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8-08 20:39
[1]신약과 구약 중간 시대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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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84  

신약과 구약 중간 시대의 중요성

 

{1}.시대 개관 (BC.430년경 이후)

1).말라기 선지자의 예언(BC.430년경) 이후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까지 의 400년 동안은 침묵의 시대라고 묘사 되어진다

2).그러나 사실상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사건으로 들끊었으며 결코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다

3). 400년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구약의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이시기에 후기 유대주의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부여하고 그리스도의 도래와 복음선포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바사시대 (BC.538년경-BC.330년경)

1).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생활은 비교적 평안한 편이였다

 ①고레스 황제가 예루살렘으로 귀국과 성전 재건을 허락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은 귀국하였다

 

2)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방해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리오 대제 때에 성전 재건을 끝마쳤다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 봉헌식. 6:13.)

 ①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할것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②느헤미야 이후에도 약1세기 반동안 페르시야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체 자신들의 종교와 제사를 지킬수 있도록 허락받고 있었다

 ③이때 유대인를 다스린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④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제직분과 정치적 공직의 겸임은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날 무서운 암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⑤대제사장직을 이에 놓고 시기와 음모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 (12:22)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2)므낫세 대제사장 탈락

 ①얏두아 대제사장 (BC.395년경-BC.370년경)

 ②므낫세 (얏두아 동생 이방인과 결혼문제로 탈락)BC.370년경-BC.354년경

 ③요하다의 아들 요하난은 대제사장직(BC.355년경-BC.330년경)을 계승했는데

 

3)사마리아 그리심산의 성전을 짓게 된 동기

 ①요세프스에 의하면 얏두아 동생 므낫세가 사마리아 의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이유로

 ②므낫세가 이방여인과 결혼 때문에 제사장직을 물러날 것을 종용받자

 ③그의 장인 산발랏이 그림신산에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새 성전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④이무렵에 사마리아 성전이 그리심산에 세워졌었다

 ⑤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산 보다 그리심 산은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⑥그리심산 성전 보다 그리심산을 더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⑦그리심산의 성전은 하스몬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경에 의해 파괴(BC.134년경-BC.104년경) 되었으나

 ⑧그림신산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사마리아인이 성역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⑨한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들의 성역에 예배처가 복원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했으나 구세주께서 예배처보다는 예배의 영적태도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 요4:20.

 ⑩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산발랏이 느헤미야서 4:1.에 기록된 사람과 동일 인물일수는 없다

 ⑪그러나 확실히 이즈음에 그리심산에 성전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하는 믿을 만한 전승을 요세프스의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  

 

4).페르시아가 그리스 침략전쟁에서 실패하자 피정복민들은 독립을 쟁취하려고 동요하게 되었다

 ①이집트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멍예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온 반면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끼여 있는 유대는 예속을 면치 못했다

 ②아닥사스3세 때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대한 투쟁을 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 정부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 연안으로 유배을 보냈다

 ③한편 이단의 유대인의 망명자들 속에 끼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들은 나일강의 동쪽 평야에 위치한 다바네스에 피난처를 구했다

 ④또 다른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 BC.5세기때 유대인들) 이주민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현제 에스완 근처인 엘레판틴 섬에는 유대 용병들이 모여사는 집단 거주지로 형성되었다

 ⑤이들 주민들을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그들 조상의 여호와 신앙를 어기고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그들 조상의 여호와 신앙에다 이방적 요소를 혼합하였다

 ⑥사마리아인 들과도 교제를 가졌다

 

2.알렉산더 대왕 시대 (BC.334년경-BC.323년경)

1).헬라문화의 영웅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도 대제는 마침내 단순히 권력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①아리스톨레스의 제자인 그는 헬라 문화의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페르시아군대를 격파하고 거기에 주둔하였다

 ②그후 사마리아와 팔레스타인 남쪽을 통일하여 이집트로 옮겨갔다

 ③두로와 가사가 각각 완고한 저항을 하였으나 그러한 저항이 알렉산더의 파죽지세를 꺽을수는 없었고 그의 군대는 승전의지를 드높일 뿐이였다

 ④대제사장 얏두아 시대에 헬라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리라는 다니엘서 예언 (8)은 정확인 실현 되었다

 

2).알렉산더의 유대인 우호적인 정책

①역사가 들이 세세히 말하지는 않고 있으나 유대인과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사이에 퍽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②알렉산더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 하였을 뿐만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③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정복민들과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3).알렉산더 헬레니즘의 문명과 문화정책의 생활 혜택

 ①이집트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압제로부터 구출해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를 울리면서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다시 되 밟아올라가 전쟁에서 동진하여 인도의 편잡지방까지 정복해 나갔다

 ②전쟁에서의 승리도 승리려니와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등 통치 방식보다는 헬라문화에 있었다

 ③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각지방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도시들은 헬라의 문화를 좇아 생활질서를 전체적으로 갱신 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④실제적인 의미에서 볼때 도시 건설이란 곧 생활방식을 헬라적으로 변화 시킬 웅장한 공공의 건물과 체육관 . 야외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⑤모든 사람은 헬라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헬라화 되어 갔던 것이다

 ⑥헬레니즘의 물질적 측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혹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⑦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상인 층계에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다

 

4).헬레니즘 문명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신앙의 도태.

