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14:15
정통주의.합리주의.청교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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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82  

정통주의

 

   정통은 좋은 의견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단이나 이설과는 반대되는 올바른 의견, 신앙을 뜻한다. 정통이란 기독교의 계시적 진리 내용이 정확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상 보편적 교회에서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개념은 2세기 이후 영지주의와의 투쟁과 삼위일체 논쟁 및 기독교 논쟁을 통하여 교회에서 중요시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총 및 인간의 의지와 성례의 문제 등에 대해, 교회는 각각 자기 교파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신앙고백을 성문화하여갔고, 상대방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경쟁적인 논쟁을 벌였다. 보통 1559년부터 1662년까지를‘정통의 시대’라고 부른다. 전통은 교회 회의나 신조나 공인된 교부의 가르침이나 예전의 관습을 말한다.

  개신교는‘올바른 의견’이나 올바른 교리라는 의미로 정통주의라 한다. 정통주의는 역사상 모든 세기의 기독교 사상 논쟁에서 중심에 위치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먼저 정통주의 사상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칼빈이나 루터의 주관적 신앙의 체험을 객관화한 객관성에 있다. 이런 정통주의의 객관화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1)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문제-인간은 제도나 관습이나 예전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2)또 인간이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확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정통주의는 성서만이 그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성서는 해석의 대상이다. 개신교에서 성서는 그 자체가 해석한다. 성서는 그 시대의 역사적 환경과 실존적 상황에서 기록되었기에 역사 비평가들은 성서가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서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정통주의의 원리이다.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큰 함정은 정통적이면서도 죽은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리에만 머물고, 어떤 교리적 신학을 수립, 변증, 연구하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사귐, 만남을 잃어버릴 때이다. 교리는 그 인격을 알게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인도해주는 수단인데, 교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적으로는 뛰어난데, 인격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없는, 어떤 친밀함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뛰어난데,‘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죽은 정통주의자가 될 수 있다. 생명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아는’데 있지, 주님에 관한 성경적 지식을 이론적으로 많이 아는데 있지 않다.

 

경건주의

 

   17세기 말, 형식화한 독일 루터 파에 반대하여 신교新敎교회에서 일어난 종교 운동이다. 성서 연구에 의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충실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계시 신학에 대한 자연신학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정통주의에 대한 다른 형태의 비판이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동기는 교리의 비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루터의 신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루터는 경건 문학의 고전 ‘독일신학’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가 받은 신비주의적 영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종교 개혁 안에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건주의라고 하는 반정통주의적 운동으로 다시 선언되었다. 이 운동은 먼저 17세기 독일에서 일어났고 스펜서와 프랑케 다음에는 영국의 감리교를 일으킨 웨슬리와 그 형제들 그 후 성령운동에 기반을 둔 여러 종파 운동에서 나타났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진실로 누가 정통주의인지 싸웠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으며 참회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엄격한 교리 즉 세세한 교리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하였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자기들이 정통주의라 불렀다. 왜냐하면 정통주의가 객관성을 띤 학문이라면 구원의 경험이 없는 자라도 신학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대신 경건주의는 거듭난 자라야 비로소 신학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자신들을 정통주의라 불렀다.

경건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을 ‘비중생자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정통주의는 신학이 객관적인 학문인 이상 우리가 거듭나 있든 거듭나 있지 않든 충분히 타당성 있는 신학을 논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존웨슬레나 프랑케나 진젠도르프처럼 결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나는 중생을 실제로 경험했기에 신학자다 될 수 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생의 앞뒤의 구별을 그처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통주의가 루터나 칼빈이 경험했던 중생의 경험을 무시했던 것을 경건주의가 다시 끄집어내어 화석화된 사상체계를 깨뜨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믿음은 좋은데 신앙생활은 엉망’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전반에 신학적 수준과 지식과 저작들은 풍성해졌다. 설교와 신앙서적도 과히 홍수라 할 만 하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혹자는 스님에게서는 수련하는 자의 향기가 나고, 신부에게서는 종교인의 향기가 나지만, 개신교 목사에게서는 기업인의 향기가 난다라고 표현했다. 부끄럽게도 그 말이 피부로 와 닿는 것은 교회는 많지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공감에서이다. 서둘러 교인에게 직분을 남발하고 떠안기는 이유가, 제자 삼는다는 그럴싸한 미명 하에 그들을 교회성장을 위한 디딤돌로 쓰려는 속셈이 깔려 있음을 심심찮게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없는 교인들을 속성으로 양산하는 한국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삶의 변화에서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 경건주의 운동의 강조점이 한국교회에 고려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합리주의

 

  합리주의, 합리론 또는 이성주의는 모든 사물을 판단할 때 이치로 명료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즉, 본능이나 감각적인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지니는 사고력, 이성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어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사물을 처리하려는 태도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감각적인 욕구에 바탕을 두어 사물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종교적인 신앙, 사고를 초월한 신비적인 것에 근거를 두려는 태도와 대립한다.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 사이에 지극히 중요한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다.

