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11 10:12
초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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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66  

초대교회

도날드 L. 노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을 읽을 때 약간의 향수를 느낀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매우 단순했던 것 같다. 오늘날 거대하고, 경쟁하는 종교 조직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막강한 활동을 펼치며,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 손을 대고 있다. 초대교회의 단순하고 영적인 모습은 영원히 사라졌는가?

초기 시대부터 계속해서 기독교계의 주류(主流)에서 비켜서서 자신들의 안내자로서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개별적인 모임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직적인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무시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참된 영적 축복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큰 즐거움을 알았다. 초대교회의 특성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한 인격을 주목함
초기의 제자들은 조직의 회원(membership)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한 헌신으로 함께 결합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었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마 4:18-20). 그들의 전 생애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다.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였다. 이 관계는 매우 인격적인 것이었다. 이 관계는 제자들의 열정적인 충성으로 드러났다. 베드로는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저만은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의 공통된 감정을 나타내었다(마 26:35).

그리스도의 승천 후, 새로운 제자들이 동일한 영을 마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했고(행 4:12,18),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을 주었으며(행 10:48), 그분의 이름으로 모였고(마 18:20),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며(행 3:6), 그분의 이름으로 반대에 대적했고(행 4:18-20), 그분의 이름으로 기꺼이 고난을 당하였다(행 5:41). 그들이 세상에 의해 "그리스도인들"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이상한 일인가(행 11:26)?
오늘날 이 영을 붙잡은 믿는 이들은 모두 교회의 계급적 호칭을 버리고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기를 기뻐한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성경에 주어진 "믿는 이들", "형제들", "성도들"과 같은 용어만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여전히 성경만을 신뢰할 뿐이다. "또 너희가 말이나 행위에 있어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말씀에 순종함
초기 시대에 믿는 이들에게 유일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미 구약은 가지고 있었으며, 신약이 기록되기 시작하면서, 신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벧후 3:15,16). 사도들은 회심한 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행 2:4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 이전에 하나님과 독립하여 살았던 삶이 이제는 말씀의 가르침으로 형성되었다(롬 6:17).

초대 교회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가르치는 것이었다(행 2:42). 말씀은 반드시 삶의 모든 면에 그 빛을 비추어야 했다. 어둠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반드시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요일 1:6,7). 호소 해야할 더 높은 권위는 없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 오늘날 초대 교회의 양식(pattern)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믿음과 행위의 모든 일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권위를 강조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결코 영적 진리를 실제적으로 알 수 없다.

장로들에 의해 인도됨
초대 교회는 가족, 곧 하나님의 백성의 가족과 같았다. 어떤 이들은 믿음 안에서 어렸지만, 어떤 이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장성했다(요일 2:13,14). 각 가족에는 반드시 인도자가 있어야 하듯이, 지역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형성되고 얼마동안 모임을 가진 후, 교회를 세웠던 초기의 사도들이 돌아와서 인도자의 자격을 갖춘 자들을 임명했다(행 14:21-23). 후에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인도자의 자격이 자세히 기록하였다(딛 1:5-9; 딤전 3:1-7).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에 관해 선한 지식을 가져야 하고, 도덕적으로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하며, 경건하고 질서 있는 가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인도자들은 장로 또는 감독(감독자)이라 불렸으며, 양떼들의 목자였다(행 20:28). 그들은 막중한 책임을 가졌다. 어느 날,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의 진보에 대하여 회계(會計) 해야 할 것이다(히 13:17). 각 지역교회에는 이러한 책임을 가지고 섬기는 장로나 목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14). 교회를 세운 사도들은 초대교회를 이러한 지역의 장로들에게 맡겼다. 더 높은 권위나 교회의 연합체, 감독관구를 다스리는 감독, 한 지역을 다스리는 감독 따위는 일체 없었다. 모든 초대 교회는 매우 단순했다. 지역교회의 인도는 돌보며 다스리는 일을 잘하는 그 지역의 영적인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성령님의 자유함
각 지역 교회는 안내서인 성경과 함께 한 무리의 장로들이 돌보도록 맡겨졌다(행 20:32). 사도들은 지역 교회의 영적 성장과 안내에 충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딤후 3:16,17). 성경을 남긴 것 외에 사도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남겼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로 확신하노라"(빌 1:6).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님께서 오셔서 증인이 되기 위한 권능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행 1:8). 그들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는 이 권능을 알게 되었다(행 4:19,20). 복음은 성령님께서 권능을 주심으로 불이 번지듯이 로마 세계에 전해졌다.
사도들이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남겨두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인도하시며 권능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같이 했다. 사도들은 성령님께서 믿는 이들의 성장을 위하여 저들 가운데 영적 은사들을 세우실 것을 믿었다(엡 4:11; 고전 12:4-7). 각 믿는 이들은 그 지역의 몸에 필요한 존재이며 그 지역의 몸을 충만케 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배웠다(고전 12:12). 각 믿는 이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초대 교회는 각 개인의 은사를 계발(啓發)하도록 격려했다. 거기에는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특권층으로 지정된 성직자와 평신도(성경적인 용어가 아니지만 부득이하게 표현하자면-역자주)의 나눔이 없었다. 대부분의 모임은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형식적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공적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딤후 2:8). 형제 자매들이 다 모인 교회 모임에서는 형제들이 인도하였다(고전 14:34). 다른 이들은 찬송으로 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거나 권면함으로 모임을 인도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은사들이 계발되고 모임에 알려졌다(고전 14:26). 이윽고 어떤 이는 예언자 또는 교사로 알려지게 되었고, 모임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을 듣고 새로운 은사를 보이는 기회는 항상 주어졌다(고전 14:31). 바울이 교회를 각 지체들로 구성된 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엡 4:11-16).

