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신학공부를 하면 반드시 세 가지 원리 (principium)를 공부해야한다. 1) 존재의 원리; 2) 내적 인식의 원리; 3) 외적 인식의 원리. 존재의 원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만물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학문의 첫째 원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할 능력이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면 그 진리를 받아 드릴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실때에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하며, 혹은 외적 인식의 원리라고 한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진리를 계시해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계시라 칭한다). 그리고 피조물 (자연), 역사,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 계시해 주시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일반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우리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일반계시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 해석되어져야 일반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A. 성경의 권위
한국장로교회에 12 신조가 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간단하게 12개 항목으로 요약하여 한국 장로교인들에게 가르쳤고, 믿고 신앙 고백하도록 했다. 12 신조 가운데 처음 나오는 것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한 법칙이다.”
(The scripture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are the Word of Go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이 고백속에서는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경은 정확 무오하다. 3)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해 유일한 법칙다. 성경에 대해 이 3 가지를 믿고 고백한다. 장로교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이 신앙고백을 해야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영감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감의 방법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일반적으로 영감의 방법에 대한 이론들은 아래와 같다.
1) 기계적 영감 (mechanical inspiration):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성경의 저자들은 받아 적는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저자들이 받아 적은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성경의 많은 부분은 역사, 시, 사실의 진술, 율법, 시, 예언, 편지, 등 다양한 장르가 있기 때문에 기계적인 영감은 맞지않다.
2) 동력적 영감 (dynamic inspiration): 인간 저자들의 영적인 직관을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한다.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의 증언이라고 한다. 동력적 영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시의 주체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이라고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 저자들의 신앙 고백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순히 신앙이 뛰어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황속에서서 자기들의 언어로 신앙을 고백했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와는 맞지 아니한 부분이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3) 유기적 영감 (organic inspiration): 성령께서 성경 저자들을 감동시켜 저자들 각자의 성격, 재능, 은사, 교양, 문체 등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여 성경을 조화있게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저자들을 감동시켜 저자들을 죄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할때에 전혀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개혁주의 입장은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이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의 범위에 대해서 사상 영감론 (thought inspir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계시의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가 담고 있는 사상이 중요하다고 한다. 오히려 글자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의 언어는 항상 오류가 있기 때문에 언어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전달 될 수 없다” 주장한다.
“조직신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잘 수행하고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설 수 있고 이 시대의 문제 앞에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게 되므로 성도의 신앙 성숙에 도움을 준다”
또한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반대하는 자들은 실존주의 신학 (신정통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명제적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만남의 사건속에서 언제나 개인적이다.”
(Revelation is never propositional, but always only personal in terms of Christ event). 이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류가 있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증언의 기록이며, 성령께서는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는 문자 혹은 글로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비언어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 언어철학자들도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주장한다. 더우기 초월적인 실체들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아니하다고 한다. 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계시는 문자로 전달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어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가운에 하나는 언어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하나는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문자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문자화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교제하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인간이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고백하며 친교하도록 만드셨다.
특별히 개혁주의는 사상과 언어를 분리 시킬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 할 수 있는 충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언어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에 의하면 언어 하나 하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언어들이 모여 문장을 만들며, 문장이 모여 사상을 형성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축자 영감 (verbal inspiration)을 믿는다. 성경의 언어 하나 하나가 매우 중요하며 문자 하나 하나 모두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다.
B. 성경의 무오성 (The inerrancy of scripture):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그루뎀의 <조직신학>을 주로 참고했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서 성경의 영감설은 주장하지만, 성경의 무오성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은 무오 하시지만 성경은 무오 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혹은 성경이 신앙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무오 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과학적인 사실과 역사적인 사실에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한다. 유한이 무한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에 (finitum non capax infiniti), 당연히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이루신 구원 사건에 대해서만 무오 하다고 하며, 성경의 무오성은 부인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을 마치 성경을 우상화하는 것처럼 말한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론들은 너무나 많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성경의 무성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무오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진실하시고, 전혀 오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하나님의 속성과 직접 관계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는데,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에 충분 함하다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언어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동시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셨고,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도 성경을 보존 전달하는 과정도 모두 성령께서 친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 성경이 인간의 일상적인 언어의 표현으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오 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가 떴다”라고 말하지 “지구가 자전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기 때문이다.
또 숫자를 세거나 계산을 할 때도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냐? 물었을 때 20불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19불 혹은 21불이다. 이 경우에 “너 왜 거짓말했느냐”라고 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이 정도 오차는 상식적으로 서로가 인정하는 오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50불 혹은 100불을 가지고 있으면 거짓말일 것이다.
