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 (J. Moltmann)의 기독론
윤 철 호
(장로회 신학대학)
I. 서 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에 몰트만의『희망의 신학』(런던 1965)이 미래지향적인 기독교 소망의 지평을 열어줌으로써 해방신학의 영성을 고무시키고 고취시켜주었다면, 그의 십자가의 신학은 해방신학의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적 사회 분석을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안에 근거시킴으로써 해방신학의 신학적 기초를 더욱 굳건히 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희망의 신학』(1965)에서는 십자가의 신학이 비중 있게 깊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의 신학은 그의 전 신학의 여정을 “안내하는 빛”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서면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신학의 다른 측면으로 전환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 당시 판넨버그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희망을 정초하였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
님』(1972)에서 몰트만은 메츠(Metz)와 더불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과 죽음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켜 상기시켜 주고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하여 희망의 신학이 더욱 구체화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조직신학 체계의 세번째 저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에서 그는 묵시문학적, 우주적, 종말론적 지평으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몰트만은 기독론의 절대성을 부인한다. 그는 기독론은 교회의 전통에 얽매어서는 안되고 언제나 새롭게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독론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불트만처럼 시대의 변화로 세계상과 종교적 표상들이 변화되기 때문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으로부터 기독론이 생성되고 또 파괴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교회의 기독론적인 초상들에 대한 항구적인 우상 파괴가 시작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 서문에서 자기가 추구하는 기독론을 “도상에 계신 그리스도,” “되어 감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정적인 두 본성을 가진 인격이나 역사적 인격성 으로 파악 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의 역사 과정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나는...오히려 역사의 갈등 속에서 도상에 있으며 방향을 찾고 있는 인간을 위한 기독론을 원한다.
몰트만은 자신이 추구하는 기독론은 역사의 낯선 곳에 실존하며 삶을 찾는 순례자들의 기독론, “길의 기독론”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논고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독론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연 몰트만의 사상을 위에 소개한 그의 두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II. 몰트만의 기독론의 방법론과 주제
A. 기독교의 정체성과 관계성
오늘날 신학, 교회, 그리고 인간의 기독론적 실존은 과거보다 더 심각한 이중의 위기에 처하여 있다. 곧 관계성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이다. 신학과 교회가 현대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들 고유의 기독교적 동일성을 상실할 위기에 빠진다. 그 반면, 신학과 교회가 전통적 교리, 예배의식, 그리고 도덕적 표상 하에 자기의 동일성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그들은 더욱 현실과 무관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 이중의 위기는 동일성과 참여의 딜레마라고 표현될 수 있다.
신학과 교회를 혁신하기 위한 투쟁은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기독교의 관련성의 위기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관계성 안에 존재하는 길을 열망하고 추구하다 보면 정체성의 위기로 인하여 마비되어 버리기 쉽다. 몰트만의 핵심 개념은, 우리는 기독교의 관계성을 그 자체의 정체성 원리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체성 원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는 또한 오늘날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적인 삶과 세상에서의 해방운동에로 우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기독교 신학에서 조차 낡은 구식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모든 신학의 내적 규준(規準)이다. 기독교 신앙의 동일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것을 제거하고 나면 교회와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만일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오늘날의 세계와 관련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예수의 죽음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동일화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만일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소외는 소외되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취하여진 바 되었다. 만일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의 연대성 안으로 들어오셨다. 만일 버림받고 버려진 바 된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그분이 그들의 재난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이러한 관련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좋은 설교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실제적인 도움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단지 위안만을 주는가? 몰트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도 이러한 십자가 신학이 가난, 폭력, 인종차별, 오염, 그리고 절망의 “악순환” 안에서 해방적인 실천을 산출해 내는 생산력이 있다고 믿는다.
