적인 통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그의 인본주의적 통찰이다. "세계속에서 시간의 실재적 現前은 인간이라고 불리운다. 시간은 사람이며 사람은 시간이다." 시간은 흔적(trace)으로 나타난다. 테일러는 여기서 데리다의 명제를 빌린다. "살아 있는 현재의 자기는 근원적으로 하나의 흔적이다." "흔적은 자아의, 그의 고유한 현전의 지움(the erasure of selfhood, of one's own presence)이다."
자기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현전성을 세우려는 노력에서 자아는 불가피한 차이와 억누를 수 없는 부재를 발견한다. 자아의식 속에서 자아 현전의 추구는 자아부재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자아를 향한 여행은 십자가의 길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여행임이 밝혀진다. "자신의 표상 속에서 자아는 깨뜨려지고 열려진다. 자아의 깨뜨림은 흔적에 의하여 기록된다.
테일러는 데리다를 인용한다.
흔적은 "첫 번째 외부성의 열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의 타자에 대한 수수께끼적 관계이며 외부에 대한 안의 관계"이다. 데카르트적 자아는 없다. 텍스트 속의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기능을 담당하지 않는다. 텍스트 속에 나타나는 자아는 어디까지나 나나 그와 같은 대명사를 사용하는 언어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의 정신이란 텍스트 속에 이미 존재해 있는 문학어나 관습 그리고 기호등이 서로 만나는 일종의 공간에 불과하다. 자아란 이 공간 속에서 흔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흔적은 공간설정(spacing)"이다. "항상 현전(現前)인 부재(不在), 항상 안에 있는 바깥은 죽음 자체이다."(the absence that is always 'present', the outside that is always 'inside' is the death itself)
살아 있는 현전은 항상 죽음에 의하여 표시된다. 이 죽음은 현전에 항상 붙어 다니는 수수께끼이다. 흔적의 공간 안에 자아의 사라짐의 측면이 표시되는 십자가가 씌여 있다. 텍스트 안에서 자아는 이미 문자이고 다른 것에 의하여 흔적을 이미 받고 있다. 자아는 주체가 아니고 흔적의 연쇄에 가입되어 있는 기능에 불과하다.
자아의 사라짐은 곧 주체성의 해체(dissolution of subjectivity)를 말한다. 주체성의 해체는
신(神) 죽음과 자아의 사라짐의 상관자이다.
3)역사의 종말
테일러는 역사라는 개념 역시 신학적 개념으로 보고 해체를 시도한다. 역사개념은 신 개념과 자아 개념을 갖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적인 서구에서 역사란 단지 신 중심적(theocentric)일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 로고스 중심적(logoscentric)이라고 말한다.
로고스적 역사 이해에는 역사적 사건이 수수께끼적으로 나타나지만 사건의 표면적 혼돈 아래는 이성과 질서가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사건들은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있는 형식을 형성하고 분별있는 방향을 가진다. "신적 로고스는 처음과 중심과 종말을 연결하여 정합적인 전체(a coherent totality)를 이루는 실(thread)이다.
이러한 로고스적 역사이해에 대조하여 테일러는 희랍적 역사 이해를 제시한다. 희랍적 역사이해에 의하면 희랍신화에서 나오는 아리아드네의 밧줄처럼 역사란 하나의 시학(poetics)이다. 아리아드네의 밧줄이란 미궁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밧줄이다. "역사란 자서전처럼 창조적 상상력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상상력은 재생산적일 뿐 아니라 생산적이다. 생산적 상상력은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부분들을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형성한다.
역사가 이야기를 포함하는 만큼 역사는 문자적이 아니라 문학적이다. 아리아드네의 밧줄은 시적인 줄이다. 그리하여 시작, 중간, 끝, 그리고 연결적인 이야기의 줄은 상상적인 언어 양태에 의존하는 시적 구상이다.
테일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콜링우드(Collingwood)의 견해가 인용된다. "사실은 해석하는 요구를 통하여 항상 걸러진다." 이 성질은 사실들이 세워지는 규범과 기준을 포함한다. 때문에 순수한 사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담화 속의 단어로 언어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추정상의 사실이 "허구"라는 견해는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함축성을 제공한다.
여기서 테일러는 로고스적 역사이해를 거부, 비판한다. 역사, 이야기, 서사에 있어서 상상력의 행위를 감안한다면 "로고스는 개시되기 보다는 고안되었고, 발견되기 보다는 창조되었다. "
"연대기가 서사적인 정합성을 갖도록 하는 상상력 행위의 결과로서 역사는 불가 환원적으로 문학적이며 불가피하게 예술적이다." "서사적 담화는 기술적으로 중립적이고 사실적으로 정확한 대신에 상상적이고 수사학적이다."
