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8:15
젠더 이데올로기 문제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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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56  

젠더 이데올로기 문제와 비판

제3의 세계사적 혁명젠더 이데올로기 문제와 비판

시작하는 말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의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사회적 성, Ideologie)는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유사 종교)로서 지구촌의 사회와 가정에 광범위하게 파급되어 우리의 신성한 결혼 제도와 가정, 남성 여성 각각의 사명과 역할까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남자와 여자라는 양성(兩性)으로 이루어지는 결혼 제도, 가정과 생물학적으로 선천적으로 주어진 남녀 각각의 사명과 역할까지 해체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이루는 일부일처제라는 결혼 제도를 해체하고 대안으로 동성애적, 레스비적, 성전환적, 혼음적 형태가 ‘성적 다양성’(sexual diversity)이라는 표현과 명목을 가지고 동등한 가치를 가진 생활 공동체를 제안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이런 형태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반박하는 사람들인 정상적인 이성애(異性愛) 자들을 동성연애 혐오자(homophobia)로 취급하고 비난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이들을 사회 구조적으로 억압한다.

제1장 젠더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배경

1. ‘젠더’ 용어의 기원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사회적 성, ideologie)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좌파 페니미즘’(Marxist feminism)이 산출한 것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 의과대학의 뉴질랜드 출신 심리학자 존 머니(John Money, 1921-2008)가 1955년 이 단어를 응용(應用)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당시 젠더(gender)의 의미는 ‘성별(性別) 구분이 매우 애매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 즉 출생 시 남녀의 판명이 어려운 상태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존 머니는 성별(性別) 역할을 특정 지우는 결정적인 것은 생물학적인 천성이 아니라 양육과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실존주의 철학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도 같은 의미로 “여자는 여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페미니즘 운동에서 원래 영문법 용어에서 남녀를 가리키는 성(性)의 의미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화되어 ‘사회적 성(性)’을 의미하는 ‘젠더’에 의해 구축되고 바뀌어 가고 있다. ‘젠더’라는 단어는 원래는 양(兩) 상반성(Bipolarität)의 ‘성’(Geschlecht)의 개념으로 영문법 용어였다. 본래적(本來的) 의미에서 ‘젠더’란 생물학적으로 구성되는 남녀의 정체성, 신체와 정서에 있어서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性)이며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을 통칭한다. 대부분 사회는 특정 성(sex)에 부합되는 ‘젠더’의 특질이 있으며 사회 구성원을 그 방향으로 사회화 시킨다.

그런데 ‘젠더’라는 용어가 페미니즘(feminism)에서 이데올로기(ideologie)로 사용하면서 생물학적 성별(性別)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에 의해 교육되고 숙련된 사회적인 성(性)의 역할만을 묘사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에서는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성(性, Geschlecht, sex)을 비판하여 ‘사회적 성(性)’인 ‘젠더’(gender)가 생물학적 성(性)과 무관함을 강조한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여성들에게 부과된 것이라는 점을 특히 부각(浮刻)시킨다.    

그러므로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의 성(性)이란 태어날 때 주어진 성(性)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역할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젠더 이데올로기’에서는 남자가 심리적으로 여자가 되고 여자는 심리적으로 남자가 된다. 그래서 남자로서 동성애 하는 자가 게이요, 여자로서 동성애 하는 자가 레즈비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성평등’(性平等)을 실현하자는 논리를 펴고 이러한 성평등 실천은 더 나아가 수간(獸姦), 소아성애(小兒性愛), 근친상간(近親相姦), 일부다처(一夫多妻), 일처다부(一妻多夫)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2. 네오-마르크시즘

193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를 중심 한 아도르노(Theodor Adorno), 프롬(Erich Fromm), 벤자민(Walter Benzamin), 마르쿠제(Herbert Marcuse) 등은 마르크스(Marx)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연결하여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을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질 당시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alism)가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득세하면서 자유주의 하의 전통적 가치 구조를 모두 해체하고 기존의 질서를 모두 부인하는 사상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때 사회주의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사상의 변화에 맞추어 정통 마르크시즘에 수정을 가한 ‘네오-마르크시즘’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사회구조를 마르크시즘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던 걸 고민하던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문화혁명을 통해서 기존의 사회체제를 전복해야 한다는 것을 각성(覺性)하게 되었다. 이것이 네오-마르크시즘의 출현 목적이다. 네오-마르크시즘이란 공산주의가 쇠퇴하고 와해 되면서 시대를 이끄는 사상이 되지 못하자 막시즘의 새로운 분파로서 등장한 사상이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시 최고 이슈였던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을 마르크시즘(marxism)에 결합시켰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표면적으로 내세운다. 이들이 주장하는 휴머니즘은 바로 인권, 평등, 평화, 나눔, 정의, 소수자 인권보호 등 그럴싸한 구호를 내세웠기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를 강타하여 시대를 이끄는 주류사상이 되고 있다.  

‘동성애 인권운동’ 역시 이 같은 논리의 네오-마르크시즘의 ‘성(性) 정치학’(sex-politics)에서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던 사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늑대와 같은 ‘동성애 운동’이 ‘소수자 인권운동’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교묘히 현대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3. 빌헬름 라이히, 허버트 마르쿠제

‘성 정치학’(sex-politics) 이론에 있어 중요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반기독교적 유대인으로서 프로이드로부터 정신분석학을 배워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가장 급진적인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 1897-1957)이다. 라이히는 1927년과 1930년 사이에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마르크시즘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을 정식화했다. 이러한 1930년대 그의 사상은 ‘성 정치학’(Die sexuelle Politik)라는 저서로 출판되었다.

