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8 20:54
[3]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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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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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 하시는가, 아니면 막고 있는가?

당혹스런 자질들

보통 사람들이 강력한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솔직히 몇 가지 당혹스런 자질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연 그런 자질들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미련한’ 것들이다.

둘째는 ‘약한’ 것들이다. 이 말은 신체적인 연약함을 의미하며 심지어 불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당신은 몸이 허약하고 병약한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그리고 그 몸을 통해서 위대한 일들을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셋째는 ‘천한’ 것들이다. 이 말은 족보도 없이 태생이 천박하고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또한 ‘멸시받는’ 것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한 경멸과 조소를 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멸시하는가? 그리고 당신이 결코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멋진 일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말로 사용하실 때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끝으로, ‘없는’ 것들이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심지어 멸시조차 당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멸시 당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보통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제 자기 백성을 쓰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밝혀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능하신 계획

첫째,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나 고귀한 자나 모두 부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만 세상의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바울은 냉담함이나 게으름이나 평범함을 장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평균적인 지능 지수를 가진 설교자나 교사라면 당신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셋째, 바울이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모든 문제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에 특별한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약한 것들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들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빌리 선데이(Billy Sunday)가 생각나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다. 동시대에 여러 가지 면에서 그와 짝을 이룰 만한 인물을 찾는다면 빌리 그레이엄일 것이다. 선데이는 분명히 지성인으로 분류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전에 야구 선수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밖에는 나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저속한 말을 사용했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강단에서의 그의 익살스러운 몸짓은 그 시대의 세련된 교인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정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 빌리 선데이 같은 사람을 선택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빌리 선데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문자 그대로 수십만 명이 그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다.

하나님의 고상한 천한 것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을 만큼 천한 사람을 원하신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기억하그를 통하는 더할 나위 없이 비천하고 천한 사람이었다. 기드온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모든 족속 중에서 므낫세가 가장 못하고, 므낫세의 모든 집안 중에서 기드온의 집안이 가장 보잘것 없<사람이자신의 집안 모든 아이 중에서 자신이 가장 못난 사람이라 하였다. 이야기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군대의 규모를 단지 300명으로 줄이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무명의 장군과 보잘것없는 군대를 택하셔서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천한 것들을 계속해서 선택해 오셨다. 어린 목동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도 받는 예상밖의 십대 소년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얻었을 때,장 못하고, 은 이스라엘에 는 더할를 기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하당신은 는 더할를영광을 얻<시기 위하여 도 받는 것들을 사용하 믿음을 가지고 할일를 알겠는가?

그가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우리의 삶에 세 가지 사실을 적용해 보자.

첫째, 우리의 교만에 대한 책망이 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교만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때에만 우리를 계속해서 사용하신다.

둘째, 우리의 능력에 대한 헤아림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실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라.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살아 계시고, 온전히 계시며, 사시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사랑과 제 힘과 제 지혜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것들을 신뢰하라. 하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특별한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셋째, 우리의 찬양에는 반응이 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31절).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계획인가! 그의 광대한 우주를 가득 채우실 만큼 크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거하실 만큼 작기도 하시다. 나는 하나님의 전이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신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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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강물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그 속에서 소성케 하는 강물과 축복의 강물이 흘러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흘러 넘치는 그 강물을 묘사하신 것이다. 에스겔은 그것을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 두 가지 그림이 아름답게 서로 어울린다. 성전이 구약에서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장소였던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우리의 영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깊은 영적 축복과 삶을 영원히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물은 영원히 그를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물이었다(요4:14).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컵을 채우기 위해 모임이나 세미나를 갖거나 주말에 수양회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 넘치는 강물이 있다면 그런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이 본 강은 비천한 원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 강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왔다(1절). 그것은 낮은 곳에서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진정한 신앙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릴 때 시작된다. 다음으로 그 강은 거룩한 원천을 갖고 있었다. 그 강은 제단을 흘러 지나갔다. 모든 성전에는 제단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들인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제단을 흘러 지나가지 않는 신앙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제단은 희생과 씻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 씻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보혈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소생케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뿐이다. 제단을 비껴 가면서도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성전에서 흘러내린 그 강은 또한 뜨거운 원천을 갖고 있었다. 에스겔은 그 강이 성전 동문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동문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문이다. 또한 그 강은 제단 남쪽에서 흘러내렸다. 그쪽은 늘 해가 비취는 곳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따사로움을 얼마나 잘 묘사한 그림인가? 우리의 차갑고 냉랭한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데워질 필요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냉랭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성케 하는 능력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뚜렷한 경로

