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
맹목적인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십일조가 폐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1) 예수님의 말씀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가정 정원에서 기르던 채소였다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집 마당에서 기르는 하찮은 채소까지도 십일조를 정확하게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비판을 하십니다. 즉 십일조는 이러한 형식이나 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인 의와
인과 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 더 중한 바"라고 말함으로서 그 의와 인과 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의와 인과 신도 중요하지만,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그 내면적인 의와 인과 신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형식적이고 과시적인 십일조라고 할지라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것 하나로 십일조는 버리지 말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달합니다. 즉 십일조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공동번역]마 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표준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현대인의성경]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2) 사도바울의 연보
고전 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공동번역] 내가 여러분에게 간 다음에야 비로소 헌금하느라고 서두르지 말고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 두십시오.
[표준새번역]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자 자기 수입에 따라 얼마씩 따로 떼어 놓아서 내가 갈 때 헌금을 거두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본문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연보는 “로기아”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모집, 수집, 헌금”(gathering, collection)이라는 뜻입니다. 즉 수입에 따라 얼마씩 떼어
놓았다가 헌금을 하는 것으로 십일조와 다르다고 구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일조라는 용어가 싫은 사람은 연보라고 쓰든지,
또는 헌금이라고 써서 수입에 따라 저축하여 놓았다가 내면 됩니다. 용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요? 십일조도 연보의 일종입니다.
연보라는 명칭이 성경에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보라는 명칭은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자선,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자발적인 헌금, 기쁨으로 내는 것이 곧 연보인 것입니다.
(3)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십일조도 폐기되었다는 주장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십일조도 폐기되었다는 주장은 자칫하면 이단적인 주장이 됩니다.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두가지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 있는데,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지키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주장과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적인 주장의 두가지입니다. 전자는 구원파에서 발견되고, 후자는 행위구원론자에게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8)
폐기된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기능입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기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예를 들면 율법에서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죄라는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살인과 도둑질,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있으므로서 우리는 무엇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롬5:13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과 같은 명절과 절기를 지키라든지, 제사를 지키라는 기능은 비록 폐하여졌지만, 그 예표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으로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구약의 명절과 절기나 장래일의 그림자이고
예표이지만, 그리스도가 그 실체가 됩니다. 또한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바쳐진 제사의 온전한 성취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단
한번의 제사로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사법이나 절기 명절에 관한 율법은 그림자로서 예표로서 남아있으며, 그 실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일조도
폐하여졌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만약 그런 논리를 주장한다면, 율법에서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율법이 폐하여졌으니 간음과 도둑질과 살인을 하여도 좋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지요?
물론 필자는 십일조를 반드시 강제적으로 내어야
한다든지, 정확히 1/10의 액수를 계산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내면 됩니다. 다만
십일조는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가 폐하여진 것이 있다면,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제사장, 즉 레위지파의 생활비로 지급되는 십일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십일조를 목사가 갖는다?
물론 나쁜 목사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일부 목사들이 교회 돈을 맘대로 쓰다가 성도들에게 고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들이 엄청난 돈을 쓴다고
비난합니다. 물론 재정이 넉넉하여 풍족한 비용을 보장받는 목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는 전체적인 교회수에 비하여
지극히 적은 숫자이며, 대부분의 목사들은 생활비조차 부족합니다. 특히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는 관리비조차 부족합니다. 일부 극소수의
경우를 전체적인 경우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단적인 교회나 특별한 극소수의 경우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십일조나 헌금이 평신도들로 임명된
재정부에 의하여 계수되고 관리됩니다. 그 재정에서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의 관리비가 지출되는 것이 원칙이며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교회도 재정이 필요합니다. 그 재정을 십일조와 헌금으로 지불하게 되는 것으로서, 수입이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수입이 적은
사람은 적게 내는 것이 교회의 방식입니다. 무리한 헌금을 한다고 하여 천국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그런 방식은 이단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