라이히는 마르크시즘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연결하여 프로이드-마르크시즘(Freudian Marxism)을 정립하였다.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분석이 말하는 자본가 계급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력 억압과 착취 그리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말하는 인간 리비도(libido, 성 본능, 성 충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억압과 착취 두 이론을 합성하여 ‘성 정치학’(sex-politics)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라이히는 ‘성적 욕구’를 억누르게 하는 문화는 잘못된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고 일부일처제 폐지, 성윤리해체 등 무제한 적인 성적 욕망의 추구를 정치이론화 한 운동가였다. 그는 1924년 정신분석학 모임에서 최초로 ‘오르가즘’(Orgasmus, orgasm)이라는 용어를 창안하여 소개하였고, 1927년 ‘오르가즘의 기능’이라는 책을 출판했으나 정신분석학의 원조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이 오르가즘 이론을 거부하였다.

라이히는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에 프로이드의 성적 욕망 개념을 넣어 성(性) 관념이나 도덕 윤리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解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개인의 성욕을 억누르는 사회적 제약을 해체하고 성(性) 해방을 실천하는 그의 ‘성 정치학’(Sexuelle Politik) 이론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일부일처제와 성도덕은 사회 모든 구성원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기독교 윤리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성 충동’과 ‘성 욕구’를 부인하게 하는 억압 교육을 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 문제로 간주했던 성(性) 이슈를 정치적인 이슈로 부각시켰고 ‘성 해방’(sex liberation)을 통해 짓눌린 인간 해방(human liberation)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이드의 ‘성(性) 억압’ 이론을 마르크스의 사회비판과 연결시켜 자본주의 사회요 기독교 사회인 서구사회가 만든 억압문화 체제 속에서 인간을 착취된 노동력과 억압된 성(性)을 해방시킬 때 개인들은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오-마르크시즘 추종자들은 빌헬름 라이히의 이런 ‘성 정치학’ 이론을 쌍수로 환영했다.

빌헬름 라이히와 더불어 네오-마르크시즘의 중심인물인 마르쿠제 역시 그의 책 ‘문명과 에로스’(Eros & Civilization)에서 “쾌락의 원칙을 따르는 인간의 본능은 자연스러운 생의 충동 에로스(Eros)에서 출발한다.”고 천명했다. 마르쿠제는 라이히처럼 인간은 본능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어야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성 정치’이며 ‘성적 쾌락’을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 문명체제는 인간의 쾌락본능을 억제해 그 성적 욕망을 필요한 생산에너지로 바꾸어 관리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므로 지식인들이 성(性)에 대한 ‘의식혁명’(意識革命)을 통해 기존 문명체제를 부정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의 주장은 결국 ‘성적 쾌락’이 행복의 근원이므로 모든 종류의 성적 행위를 인정하는 에로스사회 건설 즉 성매매의 합법화, 포르노 합법화뿐만 아니라 동성(同性) 간의 성행위, 어린이를 성행위의 대상으로 하는 소아성애, 수간(獸姦), 기계(器械) 성애, 시체(屍體) 성애 등 차마 언급할 수 없는 30여 종의 성적 취향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시킨다.

오늘날 서유럽의 국가들은 이러한 ‘성 정치학’ 이론을 추종하여 성적(性的) 방종(放縱)을 추구하는 학교 내 성(性) 교육과 성(性) 예술 성(性) 문화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미국은 물론 한국도 이런 문화 마르크시즘과 문화 좌파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4. 프랑스 68혁명

–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 아래 성 해방 문화혁명 –

1968년 5월 소로본대학(Université Paris-Sorbonne) 학생들 중심으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불합리한 사회구조의 개선을 기치로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은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아 구세대의 관습과 문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문화혁명이었다.  

68혁명의 저항정신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미국, 일본 등 전 세계적인 혁명운동으로 연결되면서 사회문화적 변동을 초래하게 됐다. 이것이 구조를 선험적(先驗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던 ‘초기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와 대립하는 것으로 구조의 역사성과 상대성과 탈 중심을 강조하는 사상인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운동이다.

68혁명은 이전의 자본가와 노동자, 제국주의와 식민지 등의 이데올로기 투쟁(鬪爭)을 넘어서 일부일처제 가족제도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 제도 그리고 가정과 성별의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문화혁명이었고, 성(性)을 정치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전통적으로 결혼과 가정과 양성(兩性) 제도에 억눌린 성(性)을 해방시키고자 ‘성(性) 혁명’을 시도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윤리(性倫理)도 해체의 대상이 되었고, 동성애자였던 푸코(Michel Foucault)가 대표적인 사상가였기 때문에 네오-마르크시즘을 추종하는 좌파는 동성애를 지지하게 되었다. 네오마르크시즘은 여성을 억압받는 대상으로 규정하여 기존의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마르크스 페미니즘(Marx-feminism)을 태동시켰고, 나아가 급진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도 나타났다. 이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와의 성관계를 거부하기 위해 ‘레즈비언으로서 살라’는 운동을 펼쳤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은 같이 움직인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性) 소수자라는 감성에 호소하고, 남성 위주의 현 사회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한 ‘성 정치’(sex politics)을 지향하여 모든 사람이 성(性) 평등하여 동성결혼을 허락하고 성(性) 소수자를 옹호하며 호주제 폐지, 대리모 출산의 정당화, 남근주의(男根主義) 타파, 여성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자들을 성(性) 소수자라고 명명하면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법적으로 보호받는 인권 범주에 들어가도록 투쟁했다.

5. 페미니즘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로

– 쥬디트 버틀러의 퀴어이론 창시와 젠더학 도입 –

‘젠더 이데올로기’의 선구자요 ‘퀴어이론’(Queer theory) 창안자 쥬디트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헝가리의 러시아 출신의 유대교 학자의 가정 출신으로 미국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가로서 1990년 전후하여 미국 버클리대학의 비교문학 교수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요 레즈비언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2012년 9월 프랑크푸르트시로부터 테오도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상을 받았다.

