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2-15 20:00
평신도 조직신학(구원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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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61  

구원론 (Soteriology 혹은 The Doctrine of Salvation)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객관적 사건)을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 (주관적 사건) 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론을 종종 성령론으로 부른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은총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로 가능하다.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성취하셨고, 성령께서 택한 자들에게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에는 순서가 있다. 이것을 구원의 서정 (the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 이라고 한다. 이 구원의 적용 순서는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존 머리의 주장에 따라, 부르심, 중생, 회개와 믿음,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궁극적 구원, 그리고 영화의 순서이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순서는 “시간순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 (not chronological but logical order)이다.

A. 하나님의 소명 (부르심, calling)

1. 외적 소명 (external calling):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한 복음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전하고, 믿으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2. 내적 (효과적) 소명 (internal or effective calling): 외적 소명이 행해질 때에 성령께서 듣는 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복음을 받아, 믿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을 내적 소명, 혹은 효과적 소명이라 한다.

B. 중생 (Regeneration, Born Again)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중생케 하신다 (거듭남). 중생의 본질은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중생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의 힘과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났다고 한다. 중생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겔 36:26-27에서도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인간은 수동적임을 가르쳐준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중요한 포인터는 중생은 부르심 (소명)의 결과이다. 물론 이 은혜는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순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다.

2) 중생의 본질은 신비적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것은 신비적이다. 요 3:7-8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본질을 설명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우리는 중생이 과정을 알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가르쳐준다.

3) 중생은 우리의 전인격 (whole person)인 변화이다. 지, 정, 의 에 영향을 끼친다. 영혼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4) 중생은 순간적으로 즉각적인 변화이다. 성화는 많은 과정과 반복적이지만, 그러나 중생은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성취한다.

5) 중생은 믿음 이전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Regeneration comes before repentance and faith). 중생의 역사가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자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었기에 영적인 감각 (회개, 믿음)이 없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살려주실 때에 (중생) 영적 감각이 생겨,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원을 위해서 “중생함을 받아라” 명령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구원을 위해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형태가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형태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6) 중생의 사건에는 삶에서 열매가 나타난다. 열매 가운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 말은 헬라어 “완료 분사 (perfect participle)”이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중생)” 사건이 새로운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중생에는 삶에 많은 열매가 나타나는데 첫째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열매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 하나님의 의 (요일 2:29), 사랑 (요일 4:7), 세상을 이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 (요일 5:3-4),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많은 열매가 나타난다.

C. 회개와 믿음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중생 (거듭남)하게 하신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간다. 회개는 죄를 떠나는 것이며, 믿음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회개와 믿음이 어느 것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이 온다. 존 머리 (John Murray) 교수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 (penitent faith)이며, 참된 회개는 믿음있는 회개 (believing repentance)이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회개할 수 없다.

1)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일평생 한 번 (once for all) 일어나는 사건이다. 2) 그러나 성화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러한 회개의 기도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회개 기도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나?” 책망하셨다. 이것은 이미 믿는자들에게 대한 성화에 이르는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과 회개는 지, 정, 의가 동반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에는 지식 (Notitia;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동의 (assensus)가 필요하며, 나아가서 구원을 위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fiducia).

복음에 대한 분명한 내용을 알아야 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해야 하며, 나아가서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는 believe 보다는 trust가 더욱 성경적인 의미와 가깝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실을 인정할 때 믿는다 (believe)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를 들면 “나는 미국의 수도는 Washington D.C. 인 것을 믿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적인 결단이나, 인격적인 신뢰가 필요하지 아니하다.

참된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believe” 라는 용어보다는 “trust” 단어가 더욱 성경의 믿음과 가깝다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싶으면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제 35장을 보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치 손님을 집으로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자” (believe in Him),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예수님 안에서 믿는자” 라는 표현에 대해서, 레온 모리스 (Leon Morris)는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구약 적인 표현으로 사람 앞에 전치사 “εἰς” (안에서, in)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이라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회개도 지적 요소 (죄는 나쁘다), 감정적인 요소 (죄에 대해 애통함과 미워함), 나아가서 의지적인 요소 (죄를 끊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결단과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D. 칭의 (Justification)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거듭나게 하시어 새 생명을 주신다 (중생). 중생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회개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1. 칭의는 하나님께서 중생한 자들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법적인 선포이다 (Legal declaration by God).

성경에 “칭의”는 헬라어 “δικαιόω” “의롭다고 선언하다” (to declare righteous) 의미이다. “의롭게 만들다”는 의미가 아니다. (눅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이곳에 사용된 용어는 “ἐδικαίωσαν” 이며 이것은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declared as righteous). 본문에서 백성들과 세리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들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칭의는 믿는 성도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롬 3:20, 26, 28; 5:1; 8:30; 10:4, 10; 갈. 2:16; 3:24). 특별히 로마서 4:5에서 잘 나타나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은 내적으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God makes the ungodly to be righteous)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은혜가 칭의이다. 그들의 믿음도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칭의의 은혜를 받아드리는 방편 (means)일 뿐이다.

그리고 칭의의 반대말은 정죄 (condemnation)이다. 둘다 법적인 선언이다 (a legal declaration).

구약에도 “칭의”의 개념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재판장들이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 단지 그들이 하는 것은 “의롭다, 혹은 죄가 있다”라고 재판장은 선언하는 것뿐이다 (출 23:7; 왕상 8:32’ 대하 6:23).

분명히 성경의 칭의의 개념은 내면적인 문제 (의롭게 만드는 것)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성을 말한다.

존 머리 (John Murray) 교수는 “ 구속의 성취와 적용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에서 중생과 칭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중생과 칭의의 관계는 마치 외과 의사와 판사의 역할의 차이다. 암을 제거할때에 외과 의사는 우리 속에서 무슨 일을 하지만, 판사는 외적으로 판결을 내린다. 복음의 순수성은 성화와 칭의의 차이를 잘 이해할때에 복음의 순수겅이 유지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복음을 변질 시킨다.”

2. 칭의는 우리의 죄의 용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죄 용서함으로 끝이 나면 도덕적으로 중립지대에 존재한다. 그런데 칭의의 은혜는 중생한 자를 중립지대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칭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리고

(롬 4:3; 창 15:6을 인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이 롬 5:19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확증이 됨을 말한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전가 (imputation)는 세개의 경우가 있다.

(1) 아담의 죄가 그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된다.

(2)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값을 치루셨다. (고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3) 그리스도의 의가 성도들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의롭다고 “의로운 자로 선언”하신다.

칭의의 근거가 되는 우리의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없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성경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경은 우리의 칭의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faith 혹은 On account of faith)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성경은 항상 “믿음으로” (By faith) 혹은 “믿음을 통하여” (Through faith)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믿음은 칭의의 방편 혹은 수단 (instrument)이 되며 결코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칭의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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