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20 01:35
기독교 교육과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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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920  


I. 교육행정의 개념

교육행정은 교육의 모든 영역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교육행정 현상과 활동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두는 영역이다. 교육행정에 대한 개념정의는 학자들마다 다양하지만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교육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적·물적 제 조건을 정비·확립하는 수단적·봉사적 활동으로 보는 입장(조건정비론), 둘째, 행정가의 일반적 기능이 무엇이며, 행정이 어떠한 순환적 경로를 밟아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는 입장(행정과정론), 셋째, 교육행정을 하나의 사회적 과정으로 보는 입장(사회과정론), 넷째, 행정을 합리성을 토대로 한 집단적 협동행위로 보며, 주로 의사결정의 과정에 역점을 두는 입장(협동행위론), 다섯째, 교육행정을 일반행정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서 "교육에 관한 행정"이라고 보는 입장(분류체계론)이다.


여기서는 리더쉽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교사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본다.


II. 교사는 누구인가


진정한 교육의 부재로 빚어진 작금의 사회적 병폐에 대한 치유책 중의 하나는 교육일 것이다. 그 최전방에 선 교사들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아래에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인 자아의식, 의무, 책임감, 방법론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자아 의식


교사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자기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의 교사는 신앙공동체가 경험하고 유산으로 받아온 신앙을 전승하기 위한 직(office)에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1) 처음 교회의 교사는 디다스카로스(didaskalos)라고 해서 사도, 예언자, 목사(고전 12:4-11, 엡 4:11-12)과 더불어 교회의 직임중의 하나로 회중을 가르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면에서 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사는 교회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채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2) 어느 경우이든 교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참예케 하기 위해 불러주신 소명(召命)을 받은 자이다. 교사에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학생과의 관계에서 알아보자.

첫째, 가르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뢰되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소명된 것이므로 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한 사람에게 귀중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다.

둘째, 소명된 자로서의 교사는 항상 교육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하며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생의 모든 상황과 경험에 있어서 활동하신다는 확신을 교사는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학교 교사의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셨고, 특히 그리스도인을 선민으로 택하셨으며, 그 중에 성직자, 제직, 교사 등을 소명하여 그의 나라를 위한 사업의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다. 소명은 본래 'imperial summons'로서 황제나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것이지만 교회학교교사의 소명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교사들은 이 점을 명심하면서 교육에 충실해야 한다.

넷째, 따라서 소명받은 자로서의 교사는 항상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한 것이며, 결국 종국적 문제임을 인식하면서 교육해야 한다.

다섯째, 어떤 경우에나 복음이 인간의 삶에 직결된 것임을 가르쳐주고 그 지식을 넓혀주고, 깊게 해주는 데 교회학교교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학교교사는 일반 교사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소명의식은 구체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어떤 모습을 띄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불림 받은 교사는 이제 학생들 앞에 세움을 받은 자이다. 소명 받은 자로서 학생들 앞에 선 교사는 그 소명의식으로부터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확신은 인간 일반에 대한 교육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교육에 의해서이다. 동물에게는 본능이 있고 인간에게는 교육이 있다.

교육에 대한 확신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잠재 가능성을 최대한 계발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사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불리움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맡겨진 학생들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교사는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2. 의무


교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교사는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성경을 가르치고, 그 밖의 것들을 지도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사람인 학생을 향한 것이고 사람의 형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여러 분야에서 정의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종교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또는 교육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즉 인간 현상이나 현재성의 바탕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그 본래성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의 원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따라서 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본질뿐만 아니라 창조주인 하나님으로서의 본질도 겸비한 참 신이며 참 인간(vere deus vre homo)인데, 이 그리스도가 교육하는 인간의 목표, 과제가 된다. 즉 원죄 인간을 신학화의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 인간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3)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 된 것으로서 상징화된 교회 내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일생이 항상 물질이나 오류적 정신에 휩싸여 무가치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늘 시간과 영원의 완전한 동일체요, 인간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본질로서 살아갈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적 삶을 인간이 축하해야 할 최고의 삶의 모습으로 구현할 것을 깊이, 높이, 넓이의 차원에서 탐구해야 한다.

