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4-29 06:52
[1]불교와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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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007  

불교와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

                    -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 


[1]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의 요청 

 

공자는 "산다는 것도 아직 체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안단 말이냐"고 말했다. 지당한 말씀이며, 진리를 구도하는 겸양한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을 다 모르면서, 사람 섬기는 법도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의 문제와  제사 문제를 문제 삼지 않을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은 진정 인간의 한계상황으로서 위대한 신비이면서 풀고 넘어서야 할 매듭이고, 초월하여 뛰어 넘어서야 할 존재의 마지막 결승벽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주로 죽음의 현상학적인 간접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그 누구나 모든 사람이 맞이해야 하면서도 돌연  예고없이 찾아 올 수있는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 오면 모든 과정이 의사, 장의사, 성직자등 전문인들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통과제의 로서의 죽음이 낯선 사람의 손에 양도되어 버린다. 

 

둘째, 죽음은 집단학살의 경우일지라도 죽는 순간만은 홀로 맞이해야 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일지라도 대신죽어줄 수 없고 함께 죽어갈 수 없다. 죽음에서 인간은 홀로되는 엄숙한 시간을 맞는다. 

셋째, 죽음이 주는 아픔은 죽음 그 자체라기 보다는 모든 의미있는 관계와 성취물과 삶의 의미 연관 구조를 일시에 잃어버리고 해체당하는 의미상실의 고통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픔, 혼신의 힘을 쏟았던 일로부터 단절되고 쌓아온 모든 생의 업적으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이다. 죽음의 아픔은 곧 근원적 소외가 주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넷째, 죽음의 두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녔던 구체적 몸으로서의 생명이 추하게 먼지와 물로 분해되고 해체된다는사실, 거역할 수없는 물리적 안트로피현상에 내던져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감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매우 비인간적일 수있는 현상을 내보이면서,인간성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독재적인 비정함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의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랑하던 가족의 시신을 병동의 냉장고 속에 안치해 둬야하고, 며칠전까지 서로 몸을 비비고 만지던 친지의 몸을 차거운 땅 속에 매장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죽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죽음의 두려움은 죽음이후의 생명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무지한 상태일만큼 모른다는 사실이며, 삶의 시간을 한줌 부끄러움없이 살았다고 자신 할만한 당당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터부시 된 이유 

죽음이 이렇게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의 최대의 관심거리이며, 모든 철학과 삶과 문학과 예술의 가장 깊은 신비적 대상이면서도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며 죽음을 터부시 한다. 그동안 현대 문명사회, 특히 서구 문명사회 에서는 죽음에 대하여서는 가급적 말을 않으려고 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장례식은 지극히 제한된 식구나 친지의 일부가 모여 성직자의 종교의식에 따라 진행할 뿐이다. 

 

아시아의 문화처럼 죽음의 장례가 삶의 커다란 통과의례가 되지 못하는 감이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도 근대 이전 까지는 죽음이 삶과 긴말한 관계 속에서 운위되어 왔다. 그런데, 현세적 삶에 인간의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된 근세 계몽주의 시대 이후, 죽음의 문제는 삶의 변두리문제로 몰려나게 되었다. 인 간이 죽음을 그의 전체 삶에서 도외시하고 소외시키면, 삶 그 자체도 비인간화되고 소외된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 분이며, 인간사회를 보다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로 조성하는 인간의 근본문제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모두 종교적 인간이 됨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각각의 종교가 지니는 구원 패러다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종교가 생사를 극복하거나 초월하여 유한한 생명의 덧없음과 그 죄나 업보가 지닌 파괴성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 절대생명, 불생불멸적 생명으로 고양된다는 신념을 지니는 점은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죽음의 극복, 죽음에 대해 보통사람들이 지니는 두 려움과 편견을 극복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의미있게 살려는 목적을 지닌다.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회피하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요,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말하려는 종교는 죽음에 대하여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분이라고 종교는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터부시하고, 현생과 현세 일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시간과 정력을 쏟는 일은 균형감각을 상실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무엇을 구원이라고 하는가의 문제는 종교가 지니는 구원 패러다임에 따라서 그 설명방식과 강조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해석학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고하고 행동할 때에도 항상 그가 지닌 세계관과 종교적 구원관에 의하여 그의 행태(行 態)가 제약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이해나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종교적 구원관, 영생관, 생사초월관이 조금씩 독특하게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이기 때문에 각자가 귀의하는 종교에 따라서 각각의 죽음이해와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영생관이 있다. 크게보면 무교, 유교, 불 교, 기독교등 네가지 영향력 있는 종교의 사생관이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네가지 종교인들이 죽음과 삶을 이해하고 대하는 태도사이에는 각각의 특징을 지니면서도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서로의 사생관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무궁성 이해에 빛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강연자는 위대한 우주적 보편종교인 불교와 기독교라는 두 종교가 죽음을 어떻게 보고 , 그 극복을 어떻게 성취함으로써, 현세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며, 생사를 초월한 자유인으로서 자비행과 사랑의 봉사를 실천해가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강연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이야기 해보려 한다.


