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하여 살아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에서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1. 보편적인 무형교회는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모여왔고, 모여있으며, 장차 하나로 모일 것이다. 이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신부요, 몸이요, 충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불러내신 성도들의 모임 (공동체)이다 (롬 11:1-5; 벧전 2: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은 신약에 나타날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신약의 교회의 탄생은 구약의 계시가 성취되어진 사건이다. 구약은 모형, 그림자, 예언으로 교회의 모습이 계시되었고, 신약에서는 예언의 성취와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로 나타났다.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지만 그러나 두가지 측면이 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이다 (church as invisible and visible). 이것은 두 가지 다른 교회가 아니라 동일한 교회의 양면이다.
보이는 교회 (visible church)는 마치 영혼에 있어서 몸과 같다. 보이는 교회는 신앙고백, 조직, 행정, 복음전파 사역 등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교회 (invisible church)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과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보이지 아니한다는 측면의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바라볼 때에 너무 보이는 면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는 면을 무시하지도 말아야한다. 보이지 아니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의 진리에 합당하게 존재하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유기체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기계와 혹은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진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A. 교회의 본질
1. 교회의 단일성 (unity):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단일성)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해서 (엡 1:22; 5:23), 같은 성령으로 교통하며 (롬 12:5; 고전 6:17; 12:13; 엡 4:4), 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모든 나라, 민족, 언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지니면 동일한 교회이다.
그러나 로마 캐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시적인 교회가 오직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단일성은 곧 로마 캐톨릭의 외적으로 조직된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영적인 단일성이다.
2. 교회의 성결성 (Holiness): 교회의 성결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는 거룩하다.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거룩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는 교리적으로 (신앙고백) 거룩해야하고, 성도들의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나타나야한다.
로마 캐톨릭은 자기들의 교회에서 예배, 권징을 비롯한 여러가지 의식의 성결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파 교회는 외적 의식의 거룩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인한 내적인 거룩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교회의 거룩함이다.
3. 교회의 보편성 (Church as universal): 보편성이라는 말은 어느 시대나, 어떤 민족이나, 어느 곳에나, 참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오직 자기 교회만 보편적 교회라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어느 특정 교파의 조직체인 외적 교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내적 교회를 말한다.
B. 교회의 정치
1. 무정치주의: 퀘이커 교회는 교회가 정치를 시행함은 교회의 신령한 생활을 해롭게 하며,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정치가 시행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마 18:15-17). 교회정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당하게 시행되면 해로운 것이 아니라,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다. 현대 퀘이커 교회는 교직자를 세워 성례를 시행하고 교회의 행정을 담당하게 한다.
2. 교회 정치를 국가에 위임하는 제도: 에라스티안 (Erastian System) 제도이다. 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교회 제도이다. 이 제도에 의하면 교회는 오직 복음을 전하고, 정치는 국가에 위임한다. 이들은 교회는 신성한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 정치 행위를 직접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관인 국가가 신령한 기관인 교회의 치리를 바로 할 수 없다. 현재 이 제도는 많이 수정되었다.
3. 감독정치: 이 제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정치를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위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회중은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현재는 영국 성공회에서 채택한 제도이다.
4. 교황정치: 로마 캐톨릭교회의 정치제도이다. 이들은 교황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직은 단회적이다. 사도는 교회를 세운 창설직이다. 사도는 반복적이 아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마 16:13-19을 잘못 해석하였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 언급된 “베드로” (반석)는 남성명사이다. 이것은 베드로라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이 반석”이라는 말은 여성명사이므로 그것은 베드로 라는 사람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위에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다.
5. 회중파 교회 (The Congregational System): 이 교회를 독립파의 제도라고도 불리운다. 이 제도는 각 교회는 상호 독립된 완전한 교회이다. 이 교회의 정치권은 오직 그 교회의 회원들에게 있다. 교회의 직원들은 단순히 사역자들이며, 교회의 회원들이 가지는 정치권을 가지지 못한다.
6. 장로교 혹은 개혁파 교회 정치 (the Presbyterian Church and Reformed Church)
1) 개혁파 교회 정치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a)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 정치의 원천은 그리스도이시다. 개혁파 교회는 어떤 특정한 인간이나 (교황) 혹은 인간의 직책 (감독)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강조한다.
b)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권위를 행사하신다.
c) 교회의 왕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2) 개혁교회의 사역의 원리
a) 사역적 혹은 섬기는 사역이다 (ministerial)
b)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교회를 봉사하고 성도들을 섬겨야한다.
