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25 16:31
[2]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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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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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과 교리


기 독교의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은 모두 성경에 기초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에 바탕을 둔 기독교는 참 종교이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거짓이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이다.

성 경의 진리는 계시(啓示)라고 하는 초월적이며, 신적인 수단인 신탁(神託: oracle)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사이클에 맞추어 자신의 말씀, 영원한 진리를 특별하게 계시했다.


성 경의 모든 구성요소는 무오하다. 모든 내용이 영감되었다. 하나님은 성경 기록자들을 유기적으로 사용했다. 그 내용은 정확하며 안전하며 신뢰할 만하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 적거나 구술형태의 기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는 개념과 언어의 형식으로 전달되는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또한 거짓된 것을 담을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롬3:4)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딤후3:16)도 진리의 말씀이다(요17:17).


역사적 기독교가 고백하는 이러한 성경무오성, 완전영감, 유기적 영감의 교리는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창작물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 온 것이다.


유 서 깊은 기독교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 규범이라고 본다. 신학과 에큐메니칼 활동의 평가 기준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이 신행의 최종의 판단기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가 문화에 대한 탁월성과 동시대성과 통합성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문화와 복음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주변 문화의 이상과 구별되는 명백한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뚜렷하고도 확실한 메시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한 동안 진리처럼 여겨지던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캄캄한 흑암을 돌아다니는 유리하는 별처럼 잠시 빤짝이다가 그 빛을 잃는다.


자 유주의 기독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교회를 점차 세속 문화의 흐름에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세상과 문화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다한다는 미명아래 교리와 신학의 한계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교회가 세상과 문화를 변혁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변화된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복음과 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유 서 깊은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과 기독교의 교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성경과 교리, 그리스도와 신조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교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바울 서신의 약 3분의 2 가량은 교리를 담고 있다. 나머지 3분의 1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경, 교리, 신앙고백, 신학이 없이 저마다의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 인간의 제한성과 주관성의 포로가 된다고 본다.


자 유주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교리를 구분하면서 교리무용론, 신조무용론을 펼친다. 교리가 교회의 분규를 조장하고 연합을 방해하며 신학의 발전을 제한하고 양심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교리를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십자가를 전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신경을 비교리의 전형(典型)으로 보면서 그것을 고백하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본다. 다양한 사상과 교리들을 모두 아름다운 신앙유산으로 받아들이자고 한다. 무조건 하나가 되자, 외형적 일치를 도모하자고 한다.


이 러한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인다. 유한한 인간이 어찌 자기가 믿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찌 자기 교단, 자기 종파만 옳고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사물이해와 사상은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교회가 복음을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전하려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해야 한다.


진 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정황과 관련을 갖고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인간이 무오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역사적 또는 초인간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절대적이거나, 명제적으로 무오한 진리를 아는 것이 쉽지 않다. 사물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조건과 제한성을 깨달아 항상 배우고 겸허하게 진리의 확실성을 탐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기독교의 근본을 부정하는 위험이 도사려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 성경과 그것의 권위 그리고 그 내용을 간추려 표현한 교리에 의존한다.


바 울은 기독교의 근본이 종교 감정이나 경험에 있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facts)과 그것에 대한 설명―교리에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1) 그리스도를 믿고, (2)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3) 율법을 지키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유태주의자들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율법을 지키고, (3)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교리이다. 교리가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빌 립보서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보다는 복음의 ‘내용’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관용 정신을 발휘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관용은 신앙무차별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리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가졌다. 자기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영지주의, 거짓교사)에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고 말했다. 거짓교사들이 진리의 복음을 비복음, 거짓복음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진노했다.