[2] 원시불교에서 죽음의 극복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바 처럼, 유교는 주검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여 예학(禮學)을 발전시켰으나, 죽음 그 자체의 근본 문제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임을 알고 일찍부터 죽음의 문제나 신령한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경이원지(敬 而遠之)하는 태도를 취한다. 죽음과 귀신문제에 대해 "경이원지"한다는 말은 관심을 갖지않거나 소홀히 대한다는 말은 아니 다.

 

글자그대로 그런 문제는 공경하는 태도로서 신중하고 경건하게 다루되 가까이는 하지않고 거리를 두겠다는 자세이다. 여기에 유교의 종교적 실재문제에 관한 인간이성의 겸허한 인식론적 한계인식, 현실적 삶의 문제에 일차적으로 성실하려는 진지한 인본주의적 태도, 그러면서도 예(禮)로서 그런 문제에 전지하게 대함으로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유교의 종교로서의 특성이 잘 나타나 보인다.


사실 유교가 한국인의 사생관과 삶의 윤리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 할수 없으나, 유교자체가 지니는 사생관의 형이상학적 본질상 거기엔 적지않은 갈등과 모호성이 발생하게 될것이다. 한국인의 유교적 제사제도는 한편으로서는 유교적 예학(禮學)이 가르치는 바에 충실하려는 의례중심 주의(儀禮中心主義)에 기울고, 죽음 그자체에 대한 이해문제는 무교적 혼백사상이나, 아니면 신유학(新儒學)의 서화담에 서 보는바처럼 일기장존적(一氣長存的) 우주론에 멈춤으로서 평범한 일반사람들에게는 죽음이해에서 모호성이 발생하게 되었다. 

 

다시말하면, 유교 제사정신은 훌륭하되 일반서민들은 유교적 사생관으로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적 귀신숭 배사상과 쉽게 종교습합되거나, 종교적 차원의 갈증은 불교 로부터 개인적으로 취하거나, 아니면 불가지론자로서 입장을 취할 밖에 없었다.
유교가 주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독교는 죽음의 쏘는 가시와 권세 곧 "죽임의 세력 "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대하여 불교는 죽음 그자체의 정체와 정면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 시켜버리려는 방향을 취한다. 

 

다시말하면, 불교는 죽음이라는 실체(實體)를 인정하고서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인가라는 방향을 걷지않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죽음이란 없는 것이라고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이다.
인간의 생노병사라고 하는 근본적인 한계상황적 문제를 해결하고 말리라는 큰 뜻을 세우고 출가한 고다마 싣달다가 보리수 아래서 등정각하여 해탈함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해탈했을 때, 무슨 초자연적인 계시적 지식에 의거하든지 초자연적 신령들의 도움을 얻어 등정각에 이른 것이 아니다. 불교는 엄밀히 말하면 영지주의적 "그노시스"를 부정한다.


싣달다가 확연하게 보고 깨달은 진리(法, 다르마)는 다름아니라 삼라만유란 인연생기적(因緣生起的) 현상이며, 한 큰 마 음(一心) 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의 바다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파문이라고 본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여러가지 개념적 지식과 경험적 인상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죽음이란 우선 죽음의 임계상황에서의 심신적 고통, 주검과 연결되는 생의 종말, 죽은자의 말없음과 생기없음, 의식의 종결과 굳어지고 차거워진 신체의 경직화, 사체의 부패 과정과 아름다움을 상실해버린 생명체의 추한 모습, 매장과 화장에 따르는 소멸성과 이별의 고통, 죽은자가 추구해온 의미와 가치의 붕괴에 따르는 허무성, 죽음 이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등등 죽음이라는 구체적 현상이 실존인간의 범부중생에게 주는 두려움과 부정성은 이루 말로 다 열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상과 경험적 개념들은 "죽음 이라는 것"이 독립적 실체로서 사실적으로 항존한다는 대 전제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경험이요 개념들이며 인간의 심리작용과 의식작용이 만들어 낸 표상작용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라는 것"이 실체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생기하는 우주적 대 생명의 한 변화와 창발적 계기에 불과하다고 깨우침으로서, 죽음에 연계된 일체의 두려움과 부정적인 상이 극복된다면 어떤 마음 상태가 될까?