3) 교회 직원의 종류
a) 교회 창설직원: 사도와 선지자 (신약)는 교회의 창설직이다 (엡 2:20). 그리고 사도시대에 “전도자” Evangelist (εὐαγγελιστής)는 행 21:8; 딤후 4:5에 나온다. 칼빈은 이 “전도자”는 사도 시대의 특별한 직원이었고, 사도와 같은 일을 하였다가 나중에는 없어졌다고 한다 (기독교 강요 4.3.4). 보우만 (H. Bouwman)은 전도자는 “정규적인 직원이 아니었고 은사에 의하여 사도들을 돕는 사역을 하였다가 나중에는 없어진 직분이다” 했다. 오늘날 교회의 전도사 혹은 부흥사는 성경에 나오는 전도자와는 다르다.
b) 교회의 항존직: 교회의 항존직은 장로(감독) (행20:17, 28; 딤전3:1-7)와 집사이다.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설교와 치리를 겸한 이를 목사라 부르고, 치리만 하는 이를 장로라 부르며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집사는 목사와 장로와 구별된 직분이며, 맡은 사역이 독특하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집사의 직분을 세웠다 (행 6:3).
4) 장로교 (개혁파) 교회의 3 가지 치리회
a) 당회 (Session or Consistory): 성경적인 근거는 행 20:17; 살전 5:12-13; 딤전 5:17; 히 13:17.
장로교 혹은 개혁파 교회의 지교회 정치는 대의정치 (representative Character)의 특징을 갖는다. 지교회 회원들은 자기들의 대표자로서 치리 장로들을 (ruling elders) 선택한다. 교인들의 대표인 장로들과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와 함께 당회를 구성하여 교회를 치리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장로들이 교인들에 의해서 선택되지만, 그러나 그 권위와 치리의 방법은 교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치리를 해야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b) 노회 (Presbytery or Classis): 성경적인 근거는 행 15:4-29; 21:17-26, 딤전 4:4.
많은 지교회들이 각처에 흩어져 있었는데 (행 9:31; 19:17-20; 20:28; 고전 16:19), 이 교회들이 예루살렘 노회를 통하여 문제 해결의 도움을 받았다 (행 15장). 딤전 4:14의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말의 헬라어인 ἐπιθέσεως τῶν χειρῶν τοῦ πρεσβυτερίου (laying on of the hands of the elderhood) “장로의 단체 (회)”는 장로들의 모임, 즉 노회를 의미한다.
보우만 (Bouwman)은 노회의 필요성은 4 가지를 말한다: 회의 통일성을 위하여;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여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교권주의 자들의 횡포를 막고 회중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유지되고 권징되기 위하여.
노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치리해야한다.
c) 총회 (General Assembly): 총회의 존재는 성경적인 근거를 지닌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난제를 의논하였다 (행 15:6). 사도시대에 총회의 성격으로, 전 교회를 대표하여 사역을 하였다. (1) 이방교회로부터 대표자들이 파송되었다 (15:2);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참여 했다 (15:6), 이 회의는 (final) 치리회가 되었다. (2) 이 회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했고 (16-18절); 지 교회들을 위하여 교리를 결정하였고 (23-29절);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고 (28절), 그 결과는 권위가 있었다. 이 결정은 당시의 교회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C. 은혜의 수단 (혹은 은혜의 방편, The means of grace, media gratia)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단이나, 방편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특정한 방법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도 없고, 성도의 삶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소요리문답 88은 은혜의 수단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들을 전달하시는 일반적 외적 수단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인데, 그 모두가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다.”
역사를 보면 은혜의 수단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례와 교회 자체를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성례의 행위와 의식 그 자체 안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하면 의식 그 자체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 의식에 참여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루터교회』는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말씀을 떠나서는 성례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자체에 효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이 자연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영적인 효력과 유익을 가져오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일반적인 수단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말씀과 성례와 같은 은혜의 수단들을 무시한다.
『이성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단지 도덕적인 영역에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은혜의 수단들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means)과 도구 (instrument)가 된다고 주장한다. 은혜의 수단들을 미신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은혜의 도구들을 매우 귀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말씀이다. 이것은 성경과 또한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의미한다. 말씀과 성령은 깊은 관계가 있다. 율법주의 (합리주의, 펠라기우스)는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필요를 말하지 아니하며, 반율법주의 (antinomianism)는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고, 말씀의 필요성을 말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Reformed Faith)는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함을 주장한다 (the Spirit works “with the Word,” cum verbo).
말씀에는 율법과 복음의 두 부분이 있다. 율법은 사람이 죄인이며,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하여 복음을 믿도록 하고,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서 차이가 있다. 구약은 복음의 형태가 약속, 예언, 모형, 그리고 그림자의 형태로 있다가, 신약시대에 복음과 구주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에는 모두 율법과 복음의 요소가 있다.
2. 성례
【소요리 문답 제92문】 성례는 무엇인가? 【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은혜들이 사람들이 지각 (감각)할 수 있는 표 (sign)로써 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인쳐지며 적용된다.
