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5 04:10
기독교 강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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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692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한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실성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하지 않는 한 논증으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일반적인 동의로 그것을 확립한다든가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지원을 받아 확증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일단 성경을 그 존엄성에 따라 경건하게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서적과는 달리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이전에는 마음에 성경의 확실성을 강하게 심어 주지 못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던 논증들이 이제는 매우 유용한 도움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얼마나 훌륭하고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도 풍기지 않는 이 교리의 천상적인 성격은 얼마나 완전하며, 이 교리가 그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책에 위엄을 가져다주는 다른 특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에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늘나라의 그 숭고한 신비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더욱 화려한 웅변으로 꾸며졌다고 하면, 불경자들은 아마도 성경의 힘은 다만 웅변술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말의 기교가 필요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인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 2 : 5)에 있다고 주장한 사도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하여 증거한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 : 4)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 아니하고 진리 그 자체가 증명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 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분명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2.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 결정적이다
사실 선지자들 중 어떤이들의 문체는 우아하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화려하기까지 하므로 그들의 수사법은 어떠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러한 실례를 보여 주심으로써, 비록 다른 곳에서 소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웅변에서 자기에게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름답고 즐거운 말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다윗과 이사야,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의 글이나 또는 거칠지만 문체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야 또는 스가랴의 글을 읽어 보면,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성령의 위엄이 어디서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탄이 거짓된 탈을 쓰고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흉내낸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세련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박한 언어로써 나약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교활하게 불경스러운 오류를 심어 우리 인간들을 속인다. 그리고 사탄은 언어의 진부한 형식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가면으로 쓰고는 자신의 사기 행각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한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트집을 잡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지 않는 선지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교훈을 무미 건조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주요한 요점들만을 택하여 전체의 문제를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에서 다룬 문제들과 함께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회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들였던 것을 선언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 외에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창 17 : 7). 모세가 듣지도 못한 것을 제시했었더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그들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즉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라고 하는 연수(年數)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창 15 : 13, 출 12 : 40, 갈 3 : 17). 모세가(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리의 전숭을 그렇게 먼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가 보여준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 기원을 세계 창조 이전 6천년까지 소급하는 것을 믿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저자들까지도 저들의 수다를 항상 조소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내가 그것을 구태여 힘들여 논박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요세푸스(Josephus)는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이라는 저서에서 기억할 만한 증언을 고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율법의 교리가 비록 읽혀지지도 않고 또 참되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득히 먼 시대로부터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였다고 결론 지을수 있다.
그리고 악독한 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혹도 품지 못하게 하고, 사 악한 자들로 변명의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최선의 구제책을 강구하신다. 야곱이 약 300년 전에 영감을 받아 자기 자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 하고 있지만, 그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종족을 고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레위 사람으로서 자기 지파에게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 49 : 5-6). 그는 분명히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온 가문이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는데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평을 기록할 때에(민 12 : 1), 육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나는 여기서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율법서의 도처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公布)한 교리에 대한 확증들이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의 교제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 : 18),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 34 : 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오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 19 : 16), 장막의 입구가 구름에 가리워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 : 34),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 그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 16 : 24),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것(민 20 : 10-11, 출 17 : 6, 고전 10 : 4 참조), 그가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 11:9, 출 16:13, 고전 10:3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하여 혹 누가 반대이론을 제기 한다면, 그러한 교묘한 이론(異論)에 대하여 나는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 모든 사건을 온 회중 앞에서 공포하였는데 어떻게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세가 회중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 완고함, 배은 망덕,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 교리를 확신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6. 모세의 이적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이적에 대하여 모세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조금이라도 무슨 기회만 보이면 온 회중을 선동하여 떠들썩하게 반항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그런 불유쾌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도 명백하여 세속적인 저자들도 모세의 이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의 아비는 그 이적들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다(출 7 : 11, 9 : 11).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모세는 미신을 증오하였다(레 20 : 6).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런 모세가 마술사였다고 억측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모세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과 형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것도 아님을 공언함으로써 일체의 비난의 표적들을 충분히 지워 버렸다(출 16 : 7). 그리고 일어난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본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마술이 백성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출 16 : 19-20)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많은 엄격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사악한 자들이 더 이상 불평함으로써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온 민중이 교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넘어뜨리려고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마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광포함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교훈이 모든 시대에 확신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더우기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우위를 부여하게 한 것이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입증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창 49 : 10). 이 예언을 최초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을 기록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사울이 즉위한 후 왕권은 베냐민 지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삼상 11 : 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 : 13), 이때 왕권의 이양에 대한 무슨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던가? 양을 치는 평민의 가정에서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가정에는 7형제나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다윗에게 그러한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조차 하였겠는가? 어떻게 그가 왕국을 통치할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노력, 혹은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서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모호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창 49 : 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예언들이 더 있지만 나는 여기서 이를 생략하겠다. 이 예언들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그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다. 요컨대 모세의 한 편의 노래는(신 32장)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맑은 거울인 것이다.