그 후 20년 사이에 쥬디트 버틀러의 ‘퀴어이론’은 많은 대학에서 ‘젠더학’(Gender-Studies)이라는 명칭으로 정규 학과목으로 채택되게 되었다. 버틀러에 의해 1990년대에는 젠더가 섹스를 결정한다는 ‘언설(言說) 결정론’이 등장했다. 생물학적인 성(sex) 구분은 잘못된 것이며 후천적 으로 성에 대한 학습에 의해 성(gender)이 결정된다고 주장하여 지금 서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중이다. 역시 네오-마르크시즘을 추종한다.

버틀러는 1990년 출간된 저서 ‘젠더 트러블- 패미니즘과 정체성의 도착’(Gender Trouble-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에서 ‘성의 불쾌감’(Das Unbehagen der Geschlechter)을 언급하면서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전복과 파괴에 관해 다루고 있다. 버틀러는 이 저서에서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섹스-젠더’ 이분법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의 ‘성 정치학’에 도전했다. 그녀는 ‘퀴어이론’의 관점에서 보봐르, 프로이드, 라깡, 데리다, 푸코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저서는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면서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그녀를 영미 지성계의 수퍼스타로 만들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남자와 여자, 부부와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본래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천성적인 의무가 없다고 한다. ‘젠더’라는 언설(言說) 실천이 그 효과로서 언설(言說)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섹스화 된 신체’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신체 그것은 이미 젠더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다. 섹스나 젠더 모두 철저하게 문화적인 사건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생물학적 성별에 기초한 모든 의무는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했다는 전제하에서 성(性)에 기초한 모든 구별을 근절(根絶)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그녀 주장의 불합리성과 무모함이 확인된 가운데서도 그녀는 ‘중성적 언어’(gender-neutral language) 예 컨데 ‘남학생’ ‘여학생’이라는 이분법 대신 단지 ‘학생’이라는 단순한 말로,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 대신 단지 ‘사람’이라는 말의 도입을 시도했다.

제2장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

21세기에 들어와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ie, 사회적 성 개념)는 젠더 주류화 운동(gender mainstreaming)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남녀의 생물학적 성별(性別)을 부정(否定) 또는 무시(無視)고 모든 남녀의 성적(性的) 동일성(同一性)을 주장한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유사종교(eine Quasi-Religion)의 성격을 가지고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의 결혼 제도에 대항하여 레스비안적(Lesbian), 게이적(Gay), 양성애적(Bisexual), 성전환적(Transgender), 퀴어적(Queer), 혼음적(group sex) 형태를 ‘성적(性的) 다양성(多樣性)’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괴기(怪奇)한 생활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런 ‘성차별 철폐 운동’(젠더 주류화 운동, gender mainstreaming)은 1789년 프랑스혁명, 1917년 볼세비키혁명과 더불어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제3의 세계사적인 혁명’으로 간주 되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봉건적 신분제에 대한 혁명이었고, 볼세비키혁명이 사회적 경제체제에 대한 혁명이었다면 ‘성차별 철폐운동’(gender mainstreaming)은 인간사회(人間社會) 형성의 기본 단위인 남성(男性)과 여성(女性)이라는 성(性)의 질서, 결혼, 가정이라는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문화 인류학적 혁명’(cultural anthropological revolution)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 같은 젠더 이데올로기(성차별 철폐 운동)는 다음 여섯 가지 문제점을 야기(惹起)하고 있다.

1. 생물학적 성(性)의 부정과 해체

자연법에 의하면 혼인과 결혼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兩性)의 평등을 기초로 한다. 여기서 양성이란 당연히 남성과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 성(性)은 태초에 창조주께서 세우신 신성한 질서이다. 따라서 이 두 성(性) 외에 다른 성(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자 국가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나 ‘성차별 철폐운동’(젠더 주류화 운동)은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관습인 인류의 수천 년의 전통을 부정한다.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상호 성적 끌림이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 삶의 기반을 형성한다는 근본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남자와 여자에게 천성적으로 주어진 상호적인 성적 이원성(二元性)이라는 천부적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성혼(同性婚)이 합법화되면 후손이 생산될 수 없으므로 가정은 해체된다. 가정이 파괴된 사회에서 우리 후손 세대도 사라지게 된다. 가정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출생해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사회와 국가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특히 출산율의 심각한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가 국가적 위기가 된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兩性)의 가치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 국가의 존립 자체를 결정하는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2. 무규범(無規範) 사회 지향

 – 자유, 인권, 해방, 평등, 소수자 보호 개념의 역(逆) 기능화 –

(1) 무책임과 방종의 자유

‘젠더 이데올로기’는 진리, 책임, 자유 개념을 ‘자유 방임주의(放任主義)’로 해석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설정해주신 참 진리와 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와 자유로운 복종을 해체(解體)하고 있다. 자기의 동물적(動物的)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 같은 행동은 짐승의 행위이지 인격과 지성을 가진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본능의 욕구를 규제 없이 행하는 것은 방종이다.

방종은 자유의 남용이요 타락이다. 남의 물건이 좋다고 소유자의 허락 없이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도둑질이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다. 책임 있는 자유인은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질서를 낳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군대 내 병영 안에서 동료나 하급자들에게 항문 성교를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과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군대 내 동성애는 군대 내 기강(紀綱)을 해이(解弛)시키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는 무책임한 행위로서 군형법상 처벌받아야 할 금기사항이다. ‘그러나 젠더 이데올로기’는 진리와 책임의 기능을 동시에 가진 자유 개념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무책임과 방종의 의미로 역(逆) 기능화시키고 있다.