 

인간의 유한한 자아도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칠 때, "삶 과 죽음"이라는 이원적 대립개념이나, 대립상이 사라지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밝은 참지혜, 반야공(般若空)만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상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공(空, Sunyata), 열반적정(涅般寂靜, Nirvana), 중도(中 道,Madhyamaka-dharma)라고 부른다.


근본불교에서 본다면 불교(佛敎)란 "깨닫은자"(佛)의 "가르침"(敎)이다. 불교라는 말 뜻자체가 지시하듯이 깨달음이 그 본질일 터인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교"라고 하면 역사적 종교집단의 종교의례, 종교경전, 종교적 상징물과 절의 건축물등 을 자꾸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본래적 시원에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불교란 "깨달은자"의 "가르침"을 참고삼아 나도 처음 "깨달은자"와 같이 깨닫자는 것, 그것 이외 다른것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깨닫자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라는 그 방대한 경전의 문자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깨닫자는 것인가? 그 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일체만유의 존재하는 방식, 일체만유의 본래적인 창발(創發) 방식, 불교식으로 말해서 "일체만법의 본원(本源)자체"를 바로 깨닫자는 것인데, 일체만법의 본원자체를 불교적 용어로서 "법성"(法性)이라 기호화하고, 그 법성을 나의 본래적 마음속에서 스스로 파지한 것을 일컬어 "자성"(自性)이라 부른다. 법성과 자성이 둘이면서 하나인데 그것이 삼라만유를 창발적으로 스스로 지어가는 인연생기하는 실상을 환히 깨닫자는 것이다. 자성이나 법성은 "不生不滅 不來不出 不一不異 不常不斷"이라 는 저 나가르쥬나의 중론송(中論頌)이 노래하는 바로 팔불게 (八不偈)가 지시하는 그것인데, 그 자리에서 볼 때 탄생과 죽음 이라는 것은 근원에서 그 실체성이 부정되고 철저하게 인연생기하는 법성의 한 계기에 불과하게 된다. 의상대사가 노래하듯이 법성(法性)은 본래 두개의 상(相)이없고 부동하고 고요하며 이름도 형상도 없어 오직 반야지 상태에서만 이해되는 만유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성(法性)에 가장 가까운 기독교의 기호는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에 해당하고 인간의 본래의 마음 곧 자성(自性)은 순수영혼에 해당한다. 불교의 법성과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자성과 기독교의 순수영혼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일부는 같고 일부는 다른 것 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불교적 또는 기독교적 색과 향이 베인 종교적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언 어적 표현인 것이다. 

 

불교의 법성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아마 가장 분개하는 사람들은 불교도들과 기독교들일 것이다. 불교의 승려들과 기독교 성직자들은 더욱더 분노할런지도 모른다. 강연자는 믿음도 없고 신앙도 없는 종교혼합주의자 쯤 되는 것으로 매도 당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정직한 지성은 그렇게 말 할수 밖에 없다. 강연자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으나, 다만 자기 종교에 사로잡힌 독단적 비판은 어느 종교쪽이든지 사양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낳고 죽고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 총체로서의 현상적 자아로서의 나"인 것이지, "진여자성"(眞如自 性)으로서의 본래적 인 나, 곧 불생불멸하는 법성의 내면적 실 재로서의 "眞我"로서의 나가 아닌 것이다. 진여자성으로서의 나는 낳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심의식 총체로 서의 나"를 벗어버리고 "진여자성으로서의 나"를 되찾아 생노 병사를 극복하려는 종교이다.