성경에서 출애굽기 12:41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를 했다고 하고, 창 15:13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할 것을 예언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의 기간은 430년이다. 그러나 400년이라는 기록도 틀린 말이 아니다. 400년이라는 긴 세월 앞에서 30년의 근사치는 일상의 의사소통에서 허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를 놓고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거리는 일반적으로 3000마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2,789 마일이다. 그런데 3000 마일이라고 해도 틀렸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관계에서 그 정도의 오차는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2) 성경에 특이한 표현이 있다고 해서 무오성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성경 저자들의 기록 속에 문법적으로 바르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문장의 진실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우리가 볼 때에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그러나 수천 년 전 그 당시의 문화 권속에서 사실을 전달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의 소통에서 그러한 표현들이 더욱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다.
일반적인 문법의 규칙이 단수 동사를 사용해야 하는데 복수 동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남성 형용사를 사용해야 하는 데 여성 형용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문법적인 불규칙적인 경우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의사 전달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꼭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확한 문법을 사용하지 못하다고 해도 충분히 의사전달을 진실되게 할 수 있다. 오히려 정확한 문법을 사용하면서도 내용이 거짓인 경우도 있다. 성경에는 일반적인 문법 기준으로 볼 때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무오 하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3)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에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인용하지 아니할지라도 성경은 무오 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에 헬라어 문장에는 따옴표가 없다. 단지 인용한 내용이 진실하면 문제가 없다. 각 단어를 정확하게 인용할 것을 기대하지 아니했다. 실제로 신약의 자자들이 구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똑같이 인용하지 아니해도 성경의 무오성에는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인용된 내용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4)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반대 논리들
(a) 성경은 단지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만 무오 하다.
성경 내용 중에 교리와 삶의 지침의 내용에는 오류가 없지만,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건의 경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종종 성경의 무흠 (infallible)을 주장하지만, 그러나 무오 (inerrant)라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한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성경의 infallible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성경의 inerrant는 믿지 아니하는 학자들도 있다.
원래는 infallible이라는 말과 inerrant는 서로 호환해서 사용했고, 같은 의미로 이해했지만, 그러나 오늘날 21세기에는 의미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경의 inerrant (무오)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infallible과 inerrant를 모두 믿는다.
성경은 어느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만 진실하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가 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주제에서 정확 무오 하다.
신약의 저자들은 성경이 믿음과 행위에서만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모든 말씀이 무오 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 사건들이 오류가 없는 진실된 사건임을 주장한다.
(b) 우리는 무오 한 성경 사본 (manuscript)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 무오는 원본에 해당되는 것이지 사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본이 없고, 단지 성경의 사본밖에 없는데 어떻게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원본만큼 그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무오 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과정에 성령께서 친히 간섭하셨기 때문이다.
성경 사본들 사이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는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 성경 학자들의 연구로 사본학의 매우 발달하여 거의 원본과 같은 성경의 본문을 구성했다. 사본들의 문맥을 보면 원본의 내용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꼭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 알아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글 성경에도,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혹은 “고대 사본 가운데 어떤 사본에는 ----라고 되었다, 첨가되었다” 말들이 각주에 표기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사본을 읽으면 원본의 문맥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사본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브루스 매닝 메츠거 (Bruce M. Metzger)의 신약의 사본학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st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의 책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경의 원본이 무오 하다고 말할 때,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 무오 하다는 주장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사본들은 결국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c) 성경에 난해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오류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주석가들이 성경의 난해한 부분들을 연구하였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다. 성경의 언어학적, 역사적, 과학적, 상황적인 증거를 우리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오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경에 오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으로 그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맡기고 억지로 성경을 풀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난해한 부분들을 명쾌하게 알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알고 또한 신앙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난제가 있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한 좋은 참고 책들은 글리슨 아처(Gleason L. Archer)의 <성경 난제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the Bible Difficulty), 월터 C. 카이저 외에 여러 명의 공저 <IVP 성경난제주석> 그리고 William Arndt, <Does the Bible Contradict Itself?>는 매우 유용한 책들이다.
그리고 성경이 19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들이 지난 1900년간 항상 존재해 온 문제들이다. 성경에 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 이상 교회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믿었다. 최근에도 매우 유능한 성경학자들이 이 문제들을 연구하고 있으면서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수록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더욱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저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C. 성경의 명료성 (Clarity)
성경의 명료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평범한 말로 기록되어졌다. 물론 난해한 부분들도 있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거의 해결되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위하여 교사와 목사들을 세워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약 1:5)
성경 명료성의 의미는 성경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벧후 3:16, 베드로가 바울의 글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중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있느니라”고 했다.
또한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에는 신비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명기 29장 29절은 “은밀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느니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명료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케빈 드영 (Kevin DeYoung)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성경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성경에서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스스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수 있고, 성경을 통하여 영적인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Kevin DeYoung, Taking God at His Word).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동일하게 평이한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열려 있어서,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평범한 수단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것들의 충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아니한 부분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믿는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인간의 지혜, 논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조명해 달라고 시편 저자와 같이 간구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가 말하듯이 우리가 성경의 모든 구절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에 대한 이해가 늘어남에 따라 다른 부분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 / scripture interprets scripture) 말을 매우 좋아했다. 우리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연구함으로 명확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면서 성경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신다.