(2) 해방과 혁명의 탈을 쓴 사악한 인권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인권(人權)’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와 틀을 인간 억압의 산물로 보아 이 억압에서 해방(解放)되는 것이 바로 ‘인권’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과거에 해방신학이나 혁명신학이 사용했던 ‘해방’이나 ‘혁명’이라는 단어 대신에 ‘인권’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오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해방’이란 자신의 생래적(生來的) 본성인 생물학적 성(남성과 여성이라는 본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 주장은 동성애자들이 성(性) 소수자로서 여태까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차별을 당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억지(抑止) 주장이다. 성(性) 소수자들은 시민사회에서 일반적인 상식적인 성(性) 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이지 시민사회가 이들에 대하여 명시적인 억압정책을 편 것은 없다.

동성애가 일반 성(性) 범죄 처럼 성폭력 형태 사건으로 발생하기 전에는 크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동성애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성(性) 소수자들로서 억압을 당해왔다는 피해망상(被害妄想)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하는 ‘해방’이란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노예제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기의 생물학적 본성(남성과 여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의 거스림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인간성 부정이다.

(3) 무조건 자기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공산주의적 평등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평등(平等)’이란 합리적 차별(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보수 차별,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차별 대우 등)을 인정하는 자유 민주주의적 평등 개념인 ‘상대적 평등’,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이들은 비전문 전문, 숙련과 비숙련, 무식과 유식, 남자와 여자 등의 상대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가 성(性) 소수자들을 다수의 정상인과  ‘무조건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절대적 평등, 결과적 평등을 주장한다. 즉 동성(同性) 간 성행위가 죄(罪)라 할지라도 존귀한 인간이 하는 행위이므로 일반적인 성행위와 무조건 동일(同一)하게 인정(認定)하고 존중(尊重)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등’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네오-마르크시즘은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성행위를 인정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며 평등 개념을 왜곡한다. 이런 주장은 절대적 평등, 결과적 평등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서 성행위에 대해 그 어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무조건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평등이란 그 가치판단이 종교적이든 신적(神的)이든 가치판단 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고, 불평등이며, 억압이라는 평등 개념이다.    

(4) 다수를 역차별하는 소수의 특권이 된 젠더인권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존중하라고 하는 ‘소수자 인권’은 보편적으로 사회적 억압을 받는 소수자들인 극빈자, 소외층, 어린이, 부녀자, 노년층이 아니다. 오로지 동성애에 관련한 성(性) 소수자들의 인권을 말한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동성애와 동성혼의 성(性) 소수자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다.

사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자기들끼리 은밀한 사적 관계로 이것이 이웃에 어떤 피해나 소요가 없을 경우는 이를 법적으로 단속을 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본인이 커밍아웃(coming out)하지 않는 경우 알 수도 없고 누구도 그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소행이 단체나 이웃들 사이에 불쾌감을 주고 공적 폐해(동성애 추행이나 동성애 성폭행)를 야기할 때 일반 성추행자나 성폭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기들 소수자 권익을 지킨다는 것은 그 근거가 약하고 미흡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이들은 한 걸음 더 나가 마르크시즘의 무신론(無神論)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배제(排除)한 채 휴머니즘(人本主義, humanism) 즉 인권, 평등, 평화, 소수자 인권 보호 등의 개념을 왜곡되게 정립하여 개념의 혼란을 조장하고 이런 혼란을 기반으로 이들이 원하는 무규범(無規範, anomie) 사회를 세우는 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며 목표하는 세상이다.    51

3. 전통적 규범의 결혼, 가정, 사회제도 해체

(1) 아버지를 아버지라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세상

네오마르크시즘(Neo-Marxism,)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하였고 세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네오마르크시즘은 종속이론(從屬理論), 남미의 해방신학 등과 연계하여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문화변혁 이론으로 등장했다. 1960년 이후 서구사회는 인권의 가면을 쓰고 기존 사회에 문화변혁 이론으로 등장한 네오마르크시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소수자의 ‘인권 존중’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평등법’ 등이 통과되어 동성애(同性愛)뿐 아니라 동성혼(同性婚)을 인정하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양성(兩性)의 폐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질서를 멸시(蔑視)하고, 도전(挑戰)하고, 위협(威脅)하는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의 또 하나의 다른 광경이라고 볼 수 있다.

2014년 영국에서 ‘동성애 법’이 합법화되었을 때 동성애자는 2%밖에 안 되었고 기독교인은 80%였다. 그런데 80%의 기독교인이 잠잠해서 영국 교회는 현재 빈사(瀕死) 상태에 있다. 과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통치했던 나치의 독재 정부 시절 독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도 대항하지 않고 잠잠했었다. 그 결과 나치주의는 독일과 그 주변 국가들에 상상을 초월한 재앙을 맞게 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도 관용이라는 미덕을 내세워 동성애 물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바마 정권의 동성애 합헌화에 두 손을 들었다. 미국 내 여론조사 결과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수(유진 피터슨이 그 실례)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문화가 미치는 영향력’과 ‘교회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최근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진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비율이 최근 10년 동안 14%에서 35%로 2배 가까이 증가했고 백인 청년 복음주의자들의 경우 동성결혼 지지율이 약 절반에 가까운 47%인 것으로 나타났다.(“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증가한 이유? 문화가 미치는 영향력과 교회의 실패가 원인으로 꼽혀,” 크리스천투데이, 강혜진 기자 입력 : 2017.07.04. 18:50)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금지법’은 오늘날 서구사회에 심각한 사회적 역차별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캐나다의 어떤 기독교대학은 동성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주 정부가 로스쿨을 허가해 주지 않아 법률가를 교육시킬 권리를 박탈당했다.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턴시의 다섯 명의 목사들은 시(市) 당국으로부터 성(性) 정체성이나 동성애에 대하여 언급했다는 이유로 설교, 연설, 교인들에게 보낸 이 메일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6세부터 실시되는 학교 교육에서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내용을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일들은 현재 북미와 유럽 등의 이른바 선진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오늘날 영국,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유치원에서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용어 사용이 금지되고 젠더 중립적 용어로 대치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성애 부부들이 입양한 자기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결여(缺如)되고 있는 양성(兩性) 부모에 대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이들 나라 유치원들은 유치원 아이들 사이에 ‘엄마’ ‘아빠’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합리에 강요되고 있다.  