그 같은 삶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분명한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그리스도의 백성이다. 이 같은 신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보장된다. 교사는 학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알도록,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학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인정이 가르침 이전에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다.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이방인이나 단독자로, 혹은 정처 없이 떠도는 영원한 나그네로 서술하면서, 매우 쓸쓸한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승화된 절대 사랑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위로의 극점이며, 소망자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에 인간은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망이나 낙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영원한 삶에 목적을 두고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정처 없는 나그네와 같은 무의미한 삶도 아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즉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생활하고, 대화하고, 활동하며, 교제함으로써 인간의 본래성을 찾을 수 있다. 그 본래성은 완전으로서의 본래성이 아니라 결여성으로서의 본래성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그런 존재로서의 본래성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 모델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특히 행위적인 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에 의한 삶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또 듣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사는 학생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삶의 본질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시키고 촉진시켜 주어야 한다. 교사는 가르침을 통하여 학생에게 세계관 형성의 자극과 삶의 원초성에 대한 인식을 도와주어야 한다. 교사는 학생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 필요한 기능, 혹은 특수 기술을 통한 경제성이나 생산성 향상에 그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자신의 위상을 궁극적 실재, 새로운 존재, 영원한 가치에로 정향하므로 높고 숭고한 삶의 의미를 확신하게 해야 한다. 인간의 본래성과 현실성을 모두 그리스도에 의한 변화에서 정립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세속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기 쉽다. 사실 학생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삶은 정신적 가치관의 교정과 훈련의 측면이 강하다.

   넷째,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다. 신자들이라도 그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살지만,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는 못한다.

인간이 이기를 벗어날 때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의미로 충만하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자지향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타자지향적인 삶은 예수에게서 볼 수 있듯이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리고 대가가 따르는 고난의 삶이다. 신자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다. 즉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 사는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지난하다. 그러므로 책임적 관점에서 그 삶의 짐을 질 필요가 있다.

신세대들에게 타자는 적과 같다. 그들에게 적과 같은 타자를 위한 삶은 대단히 낯설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무엇인가를 경험함으로써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사의 의무


교회학교교사의 의무는 세상의 교사의 의무와 다르다. 의무의 개념은 좁은 의미로 해석하면 법률이 법적인 행위자에 대하여 어떤 일을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강제성을 띈 개념이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에게 강제성은 원칙적으로 없다. 교사는 앞서 말한 대로 교회의 직으로부터 자원자(volenteer)의 개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학교교사는 적극적으로 그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4)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교육 및 연구활동의 의무이다. 급진적인 과학 기술의 발달에 수반되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홍수시대를 맞이하여 이를 적절하게 선택하여 학생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전문적 성장을 위한 연구활동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떠나서도 교육과 연구활동은 교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다.

가르치는 일은 교사의 본질적 사명이고 이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려면 그는 항상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내용은 계속 변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교수-학습이론과 방법이 계속 개발되고 있으며, 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환경도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아무런 연구 없이 구태의연하게 교육활동을 영위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문적 자질 향상은 우선 해당 내용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교사로서의 권위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교사의 본질적 행위인 교육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성실의 의무이다. 교회학교교사는 일반교사와 달리 정해진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에도 보이지 않는 법령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양심의 명령이다. 교사는 그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성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본인도 부끄러운 결과가 나올 뿐만 아니라 영혼에 상처를 주게 될 수 있다.

교사는 무엇보다 맡은 학생들에게 성실해야 한다. 그들을 잘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교회와 부서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이것들은 주로 행정 업무와 관련되는 것일 수 있는데, 이 같은 업무도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기본 구조이기 때문에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전문직으로서의 품위유지의 의무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교육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상사회를 위해서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상적 사회를 이끌 정치인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이 되려면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에 의하면 장차의 지도자감으로 선택된 어린이는 18세가 될 때까지 문학, 음악, 기초수학들을 배운다. 이 과정을 합격하면 다음 2∼3년 동안 엄격한 군사훈련과 육체단련을 한다. 20세가 되어 경쟁을 거쳐 선발이 된 합격자들은 10년 동안 수학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그것을 마친 수업생은 30세가 된다. 그래도 플라톤은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아직도 미숙하다고 여겼다. 또 한 번의 선발이 있고, 선발에서 합격한 자는 5년 동안 변증법, 또 형식논리학을 배우게 된다. 이리하여 35세가 되면 그들은 어엿한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은 현실경험이 없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들을 15년 동안 전쟁의 최전방 경험을 쌓게 하거나 정치훈련을 받으면서도 남은 시간에는 계속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이 15년 중에서 몇 년 동안은 실습을 겸해서 '번거로운 공직생활의 의무'를 맡게 한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감에 대한 이상적인 교육은 50세를 전후해서야 겨우 끝나야 한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오늘날 플라톤의 이와 같은 교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막중한 사명을 위한 구비조건이 얼마나 엄정한가를 실감할 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전문직에서나 자격증이 필요하다. 학교 교사가 되려면 대학을 졸업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한 다음에도 최고 3년 동안의 실습기간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학교교사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교사의 전문성이 필수적이라면 그 교육과 훈련의 책임은 교회학교 교사들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훈련의 기회를 찾으며 기꺼이 그 장에 자신을 던져 훈련을 받아 정병으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학교교사의 전문성에는 영성이 부가되는 것이 특징이다. 나중에 살필 전문성이 교사의 외적인 기술적인 성격이라면, 이 영성은 교사의 내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이 영성은 교사의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학생들은 교사의 신앙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신앙이란 무엇일까? 신앙이란 말만큼이나 교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은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난감하다.

