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26 09:21
하나님과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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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839  
하나님과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즐거움을 추구하는 원칙, ‘재미의 철학’이란 게 있을까?
삶을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삶의 궁극적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재충전시켜 주는 것은 합당한 즐거움이다. 삶에서 합당한 즐거움에 대한 추구나, 누리고 있는 자유함을 정의하는 데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삶의 목적을 확립하는 것이다. 모든 즐거움은 인간이 왜 존재하느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많은 슬픔의 시간들을 절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아무 관련 없이 수시로 선택한 상황들을 해결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았다. 삶이란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선택하고 버리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먼저 삶에서 의미와 목적이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우리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하고, 올바로 세워주는 선택을 해야 한다. 삶의 기초가 되는 철학이 모든 선택 상황에서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성취감과 실망감, 재미와 자기 파괴 사이를 구별해 준다.
만약 삶의 목적 의식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삶은 자체로 공허이고, 낭비이다. 이 간단한 사실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가는 장소, 만드는 우정, 사용하는 언어, 시청하는 TV 프로그램, 읽는 책, 즐기는 생각들 등 모두는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 목적 의식과 일관되어 있어야 한다. 삶의 최고 목적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하는 것이라면, 최선의 선택을 위해 차선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 해치면 합당치 않은 즐거움
사무엘하 23장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 군대에 포위되어 아둘람 굴속에 숨어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어느 날 밤, 다윗은 편안한 집을 그리워하며 순수하고 단순한 소망을 말했다. 베들레헴의 어느 우물물 한 그릇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 소망은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한숨 소리를 들은 몇몇 병사들이 다윗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으로 목숨 걸고, 베들레헴에 몰래 들어가 우물물 한 그릇을 떠온다. 우리는 뜻밖의 선물에 놀란 다윗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분명히 병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물을 마시려고 입에 대었다가 바닥에 천천히 쏟아버렸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 23:16~17).
이 말을 하면서 다윗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했다. 그는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즐거움이든 다른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은 합당하지 않은 쾌락이다.

삶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어떤 쾌락이든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현실을 왜곡하거나 욕구를 없애버린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잠 25:16). 오늘날에 아름답고 우아한 말씀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진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즐거움이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현실을 왜곡하게 하거나 욕구마저 상실시킨다는 의미이다.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 선택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정해야 할 것은 반드시 ‘즐거운’ 선택이어야 한다. 좋고 해롭지 않은 즐거움이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집착이나 단조로움을 야기해 궁극적으로 즐거움을 빼앗아 가고 만다.
개인적으로 독서나 휴식만큼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을 독서와 휴식으로 보낸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기도나 말씀 공부 같은 중요한 활동에도 적용된다. 모든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해 삶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어느 한 면만 강조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정하신 축제 시기는 의도적으로 나눠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마다 민족의 구원을 축하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했다. 또 극복한 고난들과 추수한 성과물에 대해 감사드렸다. 우리는 다양함이 삶의 진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다양함은 삶의 자체이다. 풍성한 다양함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더 큰 목적은 희락
참된 즐거움은 그것을 누리기 전에 값을 지불하며 거짓된 쾌락은 그것을 즐긴 후에 값을 지불한다. 만족감에서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이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생의 승패가 판가름난다.
우리는 합당치 않은 쾌락 추구를 강한 의지로 거절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약한 상태에서 너무 쉽게 포기하기 때문에 스스로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졌는지 깨닫지 못한다. “덫에 걸려 빠져 나오려고 분투하기보다 처음부터 미끼를 피하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다. 유혹 앞에서 먼저 ‘노!’(No)하는 법을 배워라. 무조건 ‘노’하라는 게 아니라 삶의 궁극적 목표에 맞춰 탄력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 만약 저항 없이 유혹에 굴복한다면 언젠가 대가를 지불하게 마련이다.
즐거움의 추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더 큰 목적은 희락이어야 한다. 희락은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의 만족을 주는 관계에서 온다. 이런 삶의 태도는 특별한 것만을 기다리는 불안함 없이 평범함 가운데 안식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쾌락이 지나간 자리에 영광이나 불명예, 기쁨이나 슬픔이 남는 이유이다. 즐겁게 사는 삶은 쾌락이나 고통을 넘어, 일상적인 것들로 감사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특별한 것들이 아닌 일상적인 것들에 의미를 둔다. 대부분의 쾌락은 우리가 경험한 쾌락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다. 옳지 않은 쾌락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즐거움을 빼앗기게 된다.
어떤 즐거움이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한다면, 궁극적으로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무엇보다 쾌락에 대한 욕구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 섬기는 즐거움
합당한 즐거움을 추구할수록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에서 이런 깨달음에 대해 설명한다.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하나님과 자신의 의지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실족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가르친다. 삼촌 악마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라고 조카 악마에게 명령했다. 며칠 뒤 조카 악마는 사람을 놓쳐 버려 적에게 넘겨주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다는 의미이다. 삼촌 악마는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를 유혹할 수 없단 말이야?”
조카 악마는 대답했다. “아니오. 그가 두 가지 일을 해서 빼앗겨 버렸어요. 하나는 그가 매일 산책하는 거였어요. 운동을 위한 게 아니라 산책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죠. 다른 하나는 그는 좋은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어요. 남에게 글을 소개하기 위한 게 아니라 혼자 즐기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죠. 산책하고 좋은 책을 읽는 동안 그가 적의 손에 넘어갔어요.”
루이스의 통찰력이 참으로 예리한 대목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의 삶을 너무나 왜곡되게 해석한 나머지, 하나님이 선물하신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까지 빼앗겨 버렸다. 합당한 즐거움을 추구할수록 더욱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분의 품안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합당치 않은 쾌락을 추구할수록 그분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우리가 그분에게 가까이 가게 하는 원칙들을 따를수록 하나님의 음성은 더욱 분명하게 들리고, 그분과 더 풍성하게 교제할 수 있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듯 모든 합당한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더욱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즐거움과 쾌락의 주제에 대한 모든 글을 한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에 대해 수없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엄청난 값에 대해서도 상기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은 주권 섭리와 은혜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당신의 기쁨에 참예케 하신다.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그분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신령한 칭찬을 받을 때 만나게 된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선한 목적이 함축되어 있다. 그 목적이 바로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말도 우리의 마음에 궁극적인 기쁨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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