이처럼 이들 동성애자에게는 어떤 경우든 비정상(非正常, abnormalcy)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동성애자들에게는 남성과 여성이란 양성 인정이 ‘정상적이라는 관념은 타부’(the concept of normal is taboo)요 ‘이데올로기적 의심’(ideological suspicion)에 부쳐지는 것이다.

(2)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서구사회의 동성애 물결은 서구교회의 세속화(世俗化)와 신학의 자유주의화(自由主義化)에 기인한 것이다. 교회의 세속화와 성경적 올바른 신학의 부재(不在)로 교회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가 이를 수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이 동성애가 위헌(違憲)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이미 한발 앞서 미국의 공교회(PC USA, 연합감리교, 그리스도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가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동성애 성직자들 안수(按手)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 여파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으며 남녀 결혼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캐나다에서 소아성애(小兒性愛, 성인이 소아를 상대로 한 변태적 성행위)도 정상적인 성적 취향이므로 법적으로 인정하라는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독일에서는 동물매춘(動物賣春)과 인간매춘(人間賣春)이 동일한 매춘가격으로 병행하여 운영되고 있다.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합의(合意)에 의한 부모와 자식 간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성관계도 합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반대하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성(性) 소수자 인권을 의미하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한다는 이유를 들어 기독교에 대하여 맹비난을 퍼부음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과 반(反) 기독교 정서가 팽배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들의 ‘성(性)차별 철폐 운동’(gender mainstreaming)의 영향으로 인해 서구사회에서는 부부와 가정의 성경적 질서가 소위 케케묵은 가부장적 전통에 묶인 것으로 취급받고 그 가치가 의문시(疑問視)되고 있는 반면에 소위 ‘젠더’(gender, 사회적 성)의 가정생활 공동체의 다양성은 인정받고 선전되고 있다.

이 같은 동성애 성향 가정의 다양성은 독일 개신교회(EKD)의 니콜라우스 슈나이더(Nikolaus Schneider) 의장에 의해 옹호되어 2013년 독일 개신교회에 의해 출판된 ‘가정 준칙’(Familienpapier)에서 나타나고 있다.(Peter Beyerhaus, Widersteht gegen Gender-Ideologie!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라! 2016년 6월 10일 「기독교학술원」 제10회 해외석학 초청강연) 

이 가정 준칙은 “자율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가정을 신뢰할 만한 공동체로서 강화시킨다.”고 하여 전통적 부부에 의한 가정 관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가정 준칙에서 전통적 가정과 부부 외에도 동성애 부부 등 다양한 생활 공동체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여 제기된 모든 복음주의자의 반박들이 지금까지 독일 개신교회(EKD)의 지도부로부터 냉담하게 무시되고 있다.

4. 동성애 수용교회는 성경의 성차별 언어 해체 중

‘젠더 이데올로기’는 동성애 허용 교회와 신학교에 미묘하고 정교한 형태로 들어와 있다. 젠더주의(genderism) 추종자들은 성경공부와 모든 예배의 메시지에 동성애자들의 ‘포괄적인 언어’(LGBTQ, 동성애, 양성애, 혼합성애, 이성애, 트랜스젠더, 퀴어 등)를 도입하고자 한다. 또 젠더주의를 수용한 퀴어신학자들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절대적 구분이 아니라 상대적 구분으로 보고 한 몸을 이룬다는 가정의 질서가 창조 본연의 질서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창세기 본문은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룬다.(창 2:24)고 가르치고 있다. 퀴어신학(queer theology)은 이것을 부인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는 한 몸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창조 질서는 남녀라는 짝으로 지으셨고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지는 짝이 결합함으로써 생물학적 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퀴어신학은 생물학적 성(性)의 질서를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생물학적 몸을 부인하고 사회적 심리적 성(性)을 인정하는 해석으로 기울고 있다. 퀴어신학은 동성애를 성(性) 소수자로서 부당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로 보고 또 인권 차원에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보아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이들은 동성애가 성(性)중독의 질병(변태 성)이라는 사실은 은폐(隱閉)하고 있다. 이들은 명확한 성경 본문을 보면서도 이런 가증한 행위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소위 ‘공정한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라는 제목 아래 현대적 중성적인 번역판이 여권(女權) 운동자들의 주도 아래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번역판을 보면 원문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칭호 사용을 비켜 가고 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이라는 말은 ‘남성 제자들과 여성 제자들’, ‘추종자들’이라는 말은 ‘여성 추종자들과 남성 추종자들’이라고 풀어서 쓰고 있다. 기도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남성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들 즉 주여(Herr), 아버지(Vater), 선생님(Meister)과 같은 호칭들은 기피되거나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5. 동성애 독재 정치가 목표