주님의 만찬

초대 교회의 모임에서의 다양한 활동들이 사도행전 2:42에서 보여진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교리, 교제, 떡을 떼며(주님의 만찬) 기도는 초기 모임의 특색을 이루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에서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따라서 사랑과 열정으로 매일 그분을 기억하였을 것이다(행 2:46). 후에 교회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주님의 만찬을 실행하였다(행 20:7).

만찬은 그들의 모임에서 중요한 시점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기도 후에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경배의 시간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고뇌를 기억함으로 마음들이 주님께 열려졌다. 떡과 잔은 부서진 몸과 부어진 피를 기억하는 것을 새롭게 하고 돕는 상징에 불과했다. 초대 교회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주 그분을 기억함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헌신을 돋우었다. 그리스도께 대한 유사한 헌신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전 11:23-26).


주님의 다시 오심
그리스도인들이 감동어린 눈으로 주님의 상(床)을 떠나면, 그들을 적대하는 세상을 대하여야만 했다. 그들의 마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다(행 2:44,45).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기"때문이었다(행 4:12).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 놀라운 구주에 대하여 증거했다.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믿는 자들로 알려지지 않은 모임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살전 1:9,10). 각 교회는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온 나그네들로 여겼으며, 진지하게 다시 오실 왕을 기다렸다(빌 3:20).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들의 모든 소망은 실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북돋우고 찬양하도록 한 "복된 소망"이었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는 간절히 바라는 탄식으로 드려진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단순함, 영적임, 권능...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초대 교회 시대를 열망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시다. 초기 시대부터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작은 무리들은 초대 교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찾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더 좋은 길은 없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

이 말씀에 따라
이사야 시대에 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읽혀지지 않았다. 오늘날도 거의 유사하다. 많은 목소리들이 있으며, 모두는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라고 외친다(사 30:21). 성경으로 돌아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는 거의 없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거의 강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외쳤던 이사야의 영(靈)을 잃어 버렸다(사 8:20). 오늘날과 같은 편의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려 들지 않는다.

특별히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실제적인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리에 관한 말씀에 더 흥미를 갖는 것 같다. 복음 전도자는 복음 메시지의 단순성을 지키기 위하여 격렬하게 논쟁하려 하면서도, 성경이 복음 전도 방법에 관하여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에 대하여 놀랄 정도로 무관심하다. 교사는 예언의 세부 항목에 관하여 교리적으로 논쟁하려 하면서도, 지역교회를 세우고 질서를 세우는 실제적인 일에 관하여 사람을 훈련하는 일은 거의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근거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영역을 잃어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와 같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에 대하여 스스로 그 이유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 미국에서는 매년 수백 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는가?
왜 영국과 미국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 급격히 이교도 국가가 되어가고 있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방법에서 사도들의 본(本)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상황을 변화시킨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상황은 본질적으로 변했는가?