바 울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인간경험과 복음진리를 동등한 선산에 두지 않았다. 경험은 주관적이다. 특정인에게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를 진리(교리)에 기초한 삶으로 이해한다. 교리(복음)가 먼저이고, 체험(삶)이 나중이라고 본다. 그는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진리에 관심을 가졌다. 성령의 영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교리 없는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교 회의 전횡적인 무대였던 유럽을 기독교의 불모지가 되게 만든 것은 신학을 시대사조, 시대정신에 걸맞게 변개해 온 자유주의 기독교이다. 다양한 신학을 수용하는 포용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영국, 독일, 미국, 캐나다, 호주의 주류 교회들이 생명력을 잃고 사양길을 걷는 이유는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을 ‘배타주의’라고 비난하는 그러한 발상과 태도가 교회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칼 빈은 “거짓이 종교의 성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15고 말한다. 다양한 신학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면 기독교는 교리 없는 종교, 십자가 없는 복음, 믿는 바가 분명하지 않는 집단으로 전락한다. 종교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시대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성경관과 교리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4. ‘개혁주의’ 스펙트럼


역 사적 기독교의 대명사인 ‘개혁주의’(Reformed)는 종교개혁 사건 뒤에 스위스를 중심하여 일어난 개혁파 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의 전통을 일컫는다. 비로마가톨릭교회와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트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프레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도 개혁주의자(개혁파 신학자)라고 불리며, 20세기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도 개혁주의 신학자로 불린다.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바르트주의)의 위험을 경고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그레스앰 메이첸과 코넬리우스 반틸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총재 칼 매킨타이어도 충실한 개혁주의자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라는 이름을 가진 에큐메니칼 단체는 진보계 개혁교회들의 연합체이다. 국제개혁교회협의회(ICRC)는 보수계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이다.


‘개 혁주의’로 흔히 번역되는 ‘Reformed’(독일어 Reformiert)는 대략 10 가지의 우리말로 옮길 수 있다. (1) 형용사 기능을 가진 분사로 사용되는 경우는 ‘개혁된’을 뜻한다. 개악(改惡)된 것이 아니라 고쳐져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2) 종교개혁을 거쳐 신약시대의 교회를 회복한 종교, 곧 프로테스탄트교회를 뜻한다. 해방 전후 우리나라 문헌들은 ‘개혁교’(改革敎), ‘개혁종’(改革宗), ‘갱정교’(更正敎)와 같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3) 프로테스탄트교회 가운데 루터파, 재세례파, 영국국교회와 구분되는 ‘개혁파’ 교회를 뜻한다. 개혁파는 쮜리히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빈, 스트라스버그의 부서와 관련된 교파이다. (4) 스위스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교단을 지칭한다. 네덜랜드개혁교회, 헝가리개혁교회, 미국개혁교회 등으로 사용된다. (5)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개혁주의’이다. ‘개혁파’ 또는 ‘개혁교단’이 믿고 신앙하는 것을 일컫는다. ‘개혁주의’는 이데올로기 뉘앙스를 풍긴다. 개혁신앙은 이데올로기적인 ‘주의’(-ism)가 아니다. 그 밖에도 문맥에 따라 (6) ‘개혁주의자’를 뜻하기도 하고, (7) ‘개혁파 전통’을 뜻하기도 하고, (8) ‘개혁주의 신학’을 뜻하기도 한다. (9) ‘개혁주의적인 어떤 것, 개혁파적인 어떤 것’을 지칭한다. (10) ‘개혁’으로 번역되어 ‘개혁신앙,’ ‘개혁신학,’ ‘개혁교회’ 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 독교 역사에서 ‘Reformed’란 용어는 종교개혁 역사 초기에 교황주의에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일컬을 때부터 사용되었다. 개혁된 교회가 본래의 신성한 질서와 생활을 회복했다는 뜻으로 ‘개혁된 교회,’ ‘교정된 교회,’ ‘정화된 교회’로 일컬어졌다.


그 뒤에, ‘Reformiert’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교황주의자들에 맞서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루터파 신앙고백서인 ?협정신조?의 도입 부분은 “우리 개혁교회는 교황주의자들과 다르게, 타락하고 저주받는 종파와 이교도로부터 분리되었다”16고 진술했다. 이 루터파 신조는 자신들의 교회를 ‘개혁된 교회,’ 곧 ‘개혁교회’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까지는 이와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다. 독일 기독교인들은 ‘Reformed’란 용어를 복음주의(Evangelical: Lutherans)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초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루터파’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들의 교회는 새로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라 ‘개혁된 교회’라고 생각했다.