역사의 종말은 초월적 신의 죽음과 주권적 자아의 사라짐을 전제할 뿐 아니라 불행한 의식의 극복을 필요로 한다. 역사의 종말을 여는 선언은 불가피하게 부정을 내포한다. 이 선언은 죽음의 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이 선언은 모든 긍정과 불가분리적인 부정을 시인한다. 역사의 종말을 표시하는 긍정과 부정의 일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정신 병리적 집착으로부터의 인류의 해방으로 결과된다. 이 해방은 "현재에서 사는 길이요 동시에 죽은 길"이다. 여기서 해체신학은 삶과 죽음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
종말게임은 이제 종말게임을 그치는 것에 대한 놀이로 나타난다. 종말게임의 끝은 그러나 동시에 무한한 게임의 시작이다. 이러한 역사종말의 관점에서 최종의 줄거리(final plot)는 아무 줄거리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책의 닫음"이다. 여기서 해체신학은 역사의 무의미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로고스적 서술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헤겔이나 어거스틴적 역사에 대한 거대한 서술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
4)책의 닫음
신, 자아 그리고 역사와 마찬가지로 책의 관념 역시 신학적이다. "책을 닫음"이란 차가운 인쇄매체에서 뜨거운 시청각 매체로의 문화변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인쇄의 증식과 단어와 상의 무한한 증가"와 관련되어 있다. 책의 폭발 속에서 많은 사려 깊은 작가들은 책을 쓰는 것보다 초상화를 그리거나 멜로디를 작곡하는 것이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책은 그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의 닫음은 사실로 책에/안에 제한되어 있다. 현대와 포스트현대주의자들의 문학적 작품 역시 실제로 "책의 불가능성에 대한 책들"이다.
책은 순환성을 제시한다. 책의 순환성은 책의 닫음을 반영한다.
책은 순환성은 책의 닫음을 반영한다. 테일러는 책의 관념을 데리다로부터 빌려온다. "책의 관념은 유한하거나 총체성의 관념, 지시자의 관념이다."
택이란 단지 두 표제들 사이에 짓눌린 잎들의 집합이 아니다. 책은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유기체의 지체로서 통합되어 연관되는 살아 있는 전체이다. 책은 질서있는 전체성을 형성한다. 그만큼 책은 역사와 같이 로고스 중심적이다. 책은 그 자체 속에 닫혀 있는 지시자의 유기적 총체성이다. 책은 그것의 완전한 표현을 "백과전서(Encyclopedia)에서 성취하고 있다.
서구의 신학은 이러한 책의 관념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책의 중심은 성육신한 로로스이다. 이 전지전능한 로고스는 조직신학자들의 책을 구조화시키는 기초이다.
의미의 고유성은 책의 닫음의 기능이다. 닫음은 로고스의 현전(現前)에 의하여 영향받는다.
심연의 미궁이 되는 대신 책은 확정할 수 있는 입구와 출구를 가진 확고하게 기초된 논리적 구조이다. 로고스의 현전은 의미의 결정 가능성과 작품의 읽기 가능성을 보장한다. 읽는 노력은 쓰는 놀이를 지배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공적인 책은 걸작(Masterpiece)이다. 걸작은 전통의 노력이다. 걸작은 항상 완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기대는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권위를 대표하고 전통을 전승하는 노력에 있어서 걸작은 자기의 불완전을 드러내고 그것의 선들 사이의 멈출 수 없는 간격을 드러낸다. 지배자가 수하의 노예에 관하여 주인일 수 있듯이 걸작은
순종적인 감상과의 관계속에서만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걸작은 종결된 전체 또는 완전한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릇되고 불가피하게 열려 종결된다.
테일러는 말한다. "걸작의 의미는 모든 의미처럼 어떤 부재를 전제한다. 이 비 현전의 결과로서 의미의 지배를 가져오려는 걸작의 약속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책이 간격을 닫고 상처를 성공적으로 싸매는 한에 있어서 책은 병든 주관이 갈망하는 약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약은 단지 구제가 아니라 독이다. 기대와는 달리 고정은 치료하지 않는다. 고정은 독이다. "완전한 고정은 완전한 부동이다." 책의 성공은 책의 실패이다.