오늘날 여행자가 낙타를 타는 대신 포드 차를 몰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바울 시대에 다마스커스로 들어가는 상인이 가졌던 불신앙의 썩은 마음과 같다.
오늘날 소위 지식인들이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비웃지만, 바울도 아덴(아테네)의 시장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 동일하게 조롱하는 회의론(懷疑論)을 체험하였다.
오늘날 도덕이 매우 천박하게 쇠퇴해가고 있지만, 바울도 천명의 이교(異敎) 성전 매춘부를 자랑하는 죄악의 소굴이었던 고린도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동일한 부류의 청중들을 접했다.
기본적으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은 동일한 사악한 마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 태어나야 한다. 아마도 신약교회의 방법이 오늘날 실행된다면, 바울 시대와 같이 동일한 영광스러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성경에는 명령, 본(本), 원칙(原則) 등의 세 가지 유형의 가르침이 있음을 보게 된다. 누구든지 성경 연구에 몰두하면, 자신의 행하는 바가 과연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가에 대해 당황해 하지 않을 것이다.

명확한 명령들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셨든지 또는 성령께서 다양한 저자들을 통하여 주셨든지, 신약성경 안에 명확한 명령이 있다면, 그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믿는 이들이 때로 성경에 있는 아주 분명한 명령들을 합리화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4:34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범하며 설교를 하는 여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분명한 명령들에 대하여 매우 사악하게 불순종하는 많은 예들이 있다.

명확한 본(本)들
성경에는 우리가 힘써 따라야 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남긴 명확한 본(本)이 있다. 특별히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의 본(本)으로 여겼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나를 닮으라. 내가 하듯이 하라".

말씀을 선포하는데 좋은 본보기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훈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주님은 즐겨 본보기를 사용하여 가르치셨다.

지역교회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만찬을 가져야 하는가?
초대 교회는 이 기념하는 잔치를 매주 첫 날에 가졌다(행 20:7). 진지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믿는 이에게 이 문제는 확실히 해결될 것이다.

지역 교회가 가르침과 설교와 심방을 전담하며 교회로부터 봉급을 받는 "한 사람의 목사"를 두어야 하는가?
신약성경을 조사해 보면, 그러한 직분이 사도 교회와 초대 교회의 실행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역의 양무리를 영적으로 돌보는 일은 스스로 자급(自給)하는 일단의 장로들에게 맡겨졌다(행 14:23; 20:28). 이러한 실행 때문에 전시간 사역자는 새로운 분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계에서 사도들의 본(本)이 무시되고 있다. 그 결과, 주님의 일에 황폐함과 사망이 있다.

원칙들(Principles)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명령들과 본 외에, 우리를 많은 실수로부터 지켜주는 원칙인 일반적인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열중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과 원하심을 아는 지식을 갖게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어떤 일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며 자기 백성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벧전 1:15,16).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도 죄를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과 분리되어 계신다. 그러므로 믿는 이도 세상과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믿는 이와 세상 사이의 이 분리를 무너뜨리려는 어떠한 동기도 이 원칙에 충실한 성도에 의해 경고와 함께 즉시 판단을 받게 된다. 이것이 그러한 방향으로 기운 매우 사소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주님의 일에서 믿지 않는 자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시도가 있는가? 옛 이스라엘과 같이 믿는 이들은 외쳐야 한다.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는 일에 너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에스라 4:3)
믿지 않는 이의 기호를 달래기 위하여 복음 메시지를 달콤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는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끌기 위하여 많은 연회가 열리는가?

수세기를 거쳐 바울의 말은 되풀이 전해졌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주님의 다시 오심이 다가오는 이 어두움의 시대에 많은 것들이 단순한 신약의 가르침과 실행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것으로 넘치는 때이며, 믿는 이는 세상적인 사고의 조류에 휩쓸리기 쉽다.
우리 모두 이사야 대언자와 같이 외치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사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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