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3-03 19:32
[3]성경 보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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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348  

70인역에 대한 문제

 

 

70인역이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1. 70인역의 증명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LXX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72인은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12지파의 위치를 파악하여 6명씩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리스어 필사본은 교회시대 초기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도 없다. 72명이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는지, 72명을 유대인에서 그냥 뽑았는지 알 수 없으며 12지파의 위치도 현재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 번역에는 72명이 참여하였지만 최종까지 72명이 계속 진행하였는지 알 수 없다. 2명은 유고했는지 돌아갔는지 알수 없으며 70명이 진행하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70인역으로 명칭을 부여했을 수도 있다.

 

2. AD 200년경에 제작된 헥사플라에 70인역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450년이 지난 기록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리겐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일부 의역한 것에 대해 해악의 이유로 삼기도 한다.

 

-> 오리겐이 해악을 끼친 것은 70인역의 존재여부에 관계없는 사안이다.

오리겐이 450년이 지난 후라도 70인역을 사용했다면 70인역의 존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3.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 이러한 반론은 사실(Fact)과 다른 추정에 따른 것으로 역사를 이렇게 단정지을 수 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통해서 유대민족을 가뭄에서 보존하셨으며 바빌론 왕의 꿈을 통해서도 계시를 나타내셨다. 

 

 

 

 

 

결론적으로 

70인역의 존재여부는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70인역이라는 텍스트가 고대 사본에 존재하므로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성경 번역의 역사(래리스톤)

 

 

 

4. 초대교회와 중세시대의 성경

 

신약성경을 27권으로 확정하는데 필요한 기준은 저자가 열두 사도에 속하거나 바울이거나 사도의 승인을 받은 사람(마가,누가)이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저자는 스스로 신빙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가 쓴 내용을 어느 사도가 집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도의 저술이라고 내세우는 위조 저작물에는 야고보의 비서,도마복음,바울의 묵시록,마리아복음,진리의 복음, 베드로 행전 등이었는데 복음서만 무려 50권이나 유포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의 27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는데 히포의 교회회의(393년)와 카르타고의 교회회의(397년)에서 27권을 성경의 정경으로 공인했다.

이는 그동안 교회가 이 책들의 가르침과 예배에 사용해왔던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였을 뿐이다.

즉 신약성경이 교회에서 공식으로 채택 된 이유가 아니라 내재적인 가치가 있고 직간접적으로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킨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약 250년동안 로마 당국에게 끔찍한 박해를 받았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당했다.

로마가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로마의 만신에 합병시키곤 하였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고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비쳤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친 최초의 대규모 핍박은 AD 64년에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일어 났다. 네로는 스스로 9일간의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면서도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탓으로 돌였다.

네로 치하에서 열차례에 걸친 대규모 핍박이 일어 낫다.

 

150년경 군중은 폴리캅의 죽음을 요구했다.

폴리캅은 당시 86세의 노인으로 젊은 시절에 사도 요한을 알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하면 고문을 면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86년동안 나는 그 분의 종이었고 그분은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떻게 나를 구원해준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라고 대답했다.

학자였던 터툴리안은 그런 순교자들의 용기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박해는 312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컸던 성경 번역판은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5세기 초에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Vulgate,

백성의 언어, 대중적인 판)라고 불리는 번역판으로 로마 교회가 1,500년 넘게 사용했다..

그러나 대중적인 판이라고 했던 라틴어 성경은 일반인은 읽거나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옛 라틴어번역판들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수스가 죽은 뒤에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모두 완수했다.

그는 서문에서 외경은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정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성경 번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번역판은 1,500년 이상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이라는 특권을 누렸다.

 

 

중세 시대의 성경

 

로마 제국의 몰락과 종교 개혁 사이에는 약 천년의 세월인 중세 시대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새로 등장한 이슬람의 도전을 받았고, 교회는 십자군 전쟁으로 맞섰다.

로마 교회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교황은 왕들에게조차 영향을 미치던 시대이다

 

중세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초기에서 1000년이 이른 암흑시대

1000년에서 1300년에 이르는 고중세시대

그리고 1300년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이르는 중세 후기이다.

 

암흑시대에는 가톨릭교회가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자기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라틴어 성경만 존재하였고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다.

119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의 순결파와 왈도파가 번역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비공인된 성경 번역판의 사용을 모두 금지시켰다.

 

가톨릭 교회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교회의 부와 보여주는 것이 중세시대에 건축한 장엄한 성당들이다.

이 건물들은 규모가 아주 거대하고 건축하는데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이 빌미를 제공해 결국은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낳았던 것이다.