①높은 수준의 주거 방식과 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다가 주었다

다른 모든 곳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도 헬라문화의 이 겉모습을 만족하였고그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②바벨론 유수이전 시기에 있어서 우상숭배가 이슬라엘에게 장애물이 되었었다면 헬레니즘 이야말로 유수이후에 이스라엘 에게는 가장 유혹적이었다

③오늘날 고도의 문명으로 기독교가 향락 물질에 도취되여 신앙관 타락함을 이미 헬라시대에 그 면모를 이미 보여주는 고대시대의 문명이 되었던것이였다

 ④이당시 헬라문명의 도취가 얼마나 영적 침체을 하는지를 앞으로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헬라문명을 그리워하며 타락하는 장면이 연출 된다

 ⑤바벨론시대에 있어서 포로 압정당시 우상숭배을 강제로 탄압함으로 이스라엘에게 많은 고통과 장애물이 되었다면 헬레니즘이 자유로운 선택은 많은 유대인들로 호응과 유혹을 받음으로 헬레니즘을 지향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만들어지기 까지 했다

 

5).헬레니즘 철학과 성경과 혼합하려는 움직임의 타락상

 BC.3세기의 한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마케도냐의 지배를 거치면 갖게 된 이들 이방 민족과 접촉으로 많은 전통적인 유대 종교 의식과 그 전통적인 본래성을 잃어버렸다

②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식이름을 가졌고 신비한 헬라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초석의 신앙과 헬라식 철학적 지혜를 혼합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성경을 고대와 철학과 혼합하여 연구하는 과정을 미국의 어느 신학과정을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있다)

 (이미 고대 헬라시대에 있었던일을 오늘날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⑤이러한 세태에 정통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에 저항하여 율법을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로 하였다

 

3.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BC. 320년경).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하였다)

 

1).향후 수년동안 근동의 미래 정세는 불확실하였고 그의 장군들인 네명들은 영토 분쟁에 들어갔다

①카산더 장군은 마케토니아 헬라지역을 영토을 통치하게 되었고

②루시마쿠스 장군은 트리기아와 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이들 두장군은 제외 된다)

 

2).그러나 이스라엘을 위시한 이집트와 시리아(바벨론과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할 나머지 두 장군들은

①이집트 을 통치할 프톨레미 장군이 남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②시리아을 통치할 셀류쿠스 장군이 북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3).남방왕 프톨레미왕조와 북방왕 셀류크스 왕조 끊임없는 전쟁사 (BC.250년경 시작됨)

①헬레니즘의 물결이 더욱 고조될 BC.250년경 이후무렵에

②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의 계보간 원한관계와 영토와 권력이 맞물려 서로 쉴틈없이 싸워지만

③반면에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 대해서는 완전히 일치 하였다

④역사가 타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너무 변화 시켰으므로 그의 후대에 가서는 아무것도 그 이전처럼 될 수가 없었다” 의미 신중한 말이다

⑤문명은 발달되어서는 좋으나 지난 좋은 것은 찾을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명으로 피폐된 인간사에 대해 바라본 시각을 이미 헬라시대에 알고 있었다

 

4).남방 프톨레미 왕조와 북방 셀류크스 두왕조

①처음에는 BC.320년 프톨레미 장군은 남방인 이집트을 통치 함으로 먼저 정착하여

②프톨레미 왕조를 세운반면 이집트에 안정된 경제의 뒤바탕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된다

③뒤늦은 셀류쿠스는 시리아을 장악하지 못하여 이집트에 기거하다 옛날에 동료인 프톨레미 도움을 받아

.BC.311년경 시리아을 장악함으로 북방왕으로 셀류쿠스 왕조로 등극한다

BC.250년경 두제국의 정략결혼의 파극으로 시작된 두왕조는 멸망할때까지 전쟁으로 일관한다

 

4. 프톨레미 왕조 시대 (남방왕 BC. 330년경-BC.80 년경)

 (프톨레미 알렉산더 10 BC.80년경에 프톨레미 왕조는 이집트에서 끝이 나다)

1).프톨레미 (이집트) 정세

①알렉산더가 죽은후에 유대는 처음 얼마동안 알렉산더 장군중 한사람인 안티고누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②곧이어 해방자라는 뜻의 이름인 소테르라 불리는 다른 장군인 프틀레미1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③프톨레미 1세는 BC.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이집트에 왕국의 중심을 둔 그는 유대인들을 아주 퍽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④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으며 이 도시는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사상의 중심지가 었다