기독교교육자들은 신앙을 전인적으로 파악한다. 웨스터호프(John H. Westerhoff III)라는 학자는 신앙을 경험, 소속, 추구, 고백의 차원에서 말한다. 파울러(James W. Fowler)라는 학자는 궁극적 중심에 대한 하나의 통합된 이미지로 본다. 그룸(Thomas H. Groome)이라는 학자는 신앙을 지적, 정서적, 행위적 차원의 구성으로 본다. 결국 이들의 주장의 공통점은 신앙은 궁극과의 관계에서 지정의의 일관성 있는 조화라고 볼 수 있다. 신앙에서 궁극적 성격을 배제한다면 인격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교사는 인격의 사람이어야 한다. 교사는 인간적으로 좋아야 한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재주가 있고 최신의 교육방법을 사용하고 있다해도 그 모든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에 달려 있다. 그가 삶의 가운데서 진실하고 정직하여 미덕과 친절을 지닌 모범적 인물인가? 이런 질문이 그의 가르침을 보장한다. 인격적으로 하는 가르침일 때 권위가 확보된다.

교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의 권위는 적당한 지식과 기술에 있다. 그러나 인격과 관련된 권위에는 이성적 권위(reasonable authority)와 억압적 권위(oppressive authority)가 있다. 이성적 권위란 인격 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위신을 말한다. 이 같은 인격을 가진 교사는 학생의 자유로운 자기 확대와 그들의 자유화에 있으며 그 밑바닥에는 학생에 대한 깊은 애정과 흔들림 없는 신뢰가 깔려있다. 억압적 권위란 주인과 노비의 관계로, 주인의 만족은 착취의 정도에 있다. 어디까지나 대립적, 독선적이요, 전제적이며 명령적이기에 그 관계는 반항과 증오를 특징으로 한다.

학생은 교사를 배운다. 교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교수법과는 별도로 그의 사람됨, 즉 그의 신앙, 인격으로써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나 교사는 사람됨만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는 없다. 학생들을 교육하는 필요한 내용들에 있어서 전문가여야 한다.

첫째,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알아야 한다. 유치부 어린이에게 교회의 머리는 예수이고 우리는 그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라는 내용을 가르친다면 잘못일 것이다. 그 내용은 그들의 수준에서 벅차기 때문이다.

교사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특성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영적인 특성을 알아야 한다. 이런 특성들을 학생들이 어떻게 배우느냐하는 관점으로부터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을 통해서만 그들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들에 대한 성실한 연구 성과를 기록한 양서들을 통해 학생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교사는 학생들의 실제 행동에 접함으로써 그들을 보다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부모들과의 교류, 학교 생활, 친구 관계, 그 아이의 취미와 특기, 그리고 학생의 생활 환경 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 관련지어 어린이들은 첫째, 교사가 무엇보다도 먼저 다정하고 숙부드럽기를 요구한다. 거칠지 않은 교사, 어린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지켜보며 배려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교사가 될 때, 어린이들은 편안한 느낌을 받고, 자신을 갖고 배워 간다. 둘째, 교사는 어린이들의 요구를 눈치채고 그 충족을 위하여 힘쓰며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이럴 때 어린이들은 충분히 자주적인 행동을 하며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쉽게 가르치기를 바란다. 어려운 말이 아닌 알아듣기 쉽게 가르치는 다정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 넷째, 방자한 자를 규제하여 생활의 질서를 지키도록 해주기를 원한다. 다섯째, 수업을 철저히 하기를 원한다. 여섯째, 교사가 개인의 사사로운 인정에 흐르지 않고 공평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다룰 때 일관성이 있기를 바란다. 이랬다저랬다하지 않음이다. 일곱째, 교사가 실력이 있기를 바란다. 특히 교사 자신이 알고 체험한 것을 가르쳐 주기 바란다. 특히 기독교교육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말의 설득이나 설명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여덟째,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상담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교사이기를 원한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다룬다.  

둘째, 교사는 무엇보다 실제 가르치는 일에 전문가여야 한다. 그것은 교수-학습을 말하는데, 교사는 먼저, 학생들이 어떻게 배우는 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가르칠 줄을 알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일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가르침을 교사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차원에서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학생들은 적당한 의욕과 흥미를 느낄 때에 잘 배운다. 자신의 문제와 연관될 때 잘 배운다. 학생들은 생각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배운다. 그렇다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바르게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학생들이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은 선택과 결정을 함으로써 배운다. 특히 윤리적 도덕적 분야에 속하는 문제에서 그렇다.

