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17 20:37
초월이냐 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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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058  

초월이냐 내재냐

 

예수님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선언은 하나님이 타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몇천 년간 암흑 속에 살아가도록 방치했고,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것이 백 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말인가 하는 의심과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과 양립 불가능한 교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누구는 떡을 주고 누구는 매를 주는 하나님이라면 그 공평성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평성이란 반드시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질적인 판단을 정확하고도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좋은데도 점수를 박하게 매기거나 나쁜데도 후하게 주거나 동일한 조건인데도 차등을 주어 취급하면 공평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공평성을 따지려면 그 질적인 분석과 심사를 정확하게 했는가를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받은 대우가 많거나 적은 것은 이차적인 문제로 대우가 좋고 나쁜 것은 어디까지나 그 판단에 근거한 것이지 대우가 좋고 나쁜 것에 따라 사람의 질적 수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 때, 일반인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었는가 아닌가,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했는가 아닌가를 인간 구원의 판단근거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을 질적으로 분석할 때 예수를 믿은 자는 점수를 후하게 주고 안 믿은 자는 박하게 주었다고 오해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이전에 이미 다 심사해서 판단해 놓았고, 그 심사 결과에 따라 상급과 형벌의 대책으로 예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가 인간 심사의 기준이 아니었다. 이 전후관계를 모르면 평생 가도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제대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사 결과에 따르면 어느 한 사람도 더하고 덜한 것이 전혀 없었다. 점수로 따지면 모두가 마이너스 무한대에 해당하고 그 점수로는 죽음이라는 형벌 외에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테스트한 리포트에 적힌 내용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지자면 바로 이 판단을 따져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를 믿는 자를 구원하겠다는 것은, 그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대우하고 보상하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확하고 공평한 판단에 의한 공평한 보상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대신 죽여 그 죄값을 감당하게 했다. 예수를 구원의 길로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그 판단이 완전히 옳고 공평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모든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특별히 자신이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이 대신 죽은 것으로 그 죄 값을 다 갚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를 평가함에 있어서나, 또 그 평가한 결과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전혀 불공평함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가 유일한 길임을 믿는 것이다. 정말 공평하게 하자면 모두가 죽어야 함에도 예수의 보혈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오직 은혜일 따름이지 불공평이나 차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에 반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문제삼았다는 뜻으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하자가 있다고 불평한 것이다. 특별히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고집한 것이다. 남은 몰라도 자기는 아니며 인간에게는 질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 차이에 따라 대우도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 사회의 불공평성을 강조하는 말이며 그 불공평성에 맞게 하나님도 불공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평가할 가능성이 많으니 내가 확실히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남들보다 내가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테니 절대 죽고 난 뒤에 딴 소리 하기 없기로 합시다라고 하나님과 내기를 하는 꼴이다. 감히 하나님의 공평성을 못 믿는 참으로 완악하고 교만한 모습이다.