⑤프틀레미 필라델푸스 2 (BC.250년경)치하때 알렉산드라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여로 번역하였다

⑥이번역은 후에 70인역이 알려진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경전을 헬라여로 번역한기위해 유대에서 70인역(정확하게 각지파로부터 각각 6명씩 도합72)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유대의 정세 (남방왕이 유대을 통치 하던 시대상 BC.320년경-BC.196년경)

①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미 왕조시대에도 번영을 누렸다

②이집트의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으나 지방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통치 이레로 계속하여 대제사장 책임하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③프톨레미 왕조시대에 유대인 중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의인 시몬이었다

④그는 그의 형제 가운데서 높으심이여 그의 백성의 영광중에 크시도다 라고 외경의 집회서에서 지극히 찬양되고 있다

⑤그를 프톨레미1세때에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으며 가뭄과 포위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할수로 시설공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⑥시몬은 이러한 대제사장으로서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되어졌다

⑦그가 즐겨 암송했던 격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세상은 율법과 성스런 봉사와 자비. 이 세가지에 의존하고 있다

 

4).혼란기시대에 대제사장에 대한 이모저모

①그러나 의인 시몬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역사적문제로 남아 있다

②시몬1세인지 시몬2세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③유대전승과 설화에 전해지는 의인 시몬은 이 두인물 중 하나일것이다

 

 ( 도비야가 내력 )

①프톨레미시대에 제사장 가문이었던 오니야가와 도비야가 사이에는 경합있었다

②도비야가 친이집트였고 상류층계층을 대표했다

③이 도비야가는 느혜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암몬사람 도비야가와 관련되기도 한다(2:10:4-3, 7:6-1)

④프톨레미2세때(BC.250년경)의 한 파피루스 문서(두루마리 문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도비야라는 유대인은 요단 동편 암몬지역에 주둔했던 프톨레미 군대의 기병대장이었다

⑤현대에 이르러 고고학자들이 중앙 요르단의 아락엘엠 밑에서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은 BC.3세기 때의 거대한 능묘를 발굴해 낸바 있다

⑥도비야가는 신약성경에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행하는 收 세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오니야가 대제사장직 직위 해제)

①요세푸스는 오니야2세가 프톨레미4(BC.230년경)에게 대제사장이 바쳐야 할 조공 애 액수인 은 20달란트지불을 거부하였다고 기록한다

②이거절로 인하여 오니야나 대제사장은 포톨레미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게 된듯하다

 

 (도비야가 대제사장직 )

③이후 도비야가 출신인 요셉이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세관직을 맡았다

요셉은 수세관직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들일수 있는) 자격권을 갱신 받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다녀 와야만 했기에 프틀레미왕조에 연결 될수있기에 대제사장직에 오를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④도비야가 요셉은 프톨레미 시대의 20년동안 이 영향력 있는 직위를 계속 누렸다 

 

5).혼란기의 유대 대제사장들 (알렉산더 시대부터 마키비 혁명시대까지)

①시몬1세로 (BC.320년경전후) 위대한 대제사장 은 3세기 중엽에 생존했고

②시몬2세는 (BC.280년경 전후)에 실존 했다

③오니야 가 (BC.250년경 전후) 프톨레미3. 이후프틀레미4세와 조공문제 발생

④도비야가 요셉(BC.210년경 전후)프톨레미4

⑤시몬 오니야3 (BC.190년경전후) 프톨레미 5

⑥야손 (BC.180년경 전후)북방왕 안토오쿠스4세 뇌물로 대제사장자리을 사다

⑦메델라누스 (BC.170년경-BC.160년경 전후)베냐민 지파로 친헬라파 북방왕을 매수 뇌물로 대제사장자리를 사다 (마카비 혁명에 책임을 물어 알키무스가 메넬라누스 처형 시킴)

⑧마카비 혁명(BC.160년경 전후)

⑨알키무두 (마카비 혁명에 가담한 정통파 유대인들을 설득 처음 약속을 어기고 처형 시킴)

⑩요나단 (BC.150년경전후)마카비혁명 제 2인자로 외교 정책으로 대제사장자리 오르나 반열 문제로 추종자가 살해함

⑪시몬 (BC.140년경 전후)마카비혁명 유다의 마지막 형제로 정세로 인한 이스라엘 독립을 이룩하여 대제사장 자리에 오르나 그도 반열이 아님 자신의 사위가 반란으로 두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다

 

  5.셀류크스 왕조 시대 (북방왕 BC.311 년경-BC.129 년경)

