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은 천국을 막연한 어떤 영적 상태로 보지 않고 구체성을 가진 하나의 장소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다.2) 그런데 이 영역은 실체가 없는 어떤 영적인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갈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몇 번 예고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여기서 예수님은 천국을 “아버지 집” “처소”라고 말씀하셨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천국은 아름다운 어떤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처소임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 대한 묘사에는 상징적인 내용들이 많은데 이 상징들 중에는 천국이 특정한 장소임을 시사해주는 구절들이 많다. 4장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위에 네 생물들과 24 장로들, 그 보좌를 둘러싼 천군 천사들과 허다한 무리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21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이어 성의 규모(16절)와 열두 성문들과 그 모양들에 대한 말씀들이 있는데 이 말씀들도 역시 천국은 어떤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22장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부터 시작되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있고, 그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다고 하였다. 이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창 2:8,9)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창조 때의 세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는 말씀은 재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필찬 교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속사의 정점을 연상시키는 ‘종말론적 표제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전혀 새로운 실체도 아니요 인간역사의 끝도 아니라 그것은 ‘옛 질서의 완전한 갱신’을 보여주는 것이다.”3)고 하였다.
천국이 물리적인 공간을 가진 나라라면 - 공간에 한정돼 있다는 말은 아니다 - 시간 역시 존재한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영원한 세계에서 시간의 지속이나 어떤 단위로 구분될 수 있는 시간개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원무궁세계에 들어간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국에서도 사람은 역시 사람일뿐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거나 무소부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4)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시공간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 주장의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적 부활이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는 몸을 가지신 분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하셨고,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다(41-43).
이렇게 우리가 믿는 부활은 몸을 가진 부활이기 때문에 몸을 가진 우리가 시공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시공간의 개념이 태양계 속하여 있는 현재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천국이 막연한 어떤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거의 없다. 그러나 천국에도 시간이 있는가? 라는 문제는 논란이 많다. 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시간도 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한데 이를 배제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유는 어거스틴 이래 시간을 영원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부정적인 시간관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시간관이다. 시간은 변화무쌍의 원인이며 모든 것을 쇠하게 하고 파괴한다. 꽃도 시들게 하고 사람도 늙게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이 끝나고 종말이 오면 모든 것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영원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시간이 전적으로 부정적이어서 시간의 계기(繼起)와 연속(連續)이 절망적인 긴박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같은 시간이 날로 새롭게 하는 소망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후 4:6). 시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채널”5)로서 적극적이고 날로 새롭게 하는 생명적인 시간으로 나타난다.
천국에도 시간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W. 헨드릭슨 박사는 그의 저서 「The Bible on Life Hereafter」에서 몇몇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들을 인용해서 간결하게 설명하였다. A. 카이퍼 박사는 그의 강의 노우트 “Dictaten Dogmatiek”에서 천국에서의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는 계시록 10:6을 “시간이 다시 없으리니”로 번역하고 이 본문에 의존해서 그렇게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이 구절은 문맥관계에서 볼 때 “더 이상 지체함이 없을 것이다”로 번역한 미국 표준역(ASV)이나 개정표준역(RSV)이 옳으며 카이퍼가 이 분문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연구했어야 했다고 핸드릭슨은 말한다.6)
그러나 G. 보스는 그의 저서 「The Pauline Eschatology」에서 “바울은 아무데서고 현세대가 끝난 후에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간의 지속이나 시간의 단위로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대권에 속한 것임이 명백하다. 즉 장차 올 세상에서 살 사람들을 ‘영원한 존재’7)로 만드는 것은 그들을 신화(神化)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불신 이방세계에나 있는 사변(思辯)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8)라고 했다.
이어서 헨드릭슨은 H. 바빙크의 글도 인용하였는데 G. 보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죽은 사람들은 유한하고 제한 된 존재로 그대로 남아있으며 시공세계에 있을 때보다 색다른 어떤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의 측량과 시간의 측정은 무덤 저편에서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측량단위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속하고 있는 영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거나 무소부재하는 존재는 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부활한다 할지라도 시간성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즉 순간들의 계기라는 의미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9)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천국에서도 영원한 존재는 아니며 피조물의 존재양식인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원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이고 시간은 인간의 존재양식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도 시간이 있으며, 이는 영원 가운데 있는 시간이다. 다만 이 세상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또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시간은 시초가 있는 것이므로 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만약 그 말대로라면 태초에 창조된 모든 것은 없어져 버릴 때가 있었을 것이란 말과 다름없다. 그러나 피조물이 피조물로 존재하는 곳에는 그 존재 양식이 항상 따를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또 천국이 시공간을 가진 나라라고 하면 그곳은 또한 소망과 진보가 있는 생명의 나라일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더라”(계 22:2)
▽미주
1) 이 논문은 필자가 대학 졸업논문으로 썼던 “시간과 역사에 관한 소고”의 일부 내용(제4장 시간과 역사 그리고 영원)을 근거로 다시 정리해본 글이다.
2)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영역은 없다. 지옥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며,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리심이 있는 곳이다.
3)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이레서원, 2006년 서울) p.876.
4) H. Bavink, 「개혁주의 교의학」 p.709. 재인용
5) Calvin D. Linton의 논문 “Our Bourne of Time" in 「Christianity Today」 in1962, December.
6) 개역한글판에서는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번역하고 각주에 “시간이 다시 없으리니”라고 표시하였다. 개역개정판에서도 동일하게 번역하였고 각주는 달지 않았다. 박윤선도 계시록 주석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주해하였다.
7)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과 구원받은 자가 “영생한다”는 말은 서로 마찰하지 않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