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양자됨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됨)
중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칭의를 통해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법적인 지위를 주시고, 그리고 양자 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가족이 되게 하신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요일 3:1),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시 103:13-14),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마 6:32),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신다 (마 7:11).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롬 8:14).
그리고 자녀 됨의 특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히 12:5-6; 잠 3:11-12). (히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징계는 모두 우리를 위함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F. 성화 (Sanctification):
소요리 문답 35문에 의하면, “성화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역사로서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 (Whole man)이 새로워지게 되고, 점점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되는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는? 칭의는 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 (법적 위치)를 말하지만, 성화는 성도들의 내적인 상태를 말한다. 칭의는 단회적이지만 (once for all time), 성화는 이 세상에서 지속적이다 (continuous throughout life). 칭의는 전적 하나님의 일이지만, 성화는 우리가 협력한다. 칭의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만 (perfect in this life), 성화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지 못한다. 칭의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지만, 성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1. 성화는 성도들이 거듭남 (중생)의 은혜를 입을 때에 이미 시작이 된다.
(행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칭했다. 이 말은 “ἡγιασμένοις” (having been sanctified) 명사형 완료 수동분사 (substantival perfect passive participle)으로 이것은 “ 완성된 과거의 행동과 계속되는 결과를 모두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과거에 중생을 받을 때에), 그리고 중생함을 받고 난 후 계속적으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자들이다.
2.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 자라간다.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성도들이 “전에는” (예수 믿기 전에) 점점 죄로 향해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화를 위해 의를 향하여 점점 나아간다. 그리고 빌 3:13-14에서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러나 거룩함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한다.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3. 성화는 이 세상에서 계속되지만 완성되지 못하며, 우리가 죽을 때에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성된다.
4. 완전주의 (perfectionism)는 잘못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요한일서 3:9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근거로 해서 중생한 자는 죄를 범치 아니한다고 주장한다는 그룹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완전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죄를 짓지 아니한다 (οὐ ἁμαρτάνειν)” 라는 헬라어 표현은 “계속 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not to continue sinning)” 뜻이다. 현재형 동사 (능동태 부정사)로서 지속적, 습관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계속 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의미이다.
G. 성도의 견인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아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믿는자로 남아 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믿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 36번은 성도의 견인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금생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 나오는 혜택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그 누구도 성도들을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며” (They shall never perish), 헬라어 “μὴ ἀπόλωνται” 이 단어는 요 3:16에 사용된 말과 같다. 헬라어 부정과거 가정법의 구 (The Greek construction: οὐ μή plus aorist subjunctive)인데 특별히 강조 할때 (emphatic) 사용된다. “결코 영원토록 멸망치 아니한다 (they shall certainly never perish forever).” 진정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토록 결코 구원을 잃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요 3:16 동일한 의미).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영화롭게” 되는 미래의 사건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과거로 보았다.
“ἐδόξασεν”/ “He glorified” 과거 (aorist) 시제를 사용했다 (원형은 δοξάζω). 현재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입은 자들은 이미 영화의 단계에 있다는 것으로 묘사하며 이들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음을 전제로한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임을 확신하는 말씀이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ἐν δυνάμει Θεοῦ φρουρουμένους (by the power of God being guarded), 여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 다는 것은 1) 벗어나려는 것을 보호함; 2) 공격으로 부터 보호함 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보호하시며, 그리고 나아가서 외부에서 오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과거에 일어난 소명, 중생, 회심, 칭의, 그리고 성화의 모든 복을 마지막에 소유할 수 있도록 끝까지 보호하신다.
그러나 알미니안과 같은 자들은 한번 구원받은 자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성구들을 몇 가지 살펴보겠다.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농사짓는 일에 비유한다.
(히 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4-6절에 묘사된 사람은 참된 성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시와 엉컹퀴를 맺는 땅, 곧 심판을 받는 땅에 비유되었다.
여기에서 “한 번 빛을 받고” 하지만 이 비췸은 단지 복음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참된 믿음으로 응답했다는 말은 아니다.