불교의 종지(宗旨)를 실재관으로 말하면 인연생기설(因緣生 起說)이요, 중도사상(中道思想)이다. 중도란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거룩과 세속, 영원과 시간, 본질과 현상, 선과 악등 이분법적 도식구조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그 양자를 동시부정하고 동시긍정함으로서 전체를 생동적인 진여 의 계기적 모습으로서 파지하는 것을 말한다. 삼라만물을 상호 인대적관계(相互因待的 關係)로서 파악하는 것이요, 인연생기적 현상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중도사상에서 볼 때, 죽음이란 삶의 대립적 실재가 아니라 삶과 더불어 존재를 구성하는 인대적 변화계기에 불과하게 된다. 죽음이 없이는 삶이 없고, 죽음이란 더 크고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의 계기요 전환에 불과하다. 우선 불교에서는 육체의 몸으로서의 생명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머무르는 자연소재 물의 집합체이므로, 죽음이란 우선 육신으로서 몸이 거기에서 빌린 자연에로 다시 되돌려주는 환원작용이므로 좋은 죽음이란 자연으로부터 빚진 육신의 몸을 자연에로 돌려주는 순환행위이어야 한다. 

 

가장 불행한 죽음행위는 죽음이후에도 자기의 시신을 자연에로 환원하기를 거부하면서 방부재로서 보존하는 인간 우상들의 비참함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들이 살아있을때 이룬 업보에 대한 죄값을 그렇게 치룸이다. 걸출한 선승 (禪僧)들이 그들의 죽음이후 시신을 그들이 빚졌던 동식물에게 공양되기를 바랬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중도사상에서 볼때, 삶과 죽음은 대립개념도 아니고 독립적 실체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진여자성과 법성의 대 생명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물결의 높낮음, 산봉우리와 계곡, 양지와 음지를 확대하여 기호로서 표지한 허구적 그림언어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이 한 인생의 처음과 종말에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인간은 살고 죽는다. 날마다 탄생하고 소멸한다.그러나 날마다 탄생하고 죽는 인생은 "심의식 (心意識)총체로서의 자아"인 것이지 "진여자성"으로서의 "참 나"는 탄생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그것을 확연하게 깨닫고, 진여자성을 회복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불생불멸하는 대생명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참생명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이 해탈이요 불교적 죽음의 극복이다. 

 

업보사상과 윤회사상의 본질 

불교에서는 진여자성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임을 가르치며, 심의식(心意識)의 총체로서의 가변적 자아상을 부정한다고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어떤 근거아래서, 왜 인간의 윤회사상이 끈질기게 불교사상 속에는 살아남아 잇는가? 윤회사상은 불교 본래 사상이 아니라 전통 인도인의 민속신앙이 불교안으로 습합 하여 들어온 결과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Karma)사상은 물론 불교만의 독점적 사상은 아니고 인도에서 일어난 자이나교나 힌두교사상속 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불교의 업사상은 따지고 보면 불교의 근본종지인 만유의 "인연생기설"의 논리적 귀결이자 인생관이요, 세계관이기도 하다. 업보사상, 윤회사상이 일반 불자들의 대중교화적 설화형태를 빌어 권선징악하려는 목적으로 과장되고 탈선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현생에서 악업을 많이 짓고 못된 짓을 많이 한 인간은 죽어서 구렁이나 미물 축생으로 태어날 수있으며, 반대로 미물축생의 형태로 업보를 치루는 어느 생은 업보를 다 치루고 착한 선행을 쌓아서 귀한 가문 에 태어 날 수도 있다는 설화등이 그렇다. 그러나 업보사상은 그렇게 비약하지 않는다. 업보사상과 윤회사상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두리라"는 사도 바울의 말뜻대로 심는대로 거둔다는 생명의 진리를 불교적 언어로 섬세하게 다듬어 놓은 것이다.


가장 고전적인 원시불교의 근본교리 중에 십이연기설은 단순한 물리화학적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인과관계도 말하며, 단순한 직선적 연쇄고리의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그것들 상호간의 구조적 상승작용과 복합적 상승작용도 말하고 있는것이다. 여기에 한송이 국화꽃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씨앗과 토양관계만이 아니라, 전우주적 역학관계, 씨앗의 생명력을 지속시켜온 전우주적 진화과정, 태양광선과 우주중력과 습도와 곤충과 바람 , 그리고 그 꽃의 색깔과 향기, 꽃의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감상하는 인간의 시각 후각구조와 감각작용과 심미적 이해작용 등등 억천만가지 요소들의 집합적 결과로서 지금 우리 눈앞에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의 활동이 인간의 대뇌구조및 그 활동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순수정신의 자기초월적 기능및 활동 그 모두를 인간의 대뇌피질의 회백질 안에서만 일어나는 전자기적 생화학적 반응구조라고만 보는 생물학적 인간관은 인간 정신현상의 전부를 모두 설명해 낼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마음은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인간마음은 인과율적 법칙만이 아니라 동시성의 원리지배 아래에 있으며, 시공을 넘어 직관, 예지, 텔레파시, 정신감응, 미래예측, 과거기억등등 다양한 비인과율적 현상을 나타내 보인다.