십자가 신학의 인식론적 원리는 이 변증법적 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십자가의 파라독스에 나타난다. 이 때 예수의 길도 한층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 속에 있는 자기의 동일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뒤를 따르며 그분과 자기 자신을 타자 속에서, 이질적인 것 속에서 나타내어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는 그가 근거해 있는 그분에 대하여 합당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을 계시하여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도 합당할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사귐으로써만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증거할 수 있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B. 기독론의 묵시문학적 지평과 변증법적 접근방법
몰트만에게 있어서 기독론은 여전히 신학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철저한 유일신주의”이며 신정통주의는 사도 신조의 제2계명의 유일신사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한 리차드 니버를 공박하면서 몰트만은 단호하게 “기독교 신앙은 ‘철저한 유일신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고 예수,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다. 기독교의 “경감할 수 없는 핵심”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의 진술을 제거하면 기독교의 독특성을 사라져 버린다. 뒤집어 말한다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기독교 신앙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어떤 신학자들이 부정하려고 해도 기독론은 언제나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참 하나님인가? 그는 참 인간인가?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말했는가? 그의 친구와 적들은 그를 어떻게 말했는가?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는 과연 누구였으며 인류에 대하여 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해 왔다. 그리하여 예수는 한때 인간이 갈망하는 신적인 권위와 영광의 총괄 개념이 되기도 하였고, 새로운 도덕을 가르치는 인류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고, 또한 갈릴리 선동가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상이한 관념과 예수의 상을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인간의 요구와 기대로부터 출발되어진 상이한 방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묵시문학적 지평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 중심적으로 그리스도를 전망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위로부터의 기독론)과 19세기 자유주의 십자가의 인간학적 기독론 (예수론<Jesus logie>, 또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비판했다.
우주론적 지평은 ‘위에 계신’ 절대적 하나님, 영원불변하며 고통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아래로’ 내려와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고 즉 성육신 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태를 가진 참 하나님이라고 이해되었다. 예수의 존재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의미한다면,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허무하고 죽어야 할 존재들이 불변성과 불멸성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고대 이래로 고전적 전통적 기독론의 방법이며 독일 관념론에 계승되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어떠한 길도 하나님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수하였고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그 전제를 두었다.
그러나 존재하지만 영속할 수 없는 존재자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한 존재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보증 받고자 하는 우주론적 지평에는 그 자체 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제기된다고 몰트만은 파악한다.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허무한 인간 속에 있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만일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을 같이한다면 역사의 예수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 가도 문제로 남는다. 어떻게 한계 없는 신적 본성이 동시에 하나의 실제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대답을 못한다.
르네상스, 계몽주의, 기술 문명 이후, 인간의 주요 문제는 이제 그 자신의 인간성이 되었다. 그러기에 영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의 여부보다 그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떤 한에서 신적인가를 묻게 되었다. 반면 초대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에 대한 사고는 성육신 안에 가능하게 된 인간의 신격화와 언제나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예수는 신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인간”으로 이해된다.
우주론적 그리스도 이해에 반하여 근대 이후, 특히 19세기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초월된 신성의 나타남이 아니라 인간의 숨어 있는 본성 내지 인간성의 나타남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였다. 사람들은 자주 역사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이해로부터 예수의 신비에 접근해 가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론의 방법은 근대 유럽의 인간학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예수는 더 이상 신학적인 배경에서 “신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하나님의 사람,” “참사람,” “신적인 사랑의 기적”이라고 정의되었다. 칸트는 예수를 “선의 원리가 인격화된 관념”내지 윤리적 모범(Vorbild)이라고 정의하였으며,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예수를 구원받은 현존의 생산적 원형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의식을 강화하였다.
몰트만은 이러한 인간학적 기독론 역시, 자체 안에 답변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 나사렛 예수가 윤리적 모범이요, 혹은 참된 인간 존재로서의 구원하는 원형이어야 하는가? 또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절대성의 요구는 어디에 존속하는가? 이 인간학적 지평은 예수의 구원자로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그를 하나의 윤리적 종교적 지도자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위에서 살펴본 두 견해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묵시문학적 지평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의 정신적 배경은 희랍철학의 우주론도 아니고 근대 철학의 인간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하는 묵시문학이다. 예수가 등장하여 활동할 즈음 유대인들은 묵시사상적인 기다림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의 주로 나타나셔서 그들을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불의한 자는 영원한 멸망에로 심판하시며, 의로운 자는 영원한 생명에로 축복하실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몰트만은 성서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인용하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는 메시야적인 질문의 지평은 구약 성경의 약속들을 통하여 열려진 역사의 미래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야적인 기다림이며 묵시문학적 지평이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희랍철학의 우주론적 배경이나 근대철학의 인간학적 배경에서가 아니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배경과 사고의 틀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몰트만은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시문학적인 지평에서 이해하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살펴 볼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비록 묵시문학적 지평 안에서 이기는 하지만 유대교적인 요한의 질문으로부터 이해되어지는 기독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기독론의 형성을 위해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전향의 타당성을 인증하기 위해 다음의 성서를 인용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중들에 대한 대답이다. 민중들에게는 예수가 엘리야, 혹은 예언자들 중의 한사람처럼 보였다. 민중들은 그들이 경험 상으로 알고 있었던 비슷한 개념들에 비추어 예수를 이해하였다. 두 번째는 제자 베드로의 답변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에게 조국을 돌려줄 메시야로 생각했다. 메시야 왕은 시온으로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율법과 정의를 가져올 것이며, 온 인류에게 자연과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파괴된 세상에 메시야 왕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고 모든 것들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몰트만은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구분을 지양하고 변증법적인 인식 과정을 제안한다. 이 변증법적 인식원리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는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하며 또한 예수를 철저히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식되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예수는 아들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인간성을 보아야 하며, 그의 인간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인식을 통하여 몰트만은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또는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사이의 긴장을 지양하고 있다.