이 문제는 절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편애나 편가름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의 판단 근거를 종교의 우월성의 비교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 두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완전히 공평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단을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몽땅 동일한 벌을 주든지, 아니면 전부 동일한 사면을 해주든지 둘 중 하나뿐인데 그 중에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I­a|n≪:하나님이 택하신 세상을 구원할 공평하고도 유일한 길)라 시인하면 몽땅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공평한 방법이 어디 있는가? 은혜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이 아니고는 공평도 은혜도 절대 만족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독교를 편애하여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불공평한 것이 되려면, 예수를 믿는 자에게 특별한 상이 주어지고 믿지 않는 자에게 특별히 무거운 벌이 부과되어야 맞다.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3:18¡­21)고 하셨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따로 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죄 가운데 그냥 거하는 것, 죽어서 받는 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지내는 것들이 벌이지 하나님이 예수 안 믿었다고 따로 준 벌이 없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므로…"(1:24, 26, 28).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한 마음대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벌이고, 신자는 예수를 알고 그 빛 가운데서 사는 것 자체가 상이다. 그럼 죽은 후의 구원과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도 따로 추가로 부과된 상과 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아무런 절대적·인격적·사랑의 관계가 없었던 자는 당연히 죽어서도 계속해서 그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있었던 자는 그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죄인인 줄 아는 죄인'의 두 가지 종류의 죄인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의 불공평성이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보게 된 원인이지 하나님이 불공평해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공평하셔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이 구원의 진리를, 하늘에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일방적이고도 독단적인 방법을 유일한 길로 정해놓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혹자들은 비난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의 산물에 불과한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믿는 기독교의 보수주의자들이 순전히 자기 고집으로 우긴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독단적이요, 기독교인들도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된 까닭은 초월적인 초자연주의 신관을 가졌기 때문이니까, 초월 대신 내재하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런 예수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기독교를 초월만 믿는 종교로 까지 몰아붙인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자신을 남들과 동일한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대체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초월보다 내재를 강조한다. 그 반대의 사람은 비교적 초월 신관에 기우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초월의 하나님과 내재의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내재하시는 초월자이다. 전자는 자신은 남에 비해 우월하니까 세상은 공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자신은 남에 비해 죄인이니까 어떤 벌이라도 심지어 불공평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많이 따지는 사람일수록 세상은 공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은 몰라도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하나님에게 응분의 보상을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할 말인가? 그들은 또 기를 쓰고 예수를 부인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인정하면 자신이 꼴보기 싫어하는 놈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어, 하나님에게서 불공평하게(?) 취급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흉악한 강도가 단지 예수를 받아들인 것만으로 자기들처럼 멋지고 고상한 사람만이 가야 할 천국에 함께 간다면 자기는 죽어도 안 가겠다는 뜻이다.

 

 

초월도 내재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에 입각한 '냐냐주의' 혹은 '이것만 저것만'을 강조하는 '만만주의'로 따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아가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내재와 동시에 초월을 함께 강조하는 '도도주의(both/and)'적 입장도 엄격하게 따져 볼 때에 맞지 않다. 우리말 표현상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면 마치 각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속성중의 하나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설사 정확하게 둘 다 맞다라는 영어식 표현(both)이 강조되었다 한들 신을 한마디로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없다는 약점은 여전히 남는다. '도도'가 되면 항상 두 개 중 어느 것이 우월한지, 혹은 동격인지 가치 비교가 필수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초월은 내재를 동반할 수 있지만 내재만으로는 초월로 나아갈 수 없다.