윤회 또는 환생하는 주체는 인간의 진여자성이 아니라, 심의식(心意識) 복합체로서 인간의 경험적 자아인데 그것이 일으키고 남긴 정신적 심인적 잠재력과 그 영향력이 바로 카르마 (業)이다. 십이연기설에서 무명이 일으키는 행(sankhara)은 삼라만유를 지어나갈 잠재적 가능성과 그 힘을 말하는데, 업보 (業報)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이 행(行)이다. 모든 業들은 곧바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 業이 결실로 나타나기 위하여는 인연생기법이라는 우주적 근본법칙에 따라서 외적 내적 제반조건과 시공간적 인연으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업은 축적되어 어떤 성향으로서 나타나지않고 축적된 업으로 지속한다. 업의 힘은 일종의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요 경향성이며 의지적 힘이다.


불교의 업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우리는 현대 유기체 철학 이라고 말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현실적 존재들"(actual entities) 또는 "현실적 계기들'(actual occasions)이 라고 부르는 것들의 무한한 상호 합생과정과 관계성 이론을 참작하는것이 좋겠다. 세계란 하나의 창발적 과정(emergent process)으로서 무수한 가능한 질료에 해당하는 이 현실재들의 창발적 사건이며 생기(生起)이다. "현실적 존재"들이란 "경험의 방울들"(drops of experiences)로서 매우 역동적인 성격을 지닌 에너지의 흐름이며, 느낌 감정 사유체의 흐름이다. "현실적 존재들"은 그들 상호간의 파악(prehension)에 의해서 서로를 포섭하면서 다른 무수한 현실재들과 함께 유기체적 관계 망을 형성하면서 구체적인 어떤 실재적 개별자로서 나타난다. 업사상과 업의 윤회사상은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구조 안에서 어느정도 불교적 설화형태를 떠나서 현대철학적 시각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불교의 구원론에서 보면 인간이 살아있을 때, 그 자신의 행업과 그가 태어나기 전 그 조상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행업의 결과물로서의 "심의식(心意識) 총체로서의 자아"는 윤회할 수 밖에 없고 그 업보를 남길 수 밖에 없으므로, 그 윤회의 고리를 탈출하여 법성 곧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윤회의 업보와 윤회의 연쇄고리에서 탈출하자는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법성 그 자체는 모양도 색체도 없고 그 어떤 속성도 없는 순수 존재의 빛이지만, 그 스스로 묘유로서의 만유충만한 존재의 바탈이므로 무한한 존재의 층을 그 안에 스스로 지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 지구인이 살고 있는 이러한 행성에 갇혀있는 존재만 전재하는 것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들어남의 여러가지 다양한 존재의 층은 매우 유기체적인 것이어서, 마치 유기체 몸 안에 횡경막 아래층의 여러 장기들이 있고, 횡경막 위에 심장과 폐가 있고, 두개골 속에 사유하는 뇌세포가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 받듯이, 법성의 들어남인 법계(法界) 안에는 다양한 존재의 층이 존재할 수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귀계 - 아수라계 -지옥계 - 축생계 - 인간계 - 천상계라는 여섯가지 차원의 존재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업보사상이 흔히 잘못 오해되는바 같은 숙명론이나, 결정론이나, 소극적 체념사상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도 퇴돌: 사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