 

중세시대는 걸작품에 속하는 장식 성경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성경은 삽화, 화려하게 꾸민 첫 철자, 가죽종이 위에 금이나 은으로 도색한 디지인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귀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중세 성경인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는 높이 90cm, 폭 50cm, 무게는 약 75kg이나 되었고, 동물 160마리를 이용해서 만든 가죽종이 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1200년경 프라하의 동쪽에 있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헤르마누스 수도사가 수도 서원을 위반한 것 때문에 생매장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역사상 최고로 장엄한 책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귀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귀의 화려한 형상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소위 마귀의 성경이라 불리는 코덱스 기가스는 스웨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에는 프랑스 루이 9세를 위해 만들어진 크루세이더 성경, 대머리 왕 찰스가 의뢰해서 만들어진 코덱스 아우레우스, 잉글랜드에서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품 중 하나인 윈체스터 성경, AD 800년 경에 스코틀랜드 수도원에서 만든 라틴어 켈즈 사본 등이다.

 

로마 카톨릭의 정치권력화와 권력남용, 그리고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정치적 권위를 더 높여 군림하는 것으로 결국은 타락을 불러왔고 반대자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정죄하여 통제하고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에 반발하여 개혁을 시도하는 집단과 개인이 생기게 되었다.

 

1320년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탄생한 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위클리프는 교회에 타락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 교회는 부요가 아니라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했는데 이는 훗날 종교개혁의 원칙이 되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는 순회 설교자들을 파송했는데 이들은 둘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과 경건한 삶을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롤라드를 이단으로 천명했다. 그 중의 일부는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틀리프는 라틴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으나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포고를 내렸다.

위클리프 번역판은 출교를 당한다는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지금도 수백권이나 남아 있다.

 

1408년에는 컨터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의 이름으로 이런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이는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0년 뒤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이 뒤를 이어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5. 종교개혁 번역의 시작

  

AD 1450년에서 1550년 사이에 세계는 큰 변화를 경험하는데 인쇄술의 발명으로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세계적 변화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마틴 루터 였다. 둘 다 독일인이었다.

 

구텐베르크는 1448년에 인쇄소를 개업하고 면죄부의 증서를 인쇄하는 거대한 시장에 뛰어 들었다.

면죄부는 죄의 형벌에 대한 용서를 증명하는 증서였는데 이 증서를 돈으로 살 수 있었기에 교회는 교회 건축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걸작은 바로 성경이었다

그 작업은 모두 10만개의 활자 조각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고 엄청난 재정 투자가 필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죽종이도 구입해야 했는데 성경 한권을 인쇄하려면 160마리가 넘는 동물의 가죽이 필요했다.

1450년에 그는 부요한 금 세공인이었던 요한 파우스트에게서 800길드를 빌렸다.

그리고 마침내 180부의 성경을 출판한 것이 결국 세상을 바꾸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번역본이 아니라 라틴어 성경이었고 모두 1,282페이지였다.

현재 48권이 남아 있는데 이 책들은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인쇄물로 꼽힌다.

 


마틴루터는 1483년에 태어났다

그는 에어푸르트 대학을 졸업한 뒤에 번개에 맞을 뻔했던 경험을 계기로 어거스틴파 수도사가 되었다.

 

로마교회는 누구든지 죄를 용서 받으려면 선행으로 자기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선행의 본보기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들었다.

이런 가르침은 결국 타락하여 남의 죄와 자신의 죄를 위해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요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돈이 돈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즉시 그 영혼은 연옥의 불에서 튀어 오른다”고 했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있을 때,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랬다

“오늘날 부자 중의 부자인 교황은 어째서 자기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를 짓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을 끌어오는가?”

교황은 루터를 ‘술 취한 독일인’일고 부르면서 ‘술이 깨면 제정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고

루터는 교황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적그리스도“라고 되받아쳤다.

루터는 1521년에 출교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종교개혁가들인 루터, 존 칼빈, 울리히 츠빙글리 들은 면죄부의 남용문제를 넘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다섯가지 ‘오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오직 믿음으로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온다)

2. 오직 성경으로 (권위는 교회나 교황이 아니라 성경에서 온다)

3. 오직 은혜로 (구원은 공로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4. 오직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교황이나 성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출교를 당한 루터는 독일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하여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손치노에서 인쇄된 1494년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각각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1522년에 출판되었고, 신구약 완역판은 1534년에 출판되었다.

루터의 번역본은 불과 50년만에 비텐베르크에 있던 한 인쇄소에서 거의 10만부나 인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황이 루터의 저술을 금서로 규정했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14개 이상의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은 마태복음 32장 2절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지 왔느니라” 라고 번역한 반면에 가톨릭의 공인 라틴어 번역판은 “고해성사를 하라”고 번역함으로써 교회가 요구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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