수학에 필요(Necessary) 충분(Sufficient)조건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명제 P가 참이면 명제 Q도 반드시 참일 때 명제 P는 명제 Q를 유도한다고 하며, 이때 QP이기 위한 필요조건, PQ이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절대타자로서 초월성이 있어야만 모든 신자의 마음 안에도 내재할 수 있지만, 우리 생각만으로 깨닫는 신은 초월적인 절대자가 될 수 없기에 이때 내재성은 초월성의 필요조건이 되고 초월성은 내재성의 충분조건이 된다. 인간의 신적인 체험이나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 그분이 절대자이기에 가능하며, 또 오직 그분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아무리 지성적으로 똑똑하고, 영적으로 신령하고, 구도자적 자세가 열심이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해도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두 명제 PQ가 서로간에 필요충분조건이 되면 그때는 완전히 동치(OOo·)가 된다. 초월과 내재에서 '도도주의'가 되면 어떤 위험성이 따르는가 하면 완전히 초월이면서 완전히 내재가 되는 상태, 즉 범재신론에 해당할 수 있다. 그림으로 따지면 두 개의 원이 중심과 반경 등 모든 면에서 일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언뜻 보아 특별히 틀릴 것 없는 것 같으나 초월과 내재성을 상호 분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내재하는 하나님만으로 필요 충분하다고 하거나 초월하는 하나님만으로도 필요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일부 기독교에서 과거 초자연적 하나님만 강조한 잘못이나, 동양종교에서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신관이 바로 그런 오류다. 범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범재신론에서도 인간 자신의 느낌과 체험과 깨우침을 신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 하나님의 유신론적 신관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초월성의 하나님의 커다란 원 안에 내재성의 하나님이 작은 원으로 동심원(OOaye­)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라는 뜻 자체가 피조물에 불과한 일개 연약한 인간의 개체 안에 있는 하나님이므로 당연히 그 원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둘이라는 뜻도 아니요, 두 속성 중에 꼭 초월이 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라 몇 번 강조한 대로 초월은 내재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지만, 내재는 초월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 하나님의 초월성이 내재성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간극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영이시다. 물질이 아니다. 영과 물질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영은 물질에 들어 올 수 있어도 물질이 영계에 들어갈 수 없다. 돌·물·공기·풀·나무에 영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영이 들어갈 수 없다. 영은 생명과는 다르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영은 없다. 또 영은 지·정·의와도 다르다. 동물의 경우 비록 낮은 수준이긴 해도 분명히 지성·감성, 심지어 의지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동물을 두고 영적인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르다. 특이한 존재다. 형체론적으로는 물질이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지정의가 있고 또 영이 있다. 피조세계에서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지정의를 동원해서 사물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각·감각·의지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를 뛰어 넘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간만이 영으로 감지할 수 있고 나아가 절대자 하나님과 상호 교통할 수 있다. 돌고래의 아이큐가 80¡­120의 수준이 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아무리 인간만한 지성을 동원해도 하나님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도의 아이큐만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든지 인식하고 대화할 수 있다. 돌고래는 영이 없고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는 영으로만 알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한 모든 피조세계는 본질적으로 당연히 존재론적 간극이 있고, 인간도 예외가 아니지만 하나님 대신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에게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그 간극을 넘어 상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의 본질이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또 다른 간극은 품성적인 것이다. 존재론적 간극이 인간과 하나님의 물질적·외형적 성질의 차이라면, 이것은 인격적·내면적 성질의 차이로 사실 이것이 더 본질적인 간극이다. 죄에 찌든 인간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도저히 맺을 수 없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본 자는 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실체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심술이나 감히 인간인 주제에 건방지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았으니 벌을 받으라는 독선의 뜻도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진선미의 결정체로 어떠한 죄나 더러운 것과 불완전한 것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 죄에 찌든 인간이 그 상태로 그분 앞에 서는 순간 그 거룩성 앞에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린다. 마치 블랙홀이 엄청난 중력으로 그 근처에 있는 어떠한 물질·에너지·빛도 흡수해 삼켜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구약에는 항상 하나님 당신이 직접 인간 앞에 나서지 않고, 천사나 사자를 보내거나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하나님 당신이 막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3:2). 불은 불이되 타지 않는 불이다. 불이란 항상 타 없어지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이 불은 불 자체는 타고 있지만 타야 할 대상물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있다. 불 자체가 스스로 타는 대상이 되었다. 피조물로 물질에 불과한 떨기나무는 하나님이 임재하면 타 없어져야 함에도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혼자 타고 있다. 하나님 당신이 혼자 타고 있다는 뜻이다. 죄와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죄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스스로 그 죄를 감당해 내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 외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면하고 제대로 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는 전혀 없다. 죄를 지어 타 없어져야 할 대상인 인간을 소멸시키지 않고 인간의 죄를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와 함께 소멸되어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막으신 것이다. 마치 블랙홀이 자기 근처에 오는 모든 물질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블랙홀 스스로 자신을 흡수해서 소멸시킨 것과 같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이요 은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품성적 간극을 메우기에는 인간 쪽에선 절대 무력하고 오직 하나님 당신만이 메울 수 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그 초월성을 스스로 벗고 인간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만 그 간극이 메워진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임재를 체험하며 그분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체험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행해지든지 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의 발단과 전개와 결과 모두를 주도하시고 책임지는 이는 하나님이다. 동작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문장 형태는 능동태이다. 인간을 주어로 바꾸려면 문장이 자동적으로 수동태로 바뀐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가 있는 더러운 상태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심리적·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 제대로 따지려면, 인간은 완전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완전한 절대자라는 관계를 가장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현재 서구 사회에서 내재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동양 사상이나 종교에 영향을 받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죄의 문제를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가치 중립적·상대적·인간의 지정의에만 바탕을 둔 관계는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든 그 속에 참다운 사랑과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과는 그것으로는 절대 어떤 관계조차 맺지 못한다. 저들은 하나님 내재의 실제 체험도 없고 또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초월의 절대자 하나님을 가능한 부인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가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신을 그것으로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오직 절대적 가치에 입각한 영적인 교제, 그것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은혜를 베풀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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