에스겔이 강을 따라 이끌려 가고 있을 때,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나와 작은 물방울을 일으키며 흐르던 조그만 시내가 마침내는 커져서 폭포가 되어 산기슭으로 흘러내리게 되었다. 그 물이 이제는 점점 그 경로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강은 아무런 지류도 없이 그렇게 커졌기 때문에 분명히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화시키는 역사가 있다. 발목 깊이의 물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무릎 깊이의 물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허리까지 찬 물은 성령 안에서 강건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수영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은 성령의 강력한 소성케 하는 힘을 말할 수 있는데, 그 힘은 우리가 그 힘에 완전히 압도당할 때 그 힘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들어올려 휩쓸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에스겔의 환상에 의하면, 그 강은 절망적인 곳으로 흐른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겔47:8).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얼마나 절망스런 일이 많은가? 절망은 무일푼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들은 동구권과 구소련에서의 공산주의 붕괴가 세계를 전쟁의 위협에서 건져내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선도할 것이라고 생각여 흘러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 수 있들이 절망 상태에 있 수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영광스런 강물이 이와 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필요가 있다. t충만함에 적시울 필요가 있 수 있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대학생들이요, 많은 문 절망안고 있 수 업가들이며, 자기가 처해 있 수절망스런 환경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주부들이다. 오, 이러한 사랑과 권능 충만함으로당신과 나와 같은 성전에서 과 한 절망적인 얻을로 흘러와 친다 한얼마나 좋겠는가? 의하,은 또한 메마른 곳으로 흐른다.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광야로 내려가서.” 에스겔은 아라바로 흘러갔다고 절망은 무일런데 아라바는 곧 유대 광야절망절망은 무이 광야는 히 압도당할 때 을 필요로 하할 뉔 대고 열매 없는 도 영가리킨은 무이 뉔 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충삶힘에 만 있 수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부 사람들 충삶힘에 도 존재망은 무대부분의업가들이며,은 메마른 헌신 충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열매 없는 마른과 황폐한 복음 전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은 무일런 사람은 생명 충만수에 젖어 새롭게 변화되고 헌신 삶을 살필요가 있다. 가들하면 그의 광야와 같은 삶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 강물은 죽음의 곳으로 흐른다. “이 물이…바다에 이르리니” 에스겔이 말하고 있는 바다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해를 말한다. 사해는 증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기만 하지 주지는 않기 때문에 소금의 농도가 매우 짙다. 보통 바닷물보다 염분이 25% 이상이나 많다. 그리고 마그네슘 브롬으로 인해 유기체가 살지 못한다. 사해의 물은 납 성분이 많고 유독하다. 이와 같은 죽음의 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기심으로 인해 사망과 심판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치유의 강물에 적시울 필요가 있다.

능력의 강수

강물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천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에스겔이 본 그 강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그 곳이 바로 그 강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강물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 또한 물이 흐르는 곳에서 나무가 자랄 것이다라는 말을 주목하라.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7절). 이러한 생명을 주는 물이 흐르는 곳에 죽음의 황량한 사막 대신 생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물이 흐르는 곳에 물고기가 번성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9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가 현대의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나 적은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그물이 텅 빈 이유는 그 모든 계획과 홍보와 장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체된 바다와 오염된 못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고 소성케 하는 강물이 흘러 넘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의 수확이 있을 것인가! 다음으로 물이 흐르는 곳에 과실이 맺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12절) 언제나 푸르른 성도들의 늘어진 가지 위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즙이 많은 이 과일들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우리가 이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강이 우리 몸의 성전에서 흘러나올 때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흐르는 곳에 건강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 자라난 실과 나무의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선지자가 기록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불명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성케 하는 강물이 충만한 힘으로 흐르는 곳에는 연약한 성도와 빈혈증을 가진 성도가 영적인 생명력과 건강을 얻어 진동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성전된 당신의 몸에서 과연 소성케 하는 강물이 흘러나오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나와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더욱 목마르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평화는 영광스런 강물과 같고, 그 밝고 밝은 평화는 늘 승리하고 또 승리하네. 온전하심에도 날마다 더욱 충만히 흘러 넘치고 온전하심에도 언제나 더욱 깊이 차고 넘치네.

- 프란시스 하버걸(Frances R. Haver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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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집을 깨끗이 하라

만일 성령께서 당신의 몸, 곧 그의 성전에 머물기를 원하신다면 당신은 그 전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당신의 영적인 집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 가운데 하나는 죄를 범했을 때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윗은 국왕으로서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대리석 욕조에서 몸을 씻었으며, 비단 담요를 깔고 잠을 잤고, 제왕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범죄했을 때 그는 더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씻기시고 나를 깨끗이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죄 때문에 영적인 집안 청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성도와 죄인의 차이는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이라도 죄를 지을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다만 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성도는 죄에 미끄러져 들어가지만 죄를 혐오한다. 그러나 죄인은 죄 가운데 뛰어들어 그것을 즐긴다.