8.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들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한층 더 명백하게 발견된다. 나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의 실례만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체의 실례를 든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될 것이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 : 6-7). 그 당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오래 전에 예언한다는 것은, 아직 신적 영감에 대한 명백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못된다고 치자. 그러나 이사야가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 : 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하였다.7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고레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바벨론과 싸워 그 강대한 왕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자적인 수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사람의 추측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의 포로 생활의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하여도 예언하였는데(렘 25 : 11-12, 29 : 10),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예언자들의 권위가 확증되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주장한 바가 바로 그들이 말의 신빙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 : 9).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대하여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같은 시대에 예언하였으며, 그 예언이 마치 상호간에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 진술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니엘은 어떠한가? 그는 약 6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것이 마치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역사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충분히 억제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너무도 명백해서 교묘히 반대할 여지를 조금도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율법의 전승(傳承)은 신뢰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박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치의 예리함을 보이기 위해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나 선지자들의 이름이 붙여진 채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8 심지어는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었던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주먹이나 채찍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도록 보존되었다. 비록 그 율법이 제사장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잠시 파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 : 8, 대하 34 : 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9 실로 요시야는 이를 공포할 때에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야는 그 원본을 성전에 보존하고,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하였다(신 17 : 18-19). 다만 이러한 일들은 있었다. 곧 제사장들이 옛날의 엄숙한 관습을 따라 율법을 공표하기를 중단하였고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버릇을 게을리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가 확인되지 않은 때나 그것이 갱신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윗의 시편에 정통한 사람이 모세를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저자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저작은 오직 한 길을 통하여 직접 입에서 입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어떤이들은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율법과 예언자를 보존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던 것 중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깨끗이 일소해 버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설치한 공격 무기로 그들을 역습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성경을 다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에서 그처럼 빨리 위조될 수 있었겠는가10 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가 끝나자 마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그 책들이 바로 성경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악한 자들이 서로 모의나 한 듯이 파렴치하게 유대인들을 모욕했지만,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종교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들은 모세가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全)역사의 동의로 그 거룩한 유구성이 확증된 이 책들을 가리켜 날조라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개 같은 몰염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추악한 비방을 논박하는 데 이 이상 더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맹렬히 타고 있는 불길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이 말씀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지조를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보물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게 하셨으며, 또한 총독들과 군인들의 온갖 맹렬한 조사를 좌절시키기도 하셨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던 그 거룩한 기념비가 즉시 되돌아와서 이전의 위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되고, 더욱이 그 위엄이 높아지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적이며 주목할 만한 성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후 곧 이어서 헬라어 성경이 나왔으며 이것은 전세계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 내셨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손상되지 않고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당시 히브리어는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를 돌보지 아니하셨더라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자기네 모국어를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예언서들을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고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해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마 22 : 37-40)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 곧 어거스틴이 기독교회의 사서(司書)들이라고12 적절히 칭한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11)
11.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로 확고부동한가! 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비천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교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성을 몹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제 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간단하게 요약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들의 기록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치듯 강하게 꾸짖는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 대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욕망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트집쟁이들을 대중(大衆) 앞에 나오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적어도 그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줄 무수한 말씀들, 아니 그들의 조롱을 억제하도록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줄 무수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작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재하는 하늘의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교리를 이 세상 이상의 것으로 높이기에 충분하다.

마태는 이전에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배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하나도 이 세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원수였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았던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지난날 그가 반대하던 교리를 변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 개들이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임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자. 또한 심지어 그들이 역사를 불신하도록 놓아두자. 그래도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이 외에도 교회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또 다른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전세계와 함께 성경을 억압, 전복하며, 혹은 인간의 기억에서 이를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을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고 하면 사방으로부터의 그 강력한 공격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만사에서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러한 일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서로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에 적지 않은 중요성이 이에 더하여진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등불로 삼아 빛을 발하게 하신 사람들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교리를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담보를 치르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를 확고부동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지나친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 밖에도 소수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게 변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의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을 확증하려는 인간적인 증거는 그 주요하고 우선적인 증거에 대하여 부차적인 보호자의 역할만 한다면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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