– 젠더 중심 세계관으로 폐쇄된 이데올로기 –

‘성(性) 차별 철폐론’(젠더 주류화 운동, gender mainstreaming)을 깊이 살펴보면 ‘젠더 이데올로기’가 현대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폭력적이며 비민주적(非民主的)인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 ‘젠더 이데올로기’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性)에 대한 존엄성과 수치감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이성(異性)과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과 그리고 성경적으로 계시 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표현하면 자신의 주장과 사상에 대한 수용성과 관용성을 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와 다른 사상과 도덕에 관해서는 극단적으로 배타적(排他的)이고 모든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적극적 저항과 혐오를 선동하고 차별금지법으로 역차별을 가하는 동성애 독재(homosexuality dictatorship)라는 성(性) 정치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며 수용과 관용을 요구하나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부르조아들로 매도하고 극도로 증오(憎惡)하는 독선적 태도와 동일하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인권(人權)을 빌미로 실재로는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언론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모두 빼앗는 독재법(獨裁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소수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위장 하에 다수의 비판 정신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법을 산출하도록 하는 폐쇄된 이데올로기이다.

6. 젠더 유토피아 추구

– 젠더를 인간 내면성의 구심점으로 정립 –

‘젠더 이데올로기’는 그 발단과 전개 과정에 있어서 절대성(絶對性)과 배타성(排他性)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기본형태를 따르고 있다. 마치 이상주의자들에 의해 고안된 현대적 세계관과 같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자기들만의 내면의 세계의 원칙에 기초해서 우리가 사는 현실을 설명한다. 그 원칙이란 성(性)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관습(慣習)에 따라 주어진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을 부정하고 사회적 성(social sex)만을 인정한다. 즉 성(性)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後天的)으로 자기가 자기 성(性)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사회 현실을 마르크스에게서 빌려온 유토피아적인 목적과 그 상응한 방법으로 총체적으로 바꾸려고 한다. ‘젠더’(gender)라는 사회적 성(性)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현실을 성(性) 혁명의 유토피아로 바꾸려는 것이다. 성(性)의 금기나 제한 없는 성적 쾌락으로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BC 270)적 유토피아(utopia, 이 세상에 없는 장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라는 말(그리스어 ‘없는 ou’와 ‘장소 toppos’의 합성어 즉 ‘없는 장소’)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처소(處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망상(妄想)에 불과하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 내면세계 원칙은 소위 젠더(gender, 사회적 성)이며 젠더를 그 구심점에 세우는 것이다. 즉 오늘날 인류가 정신적 사회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주요 사상적 물줄기의 중심과 그 역할을 젠더(gender)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젠더라는 ‘사회적 성’으로 지배되는 인류학적 혁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추구한 물질(物質) 중심의 무산자(無産者) 계급 유토피아 환상을 젠더 중심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무산계급 유토피아가 환상에 끝나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빌려다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에 억눌려 있는 성적(性的) 억압을 분출(噴出)시키고 해방시키는 문화적인 방식의 사회혁명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다른 전통과 규범을 존중하는 정신 운동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전락될 뿐 아니라 그런 정신 운동의 진리성과 생존권까지 박탈한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兩性) 관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혐오(嫌惡)하고 거부(拒否)한다. 특별히 부부와 가족의 구성을 위해서 그리고 집과 학교에서 자녀의 양육을 위해서 표준이 되는 성경의 권리와 자격을 박탈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서구문화의 기초였던 기독교 진리가 성(性)차별 철폐론의 주적(主敵)이 되었고 유토피아를 통해 젠더(gender)로 대체 흡수된 상황이 되었다.(Peter Beyerhaus, Widersteht gegen Gender-Ideologie!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라! 2016년 6월 10일 「기독교학술원」 제10회 해외석학 초청강연) 

만약 ‘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이 계속 진행되어 대한민국에서 미국처럼 ‘동성애 허용 헌법개정’까지 이루어지게 된다면 이제까지 정립(定立)되어 온 우리 사회는 본질적인 모든 측면에서의 분별력(分別力)을 잃어버리고 사회 질서(秩序)들이 해체(解體)됨으로 인해 대혼란(大混亂)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혼란 후에는 동성애자들의 독재적 폭정(暴政)이 뒤따르게 될 우려(憂慮)를 낳고 있다.

3젠더 이데올로기 비판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동성애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동성애를 인권과 결부시킨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性) 소수자로서 여태까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박해와 차별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점령한 후 자신들의 주장을 유엔의 ‘보편인권 선언’과 결부시켜 자신들의 주장을 인권 차원에서 정당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성찰해보면 동성애는 성중독(性中毒)이며 절대 인권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동성애가 성중독(性中毒)이라고 진실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판을 가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법적인 처벌을 받도록 하는 역차별(逆差別)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 사랑, 관용, 정의, 평등, 차별 등 인권과 연계된 개념들이 모두 다 젠더주의(genderism)로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자유 개념의 사유화(私有化)

– 젠더 이데올로기의 자유는 자유방임적 무책임한 자유이다. –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전통적인 자유 개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한다. 전통적 의미에서 자유란 외부적 강제 없이 양심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예전 군부 독재 시절 정치적으로 유신헌법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 요구는 다수 시민의 정치적 의사 표시를 대변하는 미덕으로 간주 되었다.    

공산국가 중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보의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 요구는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면서 8년 감옥에 있었던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이런 공산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자유 요구는 사회적 다수가 가져야 할 공동체의 자유와 진리에 대한 양심의 소리와 책임감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회적 다수들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공동선(共同善)에 기여 하는 자유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이런 공동체에 기여 하는 선과 책임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기분(氣分, subjective whim)을 주장한다. 이들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말하지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즉 자유 방임(放任, laissez-faire)만 주장한다. 개인적인 기분(氣分)으로 환원된 자유 개념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의 결과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자유는 진리에 부합(符合)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주관적 욕망(慾望)에 의해 지배된다.