여기서 테일러는 데리다를 따라서 책의 관념에 대한 철학적 해독의 기술원리로서 테스트 개념을 제시한다. 텍스트는 책과 전혀 다른 지대에 속한다. 텍스트에는 "고정되어 있는 " "현실적 중심이 없다." 택스트안에서는 어떤 고정된 중심이 없다. "중심의 부재는 주체의 부제, 저자의 부재이다." 그러므로 택스트 바깥은 없다."
책을 택스트로 볼 때 모든 중심은 사라진다. 여백이나 간격이 중요시된다. 여기서 오히려 텍스트를 읽는다. 여기서 텍스트는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여백과 간격에 따라서 그 의미가 균열된다.
택스트의 의미는 고정 불변하지 않고 항상 개방적 상태로 남아있다. 문학 텍스트는 오직 독자의 마음속에 다양한 의미작용의 유희를 유발시키는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텍스트의 균열은 단지 파괴적인 것만이 아니다. 텍스트의 균열은 상처이며 裂開이다. 열림은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테일러는 생물학의 열개 개념을 문학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데리다를 따라서 책의 균열을 "산종"(dissemination)으로 읽는다. 이 산종이란 분봉처럼 종자가 여러개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텍스트의 단어들을 뿌리는 것이다. 산종은 자기의 것을 흩뿌리고 여기저기 산개시킨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이나 자아성은 여기서 완전히 사라진다. 주체는 산종 속에서 자아를 넘는 언어적 직물에 언제나 이미 연계되어 있다. 얽힘이 분절된 주체성의 가능조건이다.
이러한 읽기는 "해체적"이다. 텍스트는 산종의 異名이다. 산종인 텍스트는 놀이요 무대이다.
전통적 철학적 해석이 팽개쳐 놓은 각주나 또는 행간 같은 여백에서 책의 공식적인 천명 이외 텍스트의 비공식적인 기술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공식적인 검은 글씨의 장엄한 의미를 해체시킨다. 해체는 "반 구조주의적 비판"이다.
"쓰는 질문은 단지 책이 닫혀지면서만 개방된다. 책들에 대한 즐거운 방랑은 귀환 없는 방랑이 된다. 텍스트로의 개방은 모험이요 유보없는 시도이다." 해체신학은 완결된 정체성을 요구하는 책의 종결을 선언하고 무한한 산종과 해석을 가능케하는 텍스트로의 개방을 선언한다.
3. 비판
해체주의가 이성과 논리 자체를 부정함으로 서구의 정신사적 전통을 전적으로 부정하는데 대하여 정통신학은 이성과 논리에 그 적합한 권리를 인정하는 점에 있어서 해체주의와는 다르다. 해체주의는 전통적 논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는 더 이상 재래적인 의미에서 신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신학이든 정통신학의 체계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첫째, 신을 책의 단어나 글로 보는 등 전통적 신관을 해체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아를 성령을 통해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자체를 부정하는 자아의 해체를 주장한다, 셋째, 전통적 로고스적 역사관을 부정하고 반 로고스적 우주관을 설정함으로 즉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적 그리스도인 디오니소스의 세계, 절대적 시작도 중간과 종말도 없는 세계, 결정적으로 윤회를 인정하는 듯한 보충대리의 세계는 우리 전통 기독교 역사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넷째, 확신은 죽음의 영역이며 비 확신은 생명의 영역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현존하는 텍스트는 없다라고 하여 기독교 최고의 경전로서 정경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상으로만 보아도 해체주의 신학은 우리 정통 기독교 신학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인정할 수 없는 신학이다.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사상이 흠뻑 묻어서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의 사상으로 밖에 모이질 않는 것이다.
나가는 말
테일러의 책 'Erring'의 겉 표지를 보면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잘 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그림은 미로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앞에서 간단하게 나마 살펴보았듯이 그 앞과 뒤가 보이질 않는, 해체만을 주장하지 그 대안이나 끝은 제시하지 않는 미로의, 혼돈(chaos)의 신학으로서 아니 신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어려운 하나의 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해체신학은 니체로부터 시작하는 극단적인 인본주의적 생각들의 총체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의 해체라는 거대한 사상적인 괴물의 출현 앞에서 우리 정통 기독인들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소위 신본주의 확립에 힘써야 할 것이다.
먼저 이러한 포스트 모던의 현상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 이에 대한 복음주의적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남을 모르고는 나를 바로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시급한 현실로 인지된다. 앞에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현 교회에도 포스트모던의 많은 영향이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미래지평을 올바르게 열어 가기 위해서는 노력에 노력을 더하는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