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례
2) 성찬 : 성찬에 관한 성경 해석에는 다양하다.
a)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이다.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really, truly)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주장한다. 떡과 포도주의 속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본질(substance)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잘못은 주님의 이 말씀은 (1) 은유로 해석해야한다. (2) 그리고 물질의 본질과 속성을 구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위반한다. (3) 또한 그들은 성찬을 그리스도의 속죄제의 중복, 반복적이라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단회적이다. 단번에 (once for all) 온전히 다 성취하셨다. 성찬은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영적인 양식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것으로 다 된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어야 했고,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마셔야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과 구원받고 난후에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 영적인 음식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5-56).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길을 열고, 성찬은 그 열어 놓은 길을 계속에서 걸어갈 힘을 공급한다.
b) 공재설 (consubstantiation): 루터파는 예수님의 본성에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의 무소부재 (無所不在) 속성에 따라 예수님의 인성도 편재(遍在)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몸이 (real body of Christ) 잔과 떡의 요소안에, 밑에 그리고 함께 임재하신다 주장한다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are present to the communicant “in, with, and under” the elements of bread and wine). 화체설과 차이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성찬의 요소들 (빵,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 임재한다는 주장이다.
공재설의 문제는 (1) 루터파가 카톨릭의 입장인 “성찬 그 자체가 역사한다 (ex opere operato)” 는 성례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성찬을 그 자체가 역사하는 것 처럼 생각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2) 루터파는 예수님의 양성 (신성과 인성)의 “속성 교류설” (communicatio idiomatum)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하는 주님의 몸과 피가 신성과 같이 온 세상 어디에나 편재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신성만 편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도 신성과 같이 편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요소들인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 (in, with and under)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이다. 즉, 신성에 속한 성질과 인성의 속한 성질이 혼합되거나 합하여 제 3의 성질을 구성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개혁주의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과 혼동됨 없이, 그리고 분열과 분리 없이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정의했던 칼케톤 신조 (Chalcedonian definition)에 충실하다. (칼케톤 신조: “주님이시요, 독생하신 자는, 양성(兩性)에 있어서 혼돈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음을 인정받으며, 성품의 구별이 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성품의 특성이 보존되고,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실재로 작용한다.”
(Only-begotten, to be acknowledged in two natures, without confusion, without change, without division, without separation; the distinction of natures being by no means taken away by the union, but rather the property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concurring in one person and one subsistence, not parted or divid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 begotten, God the Word, the Lord Jesus Christ.)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성의 밖에서도(extra humanum)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지상 생활의 기간에도 성자의 신성은 그의 인성의 한계 내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 인성과 함께 하시면서도 동시에 인성 밖에서도 존재하며 작용하고 계셔서 그가 창세 때부터 하고 계시던 온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며, 붙드시며,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셨다”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그의 신성으로는 계속 우주적 통치 사역을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며, 칼케톤 신조를 확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을 생각하듯이 생각해서도 안된다.
성찬과 관련해서 말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항상 무소부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spiritual presence)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가 승천하여 오르신 하늘(heaven)에 계신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잘 나타난다.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그러므로 루터파가 주장하는 공재설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c) 기념설 (Memorialism): 쯔빙글리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기념하는 의식으로 생각한다.
d)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 칼빈의 주장이며 개혁주의 입장이다. 성찬에 예수님의 몸이 실제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요, 동시에 성찬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성찬을 행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참여자들에게 영적으로 임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찰스 하지 (Charles Hodge)는 칼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찬식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능력으로 (dynamic) 임재한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하늘에 있으면 땅에 태양의 빛과 열이 임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바빙크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신비설” (mystical theory)이라 칭했다.
(고전 11:23-26 교훈)
고전 11:24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성도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이다. 성찬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믿게 하고 또한 확신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1) 성찬식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이것을 행하여” (Do this) 두 번 나온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성찬은 주님의 권위로 우리에게 명령되어진 예식이다. (2) 성찬은 주님의 구속사역을 기억하는 일이다: “나를 기념하여” 두 번 나온다 (24-25절). 기념 (ἀνάμνησιν) 이라는 말은 “기억” (remembrance) 이라는 말이다. 기념은 단순한 행사일 수 있지만, 기념은 우리의 인식에서 잊어 버리지 않게 늘 기억하고 생각하기를 힘쓰는 일이다. 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는 예식이 성찬식이다. (3)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일이다.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