그리스도인의 죄의 결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1:3-4).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우리는 분명히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게 된다. 다윗의 회개의 기도를 상기해 보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시51:12).

만일 당신이 타락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으면 그 기쁨을 한 번 시험해 보라.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르다. 행복은 일어나는 일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생긴 우연한 일이 좋은 일이면 우리는 행복해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기쁨은 우연한 일이나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예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행복은 온도계와 같다. 그것은 상황을 기록한다. 반면에 기쁨은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같다. 그것은 상황을 조절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당신의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죄이다.

그리스도인의 죄의 은폐

한 가지의 속이는 곧 다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둘수록 그 속이려 하고 숨기려 하는 특성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거짓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타인에게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냉담해지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은 가식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늘 그러했던 것만큼 자기를 영적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얼굴에서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나중에 그 영광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모세는 여전히 그 베일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 베일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빨리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쉽게 합리화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데 곧 실수라든가, 판단 착오라든가, 전염성 기능 부전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으로 돌리게 된다.

하나님께 거짓말하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하나님의 영이 우리가 범죄한 사실을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부인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거짓말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죄를 숨기는 일에 이력이 난 사람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자각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의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아버지께서 빛으로 그를 충만히 채우시게 한다. 그 빛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빛을 무서워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이보다 더 어리석다. 지금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지대에서 밝은 햇빛으로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 점을 명심하라.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과 사탄의 고소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사탄의 본성은 고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를 고소하시지 않는다. 다만 깨닫게 하실 뿐이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가?

첫째, 합법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고백하지 않은 죄와 깨끗해지지 않은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 나아가 용서받은 죄는 이미 잊혀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새삼스럽게 이미 용서받은 죄를 꺼내어 계속해서 그것으로 우리를 고소하기를 좋아한다. 당신이 과거의 무용담을 계속해서 듣고 싶어하는 한, 마귀는 언제까지나 그것을 당신에게 되풀이하려 할 것이다.

둘째,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만일 사탄이 당신의 씻음 받은 죄를 고소할 수 없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상의 죄를 가지고 당신을 고소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진찰하는 의사와도 같다.

만일 우리 삶 속에 어떤 죄가 있으면 그 아픈 곳에 손가락을 얹고 눌러 보신다. 그 곳이 문제가 있는 곳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병적인 내적 성찰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죄를 찾아내느라고 한 번에 조금씩 우리 자신을 분해해 볼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빛을 향해 활짝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분의 일을 하실 것이다. 만일 성령께서 죄를 구체적으로 거명해서 깨닫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아마 마귀가 당신을 고소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끝으로, 구속(救贖)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사탄은 당신을 정죄하기 위해서 고소하지만, 성령께서는 당신을 깨끗게 하시기 위해 죄를 지적하신다. 마귀의 고소는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성령의 깨닫게 하심은 고백과 씻음과 승리로 인도한다.

죄의 고백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19). 진정한 깨달음이 있으면 진정한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고백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동의하다’, 혹은 ‘똑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죄의 고백은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남김없이 고백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나는 죄의 목록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죄를 낱낱이 고백한 다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승리와 절대적인 죄 씻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리고 그 목록을 찢어 버린다. 그런 다음 그것을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조심스럽게 버린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끝으로 확신을 갖고 고백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이 지은 모든 죄값이 이미 갈보리에서 다 치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값을 치르셨다(요일2:2). 분명히 거기에는 당신이 저지른 가장 나쁜 죄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죄가 다 해당된다.

갈보리로 인하여

우리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당신의 삶 속에 있는 모든 얼룩과 오점과 흠과 더러움과 결점이 눈보다 더 희게 씻겨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시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다 할 수 없다. 심지어 당사자인 당신도 하나님의 사하심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잘못을 범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삶의 똑같은 영역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잘못을 벌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금 용서를 구하러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솔직하게 자백했다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똑같은 잘못을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셨든지 간에 다시금 용서해 주신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여러 번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마치 당신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처음 나올 때와 똑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전의 모든 것을 다 잊으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기억지 아니하시고 그 죄로 인해 우리를 더 이상 나쁘게 여기지 않으신다. 용서는 전염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죄를 다시는 영원히 거론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 당신의 것이 될 때, 비로소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까지 용서할 수 있게 되고, 다시는 그것을 거론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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