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23 09:59
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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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230  

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본 시편 23편을 주제로 한 설교와 글이 많기로는 성경의 모든 구절 중에서도 상위 열 손가락 안에는 충분히 들 것입니다. 신자가 전체로 암송할 수 있는 구절로 치면 아마 으뜸일 것입니다. 새로운 주석과 설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모든 신자에게, 심지어 불신자에게마저 큰 위로가 되는 시편입니다. 단순히 읽기만 해도 마음에 평강이 스며들 정도로 은혜가 넘칩니다. 성경 말씀 그 자체로도 큰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은 바로 이 시편을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과(過)하면 반드시 어디엔가 부족한 면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본 시편도 위로와 은혜가 너무 넘치다보니 신자들이 그 풍성한 여유로움에만 파묻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보호 인도하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단순히 이해하고 치운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틀린 이해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분명히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어 내 잔을 넘치게 해주십니다. 신자의 평생을 두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따르지 않은 때와 장소는 정녕 없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 기자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바 초점이 그런 은혜의 풍성함에만 있지 아니합니다.  

독자는 무슨 글을 읽든 반드시 시작과 끝에 주목해야 합니다. 글의 시작은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발제(發題)이며 끝은 결론(結論)입니다. 이 둘을 무시해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을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간 몸통만 들고서 이것이 생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본 시편의 시작인 1절과 마지막 6절을, 그 중에서도 각 구절의 후반부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선 1절부터 다시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확하게 어떤 뜻입니까? 아니 신자들이 주로 어떻게 이해합니까? 거의 대부분이 “여호와는 나에게 언제 어디서나 부족함이 없는 은혜로 채워주신다.”일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과 세밀히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기자는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여호와 그분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그분만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그 분 외의 다른 목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에 부족함이 없다고 흔히 이해하고 있는 바와는 사실상 다른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내용을 단지 표현만 다르게 한 것도 아닙니다.

채워주시는 은혜에 부족함이 없으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쉽게 말해 현실적 고난이 닥쳐서 은혜가 부족하거나 사라지는 것 같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반면에 그분만으로 부족함이 없으려면 어떤 문제와 질병과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얼마든지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은혜는 현실에서 좋은 일이, 특별히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온 축복들과 동의어가 됩니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이기에 그분이 이끄는 일이라면 기쁘든 슬프든 모두 은혜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기자가 처해있는 상황도 은혜가 넘치는 기쁜 일이 아니라 고달프고 슬픈 일들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합니다. 또 “내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말합니다. 둘 다 절대 절명 위기의 순간입니다. 단순히 힘든 일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난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오직 여호와만이 구원의 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표현도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쉴 만한”이라는 것은 그 전에 도무지 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환난이 겹쳐서 힘들고 지쳐있는 신자를 하나님이 물가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도 하나님이 그를 눕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호와가 주시는 은혜가 부족함이 없으려면 “항상 푸른 초장에 거하게 하시며”라고 말해야 합니다. 매사에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면 구태여 “쉴 만한”이라고 표현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또 이 기자가 너무나 고달픈 가운데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소생시킨” 것입니다. 소생(蘇生)이라는 말은 그 전에는 죽어 있었거나, 죽음과 방불한 상태였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원수가 바로 눈앞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죽이려 들었기에 도무지 그에 맞설 힘이 자기에겐 없었고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밀어 넣어졌던 것입니다. 사방이 다 막힌 그런 구렁텅이에 떨어져 절망에 빠졌었는데 여호와의 간섭과 섭리로 구출 받고 나니 그 영혼도 새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는 우리의 예상, 기대, 이해, 믿음과는 달리 신자가 된 후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넘치는 축복과 풍성한 은혜 가운데에서 지내고 있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의 삶 전체가 물이 전혀 부족하지 않는 푸른 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 시편은 그래서 축복을 많이 받은 자나, 현재보다 더 풍성해질 것을 기대하는 신자가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절망을 넘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자가 하나님의 건져주심으로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회복했기에 자기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쉴 만한”의 의미를 다시 정확히 되새겨 보십시오. “이제야 비로소 쉬게” 된 것입니다. 전혀 문제가 없이 유복하며 풍성한 상태였기에 항상 원기가 넘쳤던 것이 아닙니다. 초장에 누인다고 했지 초장 위에 집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이 기진맥진한 신자를 거기까지 데려온 것입니다. 자기가 누울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잠간의 휴식일 뿐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목자이기에 그 분 외에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도 아주 심각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더라도 그분만으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욥처럼 소유물, 건강,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다 떠나고 정말로 이 세상에 혈혈단신 오직 맨 몸으로 홀로 남겨진 것 같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가족과 배우자도 아무 힘과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측근마저 자기를 비방 멸시하거나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이 땅에서 자기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예상, 기대, 꿈이라고는 단 한 치도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심지어 하나님마저 인자하고 푸근한 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는커녕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된 것도 이 땅의 인간 원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그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환난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도리어 더 큰 환난이 겹치기만 합니다. 그래서 현 상황은 물론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의심과 원망과 불신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의심과 원망과 불신은 잠시뿐이고 그분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와 헌신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이 기자가 말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뜻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어떻게 이 시편 기자 같은 확신을 갖고 절망에서 영혼이 소생될 수 있습니까? 본 시편을 주문처럼 낭랑하게 암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제자훈련과 기도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여 내 믿음을 최고조로 올렸기 때문이니까?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하며 다 떠났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명마저도 버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할 만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이 땅에 단 혼자만 남겨졌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 골짜기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한 모든 형벌을 당신께서 대신 다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어떤 절대 절명의 순간에 빠져 있어도 당신의 십자가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대신 내어주신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와 은혜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바꿔 말해 비록 현실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마저 나를 버린 것 같은 환난이 닥쳐도 이 시편을 기쁨으로 즐거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의 고통 때문에 비탄의 한숨과 단장의 슬픔이 함께 터져 나올지라도 말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님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나 원수가 내 목전에서 나를 죽이려 할 때도, 나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른다고 합니다. 신자 쪽에선 주님에 대해 어떤 의심과 원망과 불신도 개입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과 헌신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향한 당신의 인자에 추호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도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헌신과 실천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감사 찬양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도 진지한 결단과 헌신으로 마칩니다. 감사가 넘칠수록 주님을 향한 실제적인 헌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감사는 입술로만 하는 빈껍데기 감사일뿐입니다.  아무리 감사 헌금을 많이 드렸어도 그렇습니다. 삶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만이 온전하고도 진정한 감사의 표식입니다.

본 시편은 또 주님만 계시면 충분하다고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그래서 평생 동안 주님 곁에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중간의 믿음의 여정에는, 쉽게 말해 인생의 여정은 광야같이 온갖 고난이 겹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 수많은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이 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시편은 항상 푸근하고 따듯한 안락과 풍요가 넘치기에 감사 찬양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너무나 쓰라린 상황 속에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심을 맛보고 있기에 평생 동안 주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어찌 보면 피맺힌 결단과 헌신의 절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첫 구절을 고백하지 않는 신자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대부분의 신자가 고백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아는 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풍요할 때에 이 시편을 암송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비탄과 절망의 한숨과 울음밖에 새어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온전한 체험적 고백으로, 그것도 자신만의 고유의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 터져 나와야 비로소 이 시편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박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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