‘개 혁파’라는 이름이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비루터파 구성원만을 일컫는 용어가 된 것은 성만찬 논쟁 때부터였다. 이 논쟁은 프로테스탄트들을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 개혁파로 구분했다. 칼빈파 인물이라고 비난을 받던 팔라틴 왕국의 프레드릭 3세는 1563년에 보낸 어느 편지에서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성찬 교리에 관한 주님의 말씀의 본문에서 이탈한 자들”이라고 말했다. 협정신조는 칼빈파를 “모든 성찬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유해한 자들”17로 묘사한다.


한 국장로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성경에 대한 높은 권위, 확신 있는 전도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파―개혁주의 전통을 전수(傳授)했다. 초기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개혁주의 전통에 바탕을 둔 청교도 형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는 경건생활, 개혁주의 메시지를 가지고 교회, 학교, 도시, 촌락에서 말과 글로, 행위와 활동으로 전도한 사람들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의 조형기(造形期)로부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1907년에 출범한 한국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된 때부터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국장로교단들이 이 고백서들을 공족 문헌으로 수납힌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개 혁주의 전통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개혁’이란 단어가 한글 문헌에 사용된 것은 1920년 4월에 발간된 ?신학지남?이다. ‘만국장로회연합총회’라는 이 글은 부두일 선교사가 번역하여 게재한 것으로 1877년 에딘브라에서 모인 제1차 장로교연합총회를 소개하고, 그 모임에 다수의 ‘개혁교인들’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개신교를 ‘갱정교회’(更正敎會)란 말로 일컫는다. 한국인으로서 ‘개혁’을 문헌상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남궁혁 박사였다. 1934년 7월 ?신학지남?에 실은 ‘칼빈신학과 현대생활’이란 논문에서 ‘칼빈주의’를 소개하면서 사용했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18


우 리나라에서 신앙고백 차원에서 개혁주의(Reformed)란 용어를 공식 사용된 것은 고신교단이 출범하면서 발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포문’(1952)19이었다. ‘개혁주의’를 3회 언급하면서 신생 교단의 신학노선을 천명한다. 한국장로교회가 전수한 개혁주의를 계승한다고 선언한다. 고신교단은 평양에서 마포삼열, 구례인, 박형룡 등이 가르친 개혁주의 신학, 곧 한상동·주남선·손양원 목사가 전수받은 정통신학을 계승하고자 했다.


총 신대학교 교수회는 ‘총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 학교가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고수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우리 총신 교수 일동은 전국 교회 앞에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과 복음주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이제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고 서술하면서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언급한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실제적 특징인 적극적 문화관과 사회봉사를 강조한다”20고 서술한다.


한 국의 장로교회와 장로교계 신학교들이 사용하는 ‘개혁주의’의 개념은 이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고려신학교의 박윤선 교수와 직결되어 있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메이첸과 반틸의 신학노선을 따라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했다. 정통신학, 개혁파 정통주의, 칼빈주의, 전통적 개혁주의, 개혁주의 정통신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일컬어져 온 이 유서 깊은 기독교는 종교개혁자, 칼빈주의자, 구프린스톤신학자, 웨스트민스터신학자, 평양신학자 등이 가르치고 고백해 온 신앙노선이다.


‘개 혁주의’가 한국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한신대학교 관련 문헌도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통합, 기장 교단 관련자들은 자신들을 칼빈과 바르트주의 영향 하에 있는 진보계 ‘개혁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세 계개혁교회연맹(WARC)은 자유주의 기독교와 신신학의 영향 아래에 있는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1875년에 장로회 체제를 가진 유럽과 아프리카의 개혁교회 연합체로 시작했다가 1970년에 합동 과정을 거쳐 현재의 연합체로 바뀌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을 수용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들, 특히 진보계 장로교회와 개혁파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실을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사무실 곁에 두고 있을 정도로 두 단체는 밀접한 사이이다.


