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
시편 62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_시 62:1,5
여기에 사용된 ‘잠잠히’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다맘’(da-mam)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잠잠하다’(be silent)라는 뜻만 아니라 ‘기다리다’(be still)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62편의 시인이 고백하는 것은 ‘나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우리에게 유효한 구원과 소망의 출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삶으로 막상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잠잠히 기다리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삶에서 드러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구원과 소망은 더욱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들리고, 만지는 것에 더 신뢰를 둡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인 동시에 영혼(soul)을 지닌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당연히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영적인 눈이라 부릅니다.
육체의 눈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은 항상 그분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나의 영혼이 하나님만 바라본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기다리며, 구하고, 찾는 것일까요? 바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함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마쳐야 온전한 기도가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문화이자 영적인 무기 중 하나로 통성기도가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한국인의 ‘한’(恨)이라는 정서가 만들어낸 것으로, 마치 광야의 울부짖음 같습니다.
광야라는 곳은 울부짖기에 가장 좋은 장소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광야 속에서 한을 토하듯 울부짖는 것에 익숙합니다. ‘제발 억울하고 답답한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달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이 마친 후에는 우리도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장 고요하며, 가장 집중을 잘 할 수 있는 곳이 광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광야에서 듣기를 포기하거나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바로 ‘잠잠히’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요동치는 우리 내면의 음성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음성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우리의 온몸에 힘을 뺄 때, 바로 이때가 우리의 영혼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때입니다.
시끄럽고 복잡한 광야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이런 광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바로 골방입니다.
매일 머무는 곳, 매일 내가 지나는 곳,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는 곳, 그곳에 나의 골방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광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화장실이든, 차 안이든, 사무실 책상이든, 버스 안이든, 지하철 안이든, 혹은 출근 전 들리는 새벽기도회이든, 우리는 어느 한 곳을 나만의 광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곳에 앉을 때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30초 만이라도, 1분, 3분, 5분 만이라도 우리의 온몸과 영혼이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이렇게 날마다 주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훈련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려는 노력이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하고 깊이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