이들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비(非)이성적 주장을 한다. 이같이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태어남’을 선험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문제가 아니라 진리문제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모든 인간의 이런 보편적인 성적(性的) 질서와 관련하여 명백한 진리(생물학적 남자와 여자로 태어남)를 거부하는 것이다.  

 독일의 반(反) 동성애 여성 운동가 가브리엘 쿠비(Gabriele Kuby, 1944- )가 지적하는 것처럼 가족이란 마음속 갈급함을 채워주는 공간이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따른 신실한 사랑은 생명을 가져온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오직 자기 성욕(性慾)만을 충족하겠다며 이를 모두 무시하고 있다. 쿠비가 분석한 것처럼 “그 결과 한 생명을 잉태하는 책임감, 결혼 서약은 무시한 채 성행위 파트너가 남자든 여자든 동물이든 상관 않고 성욕만을 해소하려 한다.” “성적 자유를 앞세운 ‘젠더 이데올로기’가 법률 강압을 통해 기독교 가치관을 공격하는데 그 최종 목표는 가정의 해체다.”이다.(쿠비, ‘동성애 쓰나미’ 맞서 전통가정 소중함 외쳤다. ‘서울 글로벌 패밀리 컨벤션’ 2017.06.05. 글=백상현 기자, 사진=신현가 인턴기자,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59553&code=23111111&cp=nv)  

쿠비가 우려하는 것처럼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자유는 오히려 우리를 성적 쾌락의 노예로 만들며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뿐이다. 성적 문란함은 인간 정체성의 파괴를 초래하고 사회의 성적 타락은 새로운 동성애 전체주의를 잉태한다.

이런 자유 즉 진리(眞理)와 선(善)과 책임(責任)에서 벗어난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의 자유 주장은 타자(他者)에게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자신과 공동체가 누리는 자유의 축소를 초래한다. 한 개인의 동성애 행동은 그 가정이나 집단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유발함으로써 그가 속한 공동체의 정서와 질서가 훼손된다. 17세기 영국 정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말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야기 된다. 이런 사회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2. 사랑 개념의 성적 탐닉화

– 그들은 이성적(異性的) 관계를 동성적(同性的) 관계로 변형시킨다. –

하나님은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하고 확고한 서로 다른 성(性)으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은 놀랍게도 뇌와 신체 구조 등에서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둘은 성(性)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고 훗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을 때 좋은 상호작용(相互作用)을 하게 된다.

이같이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差異)에서 이성애(異性愛)는 결혼과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생산하고 인류 존속(存續)을 가능하게 한다. 이성애는 남편과 아내로 서로 인격적으로 보완(補完, 돕는 배필)하도록 하여 참 인간 존재에 이르도록 성숙하게 한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에게 천부적으로 심겨진 사랑의 본연(本然) 질서이다.  

그러나 동성애자(同性愛者)들의 사랑 개념은 부부(夫婦)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에로스적 사랑이기보다는 성적(性的) 탐닉(耽溺)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동성애자의 사랑을 인정해야 한다’는 진보신학자들의 주장은 부도덕을 조장하는 것이다. 전문가들 보고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이 말하는 사랑은 수백 명의 성관계 파트너와 함께하는 문란한 성관계를 말하며 극단적으로 성욕을 추구하다 보니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앓고 평균수명이 일반인보다 20년가량 짧고 자살률도 높다고 한다.

2017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쿠비는 “동성애자들이 말하는 ‘사랑’은 신실함, 헌신, 생명이라는 가정과 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절대 충족시키지 못한다.” “동성애자들은 성욕 해소에 집착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내가 성을 결정한다.’며 자신이 창조주 역할까지 하려고 한다. 이같이 하나님을 떠나 육체적 ‘욕망의 노예’로 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인간적인 존재를 무너뜨리는 행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결혼이 갖는 속성(屬性)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주신 것으로 신성(神聖)한 것이다. 건강한 가정은 자녀가 한 남성 한 여성으로 성장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자녀들을 낳아 건강하게 돌보는 데 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자녀는 결혼 후 손주라는 생명을 부모님께 보여드림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쿠비가 피력한 바와 같이 가족이란 마음속 갈급함을 채워주는 공간이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신실한 사랑은 무조건적 생명을 가져온다. 이 같은 사랑은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가치다. 그러므로 전통적 가정과 결혼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무한한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3. 관용 개념의 사유화

– 그들의 관용은 선과 악의 구분을 폐지하고 자신들의 악을 선으로 선언한다. –

관용(寬容)이란 어떤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나 상대방의 다른 견해와 태도에 대하여 참고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관용이란 악(惡)도 자기들이 하면 다 선(善)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선(善)이라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처럼 관용은 선(善)과 악(惡)을 구분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는 주로 절대군주 통치자들에 대해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런데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이 관용을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폐지(廢止)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惡用)한다. 이들에게 진리가 존재한다는 순수한 선언 자체는 불관용(不寬容, intolerance)으로 간주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관용(寬容)의 진리를 가르쳤으나 비(非) 진리 즉 죄(罪)를 인정(認定)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 사랑으로 모범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에게 원수까지 사랑을 가르치셨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罪惡)까지 용납(容納)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죄 없으신 그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임당한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그 증거이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관용이란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진정한 관용이란 비(非) 진리까지 인정(認定)하고 수용(受容)하는 것이 아니다. 관용이란 자기와 다른 생각과 신앙에 대해 이를 정죄(定罪)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고 바로 서기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용은 거짓과 비(非) 진리를 용인(容認)하는 것이 아니며 관용이라 하여 죄악 된 행위(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폭력, 마약 등)까지 허용(許容)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은 양심이 강요되지 않으며 거짓이 묵인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善)과 악(惡)을 구분(區分)하고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에 거(居)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a-32) 그런데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도리어 진리를 박멸(撲滅)하고자 하는 것이다.