1).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셀류키드라고 불리어진다

①왜냐하면 알렉산더 제국을 계승한 국가중의 하나인 그들이 왕국이 세루크스 니카론 1세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②초기 지배자들을 대부분 셀류크스나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은 오론데스강의 안디옥을 그 수도권으로 삼았다

③대제라는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3세는 BC.199년경까지 이집트와 수차례의 전쟁을 치루어 한번도 승리한적이 없는 북방은 그동안 프톨레미인 이집트로부터 통치했던 팔레스타인을 그해에 처음으로 북방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됐다

④요단강의 발원지인 파니온 근처의 전투에서 북방이 승리한 결과 였다 이사건은 유대 역사에 새롭게이루어 놓았다

 

2). 북방이 유대에 대한 통치 방법(BC.197년경-163년경)

①그 이전이 남방의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관습과 전승에 포용적이며 관용적이었던 반면

②북방의 셀류크스 왕조는 유대에게 헬레니즘 문화을 아주 강압적으로 이식시켰던것이다

③안티오쿠스 3세때 (BC.197년경 ) 팔레스타인및 유대을 처음으로 정복하게 된다

④초기는 정치적탄압 중엽에는 종교적 탄압 정책을 하였다

 

3).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BC.175년경-BC.163년경)의 시대상

①북방왕으로 등극하자 팔레스타인이 그의 통치함에 들어감에 따라 유대 역사상 유래없는 신앙의 탄압의 폭정이 시작된다

②그는 유대내에 남방시절 친헬라파 유대인을 규합하여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③그 당시 남방때부터 유대을 다스려오던 대제사장 오니야3세는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인으로 대제사장 이였다 (마카비 혁명으로 북방왕 에피파네스 4세는 무너진다 )( 안티오쿠스 10 BC.139년경-BC.129년경 셀루쿠스 왕조는 끝나다 )

 

4).친헬라파들의 헬라 문명으로 신앙의 도태

①그러나 헬라 문화을 지지하고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남방왕 프톨레미의 시대에는 온유정책으로 유대안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가 북방왕으로 통치권이 강압으로 바뀌자 친헬라파 들은 북방왕의 군대 권력을 이용 그들에게 데제사장 자리를 뇌물로 사서 친헬라파들이 유대의 정권을 장악한다

 

5).헬라파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의 직임을 매석 매직의 사건

①북방의 안티오쿠스4세가 유대를 강압 통치하자 북방에 붙어서 친헬라파 유대인들은 오니야3세을 반대하고 헬라파 유대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지지하고 친헬라파 세상을 만들었다

②야손은 거액의 뇌물을 안티오쿠스에게 주어 약속의 댓가로 오니야3세을 제거하고  야손이 대제사장직에에 오르는 성과을 이룬다

③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이 대제사장직을 정치적 직임으로만 생각한데 반해

④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것이 그근원(모세때)에서 부터 신성한 것이며 돈을주고 그직무 매매하는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것이라 생각하며 불만스러워 했다

⑤야손은 북방왕으로 대제사장직의 직위를 받고 헬라 문화를 장려하였다

⑥경기장에 예루살렘에 지어지고 좋은 문명을 받아들임으로 문명에 안락함에 취하여 히브리어 이름을 버리고 헬라의 이름은 흔한일이 되어 버렸다

⑦히브리적 정통주의는 시대에 뒤진것이라 매도하며 반 계몽적으로 헬라 문화을 옹호하며 새로운 문명으로 인하여 종교의 도태의 길이며 영적 쇠퇴의 길을 택하게 됐다

 

6).이러한 물질 문명의 죄악으로 율법을 떠나는 또한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①헬라파 유대인의 야손 대제사장의 친한 친구의 한사람인 메넬라우스가 등장한다

②야손이 뇌물로 대제사장자리을 사는것을 보고

③헬라주의자인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는 베냐민 지파인데도 불구하고 야손보다더 더많은 돈과 뇌물을 안티오쿠스4세에게 지불하여 야손을 밀어내고 대사장직에 임명되게 된다

 

7).야손과 정통파 유대인의 반란

①야손이 대제사장직에 되었을때 소요했던 정통파 유대인들과 합세하여 대제사장직을 맡을수 없는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자 더욱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②야손은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회복하기위해 군대을 일으켰고 정통파 유대인의 도움을 청했다

 

8).메넬라우스의 북방군 요청으로 이스라엘 진압과 재점령

①메넬라우스는 북방의 안티오쿠스에게 병력요청으로 도움을 청했다

②그당시 이집트 남방과 대치하고 있었던 북방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효과적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 적이였다 (북방의 군사기지로 필요)

③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은 공격하기로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④안식일에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했다

⑤마침네 북방왕 시리아 군대는 유대을 점령하고 메넬라우스에 적대하는 세력들을 대량학살하였다

⑥도시의 성벽들이 파괴되었고 새로운 북방의 요새인 아크라가 성채에 건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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