C. 종말론적, 사회적 기독론의 주제
몰트만은 초대교회의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근대의 인간학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테마가 다 협소하다고 비판한다. 전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 안에 있는 기독론의 전역사(Vorgeschichte), 탄생과 죽음 사이의 예수의 선포와 활동, 그리고 영광 가운데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이 사라지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우주의 통치자로 찬양되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고, 죽음과 함께 예수의 실존이 끝나버리게 된다.
여기서 몰트만은 종말론적 기독론을 추구한다. 그리스도는 장차 올 세계구원 즉, 모든 민족의 메시야적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고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모든 것을, 전체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온다. “종말론적”이란 말은 장차 올 세계구원, 곧 모든 민족들의 메시야적 평화의 나라가 실현되고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오게 되는 세계구원을 가리킨다. “종말론적 역사”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 약속과 계약을 통하여 이 미래를 지향하며 이 미래의 지평 속에서 경험되고 작용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세계의 이 종말론적 역사의 기독론은 예수의 인격을 이 역사의 길과 과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지한다. 몰트만은 가난한 사람들의 예언자 예수의 메시야적 파송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아들 예수의 묵시사상적 수난을 다루고 그 다음에 예수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변용 시키는 부활을 다루려고 한다. 그는 특별히 우주의 화해에 관심을 기울이며, 마지막으로 심판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미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발견하며, 종말론적인 세계구원과 화해의 성취를 보고자 한다.
또한 몰트만은 사회적 기독론을 추구한다. 전통적 기독론이 하나님 아들로서의 예수의 하나님 인격을 고려하거나 사적 존재로서의 그의 역사적 인격성을 강조한 반면, 몰트만은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민중들, 여자들, 이스라엘과 함께 가졌던 그의 사귐을 관찰함으로써 예수의 사회적 인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버림받은 죄인들의 형제로서, 공동체의 머리로서, 우주의 지혜로서 죽었다. 그는 하나의 “집단인격”이요, “대표인격”이다.
III. 예수의 인격과 삶과 십자가의 죽음
이미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몰트만은 도상의 기독론, 종말론적인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기독론을 구상한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인격은 되어 감 속에 있는 인격이다. 이와 아울러, 몰트만은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론과 그리스도론의 분열을 지양하는 두 가지 지평을 말한다. 하나는 그의 종국을 그의 삶의 컨텍스트(역사적 이해의 관심)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부활신앙의 컨텍스트(종말론적 신앙의 관심)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첫째 지평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에서의 예수의 인격을 고찰하고, 둘째의 지평에서는 부활에서 본 종말론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A. 되어 감 속에 있는 메시야의 인격
기독론의 역사적 전제는 구약성서의 메시야 약속과 히브리 성서에 근거하고 있는 유대교적 희망이다. 메시아 희망은 한번도 승리자들과 지배자들의 희망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정복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희망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희망은 메시아적인 희망뿐이다. 메시아적인 인간은 인간적인 인간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 메시아 희망의 주체는 시련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강림절의 빛 속에서 살고 이 세계와 함께 그의 오심을 위하여 자기를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과 행위를 통하여 그의 오심을 앞당겨 오는 것을 의미하며, 이미 메시야가 그의 날에 완성할 모든 사물의 구원을 “이미 지금” 온힘을 다하여 크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예수의 인격성은 그 자체로서 구성되어 있거나 영원 전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동적인 관계들과 상호작용 가운데에서 형성되며 그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개방된 정체성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아는 사람은 되어 감 속에 계신 그리스도,도상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론적 활동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식하며,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 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지상의 예수는 그의 메시야 되심을 계시하는 도상에 있었다. 이것을 몰트만은 예수의 “메시야 비밀”이라고 부른다. 부활한 주님은 그의 영광에 이르는 도상에 있다. 이 영광은 시작하였으나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 때에 그는 완성된 주권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 되시며 그의 “직접적인 신정”을 이룰 것이다.
