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2-05 07:37
[2]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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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077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들

 

역사적으로 ‘행복’은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생의 최고 목표로 간주되어 왔다. 세상 사람들의 통속적인 행복은 외적인 환경과 조건에 좌우되는 개념이다. 행복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상태를 가리킨다면, 그런 만족과 기쁨은 외적인 환경과 조건에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승진을 했다거나 사업이 번창한다거나 예쁜 여자와 사귀거나 결혼을 할 때 사람들은 흔히 행복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은 험하고 거친 경쟁사회여서 자신에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조성되기 어렵고, 비록 그런 환경과 조건이 조성되었다고 해도 쉽사리 사라지기 쉬워서 만족과 기쁨은 금방 슬픔과 비애로 바뀌기가 쉽다. 더욱이 인간의 쾌락 감정은 그 속성상 더 큰 외적 자극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때 행복한 환경과 조건이 마련되었어도 더 큰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은 금방 권태와 불만족에 빠져들곤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 사도가 교훈하는 참된 행복은 철저하게 신중심적개념이다. 타락한 인간 존재는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종국엔 고독과 소외, 비애와 절망, 갈등과 불안, 삶의 무의미와 허무 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탄의 나라는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하게 만드는 나라여서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극심한 경쟁과 갈등, 싸움과 다툼, 거기서 파생되는 불안과 불만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에서 나타나듯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 속에서 구현되는 나라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속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의 잔치비유에서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배부름과 행복, 나눔과 기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높은 담벼락을 세우기보다 담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 형제자매처럼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바울은 인간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이며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기독론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경험하는 자들에게만 경험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성령론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그리스도의 왕적 집행 능력으로서 성령 안에서 현현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종말론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실현되고 있지만 그 최종적 완성은 여전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이유는 신자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삶의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4:17은 무엇보다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요소를 특별히 강조한다.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현현된다. 사람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대변되는 참 행복을 경험할 때 그는 지금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러한 천국 경험은 인간 자신의 내적 자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붙잡힐 때만 내 삶 속에서 임하는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분과 삶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성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17-18절). 이것은 바울의 권면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신학적 원리이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먹고 마시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먹고 마시는 행위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에 관한 옛 율법 규정들의 준수에 의존해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은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생활, 하나님 앞에서 상호 간의 화목과 사랑과 일치를 실천하는 삶 가운데서 임재하고 실현된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지탱되는 그러한 삶을 살 때 신자들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 즉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구현은 음식과 날짜에 관한 사소하고 낡은 옛 종교적 규율들에 관한 논쟁으로 결코 희생될 수 없는 궁극적 가치이며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상호 화합과 사랑과 일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음식법과 날짜 준수가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본질적 현현인 것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준수할 것을 고집해서도 안 되고,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그런 것들을 삼가 지키는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믿음의 자유는 그런 의식 규정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와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런 규정들을 존중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의식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신자의 자유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향유하는 자유가 아니라 형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유보할 수 있는 자유일 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진정한 자유이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부합한다.

율법의 옛 종교적 계율들은 더 이상 구력을 갖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였다. 하지만 그 종말론적인 함축들을 깨닫고 그것들을 자신의 일상생활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속도는 개별 그리스도인들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그들이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확신하고 살았지만,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법과 안식일을 삼가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강한 신자들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속도’를 조절해 줄 것을 호소한다. 만일 강한 신자들의 믿음의 자유가 형제 사랑에 의해 지배를 받지 못하고 교만한 방종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오히려 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앞길에 그리스도라는 거침돌을 두셨다. 그를 믿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치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강한 신자들이 약한 형제들 앞길에 거침돌을 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성취할 수 있는 신적 역할을 빼앗는 것이며, 강한 자가 최후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긍정적 거침돌 이외에 어떤 다른 부정적 거침돌도 약한 형제들 앞에 두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의 믿음의 자유는 형제 사랑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적절히 통제되어야 한다. 신자의 참된 믿음과 진정한 자유는 아무런 목표나 지향점이 없는 공허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주를 위한” 헌신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바울의 교훈은 음식 먹는 문제나 날짜 준수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이 강한 신자들과 믿음이 약한 신자들 간에 불거진 갈등과 분쟁을 다루는 문맥 속에서 등장한다. 현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행복’이란 술어 자체가 바울서신 가운데서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에 준하는 개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과 같은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표현해주는 중심 요소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인 특징들을 지닌다. 

천국이 행복의 나라라고 한다면, 바울 사도가 교훈하는 행복은 그저 단순히 좋은 외적 환경과 조건이 자신에게 주어질 때 주어지는 소극적 만족과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받아들일 때 의로운 삶, 이웃과의 화목과 일치, 적극적인 기쁨을 동반하는 신적 은혜의 선물이다. 신자가 진정 행복해지기 원한다면 너무 외적 환경과 조건에 지배를 받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길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좇는 신자의 내적인 삶으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모습으로 현현되거나 경험되는데, 참된 행복을 나타내는 이들 요소는 서로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거룩한 뜻에 부합하는 삶을 가리키는데, 신자가 성령 안에서 그러한 삶을 살 때만 하나님과 이웃과 사이에 진정한 샬롬(shalom)을 이룰 수 있고 그의 내면의 삶에 참된 만족과 기쁨, 즉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일 때만 맛볼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한수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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