【소요리문답 제93문】 신약 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어떤 것들인가? 【답】 신약 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
성례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이다. 사람들이 고안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신적 권위가 있다. 벨기에 신앙고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감각함(insensitivity)과 연약함을 잊지 않으시어 성례를 제정하시고, 이것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인치시고(seal),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
성례는 내면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외적의 가시적인 표와 인치는 것(visible signs and seals)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수단 (방편)으로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말씀은 성례없이도 스스로 그 능력을 나타내고 완전하지만, 그러나 성례는 말씀없이는 완전하지 못하다.
말씀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성례는 다만 믿음을 견고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말씀은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성례는 진실된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진다.
1) 세례
【소요리 문답 94】 “세례란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음과 은혜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세례의 방식, The Mode of Baptism】 세례를 베푸는 일반적인 방식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법(sprinkling), “물에 잠그는 침례 (immersion), 그리고 머리에 물을 붓는 (pouring) 방법들이 있다.
세례의 방식을 온 몸을 잠그는 침례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례 혹은 침례 어느 것이 맞는가? 그러나 이것은 진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혹은 침례 그 자체가 실체 (중생함을 받음)를 외적으로 표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체이며 외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다.
침례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정결하게 하다, 혹은 씻는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결하게 하는 예식은 물을 뿌리거나 물에 적시는 표지만으로 실시되어진다 (반드시 물속에 잠근다는 의미가 없다). 구약에서 정결하게 하는 예식은 물을 뿌리는 예식이다 (시 51:7; 겔 36:25; 요 3:25-26; 행 2:38; 22:16; 히 10:22; 벧전 3:21).
그리고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말씀을 근거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몸이 물속에 잠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낮은 곳,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셨다가 언덕으로 올라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행 8:38-39도 같은 의미이다.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그리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라고 한다. 만약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다고 해도, 본문은 침례를 베푸는 자와 침례를 받는 자가 모두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로 침례를 베푸는 집례자는 물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침례를 받는 사람만이 물속에 들어간다.
세례의 방식이 물을 뿌리는 행위 혹은 물속에 잠그는 행위 문제로 너무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세례 자체가 실체에 대한 외적인 표시이며 인을 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체, 곧 중생과 거듭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세례의 의미】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 세례는 언약에 가입되었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
구약의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표시(sign)이며, 인(seal) 을 치는 것이다.
(2) 세례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었다는 의미: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τοῦ σώματος τῆς σαρκός), 칼빈은 이것을 우리의 죄와 부패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세례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와 부패성 전체를 벗기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지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다(딛 3:5; 벧전 1:2; 요일 1:7; 계 1:5).
(3)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다는 의미: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여기의 함께 (συν)의 의미는 “연합” 혹은 “접붙임”을 의미한다. 로마서 6:3에서도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제 예수 믿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한다.
【유아세례】 유아세례는 이 유아가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된다는 표(sign)와 인(seal)이 된다는 의식이다. 유아세례를 받는 유아에 대한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아들을 가르쳐야 하며, 유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유아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유아들에게 경건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1)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 언약을 주셨다. 이 은혜 언약의 표는 할례이었다(창 17:9-10; 롬 4:10-11). 신약 시대의 세례는 구약시대 할례처럼 언약의 표시와 인(sign and seal)이다(롬 6:3-4; 고전 10:2; 12:13).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상징이다.
세례와 할례가 외적인 모양을 다르지만, 그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모두 은혜 언약의 외적인 표현이다.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동일하며, 발전적인 연속체이다. 구약 교회는 신약교회의 예표가 되며, 신약 교회는 실체가 된다. 그러므로 신구약 교회는 본질상 동일한 실체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도 신, 구약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기초한다.
유아세례는 유아들까지 포함되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기초한다.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 4권>에 의하면, “장년이나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믿음과 회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언약 때문이다. 유아세례의 근거로서 이 보다 더욱 든든한 것이 없다.”
(2) 땅위의 교회에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도 섞여 있다(마 13:24-30). 그러므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여부를 완벽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에게 은혜의 방편을 베풀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신앙의 원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신앙 고백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과 은혜 언약의 신실함 때문이다. 유아가 은혜의 수단인 세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세례에서 제외될 수 없다. 성인이나 유아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3) 교회 역사에서 어거스틴은 유아세례는 사도적인 전통 (apostolica tradition)이며, 자기 시대에 유아세례가 실시되고 있다고 했다. 키프리안이 참여한 공의회 (253 A.D.)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선언했다. 크리소스톰도 유아세례를 베푼다고 했다. 그레고리는 “한나가 사무엘이 출생되기 전에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 아이는 어렸을 때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 했다.
-이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