1)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의 연구 결과로 일어난 과학혁명. 2) 데카르트의 철학적 혁명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이 세계 속에 놓여진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기독교 시각에서 보면 17,18세기에는 기독교 시각에서 보면 문화가 교회와 신학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계몽주의는 국가와 사회가 교회의 통제로부터 해방되고 세속적인 성격을 띤 문화의 출현을 의미했다. 근대의 사회학 이론이나 정치학 이론은 성경적 계시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자연인의 이성과 사회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거를 객관적인 권위로서 성경이나 교리에 두기보다는 주관적인 자기 개인의 경험에 두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함께 새로이 발견된 과학적 지식을 기독교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그 당시 교회의 커다란 당면 문제였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의미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적인 교리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하면 아무에게나 가르칠 수 있을까? 가르침을 단순화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단순화는 점점 합리화가 되었다. 교리가 더 잘 이해되기 위해서는 더 합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로마교회의 신자와는 달리 우리는 모두 자율적이기 때문에 평신도가 되었든 성직자가 되었든 자신이 교회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어떻게 해야 이해시킬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이해시키려면 이성이 요구되어진다. 정통주의의 하부구조는 자연신학이고 자연주의 신학은 합리주의 신학이다. 합리주의 신학이 계시신학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합리주의 신학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을 통해서 순수 이성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신학을 세우려고 시도한 신학이다. 합리주의 신학은 이성에 바탕을 두었다.

다윈이 1885년 종의 기원 The Origin of Species)을 발표하자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간 창조의 성경적 이해가 곤란하게 되었다. 다윈이 주장한 “인체 내의 보다 저급한 인간 기원의 흔적”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창조 교리 사이에는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상이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교회들은 성경적 창조론보다 진화론의 가설 아래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에서 부르짖은 성경의 절대 권위는 과학과 이성의 심판대 앞에 여지없는 공격을 받게 되고 고등비평가의 집도 아래 성경은 갈래갈래 해부되고 말았다.

 

  비교 종교학의 연구가 성경 연구에 도입되고 역사 비판학이 성경의 진위성을 가리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합리주의의 여과를 거쳐 하나의 문화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1880년대의 미국 강단에서 묘사된 그리스도는 하나의 훌륭한 문화적 이상에 불과했다.

남북 전쟁 이후에 일어난 미국 경제의 부흥과 과학 문명의 발달, 생활수준의 향상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구원과 내세를 약속하는 정통주의 신학을 외면하게 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예찬하는 낙관주의적 현대주의 신학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이와 같은 신학적 좌경에 새로운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로 두 가지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결과 신유의 은사를 앞세우는 경건주의 계통의 운동이요, 둘째는 복음적인 교리를 내세운 근본주의 운동이다.

 

청교도주의(Puritanism)

 

16세기 말과 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종교협정 이후 존속되어온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습으로부터 영국국교회를‘정화’하고자 노력했다. 모든 생활에서 도덕적․종교적 진지성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전 국민의 삶에 확산시키려고 했다. 국가를 변혁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내란으로 이어졌고, 청교도적 생활방식의 실용모형으로 미국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1560년대의 제의 논쟁 과정에서 생겨났는데, 청교도들 중 다수는 영국국교회의 정치 형태를 장로중심제로 만들기 위해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개혁이 지체되는 것을 우려한 다른 청교도들은‘지체 없는 개혁’을 결의했다. 이‘분리주의자들’은 영국국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의 계약에 근거를 둔 자발적 회중을 형성했다. 두 집단 모두 기존 체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특히 분리주의자들이 받은 탄압은 더 심했다.

기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당한 청교도인들은 설교와 소책자 발간으로 관심을 돌렸고, 종교적 표현, 사회적 행동과 조직을 통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가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귀족과 의회의 후원뿐 아니라 옥스퍼드, 게임브리지의 여러 대학과 교수단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계약 공동체를 수립하여 거룩한 공화국을 실현하려고 한 청교도들의 이상은 토머스 데일에 의해 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로 이식되었으나 가장 큰 기회는 뉴잉글랜드에 찾아왔다. 메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 세워진 교회조직의 본래 형태는 장로교외 분리주의의 ‘중간형태’였으나, 1648년 뉴잉글랜드의 4곳의 청교도 식민지는 케임브리지 선언을 공동 채택하여 회중교회적인 형태를 취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교회의 틀에 따라 세속사회에서도 공화정을 실시했고 하나님의 선민만이 투표를 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원칙이 제2세대 거주자들에게 문제가 되자 불완전 서약을 했는데, 이는 세례를 받고 도덕적이고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교도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메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서 쫒겨난 로저 윌리엄스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퀘이커교도 윌리엄 펜은 펜실베니아에서 각각 청교도적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의 특성은 일차적으로 강도 높은 종교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자신의 죄의 상태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하고,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구원을 제시하며 이성보다는 성령이 힘 있는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히 당시 영국국교회의 설교와 의식의 특성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청교도들은 성서와 일상적인 경험의 이미지들에 주목하는 평범한 설교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중시한 청교도들은 학식 있는 목회를 권장했다.

  청교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회심경험은 칼뱅주의에서 비롯된 예정론과 결합되어 자신들이 역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라고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질문은 역사를 뛰어넘어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된다. 주님의 물으심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오늘날 교회의 신앙고백의 초석이다. 역사 속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지상 교회가 결정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기독교회 사상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였다. 역사와 계시의 문제, 역사와 신앙관련 문제는 현대 신학의 논쟁의 초점일 뿐만 아니라 줄곧 기독교 사상사의 중심과제가 되어 왔다. 교리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역사성(인성)만을 주장하거나 계시성(신성)만을 내세운 것은 다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초대 교회는 심한 박해 중에서도 교회의 순결 생활뿐 아니라 바른 교리를 보수하여 증거 하기에 온갖 힘을 다하였다. 고대 교회사에 엮어진 6회에 걸친 기독론 논쟁의 결과는 세계 교회가 한결같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이단을 단호히 배격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수된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칼케돈 신조 등은 이와 같은 피나는 논쟁을 거쳐 거두어진 신앙의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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