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2-24 15:25
신앙과 믿음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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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58  

신앙과 믿음은 다르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


신앙이란 의미의 영어 '페이스(faith)'는 원래 '신뢰'라는 뜻이다. 신앙이란 어떤 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또한 지적이며 정신적인 활동이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내재된 일종의 덕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약속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라틴어로 '크레도(credo)'는 흔히 '나는 믿는다'로 번역되는데, 그 의미를 직역하면 '우주의 질서에 맞게 자신의 심장(생각과 정성)을 배치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영어로 '빌리프(belief)'가 된다.

"나는 한 분의 신을 믿습니다.(Credo in unum Deun)"라는 문장은 초월적인 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문장은 사실 '우주의 질서를 만든 절대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나는 삶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설득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 안젤무스(Angelmus, 11세기 영국주교)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라는 라틴어 명구를 남겼다. 그 의미는 "나는 삼라만상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고 내 삶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는 한 종교가 만든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렇게 산다면 언젠가 신을 이해할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현대인의 신앙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종교 생활을 지향하고 그 종교의 신화와 의례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과학적인 관행에 따라 교리에 담긴 내용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 신화는 믿지 못할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다를 치니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났다고 전한다. 이 신화는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키려는 통과의례에 관한 이야기이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물을 바람으로 걷어내 마른 땅이 드러나는 주제는 <창세기>의 우주 창조 이야기이다.

# 의례와 신화적인 이야기들은 과거에 발생한, 즉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시간을 초월해 오늘날 그 이야기를 듣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화적 사고는 데카르트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는 우주는 생명이 없는 기계이다. 신화가 원초적인 시작을 희구한 그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자로서 자명한 수학적 논리로 진리를 증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문장만이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영적인 해석은 니체에게 와서 완전히 끝난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저 위에 혹은 저 아래 누가 아직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

엄청난 무서움, 의미를 상실한 분노 그리고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인들의 삶의 일부가 됐다. 현대인들의 삶에 신앙이 없다면 그 삶을 쉽게 절망의 늪에 빠질 것이다. 평화를 깨는 니힐리즘(절망)은 신앙을 상실하고 신성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 복음(gospel), good news는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이라는 뜻의 이 복음은 로마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이 복음을 들고 간 전령들은 속국으로 가서 "우리가 새로운 황제를 맞았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시저이다. 너의 삶을 고치고 무릎을 꿇어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령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황제의 특별 사면장을 가져갔고, 사면을 기대하지 않았던 죄수들은 갑작스러운 석방에 놀란다.

오병이어의 기적

성서가 신플라톤주의 영향으로 은유적 해석으로 흐른다. 오리기네스는 성서는 세 단계 해석을 통해 그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는 '축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그리고 '영적인 해석'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3요소인 육체, 정신, 영혼을 지칭한다.
1) 축자적 해석은 이단자들의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다.
2) 도덕적 해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염두에 둔 해석이다. 물고기와 빵을 가져온 사람이 그 음식을 혼자 먹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누었더니 기적이 일어난다는 초보 신앙인들의 해석이다. 도덕적인 의미를 찾는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타인과 나눌 때 그 사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3) 영적인 해석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해석이다. 이야기가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스스로 깊이 묵상하라는 요구의 영적인 해석이다.

오리게네스는 도덕적 해석을 은유적 해석이라고 부르며, 영적인 해석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성서를 믿는다는 것은 구절의 축자적인 의미를 '믿는다'고 단순히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일상에서 은유적으로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다.
소명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는 연습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가 물 위로 걸었다."는 성서에서 물이나 바다는 항상 혼돈을 상징하므로 혼돈의 세상인 물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살아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
이 문장은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반면,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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