4. 정의 개념의 왜곡

– 그들의 정의는 소수자로 자처하는 그들의 사악한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다. –

정의(正義)란 권리와 의무의 정당한 주고받음을 통해 개인이나 기관의 사회적 기본 구조(構造)에 대한 관심의 균형(均衡)을 말한다. 정의는 공평(公平, justice)한 일은 공평하게 불공평한 일은 불공평한 것으로 다루어 모든 일이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불공평한 일이 공평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그 결과는 불의(不義, injustice)다.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모든 것을 각기 본래(本來)의 속성에 따라서 대하라.’ ‘각자 해당의 정당한 몫을 주라.’(suum cuique)는 보편적인 법적 원칙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원칙이 정상인들(대다수인 이성애자들)을 자신의 변태(變態)에 종속(從屬)시키려는 비정상인들(성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극단적 페미니스트(feminist)와 성소수자(LGBT) 행동가들에게 정의란 각 사람이 그의 젠더 즉 성(性) 정체성을 맘대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정의란 게이(남성 동성애자),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이 결합하고 생명기술(biotechnology, 시험관 아기)을 이용 그들의 자녀들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런 정의는 성경적 올바른 정의가 아니라 ‘성(性) 정치’의 정의다. 이런 ‘성(性) 정치’는 국가 권력이 성(性) 소수자들의 강요(强要)대로 정상적 성(性) 다수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 예로 현재 한국은 에이즈(AIDS, 후천면역결핍 증후군,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 감염 동성애자 1인당 1년 치료비가 3천만 원으로 이들의 연간 의료비는 3천억 원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비용 전액을 국민의 세금으로 정부가 부담한다. 한국에서는 에이즈 감염이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로는 전체 감염인 중 92%가 게이들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에이즈 치료비 부담에 있어 정상인들의 질병 치료비 부담보다 엄청난 특혜를 누리는 불공평을 야기하고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입만 열면 객관적으로 다른 것(동성애)도 공평한 것(정상적인 것)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공평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법체계가 세워진 정의 원칙의 도착(倒錯, reversal, 거꾸로 됨)이다.

5. 평등 개념의 왜곡

– 상대적 평등을 무시한 자신들만의 절대적 평등만 요구한다. –

평등(平等, equality)은 구성원들 가운데 일하는 기회의 균등과 일한 만큼 동일 보수(報酬)가 돌아가는 것이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의 주장처럼 관용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악(惡)까지도 선(善)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공평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등과 불평등을 결정하는 비교의 제3자(tertium comparationis)이다. 비교의 제3자에 의해 두 대상이나 사람이 비교되어서 같은 점과 차이점이 결정된다. 결혼이란 두 파트너 사이의 이성(異性)적 끌림이 있어야 하며 후손을 생산하여 가족을 만드는 능력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극단적 페미니스트(feminist)와 성소수자(LGBT) 행동가들은 ‘젠더 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성(性) 소수자를 나타내는 LGBT는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LGBTAIQ는 이 LGBT에 무성애자(Asexual), 간성(間性, Intersex,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문(疑問, Questioner)을 더한 것이다. 인도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히즈라를 H로 표기하여 포함하기도 한다. LGBTAIQOC는 위의 용어에 이성 복장 착용자(crossdresser)를 추가시킨 용어이다.

한국도 퀴어행사 등의 영향으로 최근 동성결혼과 성(性)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제기됐다. 범성애자(opensexual. pansexual)라고도 하는 이들은 하숙방 여성, 부엌의 남성, 갈비 속의 태아들의 이상(理想)에 따른 남자와 여자 사이의 ‘실체적 평등’(substantive equality)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실체적 평등 주장은 남자 여자 사이에 생물학적 정신적으로 존재하는 성별(性別) 차이를 무시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관계와 동성끼리의 성관계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부부가 아닌 남성과 여성이 성(性) 평등이라는 핑계로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는 것처럼 남성끼리 그리고 여성끼리 성관계가 성(性) 평등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동성(同性) 간의 성관계를 부부 아닌 이성(異性) 간의 성관계(간통)와 같은 평등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위례별초등학교 영어교사인 최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성(性) 소수자들의 축제 영상을 보여주어 사회에 논란을 일으켰다. 최 교사 자리 칸막이에는 무지개 깃발과 포스터 등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남자는 다 짐승? 그렇다면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의 몸이 아닌 목줄입니다.”는 살해(殺害 ?)를 의미하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도 있었다. 최 교사는 지난 5월부터 학교 내 ‘페미니즘 북클럽’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교감을 포함 이 학교 교사 58명 중 21명이 여기에 가입했다. 최 교사와 함께 이 동아리 활동을 한 다른 교사들도 아이들을 상대로 성(性) 평등 교육에 나섰다고 알려졌다.([속 깊은 뉴스] “혁신학교 수업 재량권 줬더니… 편향된 성평등 교육,” 최아리 기자김은중 기자, 입력 : 2017.08.26 03:10; 조선일보 A10,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6/2017082600076.html )

또 최 교사는 2017년 7월 17일 6학년 3개 반을 가르치면서 수업 시간 내내 자신이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queer)행사에 참여해 찍은 자신의 영상을 보여주며 동성애에 관한 얘기를 했다. 최 교사의 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부모에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남자끼리 뽀뽀하는 사진을 보여줬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영어 예문을 거의 she(여성 인칭 대명사)로만 들었다.” “선생님이 여자아이들만 예뻐하고 남자아이들을 면박 준다.”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한 학부모는 “최 교사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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