<티벳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고 번역 된 티벳 탄트라 불교의 비의적 (秘儀的) 경전의 본래 이름은 < 바르도 퇴돌> ( Bardo Thosgrol)이다. 본래 책 이름의 의미는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 이라는 뜻이다. "바르도"는 둘 사이를 의미하는 데, 낮과 밤사이, 황혼 때의 어스름한 시간, 이승과 저승의 사이 곧 사람이 죽은 다음 또 다른 다음 세상에 환생하기 까지의 머무는 중간시기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그 기간을 49일간이라고 하며, 그 동안 "심의식 총체로서의 자아"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남는 업보의 주체로서의 개체생명을 중음신(中 陰身) 또는 사념체(思念體)라고 부른다. "퇴돌"이란 듣는 것만 으로 자유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바르도 퇴돌>의 저자는 지금부터 1,200년전 티벳왕의 초청 으로 인도에서 와서 신비불교 경전들을 티벳어로 번역한 파드 마삼바바(Padma Sambhava)라고 전한다. 이 경전을 티벳 설산의 동굴 속에서 발견해 낸 사람은 릭진이었고, 발견된 이 경전을 1919년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린 사람은 카지다와삼둡(Lama kazi Dawa-Samdup)과 에반스 웬츠 (Evans Wentz) 였다. 칼 융이 말한대로 이 책은 단순한 탄트라 불교의 한 경전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깊이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위대한 정신과학의 책이다. 이 책은 인간 의식의 다양한 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그려 내는 온갖 환영과 환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그려내는 허상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 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의 총체로서의 인간의 의식체"를 넘어선 본래적 "진여자성" 곧 순수한 인간영 혼은 눈부신 진리의 빛으로 가득한 진리자체이고 자유자체 이며, 영원한 것 이라는것을 보여 준다.


<바르도 퇴돌>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진여자성" 곧 참된 영혼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아서 환생의 고해를 되풀이 방황하지말고 영원한 자유의 빛을 누리도록 하려는 죽은자를 위한 깨달음의 교훈서이자, 동시에 산자들을 위한 위대한 종교적 작품이다. 현대 인류가 갖고있는 기계론적 생물학적 인간이해나, 개인적 무의식층만을 인정하려는 프로이드 심층심리학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성의 저 깊은 차원을 열어 보인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프로이트와 그 제자집단이 인간의식의 심층차원을 최초로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분석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전이해적(前理解的) 편견을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하나의 고도로 진화발전한 생물 학적 고등동물 이상이 아니라고 보면서 정신적 실재의 영원성을 믿지않은 유뮬론적 정신과 의사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무의식이란 탄생이후 의식에 의해 억압된 비생산적인 심리적층일뿐이며 치유받아야할 것이라고만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칼 융이 말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층, 곧 무한한 잠재능력과 창조성을 지닌 정신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 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간영혼의 중심부에서 빛나는 신성의 실재성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르도 퇴돌> 곧 <티벳 死者의 書> 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 한 후 겪게 되는 중간상태 기간에 크게 3단게로 정신적-심리적 의식체가 겪게 되는 경험현상을 들려주면서 죽은자로 하여금 바른 "진여자성"을 따라 진리의 참빛으로 나아가 자유와 행복 을 얻기를 권하는 죽은자를 위한 책이다. 티벳에서는 마지막 숨이 넘어가면, 승려나 가까운 정신적 스승이나, 또는 가족친 구중 연장자가 죽은사람의 귀에다가 이 <티벳 死者의 書>를 읽어주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이 사후에 곧바로 시작되는 정신적 사념체(思念 體) 또는 중음신(中陰身) 또는 일종의 유체(幽體)가 겪는 세단계 또는 세가지 차원의 경험을 설명한다. 이 책은 사후세계의 중간상태에 있는 영혼이 겪는 체험을 불교적 패러다임에 담아서 설명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영혼을 정화하여 본래적 영 혼의 모습 즉 불교적으로 말해서 "진여자성"을 회복하여 영원 한 법성(法性)에 일치함으로서 법계(法界) 곧 생명의 빛으로 충 만한 진리 세게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첫단계: 치카이 바르도.....죽음의 순간의 바르도...광명한 흰 빛으로 둘러싸이는 경험이다.
흰빛은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의 지혜의 빛이며, 인간의 진여자성에서 나오는 빛의 경험이다. 그러나 치카이 바르도 상태에서는 사념체(shepa)가 아직 뚜렷한 의식상태가 아닌 정신이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겪는 천진난만한 낙원상태와 같은 빛의 경험이다.
마음, 영혼, "지켜보는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사념체 쉐파가 텅빈충만과 투명한 흰빛을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경험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때 죽은자는 그 빛 안 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과 자기 자신의 진여본성이 하나인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때, 최초의 투명한 빛 안에서 텅빈 충만의 백색광명을 자신과 합일 시키고 그 안에 머물 때 그는 자유하게 된다.


둘째단계: 초에니 바르도....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게 되는 바르도..