“빛을 받고 (having been enlightened), “φωτισθέντας (원형 φωτίζω) 구원에 관한 배움 (빛) 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배움을 말하는 의미로 “한 번 빛을 받고” 사용된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에서 빛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복음을 한 두번 들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한 번” 이라는 헬라어는 ἅπαξ (once) 인데, 이 말은 빌 4:16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한 두번 선물을 보냈다고 했을 때도 사용했다. 그리고 히 9:7에서 지성소에서 일년에 한번 들어갔다고 할 때 사용된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그저 한 두번 일어났다는 의미이다 (simply that it happened once).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을 본 자들이다. “맛보았다”는 말은 한번 맛을 보고 취하지 아니할 수도 있고, 혹은 맛본 것을 취할 수도 있다.
“맛보다,” γευσαμένους (having tasted) 는 마 27:34에서도 사용되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지는 아니했다. 여기에서 맛보다는 말은 무엇을 안다는 의미의 상징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그루뎀, 조직신학 40장 footnote 14 & 15번을 참고하라). 맛본다는 단어가 실제로 음식을 먹는 문맥에서 사용되지 아니하면 상징적으로 “안다, 이해한다”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단순히 영적인 은사와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이해했고 체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이 중생을 체험했고, 참된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 된” (히 6:4) 자들이라고 한다. “참예한 바 된” μετόχους (partakers) 이 단어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의미할 수 있고, 또한 별로 가깝지 아니한 관계도 의미한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여기에는 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여기에 사용된 “동무들” (μετόχοις), partners, 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별로 가까운 관계가 아닌 단순히 고기잡이 동료들을 말한다.
(히 6:4-6)에서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의미는 그들의 삶이 성령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 가운데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체험했거나 그들이 중생을 체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눅 5:7의 고기 잡던 동료들이 제자들의 영향으로 그들의 삶이 변화된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히 6:4-6)의 “성령에 참예한 바 된”, μετόχους (partakers), 사람은 교회 일에 동참했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여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산상설교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다. 히 6:4-6에 나오는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사람의 모습이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회개를 한 적이 없는 자이다.
그러면 히 6:4-6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고, 교회 활동도 매우 열심히 참석했을 가능성도 있고, 복음도 알았고, 기도와 성령의 체험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 7:22에서 언급된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참된 신앙인으로 살다가 타락하여 배교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참된 성도는 아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 6:8을 통해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참된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진정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참된 성도가 아닌자는 그 생활 속에서 비유를 통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마지막은 불사름이 된다.
(히 6: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앞에 언급된 것 (6:4-5)들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보는 것이다.
앞에 언급된 이것들 보다 더 나은것이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은 구원에 속한 것들이다. ἐχόμενα (accomppanying) σωτηρίας (salvation); ἐχόμενα는ἔχω의 중간태 분사 (middle participle of ἔχω) 으로서 “구원을 소유한 것”을 말한다 (things also having salvation). 이것은 6:4-6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일시적 영향을 주는 것들이 아니라, 구원에 속한 영원한 것들이다.
구원에 속한 것들이 더 좋은 것들이다.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들은 히 6:9-12까지 적고있다.
6:9-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4-6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며, 이들의 삶은 가시와 엉겅퀴와 같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 (불사름)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생활 속에 6:9-12에서 나타난 열매를 맺게 된다. 중요한 것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증거는 생활속에 나타나는 열매를 봐서 알 수 있다.
(마 7:15-20)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자기의 구원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종종 출 32:33을 인용한다. (출 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책은 신약에서 말하는 생명의 책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책 일 것이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육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생명을 거두어 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 보면, 34-35절,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이 본문은 영생에 관한 문맥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육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구원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구절은 사울의 경우이다. (삼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난 것이 곧 구원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이 사건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부은 사건 이후의 일이다. 이것은 사울이 왕으로서 직분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다윗이 왕의 직분을 갖게 되는 것이며, 사울이 자신의 구원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이 범죄 한 후 회개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여기에서 다윗의 기도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으로 왕의 직분과 그 직분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는데, 왕직과 능력을 잃지 아니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결코 구원을 잃지 아니하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끝까지 그 구원을 잃지 아니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진정한 성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성령으로 중생과,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