가르침의 본질은 학생들이 배우도록 돕는 것이다. 더 잘 가르치도록 배운다는 것은 학생들이 배우도록 더 잘 도와주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사는 가르치는 내용의 전문가여야 한다. 교회학교교사의 주요 교육내용은 성서이다. 사실 교사는 '학생들에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잘못 가르칠 소지가 많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교사가 마태복음 25장 31-46절을 가르치면서, 예수의 재림시 양처럼 예수의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양처럼 목자를 잘 따르고, 즉 순종하고, 양처럼 잘 모이고, 제물로 바쳐지는 양처럼 헌신되고, 양이 새끼를 치듯 전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교사는 성경을 무조건 읽는 데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읽은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해야 한다. 성경의 연구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성서 사전, 성서지도, 그리고 주석이 필요하다.  

넷째, 교사는 상담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5) 대부분의 학생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함께 나눌 신뢰할만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교사가 상담에 대한 교육을 받았건, 상담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쨋든 교사는 상담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까닭이다.

상담의 상황은 흔하다. 학생들은 무엇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어떤 경우에는 외롭고 난처한 경우를 당할 때 교사를 찾아온다. 학생들은 교사를 찾아가 위로를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받은 상처가 치유 받기 원한다.  

상담은 여러 가지 방법과 다양한 수준에서 진행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만큼이나 여러 가지 종류의 상담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상담을 지나치게 전문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예절이나 농구 경기에 대한 친절한 한 마디의 충고를 비롯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충고, 학생들의 관심사에 대해 들어주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상담일 수 있다. 실제로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전문적인 상담보다는 약간의 정보와 실질적인 안내인 경우가 많다.

상담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개의 귀를 주신 것은 말하기보다는 들으라는 의도가 있어서란 말이 있다. 진지한 경청은 그 자체가 내가 인정 받고있다는 마음을 들게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상담의 효과가 있다. 학생의 말을 다 들은 후에는 교사의 경험을 통해 얻은 내용을 나누어준다. 그 경험이 사적인 것이든, 성경의 교훈이든 성실하고 진지한 답변을 해야 한다.


4. 방법론


   이제까지 교사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의무와 책임이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방법의 문제를 살펴보자.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인 교육방법을 다루지는 않고 그 방법을 방법 되게 하는 정신인 사랑에 대해 다룰 것이다. 그것이 바탕을 이루지 않는 가르침은 거짓이겠기 때문이다.

모든 방법의 배후에는 사랑이 있다. 교육을 학생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할 때, 더욱 그렇다. 교육에서 사랑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사도헌장 제1항에는 "우리는 제자를 사랑하고···"라고 말하며, 사도강령 전문 제3절에 "사랑과 봉사"라는 말과 함께 제1장 제1항 서두에서도 "우리는 제자를 사랑하고···"라고 말문을 열고 있다.

교사의 교육행위의 근본 동기가 사랑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교사로 더 잘 알려져 있던 예수께서 기독교의 정신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마 22:37, 39) 즉, 사랑으로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하며, 부부와(엡 5:22-23, 25, 28) 자녀(시 127:3, 엡 6:4), 그리고 형제(마 5:22-24)를 사랑하라고 한다. 급기야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다(마 5:43-44).

바울은 그 사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한다(고전 13:4-7). 그는 사랑을 긍정적인 덕목과 부정적인 덕목으로 나누어 말한다. 긍정적인 덕목에는 관용, 친절, 진리를 기뻐함, 인내, 신뢰, 희망이다. 부정적인 항목은 질투, 과시, 교만, 자기 유익, 무례, 분노, 악의, 불의이다.

그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여러 가지 사랑(생산적인 사랑과 비생산적인 사랑, 모성애, 형제사랑, 이성적 사랑, 자기 사랑,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 중에서 자신을 줌으로써 넉넉하게 되는 생산적인 사랑의 요소에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생산적 사랑에는 배려(care), 책임(responsibility), 존경(respect) 및 지식(knowledge)의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6)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람들은 깊은 배려를 하며 관심을 기울인다. 그 앞에서 해야 할 자기 책임이 없는 곳에 사랑은 없다. 존경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하여 그 자신의 방법으로 성장하고 발달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타난다. 또한 사랑한다함은 그 대상의 주변만이 아니라 중핵까지 알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의 불안, 고뇌, 고독, 그의 책임감 등을 속속들이 앎으로써만 그에 어울리는 배려, 책임, 존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앎은 그 대상의 깊숙한 곳에 있는 신비에까지 도달하는 일이고, 궁극의 본질까지 인식하는 일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안다함은 신을 안다라는 종교적 문제와 병행하게 된다. 사랑으로 교육할 때 하나님에 닿는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정신적 연단, 정신통일 훈련, 인내심 함양, 민감성과 신뢰성의 계발 등이 요청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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