이 단체는 안식교와 로마가톨릭교회와 더불어 대화를 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세계루터파교회협의회(LWF)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다.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단체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있다. 교리를 벗어나 공동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사회정의, 인간평등, 대화, 인도주의, 교제, 경제 불평등 해소 둥에 관심을 기울인다. 신앙고백의 일치보다 외형적인 연합을 우선시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와 문화를 수용하는 폭넓은 개념의 교회(A larger household of God, a broader OIKOUMENE to which renascent world religions and cultures belong)를 지향한다. “우리는 특히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을 깨닫고 있는 다종교의 상황에서 다른 종교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하고 실제적 협력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21고 말한다.


장 로교 기장과 통합은 세계개혁교회연맹의 회원교회로 활동하고 있다. 근년에 대신과 합동정통이 이 단체에 가입했다. 한국장로교연합회를 중심으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하던 이 교단 지도자들이 기장과 통합 교단의 인사들의 권유를 받아 가입했다고 한다. 신앙고백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면서도 신학적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외국 나들이를 좋아하는 인사들’이 주도하여 결정했다고 한다.22


한 국장로교연합회의 서기 전병금 목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23고 말하면서 모든 장로교단들이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참여하여 세계교회와 연합을 강화해 나갈 것 등을 제안한 바 있다. 고신교단도 한국장로교연합회 회원교회이므로 세계개혁교회연맹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편, 국제개혁교회협의회(ICRC)는 성경적 신앙고백과 개혁신학의 정체성과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을 소중히 여긴다. 한국의 고신교단이 가입해 있다. 회원교회와 단체의 폭을 넓히려고 하고 있다.


개 혁주의 진영 안에는 이처럼 두 개의 상반된 기독교가 존재한다. 개혁주의는 일반적으로 스위스종교개혁과 관련된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일컫지만, 그 안에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신학 캠프가 있다. 극단의 자유주의 기독교와 극단의 보수주의 기독교가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 교수,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의 박형룡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이종성 박사, 고려신학대학원의 이근삼 박사는 모두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콘텍스트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개혁주의 서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자신이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거나, 자유주의와 개혁주의가 상반되거나 대립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다.


5. 근본주의 바로 알기


종 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외적 일치보다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개혁운동을 폈다. 그들은 관용주의자, 포용주의자, 화평주의자, 신앙무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진리에서 떠난 교회와 더불어 화평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자,’ ‘분리주의자,’ ‘주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라고 하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진리 안에서 일치’의 깃발을 들었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고백하는 범위 안에서 일치운동을 전개했다.


자 유주의 기독교는 다원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고무시켰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 강령에 따라 ‘개혁’되는 것을 돕는 반면에 성경에 따라 개혁하는 것을 방해한다. 성경보다는 문화에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 기독교를 변혁시키려고 한다. 무엇을 고백하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성경이 제시하는 교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소한 문제라고 본다. 정통신앙과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양심적으로 ‘새로운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을 근본주의자, 배타주의자, 성경문자주의자로, 과거의 틀에 사로잡혀 성경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자로 매도하고 폄하한다.


근 본주의는 자유주의 기독교를 배격하면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등장했다. 근본주의는 역사적 기독교를 변호한 사람들이 초교파적으로 펼친 광범위한 신학운동이다. 성경의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초자연적 기적능력을 역사적 기독교의 표지로 삼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은 기독교의 근본 도리들을 한낱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디 모디 웨버(Timothy P. Weber)가 지적한 대로,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다. 그것은 도시와 시골, 사변성과 단순성, 지성과 반지성, 온건성과 극단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근본주의는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부정적인 대중 이미지보다 지역적, 사회적, 정치적, 교육적, 신학적으로 훨씬 더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24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은 그것이 “복음주의, 부흥운동주의, 경건주의, 홀리네스운동, 개혁파의 고백주의, 침례교 전통주의 그리고 기타 교단적 정통주의 등을 포함한다”25고 옳게 지적한다.


역 사적 관점으로 보면 근본주의를 거부하거나 폄하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중추 도리들을 거부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자이다. 오번선언서 사상을 따르지 않고 유서 깊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신앙해 온 도리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이다. 자유주의 기독교 추종자들은 역사적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극단의 근본주의자’라고 일컫는다. 기독교의 근본 도리를 완고하게 신앙한다는 것이다.