지상의 그분 -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 부활하신 분 - 현존하시는 그분 - 장차 오실 그분,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의 종말론적 역사의 단계들이다. 되어 감 속에 계신 그리스도, 도상의 그리스도(christologia viae)는 있을 수 있지만 본향의 기독론(christologia patriae)은 있을 수 없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기독론을 통합시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인격, 메시야적으로 활동하는 인격,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공적 인격, 사귐의 복잡한 관계 속에 있는 인격, 삶의 역사의 되어 감(Werden) 속에 있는 인격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인다.
몰트만은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차원의 인격을 요약한다. 1)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종말론적인 인격 속에서 인지된다. 그 안에는 이스라엘의 메시야, 모든 민족들의 사람의 아들, 창조의 장차 올 지혜가 현존한다. 그는 인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의 시작이다. 2)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신학적 인격 속에서 인지된다. 그는 자기가 아빠,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의 자녀이다. 3)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된다면, 그는 자기의 사회적 인격 안에서도 인지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제요 민중들의 동지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이며, 병든 사람들과 함께 고난 당하는 자이다.
B. 역사적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그리스도 역사는 예수 자신과 시작되지 않고 성령과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숨, 곧 영이 임할 때 예수는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등장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선포하고, 새 창조의 표징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나타낸다. 성령의 창조적 힘을 통하여 그는 이 병든 세계 속에 건강을, 노예화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온다. 성령의 현존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에게 자기를 “아빠”라는 이름과 함께 계시하며, 예수는 자기를 이 아버지의 “아들”로 드러내며,이 내적인 관계를 아버지와 자기의 기도의 관계로 현실화시킨다. 예수의 신학적 역사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을 고려할 때, 예수에게서 일어난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또한 예수가 “아빠” 곧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에 관한 그의 관계를 부르지 않고는 예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가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면 그는 분노하는 세계 심판자의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곧 아버지의 내적인 친근함을 선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을 협박과 금욕을 통하여 나타내지 않고 파괴되어진 인간에 대한 은혜의 표식들과 병든 삶에 대한 건강의 기적들을 통하여 나타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선포하고 활동하는 시간은 심판 이전의 위협하는 “마지막 시간”이 아니라 메시아의 해방하는 “시간의 완성(갈 4:4)”이다.
몰트만은 예수를 십자가에로 이끌었던 그의 삶과 활동의 빛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수의 죽음의 첫째 이유는 종교적 이유로서 예수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율법 이해 사이에 일어난 신학적 충돌 때문이다. 이 신학적 충돌은 다음 두 가지 관련 속에서 생겨났다.
첫째, 율법과의 관련하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을 향하여 종말론적으로 오셔서 율법의 명령에 대해 자유케 하며, 율법에 선행하는 사랑으로 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분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활동에 있어서 주권적으로 그 당시 율법 이해의 한계를 무시하였으며, 죄를 용서하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종말론적 권위를 역력히 보여주었다. 율법으로부터의 그의 자유는 바로 죄를 용서하여 주는 행위들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둘째, 예언자들과 묵시문학이 지닌 희망의 양상들과의 관련 속에서도 예수의 출현과 행동을 하나의 새로움이었으며, 이 새로움은 반대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기대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단지 죄인의 심판자요 의로운 자의 구원자로 출현하는데 반하여, 예수의 구원은 바로 죄인들과 타락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처형은 율법과의 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없는 자들로 간주되는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율법과 신앙의 수호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모독자”로써 심판을 받았다.
또한 몰트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동자”로 인식하며 예수의 역사의 두 번째 신학적 차원을 한 종교적-정치적 세계 내에 있는 예수의 복음의 정치적 차원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몰트만의 “선동자”로서의 예수의 이해는 정치적 혁명가 이상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단지 예루살렘 내의 평안과 질서라고 하는 전략적 이유에서 로마인에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로마의 평화를 보장하여 주는 국가 신들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세계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하나의 종교적-정치적 질서를 의미하였다. 예수는 빌라도에 의하여 정치적 모방자요 열광자로 심판 받았다.
세 번째 차원으로 몰트만은 예수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로서 그의 아버지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세번째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본래적이고 내적인 고통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 그가 당한 고통 중의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다.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미 예수의 삶의 컨텍스트 속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 사이에 또한 반대로 그의 아버지와 예수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