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홍삼열 목사
이단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삼위일체에 대해 질문하기를 즐기는데, 이들은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 당신들은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한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의 지적대로 삼위일체(Trinitas)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이 특정 단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그 개념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비록 성경에 그 단어는 없지만 성경이 그 개념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같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들이 아니었다면 정통교회도 굳이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주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이 개념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데 삼위일체는 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인데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유일신론자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와 성령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유일신론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곧 삼신론을 믿는 것이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 정통기독교가 주장하는대로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진짜 하나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가 그렇게 간절하게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인데,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삼위일체는 말이 안 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근거는 이 개념이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성구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 1:1) 일단 여기에 언급된 “말씀”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나 음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에서는 정통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입장이 갈라는 것이 1절에 두 번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에서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전능자”(The God)로 이해하지만, 곧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의 하나님은 “신/대능자”(a god)로 이해한다. 어째서 같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 첫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고 두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The God/진짜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a god/유사 하나님이란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첫 번째에는 정관사가 있고 두 번째에는 정관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정관사의 유무가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구분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절 이후에 나오는 6,12,13,18절의 경우를 보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도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들이 “신/대능자”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기록된 성경구절들 중에 정관사가 붙은 경우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28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 θε??)”라고 했을 때 이 “하나님”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디도서 2: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를 때 정관사(The)가 붙어 있다.(그밖에 히 1:8절, 요일 5:20절, 롬 9:5절을 보라.) 따라서 정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셋으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실제로 이 셋이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오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마가 10:17-18) 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셨다.(마태 26:39) 이로 보건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 구분된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면서 자신과 성령을 구분하셨다.(요한 14:16)
반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로 표현된 구절들도 많이 있다. 요한복음 10:3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 주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 요한복음 20:28절에 보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분명히 도마의 말을 교정해주셨을 것이다.(요일 5:20, 롬 9:5를 참조)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갈라디아 4:6)이요 아버지의 영(고전 3:16)으로 설명되어 있고, 사도행전 5:3-4절에서는 성령을 속인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된다고 하면서 성령과 성부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시고(마태 28:19),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한다. 만일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거나 축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세 가지 속성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태양은 동시에 빛을 비추고 열을 발산하고 붉은 색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속성 중 하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 하나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의 빛과 열과 붉은 색이 셋이지만 결국 하나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라는 설명이다. 또는 삼위의 관계를 상황/시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특히 창조와 관련하여),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특히 구속과 관련하여), 그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셋은 동일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현대판 설명은,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선생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법을 양태론(modalism)으로 부르는데,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이 설명의 강점은 삼위가 하나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반면에 약점은 셋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설명으로는 셋 사이에 이름만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구별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을 때 그때 성부도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누가 이 우주를 운행하고 계셨단 말인가?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이런 양태론적 설명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양태론이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려다가 너무 지나쳐 삼위의 실제적 구분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는데, 이 이론에서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아예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 일명 양자론(Adoptionism)이라 하는 이단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원래는 우리와 똑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보아서 세례 받으실 때 그를 당신의 특별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세례 받으신 후부터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너무나 터무니 없기 때문에 손쉽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양태론도 아니고 양자론도 아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그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하나인가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논리의 허점을 지닌 불완전한 비유를 들어서까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인데 양태론적 설명이 이에 속한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이 문제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을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성경은 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서로 구분된다.
3) 이 세 인격이 모두 하나님으로 불리고 서로 하나인 것으로 즉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만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에서 지나는 설명을 시도할 경우 이단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