종 교학이 말하는 근본주의자는 다양한 형태의 신념과 신조를 고백하고 종종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이다. 열정, 확고한 의지, 냉정성이 철저하다. 근본주의는 인도 아요다(Ayodya)의 회교 사원을 폭파시킨 힌두교도나 소수 힌두교도를 박해하는 스리랑카의 불교도, 하나님이 아랍인의 땅을 자신들에게 주었다고 주장하는 구쉬 에누민(Gush Enumin)의 유대교도,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무조건 회교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는 회교도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근 본주의는 체질상 새 것이라면 무조건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타협과 변화를 거부한다.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고 혼란시키며 현대성(Modernity)을 반대한다. 매사에 우물 안 개구리식이다. 기독교권의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나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만사를 단세포적으로 파악하고, 지적 탐색을 거부한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같은 종파의 종교인들을 다른 종파의 종교인들보다 더 가혹하게 대한다. 같은 종파의 배교자들을 불신자들보다 더 빨리 화형의 불길에 밀어 넣는다. 잊혀진 과거의 지혜를 상기시키지도 못한 채 전통에 연연한다.


기 독교계 안에도 극단의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현대적인 것을 거부한다. 반(反)지성적 태도를 유지한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대학교는 전투적 근본주의(Militant Fundamentalism)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말씀보존학회라고 하는 그룹이 극단의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킹제임스판 외의 성경번역본들은 모두 사탄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신학계가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있는 뉴인터내셔널판(NIV) 성경도 거부한다.


한 국장로교회의 신학의 틀을 세우는 데 이바지한 박형룡과 박윤선 교수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보급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를 선전하기 위해 투신한 신학자이다. 바울, 어거스틴, 쯔빙글리, 칼빈의 신학, 데오도르 베자, 프랜시스 투레틴, 유럽 칼빈주의자, 미국의 구프린스톤신학, 알렉산더, 핫지, 워필드, 메이첸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연결시켰다. 미국북장로교회가 좌경화 되기 전에 가졌던 개혁주의 신학은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위필드, 찰스 스펄전,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지녔던 신념체계이다. 주기철·한상동·주남선·손양원 목사가 배우고 전수한 칼빈주의이다.


유 서 깊은 기독교의 대명사인 개혁주의―칼빈주의는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성적 활동을 환영한다. 새로운 문명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보는 반면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세상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문화 건설을 위해 힘쓰는 일을 주저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기독교는 복음전파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세상에 대립하여 오직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거부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는 문화명령을 강조한다. 잔술했듯이 개혁주의 기독교는 드라마·댄스·문학·회화·조각·건축·음악 등의 예술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26


일 제의 식민통치, 광복 직후에 찾아온 동족상잔의 전란, 독재정권, 군사통치, 가난으로 찌든 우리나라는 한국교회에 문화사명을 충분히 감당할 여건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는 등 사회와 문화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등 여러 사람들이다. 그들을 ‘개혁주의자로 볼 수 없고 근본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더욱이 “극단의 근본주의자,” “극단적 보수주의자”27로 단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 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 교회를 세웠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다. 주께서는 이 교회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엡1:4). 한국교회는 예배당 강대상의 높이를 낮추고, 영상시설을 설치하고, 현대풍의 세련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열중한다. 사회적 신인도 제고와 도덕성 고양과 사회통합에 이바지하는 기독교를 모색한다.


그 러나 진정한 개혁은 그런 류의 혁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자와 교회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 성령 안에서 중생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화된 신자는 이웃사랑과 사회변혁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 한국교회의 개혁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우 리의 논의는 메이첸이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같은 뿌리를 가진 상이한 표현이 아니라 다른 뿌리를 가진 서로 다른 종교라고 판단한 것이 그릇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신학과 교회와 신자의 신행(信行)의 평가 기준은 정통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가 아니다. 좌우논리, 흑백논리, 중도논리도 아니다. 진보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제3의 길’도, 보수주의에 뿌리를 둔 중도파 또는 회색주의도 아니다. 극단의 배타주의와 선민의식, 무조건 타교단과 담을 쌓고 지내는 종파주의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아우른다’는 기치로 진행되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배교적이다.


최덕성 교수의 최신작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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