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5 03:56
일천번제에 대한 이해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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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3,994  
일천 번제(一千燔祭)에 대한 이해와 문제점  

박형택 목사 <화평교회, 한기총이대위, 현대종교편집위원>

이 글은 수년전 현대종교에 기고한 글로서 당시 일천번제 문제로 교계에 논란이 많을 때 현대종교의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이 글을 가지고 최옥석목사가 시비를 건 것입니다.

요즈음 일천번제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문의가 쇄도하고 있고 피해 사례도 접수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주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데 한 번에 만원씩 천 번을 하는 식으로 정한 금액을 천 번을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천 번의 헌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성도들이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서점에 가도 버젓이 일천번제 헌금봉투가 예쁘게 인쇄되어 팔 리고 있는 실정인 만큼 일천번제 헌금은 현하 한국교회에서 아무런 제재 없 이 행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천번제는 헌금뿐 아니라 기도에도 일천번제를 사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신 월동 동아교회(강창훈 목사)에서는 1,000일기도 즉 일천번제 기도를 2년 9개월 동안 매일 이어가고 있는데 천일 작정기도회의 힘이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강목사는 “1,000일 작정기도회”(예솔)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2001년부터 24차례 전국 목회자와 사모 세미나를 하면서 800여 개의 교회가 “1,000일 작정기도회”에 동참하여 성도들을 깨우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강목사의 책 내용을 보면 그가 합천 해인사에서 3,000 번 절을 하고 삭발한 후에 행자승이 된 일이 있었고 그후에 신유은사집회에 서 주의 종으로 변화 받았다고 합니다.

또 기도혁명교회(최옥석 목사)는 일천번제를 일곱 번 하는 칠천번제 예배를 드렸는데 기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일천번제본부” 산하에 기도총신연구원, 세계칠천번제본부, 칠천번제대성회, 세계기도올림픽, 세계 기도운동본부, 기도방송국, 기도타임지, 세계장로권사영성원, 신부단장원, 영적성경번역출판부 등 다양한 기관을 설립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심지어 태신자 전도를 위한 일천번제 전도운동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성 결교 류우열 목사). 그에 따르면 태신자를 정하고 그를 위해서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기도하며 관계를 맺고 전하는 방법인데 새벽기도시간에 헌금봉투를 준비하여 태신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일천번제 횟수를 기록하고 봉헌자의 이름도 기록한 다음에 1천원씩 천 번을 드리면서 기도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서울의 모 교회는 1997년 4월 6일 21세기가 되는 새천년이 1,000일이 남았다 며 일천번제에 동참할 것을 성도들에게 호소하였는데 결국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고유번호까지 부여해 가며 헌금을 드릴 것을 독촉하였는데 그 교회가 7천명정도 되었는데 70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일천번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굳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천번제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옳은 것 인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달리하고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기만 한다면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데는 전혀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성공위주의 시대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는 세상풍조인데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일천번제에 대한 이해와 그 문제점을 생각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일천번제에 대한 잘못된 해석문제입니다.
일천번제의 근거를 열왕기상 3장 4절과 역대하 1장 6절의 말씀에 두는데 문제는 일천번제(一千燔祭)를 일천 번(一千番) 드린 제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천번제는 일천 번씩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한꺼번에 드린 것을 말합니다. 즉 일천번제는(one thousand burnt offerings) 일천 마리의 양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을 말합니다. 역대하 7장 5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 낙성식에서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소가 2만2천이요 양이 12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물의 분량이 그 만큼 많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천번제를 일천 번의 제물을 드린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 다.

둘째는 그렇다면 단순히 해석상의 문제로만 그것을 돌리고 말 것인가?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이지만 일천번제가 기독교에서 행해진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천배, 2천배, 3천배, 만배 등 절을 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절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극 정성으로 빌면 소원을 이룬다고 믿는 불교의 신심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일천번의 제물을 드리면 그 만큼 정성이 커서 기도응답을 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설득력 있게 헌금을 강조하게 된 것이라 사료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의 일부 잘못된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의 헌금 걷는 방법으로 동원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헌금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잘 압니다. 심지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드리고 축복을 받았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별미헌금까지 만들어 헌금을 하게 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천번제 헌금이라 하여 작정케 한 것은 성경에는 없는 왜곡된 방법으로 헌금을 내게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헌금을 걷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잘못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셋째는 번제에 대한 이해입니다.
번제(燔祭/burnt offering)는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피를 내어 뿌리고 그 몸을 불태우는 제사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돈이나 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였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하여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이 번제였고 속죄제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산 제사(living sacrifice) 즉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12:1). 그런데 오늘 날의 일천번제는 완전히 왜곡되어 정성을 드린 후에 소원을 성취하고 응답 을 받겠다는 의도로 드려지고 있으니 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기 위하여 일천번제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번제라는 말 자체가 어떤 요구나 목적을 가지고 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희생이요 헌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번제가 헌금으로 둔갑하여 드려진다면 번제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일천번제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도 교회에서 일천 번의 제물을 드리는 일천번제를 시행한다면?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는 성도들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맡기기를 원합니다. 일천번제를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성도들 자신이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기대합니다.
목회자가 헌금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면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교회바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책이름은 “교회바로보기”라는 뜻을 줄여서 한 것입니다. 성도로서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 그리고 목회자의 잘못된 행동들을 소설형식을 빌어서 기록 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성도들도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서 옳은 것은 따르지만 그른 것은 따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 생각됩니다.

출처 : 한국기독교 이단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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