우리는 5살 된 아이에게 15살 된 청소년의 행동을 요구하지 아니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이해가 커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갖도록 성장하게 하신다. 신앙이 어릴 때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고, 그러한 믿음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고 찬송과 감사를 드린다. 신앙의 성장과 함께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시각을 더욱 확장시킨다.
성경의 명료성의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캐톨릭 교리에 반대하면서 발전시켰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근거로 “가르치는 권위 (the power of teaching , potestas magisterii)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사도시대 이후에는 사도직을 계승한 교황과 주교에게만 가르치는 권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이런 로마 카톨릭의 주장은 성경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카톨릭의 이러한 교리를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모든 진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함을 위한 교훈은 성경에서 모호하지 아니하고, 명료하게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것들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보통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아니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말씀도 있고, 또한 동시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7) 라는 말씀도 있다.
성경에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극적 사고방식 비슷한) 성공하라는 말씀도 있고, 동시에 더 많은 것을 구하지 말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라는 말씀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19세기에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는 노예문제이다. 북부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노예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orthern Abolitionists) 남부 교회에서는 성경에 노예제도를 폐지란 말이 없는데 그것을 주장하면 성경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족장들과 신약시대의 교인들도 노예가 있었다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노예제도 폐기를 반대했다. 미국의 남부 교회에서는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을 가족처럼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북부의 공장 주인들이 노예제도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북부에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노예보다 더욱 학대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남북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모두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에 관한 그들의 입장은 크게 달랐다.
이와같이 성경의 명료성을 우리가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매우 큰 혼란 속에 빠질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성경을 왜곡시킬 수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창 9:25을 이렇게 해석하고 설교를 하셨다. 창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 목사님은 함의 자손들 (흑인들)은 노예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는데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라면서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그 목사님의 성경 해석이 정당한가? 그 목사님이 성경의 명료성을 바로 이해한 것인가?
신앙의 영웅들인 아브라함, 야곱, 다윗등은 여러 명의 부인들 두었다. 오늘 우리가 볼 때에 과연 다윗이 성군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문화적인 차이로만 볼 것인가? 물론 성경이 기록된 당시 고대사회와 지금 현대 사회의 수천 년간의 시간적인 차이와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그때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은 다른가?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고대사회의 신앙 원리와 지금의 신앙의 원리가 다를 수 없다.
물론 고대와 현대의 문화적인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아니하다.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문화적인 차이를 너무 과장하면 안된다. 그때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때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오늘 21세기에도 동일한 타락한 인간들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 사이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때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신학적인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미국에 Christian Reconstructionist (기독교 재구성 주의자들)이 있다. 이들 중에는 그랙 반센 (Greg Bahnsen), 루사스 루스두니 (Rousas Rushdoony), 개리 놀스 (Gary North)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구약의 사회법 (civil law)을 현대 사회에 맞도록 도입하자는 입장이다.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죄수들을 감옥에 그냥 수감 해 놓지 말고, 사회에 나와 살아나갈 수 있도록 적당한 기술을 가르쳐야 하며, 그리고 도둑질을 하면 감옥에서 시간으로만 해결하지 말고, 앞으로 자기가 갚아야 할 책임을 가르쳐주며, 실제로 갚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여건을 만들자는 주장 등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좋은 성경 주석들과 연구 서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를 잘 연구하면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문제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상호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의 명료성을 이해할 때에 죄가 우리의 지적 활동에 영향을 끼쳐 (noetic influence of sin)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부정적이고, 왜곡되고, 편파적인 이해를 갖도록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인간의 타락은 지,정,의를 비롯한 우리 인간 전체를 타락시켰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타락성을 지적한다. 타락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편하고 유익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19세기 미국 남부 교회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하도록 성경을 해석하여 노예제도가 마치 성경적인 것 처럼 설교하고, 이론을 전개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인들의 대부분은 거대한 농장을 자기고 있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면 그들은 수십, 수백 에이커가 되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남부 교회 지도자들은 노예제도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노예제도 폐지는 비성경적이며, 노예제도가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 전체가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보지 아니하였고, 죄가 지성에 큰 영향을 끼쳐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원리를 가져야 한다. 실제적으로 성경의 명료성을 생활 속에 적용시키는 가운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명료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성경 해석의 틀을 가져야 한다. 성경을 전체적인 입장 (성경신학적)에서 바로 해석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각 시대마다, 교회마다, 개인마다 필요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적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성경의 명료성의 결론는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함과 성경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