백색광휘, 황색광휘, 적색광휘, 녹색광휘의 빛을 동반하면서 나타나는 네명의 위대한 불교적 보살들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이 각각의 빛들은 지혜, 평등, 분별력, 원만성취를 상징하는 "진여자성"과 "법성"의 내면의 빛이다. 그러한 황홀한 빛과 보살님들의 현현을 체험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실재라고 말한다면 객관적 실재이지만, 죽은자의 정신적 내면적 "진여자성"이 자신의 내적 본질을 객관화하여 투영하면서 나타나는 정신적 환영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만약 죽은자가 기독교인이라면 불교적 보살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성자들이나 가브리엘이나 미카엘등 천사장을 체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에 니바르도의 상태에서는 死者는 심령체이지만 좀더 뚜렷하게 빛과 색과 소리를 경험 하게 된다.


셋째단계: 시드파 바르도....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치 카이 바르도와 초에니 바르도 상태에서 각종 빛에 조명받아 영혼이 자신의 본래적인 "진여자성"을 깨닫고 진리자체와 하나됨으로서 자신을 해탈하면 되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中陰身 곧 사념체는 보다 본능적이며 감각적이며 성적 쾌감과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나 고통을 경험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물론 이 경험도 마음 곧 죽은자의 사념체가 스스로 정신의 내면에서 집단적 무의식이 경험하는 환영들에 불과하다.그리고 마침네 다시 육체를 입고 환생하려는 욕구에 이끌려 인연이 닿은 새로운 생명탄생체와 결합하여 육체를 입고 새로운 생명의 윤회를 탄생과 함께 계속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개관 해본대로 <티벳 死者의 書>는 티벳 불교의 한 경전으로서 특히 죽음을 맞이한 가정에서 죽은자로 하여금 인간자신의 "진여본성"이 곧 영원한 법성이요, 불생불멸하는 실재임을 깨달게 함으로써 윤회의 고해를 벗어나게 하 려는 책이다. 죽은자의 해탈을 돕는 안내서요 불생불멸의 길을 가도록 돕는 죽은자를 위한 안내서이다. 물론 이 책은 불교적 경전이기 때문에 불교적 용어와 불교적 이미지로 가득 체워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위대성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는 "진여 본성"으로서 불생불멸하다는 것과, 인간의 심령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이미지와 개념들은 그것 자체로서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신적 환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기신론의 근본주제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대승불교의 실재관에서 보면 궁극적 실재인 "하나의 마음" (一心)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존하고 비움과 충만이라는 역설적 통전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一心은 인간에게 체험됨에 있어서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진여문(眞如門)과 변화하는 현상계로서의 생멸문(生滅門)으로 두 측면에서 파악되는데, 전자 는 반야심경에서 공(空)이라고 하고 후자는 색(色)이라고 기호화 한다. 공과 색, 진여문과 생멸문을 깨달은 자리에서 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실재가 아니라 법성의 양면성이다. 삶과 죽음도 그렇게 현상계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관계 속에서, 중도에서 파악해야 한다. 상대적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하나의 본래적 큰 생명, 영원한 진여본성의 양면성에 불과 함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불교는 그렇게하여 죽음을 정면대결함으로서 죽음의 실체가 사실은 허깨비인것을 밣힘으로서 다시 말해서 죽음이라는 현상에 붙은 개념과 경험적 이미지를 죽임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죽음관을 살펴 볼 차례가 되었다.

 

[3] 기독교의 죽음이해 


예수님도 석가모니처럼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하여 자세한 논리적 설명을 남겨놓지 않으신 것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 현세의 삶이 끝난 뒤에도 영원한 생명이 삶이 실재한다고 믿으시고 또 그렇게 가르치신 교훈은 여러곳에서 나오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념을 지니신 것은 틀림없는 것 이다. 그 분의 관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것이였지만 그 영원한 생명이란것이 반드시 사후의 생명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한 생명, 큰 생 명, 본래적인 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한 강도의 간청에 대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라고 말씀했으며,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고,산자의 하나님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누 가20:38)라고 말하면서 죽은 뒤의 생명은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이생의 그런 상태의 연장세계가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자신의 숨을 거둘때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라는 표현들을 보면 예수님도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신앙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을 가지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념은 도리어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해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26)라고 말했을 때, 무슨 육신의 몸둥이가 영원히 불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속 생명, 영혼, 진아(眞我)에 해당하는 참생명은 겉모습으로 사람의 육신의 생명이 유한하여 부셔지더라도 영원히 산다는 신념이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도, 내 속에 참 생명, 죽음이 죽일 수 없는 참 생명이 영글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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